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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누가복음 10:10-16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눅 10:10-16 / 그러나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거절하거든 거리에 나와서 이렇게 말하라. 11) `우리 발에 묻은 너희 동네의 먼지를 여기 떨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12) 심판날에는 소돔이 이런 동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3) [저주받은 도시; 마 11:20-24] 어떤 심판이 너를 기다리고 있는 줄 알기나 하느냐? 너 고라신과 벳새다야! 내가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베풀었더라면 그 도시 사람들은 벌써 오래전에 베옷을 입고 재를 쓰고 앉아서 깊이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형벌을 받을 것이다. 15) 너 가버나움아, 내가 너희들의 죄를 이루 다 어떻게 말하랴? 너희가 하늘에 올라갈 듯 싶으냐? 어림도 없다.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16)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환영하는 사람은 나를 환영하는 것이요, 너희를 박대하는 사람은 나를 박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박대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박대하는 것이다.'
본문은 복음을 거부한 동네를 향해 큰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를 거절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거부한 마을에 대한 경고 (10-1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 만약 그들이 그 동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환대받지 못한다면 그 동네에 대해 경고하라고 말합니다. 그 동네가 받게 될 심판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을이 회개하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시며, 심판의 무게를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은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거부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마을의 영적 상태와 그들이 마주할 심판을 상기시키는 경고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것의 심각성 (13-15) 예수님은 복음을 거부한 마을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 경고하십니다. 예를 들어, 고라신과 벳세다와 같은 동네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동네들이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며, 그들의 고집과 불신을 비판하십니다. 이 동네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기회를 허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 큰 죄책이 남아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복음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것에 의해 의미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과 그에 따른 결과 (16)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나를 듣는 것이요, 너희를 거절하는 자는 나를 거절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을 듣는 것이며, 그 메시지를 거절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그들의 메시지는 인간의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라고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며, 그로 인해 사람들은 심판을 받거나 구원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영원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하나요?
의성 산불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 1억 이상 기부한 유명 연예인들의 이름도 들립니다. 성경에 보면 복 있는 사람들이란 주변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요셉, 다윗, 에스더, 모르드개 등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자신의 복보다 자신 민족, 다른 사람을 위한 복의 통로로 쓰여졌던 것을 봅니다. 미국에서 수명에 대해 연구한 결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진정한 복은 자신을 위해 쌓는 것이 아니라, 액수가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이웃을 위해 가치 있게 쓸 때 더욱 빛나고 값진 것 같습니다.
< 설 교 >
호크마 주석
=====10:10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 이번에는 영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의 행동 지침을일러주고 있다. 여기서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코마이'(* )는사신들(ambassadors)을 환영하거나 그들이 전달해 주는 통지문을 환영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제자들 개인의 자격이나 권위로서가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또한 '거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테이아'(* )는 '넓은 길'또는 '노천의 넓은 거리'를 뜻하는데 이것은 거절하는 사람 또는 동네에 대한 제자들의 행동이 공개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10:11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 복음을 거절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하는 행위로서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것이다(9:5 주석 참조). 결국 이런 행위는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한 행위로 인해 필연적으로 결과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그책임이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경고성 행위는 반대나 불이익을 뜻하는 여격이 사용된 '너희에게'(* , 휘민)로써 더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 이 말씀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❶ 마지막까지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 행위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❷ 복음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엄연한 사실로서 다가오며 어떤 악한 세력에 의해서도 지연되거나 저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10:12
저날에 소돔이...쉬우리라 - '저날'은 마태복음의 병행 본문에 기록된대로(마10:15) '심판의 날'을 뜻함이 분명하다(21:34; 마 7:22; 살후 1:10; 딤후 1:12, 18). 또한 마태는 구약적 표현에 일치되게 '소돔과 고모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고모라를 생략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악의 상징이며(사 1:9; 렘 50:40) 본래 이 두 성읍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심판을 받아 멸망한 도시였다(창 19:24-28). 한편 '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는 표현은 심판의 강약을 뜻한다기보다는 그들의 심판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정지우며 그 심판의 준엄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0: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 여기서 '화 있을 진저'는 반대자들에 대한 보복보다는 불행한 운명을 맞게될 대상에 대한 슬픔과 유감을 표시한다(6:24). 고라신은 마태복음의병행본문(마 11:21)과 이곳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지명이다. 고라신은 당시의 가버나움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인데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예수께서 이 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에 비유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관심과애정을 기울이셨으리라 추측된다.
벳새다 - 이 곳에 대해서는 9:10의 주석을 참조. 예수께서 이곳에서 사역을 하신 기록은 9:10-17에 나와 있다.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 - 이 문구는 앞에서 언급한 두 장소에서 행하신 사역들이성경의 기록보다 훨씬 많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권능'(* , 뒤나미스)은4:14과 9:1에도 나오는 데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두로와 시돈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갈릴리 북방에 있는 베니게의 항구도시로 두로는 B.C. 2750년 경에,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 유명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암1:9;욜 3:6)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사 23장;겔 26-28장).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 베옷(* , 삭코스)은 염소털로 만든 거친 옷으로 회개나 애도의 표시로 입었다(왕상 21:27). 재(* , 스포도스) 역시 애도의 표시였고(욥 2:8; 욘 3:6; 마 6:16) '삼베'와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에 4:2, 3).
=====10:14
심판 때에...쉬우리라 - 12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두로와 시돈이라는 두 패역한도시에 비유하여 고라신과 벳새다의 심판이 얼마나 중할 것인가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도 심판을 면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에 대해서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10:15
가버나움 - 문자적으로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은 '자비로운'이라는 뜻으로 이마을 이름은 결국 '자비의 마을'이 되는 셈인데(Hendriksen) 예수의 심판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마을의 이름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완악한 마을'이라고 해석해야 옳을것이다. 아무튼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중심적 제자들이 그곳에서 선택되었고(5:10), 많은 이적과 교훈이 그곳에서 베풀어졌다(4:23, 31-37; 7:1-10).
그리하여 마태는 가버나움을 예수의 '본 동네'라고 하였다(마 9:1). 그러나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그렇게 주어진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는데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거역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는 표현에 의해 그들이 매우 교만하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에까지...낮아지리라 - 이는 이사야가 포로후기 시대에 오만불손했던 바벨론의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말씀(사 14:13,15)을 가버나움에 적용한 것이다. '네가...높아 지겠느냐'(* , 메 휩소데세)에서 '메'(* )는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조사로서 결코 하늘에까지 높아질 수 없음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해 준다. 하늘의 영광과 음부의 파멸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교만한 가버나움이당할 파국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음부'(* , 하데스)는 구약에서 죽은 사람들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신약 시대에는 그 의미가 조금변하여 무신론자들이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졌다(Marshall).
=====10:16
너희 말을...것이라 - 제자들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제자들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함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의 권위를 존중해주지 않고 거역할 때 그 행위는 예수를 거역하는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로서는 자신들의 권위가 자생적(自生的)인 것이 아니라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임을 인식해야하며 따라서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한다는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했다.
전도를 위한 최상의 의사소통
눅 10장 16절 / 김영헌목사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혼자 사는 노인이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자 슬픔을 안고 평소 다니던 성당의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신부님, 제가 기르던 개가 죽었습니다. 오랫동안 저와 함께 살던 애견인데 신부님이 장례식 좀 해 주세요.” 신부가 짜증스런 음성으로 말합니다. “누가 개를 성당에서 장례예식 합니까? 우리는 사람만 장례식을 합니다. 저 밑에 가면 다른 종교가 있으니 가 보세요. 거기는 혹시 개 장례식을 할지도 모르니 가서 부탁해 보세요.” 노인은 신부의 조언에 감사하다면서 물었습니다. “신부님, 개 장례식을 하려면 얼마를 준비해야 하나요? 500만원이면 될까요?” 신부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서서 말합니다. “노인양반, 그 개가 캐톨릭 신자라는 걸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캐톨릭이면 개도 장례식을 여기서 할 수 있습니다.” 유머입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웃자고 만든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 유머 속에 교훈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형식적인 신앙인에 불과합니다. 직업적 신앙인, 또는 습관적 신앙인입니다.
김씨 할머니 집에는 늘 두 분의 할머니가 마실을 와서 놀다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김씨 할머니가 아끼던 개가 죽어 있었습니다. 쥐약을 먹은 쥐를 먹고 죽은 것 같았습니다. 경찰에 연락해서 경찰차에 죽은 개를 실려 보냈습니다. 너무 슬퍼 울고 있는데 이웃집 이씨 할머니가 들어오며 다른 할머니 안부를 묻습니다. “아니 늘 내 앞에 와서 웃더니 오늘은 안 보이네?” “아이고 죽었다네. 마당에 죽어있더라구. 경찰이 실어갔어!” “무에야? 아니 죽었어? 아이고 어떻하나? 갑자기 죽다니 웬 말이여!” 퍼질러 앉아 두 할머니는 한참이나 슬피 울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알려야지. 이러고 있으면 되나?” 이씨 할머니가 일어서자 김씨 할머니가 말립니다. “새끼도 한번 못났어. 아이구 불쌍하지!” 두 할머니가 더 소리 높여 웁니다. 김씨 할머니는 기르던 개를 두고 하는 말이고 이씨 할머니는 늘 놀러오던 앞집 정씨 할머니가 그 집 마당에서 죽은 줄 알고 우는 것입니다. 나중에 둘은 어떤 얼굴로 서로 쳐다보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정씨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왜들 울어? 누가 죽었어?” 소리를 지르니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말”을 합니다. 언뜻 말은 백퍼센트 완벽한 의사전달 수단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말만큼 불완전한 전달수단도 드뭅니다. 앞뒤 정황을 잘 모르거나 말하는 이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같은 말이라도 엉뚱하게 들리거나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봉독한 롬 10:7의 말씀은 구원의 통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믿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줘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언어인 “말”이 의사전달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도구요, 방법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모든 동물 가운데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입니다. 짐승들도 그들만의 언어가 있겠지만 사람만큼 발전된 언어를 갖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데 “말”만큼 좋은 도구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나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로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성공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의사소통 행위과정에는 세 가지 필요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the sender), 둘째는 메시지(message), 그리고 셋째는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the receiver)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외에도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더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 요소는 이 세 가지입니다.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원만히 이뤄지려면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은 경험을 공유했을 때 더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세대 간의 차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경험의 공유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놀고 있는 문화의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문화언어 안에서 놀고 어른은 어른의 문화공간 안에서만 있기 때문에 세대 간의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못하는 법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경험을 함께 하면 더 잘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함께 경험한 문화의 공간에서 복음을 절할 때 훨씬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수용률도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전도라는 말로 쓰이는 ‘이반젤리즘’(evangelism)이라는 말은 그 문화권의 사람을 불러내어 훈련시킨 다음 다시 그 문화권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복음은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 버렸고, 어떤 씨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져 곧 싹이 나와 말라버렸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져 가시에 가리워 자랄 수 있는 기운을 잃었고, 어떤 씨는 옥토에 떨어져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비유는 복음의 씨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많은 열매를 맺기도 하고, 아예 싹을 내지 못하거나 났어도 쉬이 죽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이 비유에서는 씨를 뿌리는 농부가 예수님(또는 하나님)이어서 씨가 떨어지는 ‘밭’만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가 전할 때는 밭(the receiver)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the sender)인 전도자도 문제가 되고, 전하는 ‘메시지’도 생명력 있는 씨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전도자요, 예수님의 복음도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밭에 따라 열매를 맺는 결과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는 우선 전하는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전할 메시지도 분명할 수 있도록 골라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최상의 전도를 할 수 있을까요?
1. 생명력 있는 복음의 씨를 전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복음의 씨가 생명력 있는 씨인가? 내가 먼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확신이 있은 다음에 만든 복음의 종자여야 생명력이 있습니다. 내게 아무런 역사를 일으키지 않은 전도의 내용은 힘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를 하려면 내가 먼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설교학자인 존 스테이플톤(John Stapleton) 박사는 설교자들에게 강변합니다. “Whatever you believe, you have to preach!”(당신이 믿는 것을 설교하시오!) 자기도 믿지 않으면서 남에게 전도하면 이미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당신을 통해 전파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밭에서 거둔 복음의 씨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2. 전도자(복음의 전달자)의 적극적 의지입니다.
단순한 전달자가 아닌 반드시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는 자가 받아 드리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한 명령으로 주어진 과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 가족, 친구,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직접 말로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Christ calls us to give a verbal witness to the people around us).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을 가슴에 담고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열심을 냅니다. 하나님은 복음전파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눅 10:16에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자라 했으니 우리는 의지를 갖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전도대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전도하는지 모릅니다. 매일같이 전도지를 들고 나가는 그분들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합니다. “하나님, 저들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기쁘실까요? 저들의 발걸음과 저들의 입술을 축복하소서!” 저는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설득의 힘도 사랑입니다. 보험설계사들이나 판매사원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표어가 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느냐를 그들이 알기 전까지는 당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다”(Nobody cares how much you know until they know how much you care). 네가 나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나도 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먼저 지극히 사랑하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도 잘 받아드릴 것이고, 사랑과 관심이 없이 메시지만 전하면 듣는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복음의 씨를 심으라” 전도자들에게 주는 표어입니다. 비록 우리가 불완전해도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줄 알면 모든 것을 용서할 것입니다.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마음 밭에 떨어져서 새싹을 돋게 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6.25사변 후 나라 복구에 큰 지도력을 나타냈던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지는 박수무당이었답니다. 무당질하는 그를 너무 불쌍히 여긴 어느 전도자가 진심으로 그에게 다가가 전도를 했답니다. “자식망칠 짓 그만하고 천당 가세요” 마음이 완악했던 박수무당은 전도자에게 폭언을 했습니다. “너나 잘 믿고 천당 가든지 백당가든지 하라. 남의 일에 상관마라.” 그날은 무당에게 재수 없는 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집에 돌아온 박수무당은 전도자의 말이 가슴 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폭언을 했는데도 사랑스런 마음으로 애걸하던 전도자의 말이 귓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결국 이 박수무당은 신당을 정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믿었더니 많은 열매도 거두었고, 그의 아들 백낙준 박사는 미국에 유학을 가서 학위를 하고 연대총장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역사적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하시는 하나님으로 가까이 가십니다.
마리아(Maria)라는 젊은 아프리카 여인이 미국에 왔습니다. 그녀는 늘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가 방문 중인 교회의 전도 전략회의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 회의에서는 팸플릿 만들기, 여러 가지 선교 사업들, 캠페인, 등등 많은 것들을 논의 했습니다. 한참 논의한 후에 어느 교인이 앙골라에서 온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앙골라 교회는 어떻게 전도를 하나요?” 그때 마리아는 말했습니다. “우리 앙골라 교회는 전도할 때 팸플릿을 나누어주거나 캠페인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도하고자 하는 마을에 한 두 가정을 이사를 시킵니다.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사랑하면 저절로 마을 사람들이 예수 믿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사랑입니다. 가슴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받아드릴 준비가 됩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파될 때에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여름철 휴가 기간에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이 직접 전도해야 합니다. 용기를 갖고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얼마나 전도를 하시는지 하나님은 지켜보며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꼭 전도하는 여름휴가가 됩시다.
은혜 받고 교만해지면 파멸당합니다
눅 10:10-16 / 서울산정현교회
오늘도 아침 첫 시간을 주님께 바치며 새벽기도회로 모인 모든 성도님들 가정과 주님께서 세우신 서울산정현교회 위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먼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선교의 올바른 자세와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신 것이 제자들의 복음을 거부하는 동네에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이 경고가 얼마나 중요한지 선교의 교훈 중 거의 반을 차지합니다. 누가복음 10:2-16에 나오는 선교에 대한 교훈이 열다섯 절인데, 그 중에 영접하지 않는 동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무려 일곱 절입니다.
처음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네에서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며 경고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동네가 마지막 심판 때에 소돔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동네에 대한 포괄적인 경고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복음을 거부한 동네를 구체적으로 호명하시며 무섭게 꾸짖으십니다. 이곳은 앞으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동네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미 복음을 전하신 갈릴리의 도시들입니다. 고라신은 가버나움 북서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도시이고, 벳새다는 갈릴리 동북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가장 많이 사역하신 곳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한 유대인 도시들이 이방인 도시보다 더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두로와 시돈은 팔레스타인 서북쪽에 있는 푀니키아의 부유한 도시로서 대표적인 이방 도시들입니다. 베옷은 회개나 애곡을 의미하고, 재도 애곡을 의미합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한다는 말씀은 자기 죄를 몹시 슬퍼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죄를 많이 지은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권능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고 두려움 속에 자기 죄를 슬퍼하며 회개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도시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경험하지 못해서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이 심판 때에 고라신과 벳새다보다 벌을 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가장 많은 전도와 능력을 행하신 곳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꾸중을 듣습니다. 음부는 죽은 자의 세계나 지옥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하늘과 대조되는 곳이기 때문에 지옥을 의미한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가버나움에 하신 말씀은 이사야 14:13, 15에 기록된 바벨론 왕에 대한 예언과 같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이 모습은 가버나움의 죄가 얼마나 악한지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가버나움은 복음을 거부했을까요?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라는 말씀을 볼 때 교만 때문에 거부한 것입니다. 가버나움이 왜 교만했을까요? 예수님이 가장 많은 능력을 행한 곳이기 때문에 자기가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기적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도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거절한다면 기적 체험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큰 벌을 받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무서운 경고를 주시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첫째, 예수님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며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그냥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안타까워하시는 것은 그만큼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안타까워하시는 것은 그들이 무서운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복음을 거부하는 죄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다른 죄는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받지만 복음을 거부하면 아무 죄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죄입니까?
복음을 거부하는 게 왜 이렇게 큰 죄일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면 더 이상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셋째, 제자들이 이렇게 귀한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제자들의 선교사역은 정말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역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선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선교가 이렇게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 사역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숙소나 음식을 대접받아도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때 복음이 구원의 축복일 뿐 아니라 복음을 거부하면 무서운 저주에 빠진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웃이 복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예수님의 능력을 입고 예수님의 방법으로 복음을 잘 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기 바랍니다.
실패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눅 10:10-16] / 한기채 목사(서울중앙교회)
환대는 성경적 미덕
당시 환대의 미덕은 복음을 전하는 유랑전도자들에게 유익한 관습이었습니다. ‘환대’(hospitality)에서 ‘병원’(hospital)이 유래되었을 정도로 환대는 낮선 나그네, 고아, 과부, 약한 자들을 용납하고 대접하는 성경의 미덕이었습니다.
실패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러나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고 심지어 핍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패의 추억을 과감하게 버리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를 핍박하는 행위는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요 복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너희를 영접하고 말씀을 잘 듣는다고 해서, 스스로 우쭐하게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일의 대행자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완악한 자가 누구인가?
당시의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이 과거의 소돔, 두로, 시돈 사람들을 완악하다고 비판하고 자기들은 그들과 다르다고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 많은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교만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이 받을 심판이 더 크다고 하십니다.
전도를 위한 최상의 의사소통
눅 10:16, 롬 10:17 / 참좋은군사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혼자 사는 노인이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자 슬픔을 안고 평소 다니던 성당의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신부님, 제가 기르던 개가 죽었습니다. 오랫동안 저와 함께 살던 애견인데 신부님이 장례식 좀 해 주세요.” 신부가 짜증스런 음성으로 말합니다. “누가 개를 성당에서 장례예식 합니까? 우리는 사람만 장례식을 합니다.
저 밑에 가면 다른 종교가 있으니 가 보세요. 거기는 혹시 개 장례식을 할지도 모르니 가서 부탁해 보세요.” 노인은 신부의 조언에 감사하다면서 물었습니다. “신부님, 개 장례식을 하려면 얼마를 준비해야 하나요? 500만원이면 될까요?” 신부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서서 말합니다. “노인양반, 그 개가 카톨릭 신자라는 걸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카톨릭이면 개도 장례식을 여기서 할 수 있습니다.”
유머입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웃자고 만든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 유머 속에 교훈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형식적인 신앙인에 불과합니다. 직업적 신앙인, 또는 습관적 신앙인입니다.
김씨 할머니 집에는 늘 두 분의 할머니가 마실을 와서 놀다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김씨 할머니가 아끼던 개가 죽어 있었습니다. 쥐약을 먹은 쥐를 먹고 죽은 것 같았습니다. 경찰에 연락해서 경찰차에 죽은 개를 실려 보냈습니다. 너무 슬퍼 울고 있는데 이웃집 이씨 할머니가 들어오며 다른 할머니 안부를 묻습니다. “아니 늘 내 앞에 와서 웃더니 오늘은 안 보이네?” “아이고 죽었다네. 마당에 죽어있더라구. 경찰이 실어갔어!” “무에야? 아니 죽었어? 아이고 어떻하나? 갑자기 죽다니 웬 말이여!” 퍼질러 앉아 두 할머니는 한참이나 슬피 울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알려야지. 이러고 있으면 되나?” 이씨 할머니가 일어서자 김씨 할머니가 말립니다. “새끼도 한번 못났어. 아이구 불쌍하지!” 두 할머니가 더 소리 높여 웁니다. 김씨 할머니는 기르던 개를 두고 하는 말이고 이씨 할머니는 늘 놀러오던 앞집 정씨 할머니가 그 집 마당에서 죽은 줄 알고 우는 것입니다. 나중에 둘은 어떤 얼굴로 서로 쳐다보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정씨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왜들 울어? 누가 죽었어?” 소리를 지르니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말”을 합니다. 언뜻 말은 백퍼센트 완벽한 의사전달 수단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말만큼 불완전한 전달수단도 드뭅니다. 앞뒤 정황을 잘 모르거나 말하는 이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같은 말이라도 엉뚱하게 들리거나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봉독한 롬 10:7의 말씀은 구원의 통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믿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줘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언어인 “말”이 의사전달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도구요, 방법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모든 동물 가운데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입니다. 짐승들도 그들만의 언어가 있겠지만 사람만큼 발전된 언어를 갖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데 “말”만큼 좋은 도구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나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로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성공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의사소통 행위과정에는 세 가지 필요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the sender), 둘째는 메시지(message), 그리고 셋째는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the receiver)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외에도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더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 요소는 이 세 가지입니다.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원만히 이뤄지려면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은 경험을 공유했을 때 더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세대 간의 차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경험의 공유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놀고 있는 문화의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문화언어 안에서 놀고 어른은 어른의 문화공간 안에서만 있기 때문에 세대 간의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못하는 법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경험을 함께 하면 더 잘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함께 경험한 문화의 공간에서 복음을 절할 때 훨씬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수용률도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전도라는 말로 쓰이는 ‘이반젤리즘’(evangelism)이라는 말은 그 문화권의 사람을 불러내어 훈련시킨 다음 다시 그 문화권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복음은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 버렸고, 어떤 씨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져 곧 싹이 나와 말라버렸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져 가시에 가리워 자랄 수 있는 기운을 잃었고, 어떤 씨는 옥토에 떨어져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비유는 복음의 씨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많은 열매를 맺기도 하고, 아예 싹을 내지 못하거나 났어도 쉬이 죽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이 비유에서는 씨를 뿌리는 농부가 예수님(또는 하나님)이어서 씨가 떨어지는 ‘밭’만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가 전할 때는 밭(the receiver)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the sender)인 전도자도 문제가 되고, 전하는 ‘메시지’도 생명력 있는 씨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전도자요, 예수님의 복음도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밭에 따라 열매를 맺는 결과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는 우선 전하는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전할 메시지도 분명할 수 있도록 골라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최상의 전도를 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생명력 있는 복음의 씨를 전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복음의 씨가 생명력 있는 씨인가? 내가 먼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확신이 있은 다음에 만든 복음의 종자여야 생명력이 있습니다. 내게 아무런 역사를 일으키지 않은 전도의 내용은 힘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를 하려면 내가 먼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설교학자인 존 스테이플톤(John Stapleton) 박사는 설교자들에게 강변합니다. “Whatever you believe, you have to preach!”(당신이 믿는 것을 설교하시오!) 자기도 믿지 않으면서 남에게 전도하면 이미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당신을 통해 전파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밭에서 거둔 복음의 씨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둘째는 전도자(복음의 전달자)의 적극적 의지입니다. 단순한 전달자가 아닌 반드시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는 자가 받아 드리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한 명령으로 주어진 과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 가족, 친구,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직접 말로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Christ calls us to give a verbal witness to the people around us).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을 가슴에 담고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열심을 냅니다. 하나님은 복음전파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눅 10:16에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자라 했으니 우리는 의지를 갖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전도대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전도하는지 모릅니다. 매일같이 전도지를 들고 나가는 그분들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합니다. “하나님, 저들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기쁘실까요? 저들의 발걸음과 저들의 입술을 축복하소서!” 저는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셋째로 이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설득의 힘도 사랑입니다. 보험설계사들이나 판매사원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표어가 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느냐를 그들이 알기 전까지는 당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다”(Nobody cares how much you know until they know how much you care). 네가 나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나도 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먼저 지극히 사랑하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도 잘 받아드릴 것이고, 사랑과 관심이 없이 메시지만 전하면 듣는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복음의 씨를 심으라” 전도자들에게 주는 표어입니다. 비록 우리가 불완전해도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줄 알면 모든 것을 용서할 것입니다.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마음 밭에 떨어져서 새싹을 돋게 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6.25사변 후 나라 복구에 큰 지도력을 나타냈던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지는 박수무당이었답니다. 무당질하는 그를 너무 불쌍히 여긴 어느 전도자가 진심으로 그에게 다가가 전도를 했답니다. “자식망칠 짓 그만하고 천당 가세요” 마음이 완악했던 박수무당은 전도자에게 폭언을 했습니다. “너나 잘 믿고 천당 가든지 백당가든지 하라. 남의 일에 상관마라.” 그날은 무당에게 재수 없는 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집에 돌아온 박수무당은 전도자의 말이 가슴 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폭언을 했는데도 사랑스런 마음으로 애걸하던 전도자의 말이 귓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결국 이 박수무당은 신당을 정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믿었더니 많은 열매도 거두었고, 그의 아들 백낙준 박사는 미국에 유학을 가서 학위를 하고 연대총장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역사적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하시는 하나님으로 가까이 가십니다.
마리아(Maria)라는 젊은 아프리카 여인이 미국에 왔습니다. 그녀는 늘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가 방문 중인 교회의 전도 전략회의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 회의에서는 팸플릿 만들기, 여러 가지 선교 사업들, 캠페인, 등등 많은 것들을 논의 했습니다. 한참 논의한 후에 어느 교인이 앙골라에서 온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앙골라 교회는 어떻게 전도를 하나요?” 그때 마리아는 말했습니다. “우리 앙골라 교회는 전도할 때 팸플릿을 나누어주거나 캠페인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도하고자 하는 마을에 한 두 가정을 이사를 시킵니다.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사랑하면 저절로 마을 사람들이 예수 믿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사랑입니다. 가슴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받아드릴 준비가 됩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파될 때에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여름철 휴가 기간에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이 직접 전도해야 합니다. 용기를 갖고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얼마나 전도를 하시는지 하나님은 지켜보며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꼭 전도하는 여름휴가가 됩시다.
누가복음 10:13-16 강해
눅10:13-16 / 은혜바라기
너무 지명에 의미를 두지마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에 집중하세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사람들이 절대 회개하지 않는 것을 설명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회개를 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회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단 1%만 존재해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고 그 1%의 가능성을 가지고 구원의 계획을 짜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반성과 회개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죠. 부모의 지갑에서 1만원을 도둑질한 학생이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울며 뉘우치는 것은 ‘반성’입니다. 그리고 그 반성을 계기로 그 학생은 좀 더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학생을 ‘변했다.’ 라고 칭찬을 해죠. 그러나 이런 ‘뉘우침과 변함’은 회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 뿐 아니라 타 종교나 학교,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반성은 회개를 설명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무수히 많은 반성을 하면서 살아가죠. 반성은 인본주의 악에서 인본주의 선으로 돌이키고 뉘우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반성은 '나'를 기준삼죠. 나를 기준 삼는다는 말은 인본주의를 기준삼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인본주의 자체를 벗어나 신본주의를 기준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만 소망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에서 보면, 인본주의를 ‘악’ 그 자체로 여깁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이 하나님 없이 그들 스스로 법과 질서를 만들어 ‘행복(천국)’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인류가 기준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죄’의 의미는 ‘과녁에서 벗어나다’입니다. 과녁이 바로 ‘하나님’이시죠.
인간은 그 스스로 인본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과 기적으로 설명하고 설득을 해도 결국 인간이기에, 죄인이기에 인본주의 안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뿐이죠. 그래서 외부에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깨우셔서 복음을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 예수님의 시야와 귀를 공유하여 인본주의와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16절에 나오는 ‘너희 말을 듣는 자’ 라는 뜻은 ‘복음을 알아 듣는 자’라는 뜻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후 너희 말을 저버리는 자는 나를 저버리는 것이고 나를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하시죠. "복음을 알게 된 나= 예수님=하나님"의 공식이 됩니다.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원리는 복음의 주요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절대 이 세상의 논리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이 세상의 논리로 '정의'내리는 순간 모두 이단이 됩니다. 그 이유는 상징, 그림자, 표지판은 그 실체를 완벽하게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실체이신 예수님을 설명하기 만들어진 상징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논리'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100% 완벽하게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100% 다 이해해서 100점을 맞아야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다시 '복음 해석' 이라는 행위로 또 다른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예수님 우편의 강도는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 옆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시는 것에 달려 있구나~~' 라는 고백 한마디에 천국을 보장 받은 자가 되었죠. 이 짧은 고백 안에는 모든 구원이 나의 행위 혹은 인본주의 기준(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기준(선택, 기억)에 달려 있다는 중요한 복음의 원리가 들어 있죠.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은 '의미적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이 나를 선택하셔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가 된 것이죠. 그리고 그 현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시야과 귀를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이 보이고 들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모든 시작과 기준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심판을 경고
눅 10:13-16 / 매원감리교회
사랑의 종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용서의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무한대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용서를 넘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종교
그러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만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용서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심판도 함께 이야기합니다. 즉,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의 종교이기는 하지만, 심판의 종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해서 화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지역은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푸신 지역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많이 선포된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화기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응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그곳에 화가 있다는 것은 결국 마지막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분명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회개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로와 시돈이 회개하였으리라
눅 10:13-16 / 염소아빠
앞서 예수님은 70인의 제자들을 보내며, 영접하는 동네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신발의 먼지를 털고 다른 곳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이어 나온 오늘 본문은 구체적인 마을 지명을 언급하며 진정으로 복음을 영접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마을 ‘고라신’은 ‘나무가 많음’이란 뜻의 가버나움 북쪽 약 3㎞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서북쪽에 있는 지중해 연안 대도시인 두로와 시돈으로 가는 도상에 있는 마을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즉, 요단강물이 갈릴리 호수로 유입되는 입구 인근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 지대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마을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고(누가복음 9:10), 또 맹인의 눈을 치유해 주기도 하셨습니다(마가복음 8:22).
이들 마을은 모두 가버나움 지역에 속한 곳인데,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이기 때문에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곳 두 지역 주민의 불신앙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마을과 비교하여 이방인 지역이었던 두로와 시돈을 비교하여 언급하셨습니다. 이곳에서 가버나움과 같은 큰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그들이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큰 도시였지만, 이방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던 곳입니다. 복음서에는 수로보니게 출신의 한 여인이 겸손함으로 예수님께 나와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시도록 간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수로보니게도 두로와 시돈과 마찬가지로 페니키아에 속한 이방지역입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조차도 그녀를 이방인이라고 강하게 언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마가복음 7:26-29)
그러나, 간절한 바람으로 복음을 전하셨던 가버나움 보다, 이방인으로 구원에 속하지 못할 것 같은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더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의 복음은 의외의 사람들에게 역사합니다. 죄가 가득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큰 빛이 되지만 때때로 의롭고 정의로운 사람들에게는 거절당하고 외면당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복음의 속성, 즉 회개의 고백이 먼저 이뤄져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스스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역사하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자격이 없고 죄인이라고 인정한 이들에게는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 됩니다.
이는 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구원의 소망이 간절할 때, 주의 복음은 그 속에서 빛이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룩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의 거룩한 복음은 그와 아무 상관이 없어집니다.
죄된 나의 본성을 인정하고 구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할 때 복음은 내 안에서 역사합니다. 회개는 주의 백성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입니다. 간절한 회개 위에 주님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주께서 부족한 자를 도우시고 가난한 심령으로 날마다 주께 무릎 꿇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죄의 본성에 굴복하는 자가 아니라,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를 바라보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마디: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아멘.
책망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눅 10:13-16 / 아름다운 설교자
어떤 아버지에게 공부를 못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아들이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전 과목 ‘가’인데 단 한 과목만이 ‘양’이었습니다. 평범한 아버지 같으면 이런 성적표를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놈아, 이것도 성적이라고 받아 왔냐! 넌 누구를 닮아서 이리 돌대가리냐” 라고 호통을 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표에 화를 내기는커녕 이렇게 격려해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아 너무 한 과목에만 집중적으로 공부하지 말거라”
격려와 칭찬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굉장한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격려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의 원동력은 격려에 있다. 사람은 한 번의 칭찬과 격려로 2주 동안 넉넉히 살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칭찬과 격려가 있으면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는 격려와 칭찬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책망도 필요합니다. 잘못을 했을 때는 책망도 받아야 합니다. 격려와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힘도 납니다. 하지만 책망을 받으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분명 책망을 받는 것은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닙니다. 어떤 책망이든 그 책망을 받고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책망은 누구나 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망할 수 있는 자리나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나에게 책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아오시면 누구에게 책망을 제일 많이 받으셨습니까? 직장생활을 하신 분은 직장 상사에게도 책망을 받으신 적이 많은 분도 있겠지만 가장 많이 책망을 받은 사람은 아마 부모님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잘못을 안하고 성장하신 분들은 책망을 많이 받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은 누구에게 제일 책망을 많이 하셨습니까? 아마도 자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모가 자식을 책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식이 망하라고 책망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식이 정말 미워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 되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책망속에는 부모의 아픈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남의 아이가 아무리 잘못해도 그 아이를 잘 꾸짖거나 때리지는 않습니다.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대했던 자식이, 잘할 줄 알 던 자식이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부모님은 더 아픈 마음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도 착한 아들에 속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 형이 어머니 속을 좀 상하게 해서 저는 그것을 보고서는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책망을 듣지 않는 것은 아니구요. 가끔씩 책망을 들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책망을 들으면 기분이 정말 별루더라구요. 특히 칭찬만 듣다고 책망을 들으면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자식의 자리에 있을 때는 부모님의 마음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저도 자식을 놓고 키워보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관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직장 상사에 책망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선배한테도 책망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그 사람이 밉고 싫어서 책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는 정말 사랑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목사님들 모임에서 어느 듯 나이는 젊지만 제일 오래 공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희 스승목사님이 그래서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십니다. 그러데 혹 가다가 호되게 책망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 앞에서 그렇게 책망을 받을 때는 속상하더라구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스승 목사님의 그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느껴지니까 너무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책망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장면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아픈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주 무대는 이스라엘 땅이었습니다. 가끔씩 이방지역으로 가신 적이 있으시지만 대부분 이스라엘땅에 머무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땅에서도 전국을 다니면서 사역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집중적으로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몇몇 도시를 중심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로 유월절 때 올라가시고 죽기 위해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은 주로 갈릴리지역과 그 지역에 있는 도시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역을 많이 하셨다는 것은 그 곳에서 주님의 권능을 많이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지역 가운데 대표적으로 주님이 많이 사역하셨던 도시가 고라신과 벳새다 였습니다. 가버나움이었습니다. 특히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을 가지고 많은 사역을 했던 이 도시들이 주님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 책망하십니다. 13-15절까지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고라신과 벳세다는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습니다. 겸손해야 하는 오히려 교만합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다 못한 주님은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책망하십니다.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에게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서 회개 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심판하신 소돔에 그 권능을 행하였다면 소돔성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심판 날에 이르면 두로와 시돈이 소돔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그냥 겉으로만 읽으면 정말 주님이 그들이 다 망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망가운데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아픈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좀 말씀 드린 것처럼 어느 부모가 자식이 망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뒷바라지 하고 기대했던 자식이 망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이 책망을 받고 다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 하고 다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그 만큼 사랑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일곱교회에 편지를 쓴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일곱교회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칭찬만 받은 교회가 두 교회가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하고 빌라델피아 교회입니다. 우리 아름다운교회도 하나님께 칭찬만 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나머지 다섯 교회는 칭찬 받은 부분도 있지만 책망을 받은 부분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머지 다섯교회에게 책망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사랑하지 않으면 책망도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27:5-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을 보면 숨은 사랑보다 대놓고 책망하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곧 그것이 상대를 향한 더 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잠6: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책망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때 그것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책망이 결국 나를 생명의 길로 나가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보이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 얼마든지 받아 주실 있는 넉넉한 가슴을 가지고 계십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아주시는 아버지를 보십시오. 그 아들이 거지꼴로 하고 돌아오는 데 그것을 알아보고 달려갑니다.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에게 꼴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다시 돌아왔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준 유산은 다 어디에 썼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아무런 말없이 그 아들을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고 우십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웁니다. 새 신발을 신깁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잔치를 베풉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을 듣고 회개 하며 돌아오는 사람을 너무나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주십니다.
북이스라엘 왕가운데 가장 악한 왕을 뽑으라면 아합왕입니다. 아합왕은 이방여인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우상의 나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는 국가에서 녹을 주면서 돌보았습니다. 한 번은 이런 아합왕에게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그 때 아합이 하나님의 책망에 두려움이 느꼈는지 그는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회개하며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셨던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9) 그렇게 악한 왕이었던 아합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내 앞에 아합의 겸비함을 보느냐고 하시면서 재앙을 아합의 시대에는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을 이렇게 좋아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돌아갈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내 치신다고 해도 우리가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때 속히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두 번째로는 버티는 사람입니다. 돌이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시고는 돌이키기를 기다립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에 도달하시면 매를 드십니다. 우리가 아들한테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말로 해서 않들으면 매를 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매의 강도는 돌아오지 않는 만큼 세집니다. 사업을 망하게 합니다. 가족을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합니다. 그 사람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사사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그렇게 명령하셨는데 우상을 섬깁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이방나라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 나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에게 채찍을 드십니다. 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고 그들은 잘못했다고 회개합니다. 회개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또 사사를 보내서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때 그냥 돌이키는 것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한 대 맞고 돌이키는 것이 좋으십니까? 그냥 돌이키는 것이 좋습니다. 맞으면 많이 아픕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책망 받지 않는 것입니다. 책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칭찬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잘못을 해서 책망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고 책망을 받을 일을 했으면 당연히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책망을 하나님의 사랑인줄 알고 빨리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그러면 더욱 하나님께 충성하셔야 합니다. 헌신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더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책망을 받으셨습니까? 그 책망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줄 알고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따뜻한 품에 안아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책망이 나를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인줄 알고 그 책망을 통해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