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용담(龍潭)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지금 화두가 성성여여하고 잠을자나 깨어있으나 한결같으며 마음이지극히 고요하고 적막한가운데 화두의 의단만이 충만하여 마치 백척의 장대위에 서있는듯 합니다만 이것이 부처의 경지입니까?"
그러자 용담이 답했습니다.
"거기서 허공을 향해 진일보(進一步)해야지!"
<허공을 향해 진일보하라!>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이때의 허공을 마음이 상상하는 일체가 없는 공간으로 그리고 앉아있으면 다시 생각(마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니 허공은 본래 자유함입니다.
아무것도 거칠게 없고 걸리는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담의 대답은 바로 그런것도 <버리고 넘어서라>란 말인 것입니다.
즉 다시말해서 그어떤 대단한 경계라도 다 제가 애써서 만든틀이자 그의도된 에너지와 기운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모두가 바로 창조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동안 너무 그능력을 그저 문제를 만드는데만 써왔던 것입니다.
<해탈의 경지가 있다는데 그게 대체 어떤 느낌과 체험의 경지일까?>하고 말이지요.
제주변에도 지금 잠을자나 꿈을꾸나 생시에나 일관된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그것자체가 되어야 비로소 해탈이라느니 사후의 세계를 임의로 다녀올수있어야 해탈이라느니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느니 하는 각종 견해를 가지고 거기에 매여 깊은 산골이나 토굴에서 그무엇인가를 찾아 달성하려고 수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대단한 경지를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백척간두진일보>의 소식입니다. 그런것들은 오랫동안 마음을 이용해 쌓아올린 숙련된 기술이자 새로운 습성이지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본래부처>라면서요.
본래부처라면 본래우리안에 있는 성품이란 얘기인데 우리들안에 본래 잠안자고 늘상 깨어있는 능력이나 오매일여(무엇이 매한 상태이냐 아니냐도 우리들이 만든 분별일뿐이다)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그런얘기들이 다 쓸데없이 전문가집단(?)이 만든 권위적인 우상에 불과하다 이말입니다.
깨달음이란 단지 자기가 본래 누구인가를 아는것일뿐입니다.
그래서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참자기>를 보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참자기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어떤 경지나 상태나 느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경지나 상태나 느낌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자는 과연 또 누구란 말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깨달은자는 이래야 한다>에 속아왔습니다.
그것역시도 틀이자 생각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제약입니다. 그것을 벗어던지는 것이 바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소식>입니다.
참으로 깨달음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대와 우리들이 만든 <깨달음의 환상>을 내어버리십시오.
그대자신의 본래자유로움을 아는 것이 참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나아가서는 깨달음이란 우리들의 생각이 만들어낸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와지는 것입니다.
수만년전에는 <깨달음>이란 생각 개념조차가 없었습니다.
마치 백미터달리기란 게임이 그땐 없었던것을 지금 우리가 만들어놓고 누가 세상에서 제일 빠르냐고 떠들고있는것과도 같단 말이지요.
그것을 인간이 만들어내었기에 어던선사가 <석가>가 눈앞에 있으면 찢어죽이겠다고까지 말한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이란 그저생각일뿐이라고 여기면서 돌아서는게 깨달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생각안에 갇히는 번뇌망상일뿐입니다. 그생각으로부터도 다시또 진일보해야지요. 그때 과연 거기에 무슨 경계가 나타나겠습니까?
깨달으면 의문의심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왜없어질가요? 모르는게 없어지기때문에? 웃기는 얘기입니다. 그럼 깨달은자를 데려다놓고 그대집숟가락이 몇개인지 물어보십시오. 과연 알아맞출까요? 그게 아니라 의문의심의 본질이 바로 생각이자 번뇌망상임을 알므로 더이상 그런 기운에 끌려가지 않는다 이말입니다.
생각이 일체 끊어진자리란 소리는 생각이 전혀일어나지 않는 자리란 얘기가 아니라 생각이 일어나든 아니든 더이상 생각이 나를 끌고다니며 지배하지못하는 부동의 자리란 얘기입니다. 비단 어디 생각뿐이겠습니까? 느낌과 감각 혹은 상상에서 일어나는 모든것도 다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여기에서도 금강경의 핵심이론인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相이란자가 구체적인 형상물체를 뜻하는 像자를 쓰는것이 아니라 그저 대상이라는 뜻의 相자를 사용함에 주의 하십시오.
일체의 감각이나 생각 상상이나 느낌을 다 쉬어야 합니다.
그래서 쉰다는 상념마져도 쉬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거기엔 상쾌하고도 늘 푸르며 무한한 허공과도 같은 생명의 본래기운인 평화와 지복의 의식(일반의식)도 아니요, 무의식도 아닌 그자리가 드러날것입니다.
한번 그자리가 자기내면에서 드러나면 그것은 다시는 잊을수도 사라질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본래 우리요, 지금의 우리는 그저 그것이 나타낸 일시적인 그것의 파도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것을 스스로 알게되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에 확고하게 머무르십시오.
첫댓글 드넓은창공님 좋은곳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