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7~11 / 죄, 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려 하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실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슬픔이 가득하다고 나옵니다.
7절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는 것에 대해서 실상을 말씀하십니다. 에수님이 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오히려 유익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가셔야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더 유익하게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 것이 예수님이 계신 것보다 왜 더 유익일까요? 예수님은 시공의 제한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 소수에게만 계실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치를 보며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는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면 보혜사는 어떤 분이십니까? 보혜사는 성령님의 다른 이름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helper(도우시는 분), counselor(카운슬러) comfortor(위로자)라고 나옵니다. 원어에는 페라클레토스인데 남을 위해서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자, 중보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리를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마음속에 계시고 우리의 위로 임재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서 눈을 뜨면 예수님을 통해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8~9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책망한다는 말씀은 법정 용어로 판사가 올바르게 판단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 앞에서는 ‘책망한다’라고 쓰이고 긍정적인 말 앞에서는 ‘확신을 시켜준다’라고 쓰입니다.
‘책망한다’라는 일반적으로는 ‘깨우친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죄를 책망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데, 죄에 대해서라 하면 그들이 믿지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불신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죄 하면 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불신이 죄라는 것을 깨우쳐주십니다.
우리가 왜 지옥에 갑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요, 왕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물었습니다.
10절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둘째 예수님은 의에 대해서 확신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야 합니다.
인간은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의를 쌓습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나 유교의 공통점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자기 의로 하나님 나라에 가려는 것은 마치 헤엄쳐서 태평양 바다를 건너가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새가 날아서 달나라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심으로 의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이것을 증언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죄 사함의 확신을 주시고 우리가 의롭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고 자랑하신다는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11절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셋째 성령님은 심판에 대해서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세상 임금은 사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임금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여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가 승리하였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승리한다는 확신을 심어줍니다.
이미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음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