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천주사가 어디인가?
날씨가 점점 더 무더워지면서 걷기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일요일에 집 안에 머무는 것도 편안하지 않다. 습하고 눅눅한 공기가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이다.
걸음을 조금만 걷고 찾아갈 수 있는 절이 없을까. 얼핏 떠오르는 절이 경주의 천주사 터이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안압지의 바로 곁이라고 하였으니, 안압지라면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멀지 않다. 우리집 안주인더러 천주사지를 말했더니 좋다고 했다.
경주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안압지까지 걷기로 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천막을 치고 있어 내려쬐는 햇볕은 없다. 정류장에서 출발하여 서봉총으로, 바로 그 앞에 있는 천마총을 둘러보고, 첨성대를 지나면 곧 이어 안압지 주변의 연밭이 나온다. 요즘 경주에 와서 시내버스를 타면 거의가 안압지 둑과 연결된 연밭 옆을 지난다. 흰꽃, 붉은 꽃의 연꽃이 활짝 핀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아내는 들리고 싶어했다. 오늘은 그 연밭을 거쳐 안압지로 가기로 했다. 꽃이 아직도 피어 있을까.
우선 노서동과 노동동에 걸쳐 있는 대릉원공원으로 갔다. 햇볕도 없고, 거리도 가까운데 땀이 줄줄 흐른다. 예전에는 집과 릉이 뒤섞여 있었는데, 지금은 민가를 모두 없애버리고, 능들만 모여 동네를 이룬다. 능 사이 길로 아마 신혼 여행을 오지 않았나 싶은 젊은 부부들이 걸어다닌다.
전에는 금관총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이름을 서봉총으로 바꾼 능묘가 대릉원의 중심 역할을 한다. 일제강점기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경주를 방문했다.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황태자에게 여행 기념물로 제공한 것이 이 능묘의 발굴권이었다. 여기에서 엄청난 보물이 나왔다. 우리 교과서에 반드시 실려 있는 신라 금관을 발굴했다.
이때, 내 친구의 아버지가 황태자를 도와서 발굴에 참여했다. 나중에 황태자가 스웨덴 황제가 되고 나서, 친구의 아버지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스웨덴 왕립 고고 연구소에 와서 공부 할 의향이 없느냐고 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나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으니, 내 아들을 보내면 안 되겠느냐고 하여, 친구의 형이 스웨덴에 가서 고고학을 공부했다. 내 친구도 미국에 가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와서 교수가 되었고, 한국 고고학회 회장까지 했다.
1962년에 팔공산의 대율리에 제 2 석굴암이 발견되었다고 떠들썩 했다. 가을이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동아대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대율리에 머문다면서, 친구가 나더러 가보자고 했다. 경주서 새벽 기차를 타고, 봉정역에 내려 벼가 누렇게 익은 가을 논둑길로 제 2 석굴암까지 걸어갔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서봉총 앞에 서니 그떼 일이 새삼 떠오른다.
여기서 길만 건너면 천마총이다. 계림로를 걸어가서 천마총으로 가려면 꽤 멀다. 어쨌거나 들리기로 했다. 천마총이 있는 여기는 미추왕릉 지 이다. 미추왕이 경주 김씨의 시조이니 바로 앞에 어머어마한 제실이 있다. 이곳은 그때도 비교적 잘 다듬어져 있었다. 지금은 계림로를 높은 담으로 막아 놓았지만, 예전에는 숲속에 작은 오솔길도 있었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계림로에는 그 유명한 황남빵집이 있었다. 허름한 집의 빵집이었지만 우리들 학생은 주머니가 얇아서 감히 거기에 들어가서 빵을 사먹을 생각을 못했다. 계림로를 발굴하면서 차륜형 토기 등 국보급 유물이 쏟아져서 또 유명해진 명소가 되었다.
계림로 입구에 이르니 ’쪽샘‘이라는 간판과 안내문이 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경주 쪽샘 골목의 입구이다. 집 사람은 또 안내문을 열심히 읽는다. 꾸불텅꾸불텅한 골목길이 거의 첨성대에 이르도록 이어지는 긴 골목이다. 이곳은 작부를 둔 막걸리 집들이 밀집해 있어 유명한 길이다. 나는 청년시절에는 경주에 머물지 않아서, 술집 추억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긴 골목은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 쪽샘 골목이라는 말이 나오면 아는 척 한다.
계림로에서 팔우정 로타리에 이르는 땅은 경주의 대표적인 주택가였는데. 지금은 집이 한 채도 없다. 팔우정에서 인왕리를 거쳐 청섬대에 이르는 골목길도 꽤나 길었는데, 지금은 황량하다. 땅도 고르지 않고 황량하게 둔 것으로 보아서 발굴을 기다리나 보다.
입구에서 천마총까지 걸어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예전에 답사를 여러 번이나 왔다. 그럴 때마다 한달음에 다니던 길인데, 오늘은 거리가 짜증스럽다. 나이보다는 날씨 탓으로 돌려보지만------, 집 사람은 벌써 몇 번 째로 경주의 관광지에 와서 관광을 온 사람을 보니 우리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어쨌거나 천마총의 유물을 둘러보면서, 그리고 집사람에게 설명을 해주면서 힘이 들더라도 잘 왔다는 생각이다.
나무 그늘에서 쉬기도 하면서, 이제는 우리의 목적지인 천주사 터를 찾아가기로 했다. 안압지 아래의 연밭에는 연꽃이 아직도 피어 있었다. 해바리기 밭도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꽃의 밭도 있었다. 인터넷의 안내문에 연밭이 있는 이곳이 천주사의 터라고 하였지만, 내 눈에는 그냥 연꽃 밭일 뿐이다. 여기가 천주사 터라고? 내게 믿음이 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옆에 있는 황룡사지 답사 때 구층탑지 너머로, 안압지와 가까운 곳에 자그마한 삼층 석탑이 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황룡사가 왕실 내지 국가의 원당 사찰이라면 왕실 내당에는 작은 사찰이 있었지 않았을까 싶어서 이다. 그래서 나는 안압지에나 가보자고 했다. 못둑에 올라서면 보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였다.
궁실 안에 재석원이라면 절까지는 아니더라도, 궁실 법당일 수는 있다. 그렇다면 서출지 전설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런데 궁실 내의 법당을 자꾸 천주사와 연결지으려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싶었다.
안압지도 이름이 바뀌어져 있다. 안압지가 아니고 ’동궁과 월지‘라고 했다. 예전의 기억으로 주춧돌이 규직적으로 놓여 있었는데, 아마 동궁이라는 궁궐지였었나 보다. 못의 형태도 고증을 하여 바꾸었겠지만 옛 모양이 아니다. 예전에는 시골의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평범한 저수지 였는데, 그래서 더 친숙하였는데 지금은 석축을 쌓고, 궁궐의 모습이라면서 건물도 몇 채 지워져 있다. 전문가들이 고증을 거쳤으니 맞겠지만, 그러나 신성사상으로 만들었다면서 삼신산이니 뭐니 하면서 설명한 것은 얼른 수긍이 되지 않는다. 통일 신라 시대에 신성사상이 이처럼 유행하였을까. 역사책에는 잘 나오지 않던데.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토요일 오후나 할 일이 없는 날에 친구들과 안압지를 거닐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남자 친구끼리 어슬렁거리면서 나눈 이야기란 것들이, 무슨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었을까. 그래도 그때는 얼마나 진지하였든가. 집 사람더러 그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만나 차라도 마시면서 옛 그때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고 하였더니 집 사람이 ’전화번호는 알아‘ 한다. 나는 ’몰라‘하고 입을 다물었다.
인터넷에서는 안압지 못둑 아래의 연밭이 천주사 터라고 여러 자료들을 열거하였다. 대부분이 조선시대의 문헌에서 가져왔다. 천주사임을 추증케 하는 출토 유물도 조선 초에 만든 불상 등등이다. ’동경잡기‘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가 많은데 이걸 문헌자료라고 하기에는 찜찜하다.
못둑 아래의 나무 그늘에서 집사람이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떼웠다. 간혹 젊은 사람들이 지나면서 힐끗힐끗 바라본다. 요즘 세상에 도시락 싸서 다니는 사람이 어닸어, 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부부는 그들이 부러워한다고 믿고 도시락을 먹었다.
나는 아내더러 다음에 황룡사 터에 가서 석탑을 확인해보자 하였다. 대구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오늘도 걸을 만큼 걸었다는 것이 만족이었다. 그러나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