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구 씨 실종 사건
이동민
일구 씨가 태어난 햇수로 따진다면 62세이다. 환갑도 지났고, 진갑 나이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진 탓에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
며칠 전에 일팔 씨가 명함에다 자유, 민주라는 선전 문구를 벼슬자리 자랑하듯이 가득 담아서 들고 왔으므로 나는 일구 씨의 명함인 줄 착각했다. 아니라고 했다. 일구 씨의 행방이 새삼 궁금했다.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실종신고를 한다.
전화가 왔다. 일구 씨의 거처지를 찾을 길이 없지만, 일구 씨에 관한 정보를 주겠다는 연락이다. 대구의 2. 28 공원에 가면 이이팔 씨의 기념탑이 있으니 만나보라고 했다. 서로 가까운 사이이니 그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사는 곳이 대구이니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이팔 씨는 자기가 태어난 내력을 자랑하느라 열을 올렸다. 나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때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끝나고, 상처가 아물지 않을 때였어요. 전쟁 통에, 빨갱이라고 불렀던 좌파 세력이 설치는 바람에 정부가 자유를 빼앗고, 강압 통치를 하는 것을 시대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면서 국민은 참아냈지요. 학교에서는 자유와 민주라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통치자들은 전혀 지키지 않았어요. 세월이 흐르니 국민도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민주주의 꽃은 선거 아닙니까. 막걸리와 고무신을 뿌리고, 공무원이 밀주 조사한다면서 백성들을 겁주고, 깡패까지 데리고 와서 주먹질로 위협하였으니, 그때는 내가 물불을 가리지 않던 젊은이였잖아요, 주먹을 불끈 쥐고 동성로로 뛰어나왔어요. ‘독재 정권 물러나라’ 했지요.”
“이이팔 씨 당신이 동성로로 나와서 데모를 했다고요.”
“그럼요. 학교에서는 민주주의가 어떠니 하는데도, 교문을 나서면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으니”
한껏 고개를 들고 어깨를 으쓱한다.
“이이팔 씨 쯤은 대구 사람 몇, 몇만이 기억하겠지만, 다른 지역 사람은 기억해주지 않잖아요.”
“그래서 억울합니다. 그래도 일구 씨에 비하면 덜 억울합니다.”
“일구씨가 태어나기 전에 마산에서------.”
“폭력이 일어난 것을 말하려는 거지요. 아마 그날이 4월 11일이었지,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희생되었어요. 일구 씨가 태어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어요. 그를 진짜 민주투사로 기려야 하는데, 일구 씨가 실종되면서 김주열 학생도 잊어가고 있잖아요.”
이이팔 씨와 나는 죽이 맞아서 알맹이는 가고 껍데기가 주인 행세를 하는 세상에 욕을 해댔다. 당시에 정부는 공산당 조직이 준동했다 했고, 민주당은 애국 시민의 봉기라 했다. 요즘도 어디서 많이 듣는 말 같다, 역사란 반복한다는 말이 맞는가보다. 어쨌거나 4월 19일은 일구 씨가 태어난 날이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하고, 대학생, 중, 고 학생, 그리고 시민들까지 맨손으로 경무대와 이기붕 자택으로 몰려가서 자유, 민주를 부르짖으며 시위를 벌였다. 본래 탄생에는 진통이 따르잖아. 4월 25일에 전국의 대학교수가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26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일구 씨가 태어나는 산고는 끝났다. 산후조리만 잘하면 되었다.
일구 씨의 탄생도 그만하면 순산이었다. 일구 씨는 전 국민의 환호를 받고, 자유민주가 태어났다면서 환호했다. 일구 씨는 조선 말의 애기장수가 아니었고, 판서댁 외아들처럼 축복받으면서 태어났다. 서로 키워주겠다고 난리법석이었다. 일구 씨의 앞날은 탄탄대로가 뻥 뚫린 듯이 보였다. 물거품 같다는 게 세상 인심인데. 우리는 멋모르고 춤을 춘 꼴이 되었다.
말 다르고 짓 다른 것이 사람이다. 이 나라를 짊어지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일구 씨를 보살피기는커녕 뜯어먹고 우려먹기에 바빴다. 입만 떼면 사일구 정신이 어쩌니 저쩌니 하지만 뼈까지 우려먹는데 어떻게 정신이란 것이 남아 날 수 있을까.
나는 그때 아직 어린 학생이었는데 4.19정신이란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그러나 정치꾼들이 일구 씨를 자기 멋대로 놓았다. 들었다 하면서 흔들기만 했으니 4.19정신이란 것이 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4.19정신이 정신을 못 차리면 일구 씨가 나락으로 떨어질 운명도 정해진거다. 축복이란 축복을 모두 받으면서 태어난 일구 씨로서는 겨우 일 년 만에 버림을 받고 고아 신세가 되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건 아동학대가 아니고 영유아 유기에 해당한다.
5. 16일 새벽, 동쪽의 먼 하늘에서 어둠의 색이 옅어져 갈 즈음에 탱크를 앞세운 일육 씨가 보무도 당당하게 한강 다리를 건넜다. 일육 씨가 한 말 중에 일구 씨의 항쟁을 이었다고 하더란다. 항쟁을 이어서.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내 운명을 알 것 같더라구 했다. 내가 어찌 탱크를 앞세운 그들과 항쟁이란 말로 동격이 되어야 하는건지. 일구 씨는 넉두리했다.
“하기야, 그때의 정치꾼들이 싸움질이나 하다가 떡이 저절로 입 안에 들어오니 놀라서 제 정신이 아니었겠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고 굴러온 떡이었으니 어찌 소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때의 지도자란 자들이 정신을 똑똑히 차렸더라면 내 신세가 요 모양 요 꼴로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서?”
“총을 들고 나선 자들이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고 했거든, 6. 25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내가 선물해준 정권을 얼씨구나 하고 덥썩 집어 든 사람들은 아예 나라를 다스릴 깜이 안되는 무능력자인데------. 그 자들 때문에 내 꼴이 요 모양이 되었지. 좀 똑똑한 자가 나라를 물려받아서 다스렸더라면 내 모습이 지금처럼 비참하게 추락하지는 않았을거야.”
“민주, 자유가 나의 유일한 자산인데. 그때의 윤 모 대통령도, 우리 국민의 정신을 이끈다는 장준하란 분도, 유명 언론인도 총칼을 들고 민주와 자유를 박살내는 일육씨를 환영하였으니-----.나의 간판인 민주와 자유는 물거품이 되어버리는거지.”
그 다음부터는 일구 씨의 목소리가 담담해졌다.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일까. 억울하다는 것일까. 억울한 마음이 왜 없을까. 민생고는 민주정신을 밀쳐버리는 가장 좋은 선전물이었다.
“일육 씨는 민생고를 해결하였으면 자기가 약속한대로 나를 제 자리에 돌려주어야지. 권력의 맛을 본 자가 스스로 물러서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잖아. 권력의 맛이 얼마나 달콤한데 일육 씨가 돌려줄 리가 없지. 이것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만고의 진리야.”
일구 씨의 말을 옮겨보자. 그래도 처음에는 일구 씨의 정신이 어떻고, 저떻고 하더니 슬그머니 일육 씨만 추켜 세우고, 일육 씨가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배룰 채워주었다는 것만 북치고, 나팔 불고 하더라. 사람들은 환호 하더구나. 그러고 보면 뭐니뭐니 해도 배부른 게 최고야. 민주니 자유니 하는 것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고 오히려 혹독한 혼란만을 겪었으니 나는 뒷전으로 밀려나버리거지. 나는 갈 곳이 없어서 거처지도 못 구했는데 사람들은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관심도 없더라.
“하기야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는자들이 자기의 능력을 감추느라고 씨부렁대는 말이 민주와 자유이기는 하지만.”
구시렁거리는 것을 보니 억울하기는 한가보다.
“당신은 경무대 앞에서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민주와 자유를 부르짖었는데, 그 기개는 어디로 가고 지금 이렇게 숨어서 지냅니까.”
“일육 씨를 앞 세우고 온 사람들이 머리에 돌만 들어있는 군빨인 줄만 알았는데, 정치꾼들이야말로 머리에 들어있는 것이 없는 진짜 맹물이더라. 독립운동이니 반공정신이니 하면서 투쟁 경력만 앞세웠지 배고픈 백성들에게 떡과 빵을 줄 능력은 없더라구. 머리가 안 돌아가니 그런 것만 내세웠겠지만.”
“그래도 군빨보다는 나을 걸”
내 말에 일구 씨는 동의하지 않았다.
“6. 25 전쟁 통에 미군이 들어와서 우리나라 장교를 미국에 데려가 교육을 많이 시켰더라. 젊은 장교들이 미국가서 이것저것 많이 배워 왔더라.”
“군사기술이야 많이 배웠겠지.”
“그들은 젊었잖아. 경제가 무엇인지도 배웠고 나라 통치 기술도 배워왔어.”
“어떤 걸 배웠는데요”
“나라가 안정되려면 하층민보다는 중산층이 많아져서, 이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거야. 일육 씨를 앞세우고 정부를 장악한 그들이 한 일이 바로 중산층 양성이었어. 경제개발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중산층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았지.”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이 그때부터 인 것 같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희생도 따랐지. 가장 큰 희생은 나의 트레이드 마크인 자유와 민주였어. 그러나 중산층이 성장하여 그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되면서 나라가 안정되었지. 국민들도 배가 부르니 자유와 민주를 반납하고도 괜찮다고 생각했던거야.”
“그럼 잘 되었잖아요.”
“그 바람에 내 신세가 쪼그라들었어. 정부에서는 일육 씨를 기리는 행사를 성대하게 하느라 나는 뒷전으로 밀려났어. 뒷전으로 떠돌다 떠돌다, 이제는 어디에서 사는지 거처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나를 실종 신고 한거잖아.”
“많이 억울하겠습니다.”
“억울한 것도 맞아.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들어설 즈음의 여론조사가 70% 이상이 사회주의를 선호했다잖아. 배고픈 넘 휘어잡을 장사는 없는거야. 이승만 정부는 토지개혁을 하고, 독재를 하면서 깡으로 이 나라가 자유민주 국가로 살아남도록 했어. 그러나 경제가 엉망이니 언제 무너질지 암담했어. 기아선성에서 허덕이는 백성에게 밥 먹고 살도록 했으니”
“밥만으로 살 수 없다는 구호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배가 제법 불렀을 때야. 배가 부르니 예전의 배 고플 때는 잊어버리고 군사독재라면서 길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어. 나도 다시 환영 받으려나 하고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기대가 무너지는 사건이 터졌지 뭐.”
“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말이네요.”
“맞아, 그러나 더 결정적인 사건은 전두환이라는 군인이 또 쿠데타를 일으킨거지.”
“그들도 경제를 앞세웠다면서요.”
“이제는 사회 분위기가 일육 씨가 태어날 때와는 다르잖아. 지배자가 시대의 아젠다인 자유와 민주를 차압해버렸으니 좌파들이 신이 난거야. 자유와 민주를 찾는다는 명분이 생겼잖아. 활개짓하기 딱 좋은 분위기로 흘러갔으니 말이야.”
“아, 그 때 생각납니다. 지도자가 비명횡사하고, 일육 씨에 짓눌려 있던 정치 지도자들은 자기들 세상이 찾아왔다고 설치고 다녔고, 솔직히 그때 나는 나라가 어떻게 되려나 하고 불안했어요.”
“신 군빨들은 권력을 잃을까 불안하니까 일육 씨가 태어날 때보다 더 무리수를 둔 것이지. 총을 들고 설치면서 정치 지도자를 명분도 없이 잡아 가두니까. 자기네 세상이 오려나면서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이 허탈해진거지. 왜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 실망이 너무 커면 에라 모르겠다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심정이 되잖아. 그런 일이 일어난거야.”
“아, 일팔 씨가 태어난 이야기이네요.”
“그럼, 일팔 씨가 태어나는 바람에 내 신세는 더 처량해졌어.”
“솔직히 말해서 일구 씨와 일팔 씨는 성격이 같은데도 더 처량해지다니요.”
“다르지. 태어나는 방법이 달랐지. 자유와 민주를 상표로 달고 나왔지만 나는 정말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이고, 일팔 씨는 분노가 앞선거지.”
“무기고를 탈취하여 국가에 대든 행위와. 맨 손으로 시위만 하다가 일방적으로 총격을 당한 행위가 같을 수가 없지. 아, 족보만 봐도 성씨가 오씨이고, 사씨인데.”
오씨들의 세상으로 바뀌니. 오일팔 씨와 오일육 씨의 후손들 간에 서로 적자라면 다투었고, 지금은 오일팔 씨가 승리한 듯한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글쎄, 역사란 언제 후딱 바뀔지 모르는 것이니까. 앞으로 더 두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일팔 씨가 득세하자 오일팔 씨가 총을 들고 싸웠던 현장에는 코빼기도 안 비친 사람까지 공을 세웠다면서 국물을 떠 마시고 있다. 역사가 바뀌는 날이 오면 그들은 또 어떤 핑계를 대고 빠져나오려 할까.
“우리가 일구 씨를 찾으려는 이야기를 하다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
“엉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구 씨가 실종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이야기하는 거라구요”
“일팔 씨와 일구 씨는 어떤 관계인데요. 일자 돌림으로 피라도 ------.”
“오씨이고, 사씨인데, 성이 다르다고 했잖아요.”
“남남이구나. 그래서 일팔씨가 일구씨를 챙기려 하지 않는구나.”
“그래도 민주니 자유니 하는 한지붕 밑에서 같은 간판을 달고 살지만 다른 가족이라는거지.” “아무리 그래도 일구씨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좀 그러네.”
“그렇긴 뭐가 그래. 영감탱이가 되도록 살면서 세상 이치가 그렇다는 것 쯤은 알아야 하지 않나. 권력은 나누는 것이 아니고 독차지하는 것이란 것 쯤은 알고도 남을텐데.”
오일팔 씨와 오일육 씨가 싸움박질을 하는 것을 보몀 오일팔 씨와 사일구 씨는 같은 아젠다를 내걸었던 동지 사이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요즘에 와서 사일구 씨는 더 깊은 곳에 꼭꼭 숨어버렸다. 오일팔 씨의 기세가 워낙 등등하니까. 몸을 다칠가봐 숨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옛말이 우리의 앞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요즘 입만 열면 말하는 민주와 자유의 진짜 주인을 찾아주고 싶어도, 일구 씨가 어디에 숨었는지 머리카라도 보이지 않으니, 먼저 실종신고부터 해야겠다.
일구 씨를 반드시 찾아서 일구 씨의 다음 생일 날에는 ‘해피 버스 데이’를 노래하는 행사를 거창하게 하는, 그런 날이 꼭 오도록 실종된 일구를 찾도록 합시다.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