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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43
“산사.. 소용을 산사로 보내시겠다구요?”
“그렇게 심각할 거 없어요, 게다가 그게 최선책이구요.”
“마마, 외람된 질문일지.. 모르지만.”
“........?”
“소용에 대한 일은 사실대로 폐하께 고하시는 것이.. 그리고 이제 마마께서도 황후가 되셨으니 직접 회임을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언주의 물음에 은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낳고 싶지 않다, 고 즉각 입에서 튀어나올 뻔 한 말을 억지로 다시 구겨 넣는다. 그것이 모든 것을 저버리고 저를 선택해 준 우겸에 대한 예의다, 라고 스스로의 머릿속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황제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소용이 아니라 그 누가 낳은 아이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게 해 줄 명분만 되어 준다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보단,”
“........?”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존칭은 빼고 예전처럼 하자구요. 낯간지러워.”
하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언주를 향해 은이 눈초리를 세웠다. 언주는 난감해하며 손가락으로 문 밖의 장 상궁을 가리키는 시늉을 한다. 은이 장 상궁을 향해 잠시 주위를 물려달라는 명을 내리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래서, 언니 도움이 필요해요.”
“뭐든지.”
“오랫동안 믿고 맡길 수 있을만한 공녀들이 여럿 있었으면 해요. 여러 가지 일에 도움이 돼야 하니까 입이 무거워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그런 거라면 이미 줄 서 있는걸.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그 아이들이 저를 맹신할 수 있도록 당근을 쓰는 것도 좋겠죠?”
“당근?”
“그런 게 있어요.”
은이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자 언주도 따라 웃는다. 그 뒤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두 사람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건 그렇고, 언니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좋은 일?”
“얼굴이 예전이랑 달라서, 활짝 핀 것 같기도 하고.”
“좋은 일은 무슨.”
언주는 손을 내저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은에게 말해야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지금은 조금 갑작스럽겠지만 역시 운을 떼 놓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기, 있잖아,”
“뭔데요.”
“실은,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눈여겨보는? ..남자요?!”
“알아 알아. 가능성 없는 일 인거. 혼자서만 좋아하는 건 상관없잖아.”
“그게 누군데요-”
“그건 조금 더 나중에 말해줄게. 난 이만 가봐야겠어. 상궁이 경을 치려고 할 거야.”
언주는 은이 되물을 시간도 주지 않고 서둘러 일어났다. 은은 그런 언주를 부러 붙잡지 않았고, 대신 발갛게 볼을 붉히던 모습을 상기시키며 낮게 웃었다. 언주는 돌아갔고, 장 상궁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마마, 황제궁으로부터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뭐라시던가.”
“저녁 만찬은 황제궁에서 두 분 황후마마를 모시겠다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단지 저녁을 함께 먹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유별나게 반응하는 제 마음이 한심스러워 헛웃음도 났다. 공식 석상 이후로의 첫 대면. 은은 편히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하온대, 마마. 방금 다녀간 저 아이, 정말 믿을만한 아이옵니까.”
“믿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사이지. 왜 그러는가.”
“단속을 해 두셔야겠습니다. 대낮에 궁 한복판에서 깔깔대며 잡답이라니요.”
“그랬는가. 잡담 정도는 이해를 하시게.”
“상대가 문제이지요. 감히 지원 나으리를 상대로, 경망스럽질 않습니까.”
은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원? 황제궁의 그 ‘지원’말인가.”
“기회가 되시거든 한 번 불러다 엄히 야단을 치십시오, 마마.”
뭐, 할 이야기가 있었을 테지. 은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여러 가지 상황과 말들이 마음에 걸렸다. 은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아닐 거야. 언제부터 예감이 그리 잘 맞아 떨어졌다고.
“실은,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貢女 奇皇后//
“변방의 사업은 어찌 되어가고 있소.”
“순조롭습니다, 폐하. 다만, 요 근래 큰 비가 내려 축성중인 벽의 일부가 무너지는 손실이 있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만, 염려하실 만큼은 아닌 것으로 사료됩니다.”
“어찌 되었든 손실이 있었다면 충당해야 할 비용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오.”
황제는 신중하게 진 대인의 보고를 받는다. 늘 영토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이 대륙에서 원의 영지(領地)를 지키기 위한 사업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곧 보고가 있을 줄로 압니다. 폐하.”
“보고 이전에 미리 자금을 확보해 두도록 하시오. 아울러, 좌승상이 장을 맡고 있는 일이니 직접 걸음하여 상황을 보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명 받들겠습니다. 하오나 폐하, 현재까지 방어벽에 충당된 자금도 빠듯하게 모아진 상황이라 이 이상을 확보하기엔 어려움이 따를 듯하다는 점을 미리 아뢰옵니다. 그러나 염려보다 가벼운 손실일 수도 있으니 너무 괘념치는 마십시오.”
“국방 사업을 모두 좌승상에게 일임하였는데 자금 사정을 운운하다니, 운영에 문제가 있는 것이로군.”
“면목 없습니다, 폐하.”
흐흠. 황제는 탐탁지 않다는 듯한 헛기침을 내려놓았지만 더 이상의 책언은 하지 않았다. 공적인 업무에 대한 몇 마디 대화만을 끝으로 진 대인은 곧 돌아갔다. 이제 사사로이는 황실과는 사돈지간으로 부공(婦公)이 되었으니 사적인 몇 마디 정도는 예상했건만 마치 의식이라도 한 것처럼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속내 역시 전과 다름이 없을지는 알 수 없었다. 황제 자신도 서궁에는 아직 들르지 않고 있었으니.
“폐하, 두 분 황후 마마께서 이미 도착하셨다 하옵니다.”
“만찬을 잊고 있었군. 서두르거라.”
...
은은 애써 꾸민 모습을 보이기 싫은 마음에 최대한 수수한 차림을 택했다. 특이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저녁 만찬은 황제와 ‘정후’라 일컬어지는 그녀와 저, 셋 뿐일테니 누구 보기 좋으라는 듯 공들여 치장을 할 필요도 없다 생각했다. 그 선택은 옳았고, 소홍의 생각 역시 그러했다. 황제궁 앞에서 단출한 차림의 소홍과 마주쳤을 때, 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간단한 목례를 건넸지만 소홍은 반가운 기색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동등한 황후끼리의 만남이었는데도.
“며칠 되지 않았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뵙는 기분이군요.”
“네.”
식탁 앞에서의 형식적인 대화. 황제가 없는 빈자리를 메운 어색함은 은 혼자서만 의식하고 있는 것인 양, 소홍의 얼굴은 빛이 나고 생글생글한 웃음에서는 생기가 넘쳤다. 은은 크게 동요하지 않으려 했다. 만찬에 늦어버린 황제가 들어서기까지 위엄을 갖추고 차분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켰다.
“본의 아니게 늦어버렸구려.”
곧 나타난 황제는 머쓱한 사과로 자리에 앉았다. 곧 상궁들이 훌륭한 음식들을 가지고 들어와 세 사람의 주인공 앞에 가지런히 식기들을 나열한다. 그런 과정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은은, 황제 앞의 식기들이 유난히 적게 채워져 있음을 깨달았다. 상궁들의 실수라고 여긴 은이 그녀들을 불러 세우려 하자 소홍이 뭔가 눈치를 챈 듯 은의 팔에 손을 얹었다.
“폐하께서는 저녁은 꼭 소식하시는 습관이 있으시답니다. 그렇지요, 폐하?”
소홍이 황제에게로 눈웃음을 친다.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소.”
황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그 후에는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딱히 아무런 대화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분위기. 은은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소홍을 의식하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내명부 식구들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후궁을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시었소. 부지런도 하시구려.”
“외람된 말씀이오나, 가끔은 후궁들을 청하여 차라도 함께 즐기시는 것은 어떨는지요. 더불어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소용’에 관한 일이옵니다만, 심신이 안정치 못한 탓인지 태의들이 다녀갔는데도 약이 듣질 않는다고 합니다.”
“태의의 약이 듣지 않는다니.”
“황공하오나 폐하, 그 모든 것들이 ‘소용’이 공녀 출신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음험한 비리인줄로 압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군.”
“실로 고려 출신의 공녀들을 향한 대접이 짐승을 대하는 것과도 같사옵니다.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처우를 개선하여 주신다면 그들에게는 생애의 광영이 될 것입니다.”
“태감과 논의하도록 하겠소.”
“하여,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용은 신첩이 대도 가까이의 작은 산사에 청해 조섭을 보냈으면 하오니, 부디 은정(恩情)을 내려주소서.”
“벌써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쓰셨단 말이오.”
“폐하의 은혜를 입은 이들인데 어찌 외면하겠습니까.”
황제가 잠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황후의 청을 내 어찌 외면하겠소.”
황제가 은의 어투를 따라하며 웃어보였다. 은의 뇌리에서 이미 소홍의 자취는 사라지고, 마치 황제와 둘만 있을 때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 어려울 것이라 생각지 않았지만, 자신의 청이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 은은 안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홍의 앞에서 주고받은 황제의 미소가 더욱 가슴을 부듯하게 만들었다. 다시금 수저가 오가는 사이, 이번엔 소홍이 황제를 향해 가볍게 묻는다.
“하온데 폐하, 정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약속을 어기시지 않는 분께서 만찬에 늦으시다니요.”
“좌승상과 논의가 길어져 그리 되었소.”
“혹, 변방의 성벽을 축조하는 일로-”
“그렇소.”
“그 일로 아버님께서도 늘 골머리를 앓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그 일로 심려하실 것을 늘 걱정하고 계시지요.”
“그랬구려.”
“신첩이 도울 일은 없겠나이까, 폐하.”
“다행스럽게도 아직 황후의 손을 빌릴 정도는 아니니 걱정 마시오.”
황제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화를 끝맺으려 하자, 소홍이 다시 덧붙였다.
“신첩이 대외의 일에 관해 아는 바가 적지만, 그런 일에 대한 문제라면야 응당 비용에 관한 것이 아닐는지요. 자금의 일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아버님께 말씀드린다면 더 이상의 국비를 마련해야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말인 즉슨, 진 가문이 소유한 재력으로 충당하도록 돕겠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가볍게 웃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소만, 이 일은-”
“외척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제가 폐하께 힘이 되어드리려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가야 하는 땅을 지키는 일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말만으로도 고맙다는 뜻을 전하며 황제는 웃었고, 소홍 역시 기쁘다는 듯 미소 짓는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서 은은 저도 모르게 수저를 든 손이 한참 동안이나 멈춰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 역시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었지만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음식이 모두 식겠습니다. 어서 드세요.”
은이 다시금 수저를 들기 전 마주친 소홍의 친절한 눈웃음에서 불현듯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황제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한 요구와 요청이 전부. 그리고 소홍이라는 이름의 그녀가 황제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거대한 권세와 재력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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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현- 님★ 은이 소홍에게 가지는 감정은 열등감이 딱 맞는 것 같네요. 은의 감정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요.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0-저게 바로 있는자의 여유가 아닐까싶네요;;;;;부럽다 ㅠㅠ근데 은이가 좀...ㅠㅜ
까불지마ㅋ 님★ 있는자의 여유ㅎㅎ 재미있네요. 소홍과 은의 신경전, 앞으로도 계속 됩니다.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나중에는 아이에 대한 은의 생각이 바뀌길 빕니다ㅠㅠ 또 은이 우겸때문에 언주랑 사이가 나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텐데요;
Tiare★ 님★ 아주 많은 문제들이 은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네요. 말씀하신대로 나중엔 은의 생각이 바뀌게 될지- 다음화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언제 오시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ㅎㅎ 은이가 소홍이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ㅠㅠ
유리별미곰 님★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생각대로 글이 잘 풀리지 않네요. 이어지는 은과 소홍의 이야기도 꼭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오랜만이어요^^ 소홍은 현명한 여자네요 굳이 험악한 상황 만들지 않아도 은에게 압박을 주니;; 설마 은이 가만가만 당할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다음화 기다릴게요~~
헤르티아 님★ 소홍이 의도한 거라면 나쁜거겠지만,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너무 얄미운 상황이 되어있네요. 은이 어떻게 대처하게 될지, 계속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별이 님★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