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찬송가 279장 (구 337장) / 로마서 7 : 7 - 13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279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7장 7절 – 13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우리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깨달음이 있다는 점입니다. 또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의 차이점도 깨달음의 정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깨달음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현대의 가장 큰 불행은 깨달음의 상실에 있습니다. 느낌으로 살아가고,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속적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의 텔레비전이 그렇게 만들고 있고, 너무도 바쁜 현대의 생활이 우리를 마치 채 바퀴 속에서 살아가는 다람쥐처럼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은 율법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구약 시대의 율법을 가지고 논하느냐 하면서 도리어 따집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 한국에 있는 성도들 중에는 율법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율법이 우리들과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구약성경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율법에 얽매여 산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율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크게 세 가지의 이유로 주셨습니다. (1)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있는 말씀대로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주신 것은, 율법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율법을 보면, 사실 나는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도 없고, 천국에 갈 만큼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주신 첫 번째 목적입니다.
(2) 두 번째 우리에게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내가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7장 7절 말씀에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 평소에는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율법으로 우리는 나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우상을 섬기고 있구나. 내가 미워하는 죄를 짓고 있구나. 내가 부모를 섬기지 않고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3) 세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하라. 하지 말라.” 두 가지의 형태로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가르쳐줍니다. 시편 119편 105절 말씀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등과 빛은 우리를 환하게 비추어 앞을 보게 해주는 율법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 율법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은 우리들을 정죄하고,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주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회개를 깊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멀리하는 사람도 잘못이고 그렇다고 율법으로 주님을 대신하는 사람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율법일 뿐 복음이 아니며 주님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한계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는 다 나의 옛 사람에게서 비롯됩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사람이 죽을 때 나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내가 살면 주님이 죽고, 내가 죽으면 주님이 삽니다.
(1) 그러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활의 문제점은 바쁘다 보니 생각하는 것이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매일을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생각까지 한다는 것은, 더 골치 아픈 일입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한다고 무슨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책을 보는 사람들이 드뭅니다. 성경도 깊이 연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설교를 해도 축복이나 말해야 겨우 아멘, 아멘 하지 조금만 어려운 얘기를 해도 따라오지 못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위해서는 아무리 바빠도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깨달음이 없다면 동물처럼 느낌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권력투쟁입니다. 왜냐하면 권력을 가지면 영광을 가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린이란 작가는 “참 영광은 권력과 관계가 없다. 영광은 자아성취와 사명의 완성에 있다.”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술주정뱅이라고 놀리는 호세라는 신부의 죽음에서 참 영광이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참 놀라운 것은 바로 살겠다고, 신앙인이 되었으면 생각하면서 살고, 책을 읽으면서 깨달음을 가져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성경을 안 읽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독서를 안 하고, 더 깊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지도자가 될 수 없고,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기독교는 망합니다. 우리는 복을 받지 못합니다.
(2) 그래서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근본적 변화는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깨달을 때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바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나의 죄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3) 그러므로 나는 죽고 주님이 살 때,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한즉 죽음을 낳느니라.” - 우리의 문제는 자기의 주장에서 비롯됩니다. 이기주의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사람이 죽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어야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믿음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의 간격을 좁혀주고, 과거를 현재로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루를 살더라도 동물처럼 깨달음과 생각이 없이 살지 말고, 힘들고 괴롭더라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고 말한 데칼트의 철학이 현대철학의 시작이었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오늘을 바로 살수가 있습니다. 영어의 thank(감사)란 단어와 think(생각)란 단어는 서로 연결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는 생각할 때 일어납니다. 깨달을 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셨는지 생각하고 그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주님이 사는 나의 삶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와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