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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붉은 지장(指章)의 오해
갈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새어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리고 부각 중앙엔 온 몸에 붉은 옷을 입은 묘령의 여인이 서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키가 멋없이 큰데다 온 몸에 검정옷을 입은 험상궂은 괴인 한 사람이 서있었다.
여인은 저처럼 아름답고 사내는 희대의 추남(醜男)이니 그들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어 어느모로 보나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다시 머리를 돌려 살펴보니 저쪽 한 구석에 형 갈황과 또 다른 미소년이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천풍도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온데 간데가 없었다.
그때 홍의녀가 수중의 털이개로 그의 등을 치자 막혀 있던 혈도가 순식간에 뚫려졌다.
갈위는 슬며시 진기를 운행하여 재빨리 일어나면서 그녀의 뒷켠에 뒹굴고 있는 판관필을 주으려 했다.
순간 홍의녀는 자지러지게 웃어대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호호호호, 그건 안 될 걸요. 이미 당신의 두 다리는 경맥을 움직이지 못 하게 해 놨단 말예요. 아무 반항도 말고 얌전하게 구는 게 좋을 걸"
갈위는 온 몸의 진기를 다리로 운행시켜 보았다. 과연 두 다리의 경맥은 마비되어 있었고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갈위는 조금도 굴함이 없이 외쳤다.
"대체 너는 누구냐? 그리고 나를 이제부터 어쩌자는 거냐?"
홍의녀는 여전히 생글거리며 말했다.
"흥! 내가 묻기도 전에 건방지게 네가 먼저 나에게 묻다니!"
갈위는 반박조로 말했다.
"뭐라구? 못 물을 건 또 뭐냐. 한 번 겨루어 볼 셈이냐?"
"흥! 보자 하니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지?"
"이봐, 대장부란 목숨을 잃을지언정 모욕은 참을 수 없다. 네가 끝내 이렇게 나를 대한다면 그 다음 일일랑 나한테 원망치 마라!"
그러자 뒤에 섰던 흑의 괴한이 징그러운 웃음을 띠우며 끼어들었다.
"흥, 이 자라새끼 같은 놈. 너 따위쯤 없애버리자면 내 손바닥 하나면 알아 본다. 대가리가 묵사발이 될 테니까 말야, 흐흐흐흐."
흑의 괴인은 말을 마치자 껑충 뛰어오르면서 손을 번쩍 들어 억센 장풍으로 후려갈겼다.
괴인과 갈위의 거리는 칠팔척 가량이었지만 워낙 팔이 긴 녀석이라 손만 쑥 내밀면 갈위의 앞가슴까지 뻗을 듯했다.
홍의녀는 수증의 털이개를 살짝 흔들어 흑의 괴인의 손바람을 막아준 후 웃으면서 말했다.
"아냐, 상처를 입혀선 안 돼."
그러자 흑의 괴인은 명령대로 원래의 위치로 물러가면서 투덜거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살려놓으면 장차 큼 화근이 될 게 아닙니까?
제 생각으론 저 놈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홍의녀는 그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갈황과 방조남쪽으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이봐, 먼저 이 두 사람을 부각에다 데려다 놓도록 하게."
흑의 괴인은 발을 약간 움직이더니 두 팔을 벌려 한 손에 한 사람 씩 목덜미를 쥐고 밖으로 나갔다.
홍의녀는 털이개를 천천히 거두더니 다시 상냥스러운 태도로 가볍게 갈위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이봐, 지금 이 부각 안에는 오직 너와 나 두 사람 뿐이야."
홍의녀가 기분 나쁜 미소를 띠우면서 털이개 끝으로 얼굴을 살짝 스치자 갈위는 점점 더 화가 났다.
"흥, 그러니까 어쩌잔 말이야."
"사실대로만 말해 주면 되지"
갈위의 나이는 불과 십오륙 세 였지만 개성은 매우 강하여 웬만한 위협 정도에 의지를 굽히진 않았다. 그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아마 그렇게 호락호락 다루어지지는 않을 걸”
홍의녀는 그의 나이가 가장 적어 자기의 고문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를 혼자 남겨두고 혈지도의 소식을 캐내려 했지만 갈위의 꿋꿋한 태도를 보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호호호호, 보기엔 그렇지도 않더니 영웅의 기개가 약간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아마 강철로 만든 몸은 아닐 거야."
그녀는 일부러 한바탕 웃고 나서는 손을 뻗혀 갈위의 오른손을 덥썩 잡았다.
"이 꼬마야! 사실대로 말하란 말야! 도대체 그 혈지도는 어디에 있지?"
그와 동시에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던 손이 갑자기 쇠갈쿠리처럼 점점 조여 들기 시작했다.
갈위는 '앗차!' 하고 생각하며 곧 진기를 집중하여 항거하려 했으나 힘을 주면 줄수록 두 다리의 경맥과 체내의 혈맥이 굳어지면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자 홍의녀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호호호, 이제야 알겠느냐, 꼴 사납게 허우적거리지 마라.
너의 소양담경(少陽瞻經)과 태음비경(太陰婢經)에 타격을 주었으니,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소용없단 말야."
갈위는 전신에 펴져나가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며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러자 홍의녀는 영롱한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했다.
"너의 소양담과 태음비의 두 경맥은 내가 진혈단맥(晨穴斷脈)법으로 다쳐 놓았으니 우리 명악인 뿐만 아니라 강호에서도 그 상처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거야."
그리고 다시 웃어제꼈다.
그러나 갈위의 고통은 점점 심해져 얼굴에서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니 그녀의 말이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그는 아픔을 참으며 대성 일갈했다.
"주둥아리를 닥쳐! 누가 네 말을 들을 줄 아느냐!"
홍의녀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가엾은 애숭이야. 만일 그 상처를 제 때에 고치지 않으면 석달 후엔 그 경맥이 경화하기 시작하여 이제까지 익혀 온 무공을 완전히 상실할 뿐만 아니라 온 몸이 점점 더 마비되어 죽음을 면치 못 하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해."
그녀는 웃으면서도 손의 힘을 점점 더 가했다. 갈위의 고통은 바야흐로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홍의녀는 갈위의 고통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것을 알자 나직하게 타이르듯 말했다.
"네가 이제라도 사실대로만 말해 주면 더 이상 고통을 주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너의 일행도 모두 석방해 줄 데니 잘 생각해서 후회없도록 해라."
그녀는 갑자기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갈위는 곧 오장육부에 흐르던 혈맥이 정상대로 순환하고 순식간에 고통이 사라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이젠 천풍도장과 형들의 운명도 모두 저 여자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만일 내가 일시의 젊은 혈기로 저 여자와 다툰다면 자신의 목숨을 보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일행은 한 사람도 생환할 수 없게 될 것 같으니, 우선 저 여자와 어떤 타협점을 발견토록 해봐야겠다.)
그는 홍의녀에게 말했다.
"네 물음에 대답해 주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을 네가 응낙한다면 말해 줄 테다."
홍의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말해 봐라! 그 조건이란 어떤 거냐?"
갈위는 무슨 선언이라도 하듯 말했다.
"첫째, 너한테 생포된 사람을 모조리 석방할 것."
홍의녀는 웃으며 말했다.
"응! 생각이 아주 치밀하군! 보아하니 오늘 밤에 여기 온 사람들은 모두가......."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곧 이어서 다시 재촉했다.
"좋아! 그럼 둘째 조건은?"
다시 갈위가 말을 이었다.
"이 둘째 조건이 가장 중요하니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
"나는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자 어서 둘째 조건을...... ."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조리 숨김없이 말할 터이니, 내가 모르는 일을 자백하라고 강요하진 말아라."
홍의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아! 셋째 조건은?"
"우리는 오늘 초면이다. 따라서 말만으로는 증거가 되지 못 하고 또한 증명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러니 서로가 굳은 맹세로 약속이행을 다짐해야 한다."
홍의녀의 얼굴에 한 가닥 검은 구름 같은 웃음이 스치더니 말했다.
"좋다! 그럼 내가 먼저 너의 두 경맥의 상처를 고쳐준 다음에 네 말을 듣기로 하자."
그녀는 갈위의 아홉 군데 혈도를 한참 동안 문지르고 나서 말했다.
"이젠 너의 두 경맥을 풀었으니 그럼 지금부터 너에게 묻겠다."
그러자 갈위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는 아직 맹세하지 않았어."
그는 아직 동심(童心)이 남아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꼭 그대로 해야만 속이 시원한 모양이었다.
홍의녀는 웃으며 말했다.
"한 번 승락한 일을 이행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네가 그토록 나를 못 믿는 걸 보니 아직도 어린애 같은 고집이 남아 있구나."
갈위는 자신을 어린애 같다고 한 말에 비위가 거슬려 코웃음을 치고는 소리쳤다.
"오냐, 네가 정말 그렇다면 어디 물어 보려므나."
홍의녀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이토록 먼 구궁산까지 온 것은 언능포를 찾기 위한 것이었느냐."
"그렇다!"
"그럼 그를 찾아온 목적은?"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에게 부탁하여 어떤 물건을 얻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갈위는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자 홍의녀가 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바로 혈지도가 아닌가?"
"잘 알지도 못 하는 일을 멋대로 말할 수는 없다."
홍의녀는 별안간 간드러지게 웃고 나서 다시 말했다.
"이 꼬마놈아, 그래 너는 그 이상은 모르겠단 말이냐?"
갈위도 대성 일소하며 말했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하지 않았느냐, 아는 것은 묻는대로 대답했다. 사실상 나는 아는 것이 없으니 이 이상은 대답할 말이 없다. 왜? 후회가 되느냐?"
그는 홍의녀를 장난스럽게 쳐다보았다.
"흥, 너는 아주 영리하구나. 하지만 나는 절대로 후회하진 않는다."
홍의녀는 말을 멈추더니 돌연 다시 큰소리를 쳤다.
"석대표(石大彪)! 거기 있는 놈들을 모두 데리고 오너라!"
그러자 깨진 꽹가리 소리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둘째 아씨! 이젠 시간도 늦었는데 이놈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란 말씀이세요? 까짓 놈들, 그저 한 놈에게 한 대씩 먹여서 해결하면 될 게 아네요, 쳇."
홍의녀는 다시 위엄 있는 어조로 명했다.
"내 말을 못 들었느냐? 그들을 이리 데리고 오라는데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
석대표란 자는 더 이상 지껄이지 못 하고 두 사람을 옆에 낀 채 홍의녀가 있는 부각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의 동작은 매우 신속하여 순식간에 생포한 사람들을 모두 옮겨다 놓았다. 부각 마루 위에는 사람들이 너저분하게 딩굴고 있었다.
갈위가 세어보니 자기를 제외하고도 열 사람이나 되었다.
홍의녀는 그들을 바라보며 석대표에게 물었다.
"이게 모두냐?"
"네, 모두 데려다 놨습지요."
그러자 홍의녀는 자못 위세를 꾸미며 말했다.
"게 듣거라. 이제 칠일 후면 우리 교주께서 무공수련을 끝내는 날이다.
그러니 우리는 저들에게 적선(積善)하는 셈 치고 모두 석방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알았느냐!"
석대표는 이상하다는 듯 홍의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라구요?"
홍의녀는 갈위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다시 석대표에게 말했다.
"나는 저 꼬마놈에게 약속한 일이 있다. 한 번 한 말은 그대로 이행해야 할 게 아니냐?"
말을 끝내자 그녀는 손을 들어 갈황을 가볍게 때렸다.
그러자 갈황은 곧 숨을 길게 몰아 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홍의녀는 다시 재빠른 솜씨로 마루 위에 뒹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장(掌)씩 먹이니 순식간에 열 사람 모두가 깨어나 앉는 것이었다.
석대표는 한쪽 구석에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아무래도 홍의녀의 처사가 못 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보기 흉한 앙상한 얼굴, 뼈만 남은 수족 등은 엄동설한의 고목(枯木)을 연상시켰으며 아무리 보아도 살아있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홍의녀는 열 사람의 혈도를 모두 풀어주고 나서 말했다.
"여러분이 이렇게 먼 곳까지 오셨는데 이렇다 할 대접을 해드리지 못 해 소매(小妹)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머리를 굽히는 듯했다. 꾀꼬리 같은 그녀의 목소리와 미소띤 얼굴에는 추호도 적의가 없어 보였다.
생포 되었던 열 명을 살펴보니 천풍도장과 그의 제자 네 명 이외에 강남의 악당괴수 원구규의 심복 부하 두 명, 그리고 신검 나곤과 방조남, 갈황 등이었다.
나곤은 천풍도장과 그의 제자 네 명 그리고 갈황 갈위 등이 부각에 뛰어든 후,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궁금함을 참지 못 해 부각 안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신검 나곤을 제외한 천풍도장의 제자들은 공력이 미숙하여 등평도수 신법을 발휘할 수가 없어 호반에서 고목을 주워 발에다 매고 그 나무의 부력으로 호수를 건너 부각으로 들어갔으나 홍의녀와 석대표의 기습을 받아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 한 채 포로가 된 것이다.
홍의녀는 군협들의 혈도를 풀어 준 후 몇 마디 농담마저 건네고는 태연하게 부각을 걸어 나갔다. 그녀는 몇 발자국 거닐다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미소띤 얼굴로 말했다.
"여러분들 중에 혈지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자진해서 명악으로 알려주면 좋겠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달이 못 가서 강남 무술계에는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오."
신검 나곤은 코웃음을 치더니 잘라 말했다.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기고 남을 습격하는 것은 비록 그 일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다지 자랑스런 일은 못 되지."
"듣자 하니 불만이 많은 가봐. 그래 불복하겠다는 거요?"
홍의녀의 말에 나곤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불복할 뿐인가? 그보다 아가씨의 절학을 몇 수 배우고 싶은데......"
그는 말을 마치자 앞으로 나섰다.
석대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추산진해(推山鎭海)의 수법으로 나곤의 앞가슴을 내리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늙은 너구리. 또 무슨 공갈이냐! 먼저 내 주먹 맛부터 보아라!"
홍의녀는 수중의 털이개를 날쌔게 옆으로 내쳐 석대표의 공세를 막으면서 말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내버려 둬요."
그러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천풍도장이 슬쩍 나곤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형! 너무 충동하지 말고 물러서는 게 좋겠소."
홍의녀는 천천히 눈길을 돌려 방조남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방 도령! 명악 셋째 사매와 약속한 날짜를 잊으면 안 돼요.
사매를 만나게 되면 그녀가 당신을 구해 줄 테니까."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물을 차면서 쏜살 같이 질주해 나갔다.
석대표도 군협(群俠)들의 면면을 휘둘러보다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곧 홍의녀의 뒤를 따라 사라져갔다.
이제 부각 안에는 원구규의 부하인 척삼원과 모통, 그리고 천풍도장 일행만이 남게 되었다.
천풍도장의 문하생들은 지난 날 이들에게 굴욕을 당한 바가 있기때문에 모두가 복수심에 불타서 당장이라도 이들에게 공격을 가할 기세였다.
모통은 원래가 간교하고 눈치 빠른 자인지라 사태의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짐짓 코웃음을 치며 큰소리로 척삼원에게 말했다.
"척형! 두목이 없는 게 유감이오."
그러자 천풍도장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아무 걱정 마시오, 이 사람도 당신들을 죽임으로써 강남의 악한 무리를 한 사람이라도 덜고자 하는 마음 없지 않으나, 이 자리에서는 손을 쓰지 않을 작정이오."
모통은 천풍도장의 이 말을 믿었다. 그는 강남 군협 중에서도 손꼽는 인물이므로 그가 하는 한 마디는 태산 같이 무거우며 절대로 거짓이 있을 수가 없었다.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고 허세를 부렸다.
"사실 죽고 사는 것쯤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소이다."
천풍도장은 그 말은 묵살해버리고 네 사람의 제자를 향해 말했다.
"내 지시를 어기고 시비를 일으키는 자는 문중의 엄한 규율로 다스릴 작정이다."
제자들은 일제히 상반신을 굽히고 뒤로 물러섰다. 이어 천풍도장은 방조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의 실례를 용서하시오. 그대의 낯이 생소한데 어느 고명한 분의 문하인지?"
방조남은 대답했다.
"제 이름은 방조남이라 하오며, 강남 지방은 처음이오라 도장님께서 생소하다 하심은 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나곤이 나섰다.
"방형이 강남 사람이 아니라면 어인 연고로 이곳 구궁산까지 오셨습니까? 노부에게 그 이유를 한 두 마디 말씀해 주시오?"
홍의녀가 사라지기 전에 방조남에게 한 말을 들은 바 있기에 의심을 품고 하는 말이었다.
영민한 방조남은 이 말을 듣고서 상대방이 의심을 품고 있음을 곧 알아챘다.
그렇다고 상세하게 경과를 말한다면 번거로워질 것 같아 그는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다.
"소생은 언능포 선배님과 망년지교이므로 그분을 뵈옵고저 왔었으나 찾는 사람은 없고 난데없는 홍의녀를 만났던 것입니다."
나곤이 껄껄 대소하며 말을 받으려 하자 갈위가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니까 노형께서는 그 홍의녀를 우연히 만났다는 얘긴가요?"
이 말에 방조남은 급소를 얻어맞은 듯 졸지에 말문이 막혀 멍해져 대답할 바를 잊고 있었다.
그 순간 별안간 나곤이 한 발 나서며 방조남의 팔을 나꾸어 일갈했다.
"바른대로 말해! 그렇지 않으면 이 늙은이가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방조남은 급히 한곁으로 피하며 말했다.
"허! 생각하던 것보다는 비겁하군, 불의의 습격을 하다니!"
그는 나곤의 일격이 허공을 치자 틀림없이 재차 공격해 올 것이라 짐작했으나 마주 싸워봤자 불리함을 직감하고 짐짓 큰소리로 힐책하여 그의 기세를 꺾으려 했다.
과연 나곤은 공세를 멈추고 이삼 보 뒤로 물러서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늙은이와 한 번 겨루어 보겠다는 뜻인가?"
방조남이 대꾸하기 전에 천풍도장이 훌연 앞으로 나서면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서 말했다.
"보아하니 방형이 비록 그 홍의녀를 알고 지냈다 할지라도 그녀와 같은 무리는 아님이 분명하니 나형께서는 지나친 행동을 삼가하시오."
이어서 그는 네 사람의 제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이 부각을 호반으로 끌어낼 방법을 생각해 봐라."
말이 떨어지자 네 제자는 입을 모아 대답은 했으나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부각을 호반까지 저어가는 데는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방조남이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서 물 속에 잠겨 둔 줄을 두 손을 번갈아가며 당기니 순식간에 부각은 호반에 다달았다.
군협들은 호반에 오르자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근 칠팔십 리를 달려 어느 산기슭에 다달았을 때 천풍도장의 네 제자는 등어리가 슬슬 아파오고 은 몸이 노곤하게 무거워짐을 느낀다.
전신의 힘이 빠지고 두 발이 천 근 만 근이나 되는 것처럼 발길을 유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군협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으니 그들은 이를 악물고 온몸에 땀을 줄줄 흘려가며 계속 달려야 했다.
신검 나곤이 그들을 보고서 내심 괴이하게 여기며 넌즈시 천풍도장에게 말했다.
"저들이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이 말을 듣자 천풍도장은 네 제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홍의녀가 혈도를 풀어주면서 아마 저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한 수 쓴 모양인데."
이 말을 들은 군협들은 깜짝 놀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천풍도장의 네 제자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홍의녀가 암암리에 그들에게 독수를 썼다면 우리들에게도 필연 같은 수법을 썼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되자 그들은 각각 불의의 독수에 걸렸음을 느꼈다.
천풍도장이 한 제자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
"빨리 옷을 벗어 보게 !"
그 제자가 도포를 벗자 과연 뒷 등에 다섯 손가락 자국이 나 있었다.
천풍도장이 차례로 제자들의 뒷 등을 보니 모두가 한결같이 시뻘건 손자국이 역력했다.
이것을 본 군협들은 제각기 의심이 생겼나. 참다 못 한 갈위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옷을 빗어 보시오, 형님의 등에도 손가락 자국이 있는지 제가 봐 드리겠으니."
갈황은 그의 아우보다 비록 세 샅밖에 더 먹지 않았으나 나이에 비해 훨씬 침착했다. 동생의 혈육의 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여러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옷을 벗는 것은 도리가 아니어서 한참 머뭇거리며 묵묵히 서있었다.
그러자 갈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이 싫다면 제가 먼저 빗지요."
아직 치기가 남아 있는 그는 발을 마치자 거리 낌 없이 옷을 훨훨 벗었다.
동생이 하는 짓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갈황은 순간 대경실색했다.
과연 갈위의 뒷 등에도 다섯 손가락 자궁이 나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의 뒷 등을 넋을 잃은 듯 말없이 쳐다보는 형의 거동에 의심이 부쩍 든 갈위는 조조해진 듯 큰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고만 있어요? 도대체 자국이 있어요, 없어요?"
갈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암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님께선 혹시 치료할 방법을 알고 계실지도 모르니까."
나곤이 머리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운대산 대붕곡(大鵬谷)에서 자유롭게 생활을 하던 두 후배가 이런 난데없는 화를 입게 되었으니 면목이 없소이다."
갈위는 옷을 입으면서 말했다.
"비록 이 지경을 당했지만 여러분들을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노선배님 역시 그 마귀 같은 계집한테 화를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노부는 이미 늙은 몸이라 생사에 관한 일은 마음에 두지도 않지만 두 분은 희망으로 가득찬 앞날이 있지 않소?"
"선배님께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어찌할 수 없는 것, 또 이런 정도의 상처로 생명을 잃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몇 사람의 뒷 등 손가락 자국을 본 모통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홍의녀의 일장(一掌)을 얻어 맞았을 테니 틀림없이 내 등어리에도 시뻘건 손가락 자국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척삼원을 향해 말했다.
"척형! 옷을 벗어 보시오. 척형의 뒷 등에도 자국이 박혀 있는지 봐 드리겠소."
척삼원이 말했다.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당했는데 나만 화를 면했을 리가 없소. 조용히 앉아서 기력을 조절 운행하여 각 경맥이 상처를 입었는지 살펴보는 게 가장 현명할 것 같소."
그는 분명히 모통을 향해 말은 했지만 실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한 말이었다. 그러자 천풍도장이 척삼원을 돌아보더니 솔선하여 땅 위에 주저앉아 눈을 감으며 기력을 운행, 숨을 조절했다.
군협들은 천풍도장을 뒤따라 모두들 앉아서 각자의 기력을 운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군협들이 앉아 공력을 운행 조절할 때 묵묵히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방조남이었다.
오랫동안 무술계에서 경력을 쌓아 온 나곤은 눈을 감고 내공을 운행하면서도 촌시도 방조남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다.
방조남이 군협들이 앉아 기력을 운행하며 그에게 대한 주의가 소홀해 짐을 틈타 도망치려 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나곤은 대성 일갈하며 그를 제지하고 나섰다.
"일찍부터 너를 수상하게 생각해 왔다! 냉큼 게 서지 못 하겠느냐!"
방조남은 네 사람의 뒷 등에 시뻘건 다섯 손가락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던 만큼 자신도 틀림없이 그런 자국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는 생각하기를 자신도 홍의녀에 의해 상처를 입은 몸이니 언제 어느 곳에서 목숨을 잃게 될지 몰랐다. 죽기 전에 한시 바삐 조양평으로 되돌아가 사매를 그 위험한 곳에서 구출하고 서호 처하령으로 가서 낚시옹 임청숙을 찾게 한 후에라야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을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군협들이 앉아 기공을 운행 조절하는 틈을 타서 묵묵히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검 나곤은 이와 같은 그의 가슴 아픈 사연을 알 리 없었다.
고함소리를 들은 갈씨 형제는 솔선 일약하여 청정점수라는 경공신법으로 연거퍼 세 번을 허공으로 치솟으며 방조남을 향해 뛰어갔다.
방조남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며 갈씨 형제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두 분은 나를 추적하는 서요?"
나이 어린 갈위가 객기를 못 참고 냉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어딜 가시오?"
"어디를 가든 당신들이 알 바 아니오."
그러자 갈황이 말했다.
"우리는 형장과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관계할 바는 아니지만, 이때 이런 곳에서 당신이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떠난다는 것. 자체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그는 동생보다 중후하고 차분한 데가 있어 방조남은 그의 말을 냉정하게 묵살할 수가 없었던지 한 마디 했다.
"당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당신들이 나와 홍의녀가 한 무리일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나로서는 억울한 일이오."
그는 말을 마치자 사매의 안위(安危)가 자신의 생사보다 더 중함을 새삼 깨닫고 분함을 누르며 스스로 옷을 벗었다.
"자, 내 등을 보시오. 그 시뻘건 손가락 자국이 있는지 없는지? 만일 없다면 내가 그 홍의녀와 결탁한 무리라고. 생각해도 좋소이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갈위가 냉소하며 말했다.
"흥, 우리가 군자의 아량으로 당신을 대했더라면 깨끗이 속을 뻔했는데!"
이 말을 들은 방조남은 머리가 띰하며 멍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 등에는 손가락 자국이 없다는 말이오?"
그의 멍한 표정을 본 갈황은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재빨리 알아 차렸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동생을 가로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의 뒷 등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소?"
이때 신검 나곤이 달려오더니 방조남의 퇴로를 막고 조소 어린 말투로 대갈했다.
"노부는 밤낮으로 기러기를 잡고 있지만 기러기한테 눈을 찍히지는 않는다."
방조남은 갈씨 형제를 한 번 쳐다본 후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난처한 처지에서는 입이 백 개가 있어도 변명을 못 하겠구나.)
방조남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보자 갈위는 치미는 울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사실이 눈앞에 명백한데 또 무슨 변명을 하려 드오?"
그는 몸을 가볍게 날려 형의 뒤를 돌아 손을 내밀면서 방조남의 손목을 와락 잡았다.
그러자 방조남이 대갈일성했다.
"사람을 얕보면 안 돼! 이 방조남이가 그대들이 무서워 이러는 줄 아오?"
방조남은 재빨리 갈위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며 맹렬한 기세로 비폭유천(飛瀑流泉)한 수로 앞가슴을 들이쳤다.
방조남이 분노를 참다 못 해 휘두른 일격은 그 공세가 극히 맹렬하고 장풍은 억세기 그지 없었다. 갈위는 그 맹렬한 기세에 눌려 옆으로 비키며 공세를 피했다.
그때 갈황이 동생을 가로막으며 방조남에게 말했다.
"방형, 손을 멈추시고 내 말을 좀 들어 보시오."
그러는 사이에 신검 나곤이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이 늙은 몸이 반생을 무술계에서 쌓은 경험에 틀릴 리가 없다.
이자는 분명히 그 홍의녀와 한 무리이니 이 자를 생포하면 우리들의 상처를 치료할 방법을 알 수도 있을 거다!"
방조남은 사매의 안위를 생각하자 너무나 가슴이 답답해지며 연거퍼 당한 모욕에 치밀어오르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나곤을 향해 손바람을 일으키며 격한 소리로 말했다.
"좋다! 해볼 데면 한꺼번에 덤벼라!"
신검 나곤은 왼팔을 옆으로 스치면서 가까스로 방조남의 일격을 받아내고 외쳤다.
"늙어 빠진 영감이 그래도 제일 만만한 게로군! 각오가 됐거든 몸소 내 일격을 한 번 받아 봐라!"
이미 공세를 멈추고 있던 방조남은 나곤의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암암리에 힘을 주어 질풍과 같은 일격을 들이쳤다.
두 사람의 팔이 부딪치자 방조남의 몸은 상대방의 힘에 눌려 두어 발자국 휘청거렸다. 이를 본 나곤은 갑자기 대소하며 재빨리 방조남을 덮치고 눈부신 속도로 서너 차례 후려쳤다.
나곤의 맹렬한 공세는 완전히 방조남을 수세에 몰아넣고 다만 방조남은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급급했다.
이를 본 갈씨 형제는 서로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양측으로 갈라섰으나 그들의 생각은 서로가 판이했다.
갈위는 방조남이 싸움에 지게 되면 도망칠 퇴로를 차단할 심산이었고,
갈황은 방조남이 패할 때 그를 도와 도망칠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한편 두 사람의 싸움은 갈수록 더욱 치열해졌다. 나곤은 비록 늙었지만 신랄하게 철권을 휘두르며 공격을 가했고, 방조남도 용감하게 분투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열세를 만회할 가망이 없었다.
방조남으로 말하면 애조부터 승산이 있어서 시작한 싸움이 아니고 단지 치솟아오르는 한 줄기 분함을 참지 못해서 시작한 터라, 이십 회합이 지난 후에는 그렇듯 충천하던 노기도 온데간데 없어지고 나곤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 해 숨을 허덕이며 온 몸에는 땀이 비오 듯 쏟아지고 있었다.
나곤이 몇 수만 더 공격을 가한다. 방조남은 틀림없이 나곤의 주먹 아래 나가떨어질 순간이었다.
그때 돌연 나곤이 크게 비명을 지르면서 공격하던 자세를 무너뜨렸다.
방조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질풍처럼 그에게 다가서며 가슴을 힘차게 후려쳤다.
방조남이 나곤의 앞가슴에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늙은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가까스로 고통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자 그는 어리둥절해져서 그만 손길을 멈추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나곤은 천천히 몸을 오그리며 왼손을 뒷 등에 얹고 입에서는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외공(外功)이 특기인 그인지라 평소에 적을 대할 때는 수법의 위세가 맹렬하여 신검이란 이름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나, 역시 나이가 나이인 만큼 기력과 혈기가 함께 쇠퇴하여 일단 상처를 받고 보니 젊은 사람 같이 견뎌 낼 힘이 없었던 것이다.
나곤이 뒷 등을 움켜쥐고 주저앉는 것을 본 갈위는 질풍 같이 달려나가 두 손을 놀려 연거퍼 네 번이나 공격을 가했다. 그가 내리치는 수법은 방조남의 요혈만을 노리는 것이었다.
갈황은 초조해지자 상을 찌푸리며 동생을 불렀다.
"갈위야!"
갈위의 왼손은 오정개산(五丁開山)법으로, 오른손은 비폭유천의 한 수로 방조남을 맹타하자 방조남은 비틀거렸다. 갈위는 대소하며 말했다.
"형님! 염려 마시오! 나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는 갈황이 자기를 도우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러는 중에 천풍도장이 달려와서 나곤의 곁에 멈춰서며 물었다.
"나형! 다치셨소?"
그는 다가서며 나곤의 옷을 찢었다. 홍의녀의 손자국이 발작한 것이리라고 짐작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들여다 보니 나곤의 등어리는 시뻘겋게 부어 올라 있었으며 상처의 둘레는 이미 푸른색으로 변해서 상처의 원래 색깔하고는 한 눈에 구별이 되었다.
천풍도장이 그곳을 만져보니 불 같은 열이 나며 손이 뜨거울 정도였다.
(무서운 수법이로구나! 도대체 어떤 수법을 썼을까? 내 생전엔 들어보지도 못 한 일인데.......)
그는 어깨를 나란히 한 줄로 앉아서 기력과 숨을 운행 조전하는 세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콩알만한 땀방울이 비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는 당장 큰소리를 질렀다.
"두 분은 손을 거두고 내 말을 들으시오."
방조남은 대부분의 진력을 소모해 버린 후라 갈위가 지극히 예리하고도 강한 기세로 공격을 가해 오는 위기 일발에 천풍도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오자 재빨리 뒤로 비약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갈위는 그가 물러나는 틈을 타서 오히려 급히 다가서며 금나수법을 발휘하여 방조남의 왼손목의 맥문을 휘어잡았다.
갈황은 동생이 상대가 방어에 소홀한 틈을 타서 불의의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불안하여 몸을 허공에 솟구치며 달려나갔다.
방조남은 갈황이 그의 아우를 도우려고 황급히 달려 온다고 지레 짐작하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대갈일성하며 오른손으로 추파조란(推波助爛) 한 수로 갈황을 향해 휘둘러치고, 왼손에 기운을 집중하여 팔굽으로 갈위의 갈빗대 장문혈(章門穴)을 맹렬히 쳤다.
갈황은 상상 외로 방조남의 억센 일격을 받고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도우려고 달려 든 그의 기세도 극히 맹렬했지만돌연한 사태에 직면하자 하는 수 없이 손바람으로 방조남의 공격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두 줄기의 손바람이 부딪치자 갈황은 방조남의 좌측 너댓 자 거리에서 손바람의 여파로 허공에 떴다가 떨어졌다.
방조남도 그 바람에 기력이 전신에서 빠져 나가 팔굽으로 갈위를 칠 힘도 사라지고 말았다.
갈위는 냉소하면서 말했다.
"고통을 자청했으니 내 수법이 무자비하다고 원망은 마라!"
그러면서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니 방조남은 갑자기 온 몸의 피가 오장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 같았으며 전신의 힘이 빠져 나갔다.
그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대성 일갈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덤벼들어서 나 하나를 이긴들 무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홀연 기합소리와 함께 허공을 뚫고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염치 없는 것들! 둘이서 한 사람을 치다니."
이와 동시에 한 사람이 허공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은 땅 위에 내려서기도 전에 한 줄기 손가락 바람으로 갈위의 앞 가슴을 공격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쥐었던 방조남의 손목을 놓고 황급히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니 양쪽으로 딸은 머리를 두 어깨에 한 가닥씩 내리고 누더기를 걸친 십오륙 세 가량의 소녀가 책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방조남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지 않은가?
거센 손가락 바람에 부득이 후퇴하면서 갈위는 어떤 비상한 무공을 가진 사람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었는데 알고 보니 누더기를 걸친 나어린 소녀인지라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라 큰소리로 대갈했다.
"어디서 온 계집인지 모르지만 빨리 꺼지지 못 할까!"
그는 곧 민첩한 동작으로 덮쳐들었다.
누더기를 걸친 소녀는 별빛 같은 눈매로 갈위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누구에게 감히 무례를 범하느냐?"
두 어깨를 으쓱하는 찰나, 경쾌하고도 신속무쌍하게 앞으로 내달으며 손을 휘두르니 순식간에 삼 장(三掌)을 쓰는 게 아닌가?
이 삼 장(三掌)은 지극히 빠른 동작일 뿐더러 그 기묘함이 도저히 추측도 못 할 정도여서 갈위는 변 수 없이 몇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한편 갈황은 방조남을 구하러 나섰다가 봉변을 당하다시피 했으나, 홀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누더기 옷의 촌계집이 예리무쌍한 삼 장의 속공으로 갈위의 공격을 완전히 무위로 만들었으니 이제는 더 방관만 할 수가 없어 대갈일성과 함께 손을 번쩍 들고 그 촌녀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때 방조남이 몸을 솟구치며 한 수 수발오현(手擴五弦)으로 갈황을 향해 들어쳤다.
누더기 촌녀는 갈위를 상대로 싸우면서도 여유만만하게 뒤를 돌아보며 방조남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나설 상황이 아니에요! 빨리 비키세요!"
방조남은 그녀의 말을 듣자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서 다급한 김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뭐라구!"
방조남의 정신이 분산되자 갈황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장을 가하여 왼쪽 어깨를 쳤다. 그러자 그 누더기의 촌녀는 차디찬 코웃음 소리와 함께 쏜살 같이 내달아 손가락으로 갈황의 오른팔 곡지혈(曲池穴)을 찔렀다.
갈황은 오른팔의 공격을 급히 멈추고 뒤로 물러서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이 여자의 민첩한 신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그 순간 온 하늘에 찬 바람이 맴돌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갈위가 누더기 촌녀의 공격에 약이 바짝 올라서 허리에 차고 있던 쌍필을 뽑아 들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의 절학 삼십육계 유성필(流聖筆)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니, 그가 쌍필을 번쩍번쩍 휘두를때마다 쌍필의 그림자가 수십 개로 변하며 온 하늘에 빛을 뿌렸다.
이 유성필법은 갈천붕이 평생을 두고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각종 무공 특기를 총망라하여 연구한 것이다. 비록 한 벌의 필법(筆法)이라 하지만 그 신법의 변화는 괴이 무쌍하였으니 칼, 창 등으로 그 필법을 사용하면 그 수가 무궁무진한 절기였다.
동생이 공격 벽두부터 이 절기를 사용하는 것을 본 갈황은 속으로 크게 불만스레 여겨 큰소리로 제지하려는 순간, 누더기의 촌녀가 두 어깨를 약간 으쓱하더니 온 하늘에 맴도는 그림자를 뚫고 재빠른 동작으로 접근하여 맨손을 휘두르며 갈위의 쌍필과 백열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서로가 오륙 회합을 겨룬 후 홀연 촌녀의 기합소리와 함께 그 가느다란 손을 '휙' 틀면서 갈위의 오른 팔목을 휘어잡아 갈위의 오른손 판관필을 빼앗았다.
그녀의 수법이 어찌나 재빠른지 갈황과 방조남은 뻔히 바라보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뺏은 후 한 발자국을 더 나서며 붓을 휘둘러 갈위의 공격을 막는 동시에 오른손을 번쩍 들어 날쌔게 그의 앞가슴을 후려갈겼다.
순간 갈위는 고함을 지르면서 두어 발자국 휘청거리다가 땅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순간 왼손의 판관필이 땅 위로 떨어졌다.
갈황은 촌녀의 몸으로 시선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갈위가 틀림없이 그녀의 손바람에 상처를 입었으리라 생각하고 대갈일성하며 땅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동생의 경거망동에 불만이 많은 그였으나 촌녀의 일격에 아우가 다치는 것을 본 그는 더이상 참지 못 하고 하늘로 치솟으며 등에서 쌍필을 뽑아 풍뢰제발(風雷齊發) 한 수로 촌녀의 등 뒤 뇌호(腦戶),명문(命門) 두 죽음의 대혈을 찔렀다. 그 기세가 괴이하고 신속했으므로 이를 본 방조남은 대경실색하며 고함을 질렀다.
"아씨! 빨리 피하시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위급하여 갈황의 쌍필이 번개 같이 내리쳐지는 찰나였다.
촌녀는 뒤에서 내리치는 일격을 추호도 느끼지 못 하는 듯 우뚝 서있다가 갈황의 철필이 그녀의 요혈에 닿으려는 순간 별안간 몸을 앞으로 굽히며 전격적인 일격을 멋지게 피함과 동시에 오른다리를 날려 오히려 상대를 몰아쳤다.
갈황은 급히 아랫배의 진기를 밀어올려 앞으로 질주하는 몸을 멈춤과 동시에 뒤로 날아 올랐다.
그의 응변 솜씨도 재빨랐으나 촌녀의 몰아치는 다리는 그보다 더욱 빨랐다. 갈황은 왼쪽 다리 무릎에 따끔한 통증을 느끼자 온 몸의 힘이 싹 빠지고 하반신이 마비되어 공격을 가할 능력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태연스레 말했다.
"사람을 다치지말라는 할아버지의 교훈이 없었던들 오늘 당신의 다리는 부러지고 말았을 거야."
그리고서는 판관필을 내동댕이 치더니 천풍도장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몸을 돌려 거닐기 시작했다.
원래가 견식이 해박하고 체협이 많은 천풍도장은 그 누더기 촌녀의 솜씨를 보자 고명한 무공을 지닌 기인(奇人)임을 첫눈에 간파했다.
만약 자신이 그녀를 상대해 싸우더라도 꼭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거니와 그보다도 우선 시급한 것은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었다.
만일 자기마저 싸워 패한다면 이 위급한 상황을 수습할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그는 시종 아무 말 없이 싸움에 관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촌녀는 천천히 서너 걸음 거닐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방조남에게 말했다.
"왜 그러구 있어요? 제가 가고 난 후 저 사람들이 또 덤벼들면 어떻게 하려구 그러세요?"
방조남은 우두커니 서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제 정신이 들어 그녀를 따라나섰다.
갈황은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동생의 안위가 걱정되어 진기를 한 곳에 모아 있는 힘을 다해 동생 걸에 다가가며 물었다.
"많이 다쳤니?"
그 순간 돌연 왼쪽 다리가 마비되어옴을 느끼면서 넘어질 것 같아 급히 땅 위에 주저앉았다.
갈위는 눈을 뜨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 여자의 손에 다친 것이 아니에요!"
천풍도장이 급히 달려가서 말을 받았다.
"틀림없이 홍의녀의 손독이 발작한 것 일거야."
동생의 상처가 위중함을 눈치 챈 갈황의 마음은 저으기 어두워지며 풀이 죽었다. 그는 한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빨리 진기를 운행해 봐라, 아픔은 참을만한지. 너를 업고 집으로 가야겠다. 집에 가서 아버님에게 치료를 받자."
천풍도장이 나서면서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가 그 홍의녀의 장독을 입은 것이다.
이제는 저마다의 무공 수양이 깊고 얕은 데 따라 그 발작이 빠르고 늦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자네 아우는 비범한 재주가 있고 내공도 역시 깊은 기초가 있지만 아까 촌녀와 싸워 혈기 순환이 빨라졌기 때문에 장독이 먼저 발작한 거야."
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곤 다시 말했다.
"자네들 뿐만 아니라 나도 지금 등이 점점 아파 오는 게 곧 장독이 발작할 것 같네. 부친께서 설령 이런 장독을 치료할 수 있다 할지라도 여기서 운대산까지 그 먼 길을 하루 이틀에 주파할 수는 없는 게 아니겠나. 만일 도중에서 자네 아우의 장독이 더욱 심해진다면 그때는 속수무책일 테니 어떻게 하겠나?"
갈황도 남몰래 기력을 운행해 보니 과연 자신의 등도 아파왔으므로 내심 크게 당황했다.
"선배님의 말씀은 백 번 지당하오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냥 여기 앉아서 장독이 발작하여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갈위의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것을 본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워낙 경험이 풍부한 도장인지라 이런 곤경에 처해서도 정신을 가다듬으며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미소마저 잃지 않고 말을 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 말게나. 내가 잘 생각하여 사태를 수습할테니."
눈앞에는 끝 없는 산줄기 뿐, 늦 겨울의 햇빛은 산봉우리에 쌓인 눈을 비춰주고 있었다. 눈에서 반사하는 천만 줄기의 찬란한 빛은 한결 더 아름다웠다.
한겨울의 싸늘한 햇빛, 산봉우리에 쌓인 눈, 그 경치야말로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눈앞의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할 겨를도 없었다.
천풍도장은 먼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홀연 그의 뇌리를 스쳐가는 무엇이 있었다. 그는 재빨리 손을 품속에 넣어 옥자기로 만든 두 약병을 꺼냈다.
그는 병 마개를 열고 색깔이 다른 두 알약을 손바닥에 쏟았다.
냄새를 맡아보니 한 줄기 향기가 코를 찌르며 온 몸이 가벼워지고 경쾌해짐을 느끼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약이 칠교사의 암기를 맞아 생사지경을 방황하던 원구규의 상처를 고쳤으니 틀림없이 그 홍의녀의 장독도 치료할 수 있을 게다. 비록 장독을 완치는 못 하더라도 심한 통증과 상처의 확장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곧 그 약 두 알을 나곤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형, 이 약을 들어 보시오. 그리고 아픔이 가시는가 어떤가를......"
이때 나곤은 상처가 몹시 아파오자 하는 수 없이 눈을 지긋이 감고 기력을 운행 조절하고 있었지만, 아픔은 가시지 않고 정신만 희미해져 오던 터라 그저 손을 내밀어 알약을 바라보지도 않고 냉큼 한 입에 삼켰다.
천풍도장은 긴장해서 나곤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알약의 효험 여부가 전체의 생사를 좌우하는 까닭에 천풍도장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이다.
차 한잔 끓일 시간 가량이 지났을 때 나곤의 이마에 솟았던 땀방울이 잦아들고 얼굴색도 점차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알약의 효과를 확인하자 천풍도장의 어둡던 얼굴색이 밝아지며 즐거운 미소마저 피어났다. 그는 알약을 갈위와 문하 제자들에게 나누어 먹인 후 각자 기력을 운행 조절하게 하니 과연 일각이 채 못 되어 그들의 고통은 줄어들었다.
방조남은 누더기 촌녀의 뒤를 따라 약 삼 사십 리 가량을 걷다가 돌연 동굴에 갇혀 밤낮으로 자기를 고대하고 있을 사매의 안위에 생각이 미쳤다. 한시 바삐 돌아가서 사매의 고통을 덜어 줘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발길을 멈추고 말했다.
"아가씨의 구원으로 이 목숨을 건진데 대해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촌녀는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정말 저를 몰라 보시겠어요?"
방조남은 그녀가 나타났을 때, 한 달 전에 조양평으로 가는 도중의 어느 주막에서 본 촌녀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성명을 모르니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망설였을 뿐, 그녀가 반문하자 비로소 두 손을 모으면서 말했다.
"달포 전에 아가씨가 주신 음식을 먹고 굶주림과 추위를 면한 몸이 어찌 그 은혜를 잊었겠습니까? 다만 제가 뭐라고 아가씨를......."
"그렇군요! 그때 제가 이름을 가르쳐 드리지 않은 게 저의 잘못이었지요. 저의 성은 진(陳)이옵고......."
말을 하던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다 큰 규수가 낯선 남자에게 감히 이름을 말하려니까 새삼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방조남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네, 알았습니다. 저는 방조남이라 부릅니다."
그러자 누더기 옷의 촌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 참! 우리 할아버진 어찌 되셨을까?"
그녀가 느닷없이 꺼낸 이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상대방인 방조남에게 호소하는 것 같은 애처로움이 담겨 있었다.
방조남은 가슴이 뜨끔해짐을 느끼면서 말했다.
"아가씨의 조부님이시라면 만고 풍전을 다 겪고 은거하시는 고명한 분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미거한 저이지만 한 번 뵈올 수 있게 된다면 평생을 두고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는 처음엔 작년 인사를 하려던 것이 그녀의 애처로운 말을 듣자 얼결에 이와 같이 말했다.
그러자 촌녀는 다시금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옛 상처가 도져서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시는데 오늘까지 밤낮 사홀 동안이나 인사불성입니다. 아아! 이런 산중에서 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토록 난처한 일에 부딪쳤으니."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두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너무 상심 마십시오. 길인 천상(吉人天相)이라 하늘이 도와 주시겠지요......."
방조남은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의 할아버지는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여요."
방조남은 이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으나 속으로는 왜 그런 불길한 소리를 할까 생각하면서 말했다.
"제가 무술계의 누구에게나 숭앙받고 있는 지기자 언능포 선배님의 비독진신단을 지니고 있소. 이것이 혹 아가씨의 조부님께 도움이 될 수 있을는지?"
촌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저의 할아버지의 의술은 천하에 비길 사람이 없었으며 어떤 중병이라도 할아버지의 손만 가면 완치시켰지만 자신의 상처만은 치료할 수가 없답니다. 설사 화타가 다시 살아나온다 해도 그 병을 치료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이와 같이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한없는 슬픔에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닐기 시작했다.
(내 목숨을 건져 준 은인이랄 수 있는 사람인데 이 여자를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어.)
방조남은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개의 산모퉁이를 돌아 하늘 높이 치솟은 절벽 벼랑 아래 다달았을 때 누더기 촌녀가 절벽 중허리에 우뚝 솟아 나온 바위를 우러러 보면서 말했다.
"저의 할아버지는 저 우뚝 솟아나온 바위 안에 누워서 않고 계십니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두 팔을 벌려 몸을 하늘로 향해 치솟더니, 허공에서 한 바퀴 맴돌고는 곧 우뚝하게 돌출한 바위 위에 몸을 내렸다.
방조남이 보니 돌출한 바위와의 거리는 약 두 장이나 될 것 같았고 자신의 경공으로는 도저히 뛰어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바위 밑은 깎은 것처럼 매끈한 절벽이니 발을 디딜 곳조차 없어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촌녀는 방조남의 흉중을 알아차린 듯 허리띠를 풀어 돌출한 바위 밑으로 내리면서 말했다.
"비약하여 이 허리띠를 잡으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방조남은 속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진기를 아랫배에 집중하고 두 팔을 뻗어 하늘로 치솟으면서 오른손으로 허리띠를 잡고 바위 위로 뛰어 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띠를 매면서 말했다.
"저의 할아버지는 바로 이 동굴에 계십니다."
그녀는 어느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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