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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
누가복음 10:21-24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눅 10:21-24 / [예수의 기쁨; 마 11:25-27, 13:16-17]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기쁨이 충만하여 말씀하셨다. `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지혜롭고 현명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같이 의지하는 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옳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방법입니다. 22)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참으로 아는 이가 없고, 또 아들과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들 밖에는 참으로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23) 그러고 나서 열두 제자를 향하여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희는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특권을 누린 자들이다. 24) 많은 예언자들과 옛 왕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는 홀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9장부터는 12제자들에게 각종 능력을 주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 장에서는 70인을 세우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할 때 엄청 기뻐하셨습니다.
성령님으로 기뻐하시는 예수님(21) 파송을 받았던 70명이 돌아와서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항복하더라고 보고하자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눅 10:20). 최고의 기쁨은 구원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영원한 기쁨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 기쁨이 사라집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시 51:12). 그러나 본 절의 예수님의 기쁨은 차원이 다른 기쁨으로 성령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성도가 주님을 찬양할 때 옵니다. 특히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때 옵니다. 우리는 이런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22) 예수님은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앎입니다. 영국의 제임스 패커 박사는 신앙에는 2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으로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나머지 또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교제를 통한 앎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이 앎이 기쁨과 능력이 되어 사명자의 삶을 살게 한다고 했습니다.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23-24)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와서 사는 것과 사역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복이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수많은 위인들이 그토록 보고싶어 했으나 보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희의 보는 것이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들은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영안이 열리면 얼마든지 볼 수가 있고 주님이 이루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욥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적용: 신앙의 척도는 기쁨입니다. 혹시 생활 속에 기쁨이 없나요? 다윗처럼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길 바랍니다.
바다가 가까운 지방에 내려와서 초등학생들에게 올챙이의 성장, 개나리꽃의 암술과 수술 그리고 열매 이야기, 박주가리 씨앗 날리기 등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추위를 견뎌내고 봄을 아름답게 수놓는 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정교하고도 오묘한 하나님 창조의 손길과 생명의 신비를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에 대해 아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 설 교 >
호크마 주석
=====10:21
이 때에 - 예수께서 제자들의 성공적 사역을 치하하신 바로 '그 때'(at thattime,NIV)를 가리킨다. 또한 이 표현은 누가가 즐겨쓰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도 많이발견된다(2:38; 7:21; 12:12; 13:31; 24:33;행 16:18; 22:13).
성령으로 기뻐하사 - 마태의 병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마 11:25)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기뻐하사'(* , 에갈리아사토)는 '기뻐하다'는 뜻의 동사 '아갈리아오'(* )의 과거형으로 1:47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에서도 사용된 동사이다. 지금 예수께서 느끼는 기쁨임을 뜻하며 계속 이어지는 감사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일종의 계시임을 암시한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 '천지의 주재'라는 호칭은 다분히 구약적인 표현으로(창14:19,22) 전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전권적 위엄을 나타내며 '아버지'(* , 파테르)라는 호칭은 아람어의 '압바'(abba)에 해당하며 따뜻한 부자 관계를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온 천하 만물의 주관자이신 창조주께서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낸다.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영적 일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롬 8:16). 이것을 지혜롭고...나타내심 - '이것'이란 아마 예수의 사역 즉 그가 베푼 이적들과 말씀의 선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리고 방금 70(72)인의 제자들이체험적으로 터득한 것들일 것이다.
여기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대조되고 있는데, 전자는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후자는 세상적 지혜나 율법적 지식이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전통적인유대인들의 사상 즉 지혜로운 현자(賢者)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생각을(위경제 4에스라 12:35-38)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으로서 바울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상이다(고전 1:18-31). 또한 본절은 소위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 그리하여 멸시와 천대를 당하던 자들에 대한 예수의 각별한 애정을 암시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10:22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여기서 '모든 것'(* , 판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❶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계시(Jeremias), ❷ (본문이 단 7:13, 14; 마 28:18과 평행을 이룬다고 보았을 때) 예수께서 위임(委任)받은 하나님의 권한(Lagrange, Schniewind), ❸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것(Weiss), ❹ 모든 사람(Bengel), ❺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것(Holtzmann), ❻ 그 하나님의 뜻(Plummer), ❼ 모든 교리(Harnack) 등.
그런데 본문에서 '모든것'에대한 정확한 해석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주셨다'(* , 파라디도미)의 의미와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주셨다'는 동사는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 교리, 전통과 같은 것을 물려주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하며(막 7:13; 고전 11:2, 23), 권력이나 권위를 위임하는 데도 사용된다(4:6). 이렇게 볼 때 앞에 열거한 제 견해들은 어느 것이 틀리거나 어느 것이 정확하게 맞다기 보다는 종합적으로 취해질 세상의 것이라 하겠다. 결국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외에는...아는 자가 없나이다 - 여기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존재하는상호 인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또한 본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론적(存在論的)인 관계 즉 복음서들이 한결 같이 증거해 주는 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증거한다. 물론 성도들도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 아버지를 안 것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의 중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식이 너무도 부분적이라는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10:23
너희는 보는...복이 있도다 - 그런데 제자들이 '보는 것'(what you see, NIV)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❶ 넓은 의미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그리고 행하실 이적들과 가르침들을 통해서(4:6)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인식하며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비밀을 보는것을 의미한다(22절). ❷ 좁은 의미에서,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굴복시킬 때 경험한 하나님 나라의실현을 보는 것을 가리킨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언급한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13:16) 전자에 가깝고, '듣는 것'을 생략한 누가복음의 문맥에서는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0:24
많은 선지자와 임금 - 제자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옛 선지자와 임금들을 제자들과 대조시키고 있다. 본절의 말씀에는 과거에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들(선지자)과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들(왕)조차 보지 못한 것을 지금에 평범한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사상을 말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되기를 대망한 사람들이고(사 52:15) 왕들 가운데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왕들은 옛계약을 신뢰한 자들로서 선지자들의 계시를 받아들여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를 열망했었다(시 110:1).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했고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복음의 선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니 복된 자들이 아닐 수 없다(2:30; 히 11:13; 벧전 1:10,11).
복이 있도다
눅 10:21-24 / 정선희목사
두 형제의 이름 : 영국 대재벌 캐리(Carey)는 죠지(George)와 윌리암(William),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들입니다. 그 후, 형 죠지는 국회의원이 되어 돈도 많이 벌고 재벌 정치가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동생 윌리암은 난데없이 인도 선교사를 지망하여 온 가족이 강하게 반대하고 친구들은 윌리암이 어리석다고 비난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대영백과사전에 이 두 사람이 소개되었습니다. 동생 윌리암 선교사에 대해서는 1페이지 반을 할애하여 상세히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죠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윌리암 캐리의 형이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지만, 윌리암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여러분! 오늘은 ‘복이 있도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복 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최고의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21).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여러분! 여기서 ‘주재’는 ‘주인, 통치자’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와 하늘, 우주와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그것들을 긍휼과 공평과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켰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반드시 러시아는 패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사를 보면 여러 제국들이 생겼다가 사라졌습니다. 당대에는 그 나라들이 굉장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없어지거나 작아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세계를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주변국가인 앗수르와 바벨론, 페르시아와 그리스, 로마 등도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고 폐하셨습니다. 교회를 보더라도 유럽에 왕성했던 교회들이 지금은 비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건물을 유지하기 어려워 이교도에게 팔기도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관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는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때가 올 것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21)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여러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는 당대의 서기관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율법을 필사하거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입니다. 주로 레위지파에서 나왔고 세습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려서부터 많은 학문을 배웁니다. 40세가 되면 안수를 받고 정식 서기관이 됩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유대인 공동체의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 됩니다. 이 공회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들을 포함해서 70명으로 운영됩니다. 이것은 모세가 세운 70인의 장로회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이스라엘의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정책의결기관입니다. 예수님을 사형 선고한 것도 바로 이 기관입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의 눈에는 구원자 예수님이 한낱 사형수에 불과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믿음주심을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어린아이들(21)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5층 방수와 믹스커피 : 지난 6월 초에 강한 바람이 불면서 비가 많이 와서, 교회 주방 앞쪽 벽이 젖고 물이 아래로 흘러서 걸레로 여러 번 닦아냈습니다. 또 주방 왼쪽 벽 아래가 마르면서 얼룩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3층 댄스학원 주방 쪽 천정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확인해보니 석고보드를 떼어낸 콘크리트 천정에 젖은 얼룩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물주에게 “교회주방 앞쪽 벽지가 들떴고 옆쪽 아래 벽지에 얼룩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다 말랐는데 물이 아래로 스며들어 3층 주방 천정에서 물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5일 후, 서울에 사는 건물주가 교회 주방과 5층 옥상을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물이 샌 이유를 못 찾았는데 방수업자가 와서 제 얘기도 듣고 교회 주방과 5층 옥상을 살펴봤습니다. 이전 방수공사가 허술했고 오래돼서 옥상 갈라진 틈에서 풀이 자라기도 했습니다. 몇 군데 갈라진 부분을 찾은 방수업자는 “이대로 방치하면 물이 더 많이 샙니다.” 그러자 건물주는 “그렇군요. 견적서를 먼저 뽑아주세요. 공사를 해야겠네요.”라고 했습니다.
공사 2일과 3일째 날에 2번 커피를 갖다드리며, “혼자 일하시나요? 힘드시겠어요?”등. 짧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공사 후, 옥상을 둘러보니 교회 에어컨외기 윗면에 초록색 방수페인트가 칠해져 있었습니다. “교회 에어컨외기에 녹이 슬었는데 오래되면 비가 샐 것 같아요.” 업자에게 건넨 한마디가 생각났습니다. 속으로는 초록색 방수페인트라도 한 번 칠해달라고 할까?” 생각했습니다. 업자는 커피 2잔이 고마워 실외기에 방수페인트를 칠해준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순수한 맘으로 드린 커피 2잔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들’은 원어로 ‘말 못하는’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 아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원어로 보면, 뭔가 많이 어는 사람들은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합니다. 교수와 정치인을 보면 알게 됩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지식인이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지 않습니다. 말 많은 사람도 잘 안 믿습니다. 또한 성도 중에도 말이 많은 사람은 세상에서 덕을 끼치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또 잘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인이 되면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버리고, 어른 흉내를 냅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흉내를 냅니다. 그러나 진정한 어른은 담배나 술이 아니라 삶의 모범을 통해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순수한 어린이처럼 사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순수하고 지혜로운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여러분!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천지의 주재’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과 모든 것들을 통치하고 관리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에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것을 위탁받았기 때문에 철저히‘권세를 받은 책임감’으로 천지만물을 관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청지기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무책임한 사람’이 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후자입니다. 세상에서도 책임감 있는 사람이 성공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물론 영적인 사람, 신령한 사람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자녀로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명을 감당하셨고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신앙이란“나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것은 없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는 원망과 불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는 자기 아파트에 사는데 나는 월세 산다고 한탄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고 돈을 벌고 건강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날마다 감사하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여러분! 이 말은 세상에 구원자 예수님이‘하나님 아들’이심을 아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들을 낳을 수 있고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께 아들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죽을 수 있습니까? 또 어떻게 사람으로 와서 죽음에서 부활하며 다시 오신다는 모든 것이 허무맹랑한 얘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주를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하물며 영계인 하나님나라를 얘기하면 이해가 될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영의 눈을 활짝 열어주셔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6.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은 오직 아들뿐입니다. 즉 이 말은 인간에게 허용된 지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아들과 성령님에 대해서,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등등. 인간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에게도 알 수 있도록 계시를 허락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럼 누가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가시덤불, 어떤 사람은 돌밭, 어떤 사람은 길바닥, 어떤 사람은 옥토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집니다. 옥토 같은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은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합니다. 여기서‘깨닫다’는 말은‘이해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밭은 세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 대화를 많이 할수록 영적세계를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옥토 밭이 되어서 100배로 결실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7. 복이 있도다(23-24)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복’이란 말을 세상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며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을 많이 가지면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땅이나 돈이 많든지, 부잣집에서 태어나거나 재능을 소유하고 태어나든지, 건강하거나 성공하고 출세하든지 등등 이런 사람들을 모두‘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예수님을 만난 것’을‘최고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부러운 복이 많겠지만, ‘최고의 복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시고 구원자이심과 그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섬기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축복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께 나온 것이‘최고의 축복’임을 아시나요? 구약시대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최고의 신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신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을 오늘 지극히 작고 어리석은 우리가 듣고 보고 믿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최고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복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 언제나 감사드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와 우주만물을 사랑과 긍휼과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 같은 우리에게 믿음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믿어서 구원받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최고의 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복’을 주변사람들과 나누는 참된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 자
눅 10장 21~24절 / 이필재목사
10월은 첫 주일과 마지막 주일이 온 세계 개신교회들이 함께 기념하는 주일이 됩니다. 첫 주일은 만국성찬주일로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함께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주일이고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성찬예식의 의미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성찬예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인가? 오늘 우리가 먹는 빵과 포도주는 무슨 뜻인가?’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말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성경 자체는 우리 인간들의 가장 큰 문제를 죄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죄는 이 세상에서도 값을 치르도록 되어있는 것이 문화입니다.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은 작게 값을 치르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은 큰 값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벌금 몇 푼만 내면 되는 죄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야 되는 죄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슨 죄가 그렇게 많은가? 두 가지 죄입니다. 하나는 원죄라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은 자연히 죄인으로 탄생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범죄라는 죄입니다. 내가 짓는 죄의 종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자체를 한번 연구해 보십시오. 인간은 왜 그렇게 죄성이 많은 존재일까요? 죄를 지으라고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부모님이 가르쳐준 것입니까? 아니면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입니까? 우리는 죄 지으라고 교육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모두 다 죄를 짓게 됩니다. 도둑질 하라고 어느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습니까? 그 무서운 강도질 하라고 누가 교육시켰습니까? 아무도 가르친 사람이 없습니다. 살인하는 방법을 교육한 사람 아무도 없고, 거짓말 하라고 가르쳐준 사람도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다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죄 자체가 인간입니다. 다윗은 “날 때부터 나는 죄인이고 모태에서부터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보아도 죄의 존재입니다. 왜 그럴까?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육한다고 죄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교육 많이 받을수록 죄의 질이 더 나빠집니다. 교육시키지 않는데 죄의 종류는 수없이 많아집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죄의 덩어리입니다.
하와이에 부흥회 하러 갔다가 산책하려고 숙소 앞에 있는 공원을 나갔는데 이상한 푯말이 붙어 있습니다. “주의 하십시오. 이 공원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잔인한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아니? 공원에 무슨 동물이?’ 그 말을 읽으니 궁금하잖아요? “보고 싶은 사람은 이리로 오십시오.” 푯말 옆에 화살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화살표만 따라가면 됩니다. 안 가보는 사람은 그 공원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 다 가봅니다. 마지막까지 가보면 조그맣게 담을 쌓아놓고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글을 또 써 붙여 놓았는데 “이 동물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무서워서 땅 속에 가두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래서 내려다보면 거기에 거울이 하나 있습니다. 결국 “제일 잔인한 동물은 너니까 그런 줄 알아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만물의 영장이고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문제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죄의 문제 해결을 짐승 제사로 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려 “인간이 죽었다. 너는 새로 태어났다.” 그래서 죄의 사함을 제사 의식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까지만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는 짐승을 잡아서 피 흘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서 모든 인류의 죄를 한꺼번에 속죄하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그렇게 믿는 사람들만 그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오늘 성경 말씀에 예수님이 약간 탄식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는 사람은 누군가?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 그는 훌륭했던 선생님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4대 성인 중에 하나이다.” 이런 말들을 합니다. 실제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소크라테스보다 더 훌륭했던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석가보다 더 심각한 인간고뇌의 문제를 연구한 사람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오히려 서열이 낮습니다. 그 시절에 그분들이 가장 훌륭했기 때문에 그분들을 존경하는 가치관이 그냥 문화적으로 내려왔을 뿐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기록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왔으나 아는 자가 없도다.” 일반 대중은 고사하고 예수님의 직계 제자 열두 명도 헛갈리는 말을 합니다. “날 누구라 하느냐?” “네, 세례요한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그렇게 말하겠지. 사람들이 본 사람 가운데 세례 요한이 가장 의로웠으니까!”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그럴 듯하게 말하는군. 엘리야가 하나님이 쓰시던 예언자 중 가장 능력 있는 사람으로 나타났으니까!”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그렇지. 예레미야의 설교와 내 설교가 좀 비슷한 면이 많이 있으니까!”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것도 그럴 듯 하다. 내가 하는 일이 선지자의 일이니까! 그러나 다 틀렸다. 나는 나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누구로 아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신앙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열 두 제자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메시야관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 이 메시야는 인간 고난의 해결자이다.’ 배고프다고 하니까 기도 한마디로 5천명을 먹이셨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인간의 문제를 순간적으로 해결하시는 메시야다!” 메시야를 이렇게 봤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아프다고 찾아오니까 현장에서 다 고쳐주셨습니다. “인간 고난의 질병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시는 분이다.” 폭풍까지 잔잔케 하시며 천재지변까지 해결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은 사람 다 살려내십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메시야의 사역은 인간 고난의 해결사다.” 그래서 예수님을 좋아했는데 가장 필요한 예수님 자신의 고난은 해결을 안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상했던 겁니다.
십자가 밑에 와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왜 당신은 당신의 고난을 해결하지 않고 그렇게 피 흘려 죽고 있느냐?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 내려오십니다. 이것이 메시야관의 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너희들의 고난 문제인 최고의 인간 가치인 영생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 고난은 일부러 내가 해결 안하는 것이다. 이게 십자가의 의미이다. 옛날에 짐승이 인간 죄를 위해서 피 흘려 죽지 않았느냐? 그렇게 피 흘려 죽음으로 인간의 죄는 사하여 지지 않았느냐? 나도 내 피를 흘려줌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과 유대 나라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 문제까지도 해결을 하여야 메시야이지!” 이 차이가 나타났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은 것이고 제자들은 다 뿔뿔이 도망을 가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영적 의미를 깨닫는 자는 누구냐? 계시를 받은 자이다. 계시를 받은 자만이 이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죄인으로 취급했고 그 중에서 메시야를 알아본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가끔 일이 일어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아주 이 문제가 생활 가운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제가 이렇게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설교를 하러 다니잖아요? 오늘도 4부 예배 마치고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 부흥회를 해달라고 해서 부지런히 가서 며칠 설교를 해야 합니다. 사방에서 그러니까 자연히 얼굴이 많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아예 20대 초반부터 안경을 똑같은 것으로 평생 썼습니다. 요즘에는 내가 가만히 있었더니 검은 테로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이필재 목사님! 항상 머리도 똑같이 깎고….” 어디를 가도 제가 스타일을 바꾸지 않으니 저를 금방 알아보십니다. 그러면 길 가다가 저를 기억하시는 분은 제가 반가울 거 아닙니까? 막 오셔서 저에게 “아, 이필재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그때 저도 똑같은 반응을 해야 좋을 텐데 제가 그분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가끔 어디서 뵌 분인지 기억이 안 나는 겁니다. 사실 인간의 기억이 한계라는 것이 있으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떨 때는 괜히 저도 아는 척을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방향이 삐뚤게 나갑니다. 그러면 또 탄로가 납니다. “아니, 나는 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입니다.” 저도 똑같이 알아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이런 경험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는데 이발소 아저씨가 내 머리를 자르면서 이필재 목사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겁니다. “이필재 목사를 잘 아십니까?” “아, 그럼요. 이 동네에서 그 사람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모르는 겁니다. 앞에 두고도 모르면서 뭘 잘 안다는 겁니까? 어떤 사람은 저를 보고서 “어머나! 이 아저씨는 이필재 목사님 많이 닮았네?” 이러십니다. 다 틀린 겁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레미야 닮았다.” “내가 왜 예레미야이냐?” “와! 세례요한 닮았네?” “틀렸다.” “그러면 엘리야다.” “내가 왜 엘리야이냐? 나는 나다.”
사람이 가장 기쁜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이 전달되었을 때입니다. ‘그렇지. 내가 그래.’ 제일 답답한 것은 마음이 전달 안 될 때입니다. ‘왜 내 마음을 모르냐?’ 이렇게 되잖아요? 여러분도 고등학교, 대학 시절, 한때는 누구나 다 시인이 됩니다. 그때는 감수성 때문에 예민해지고 센티해집니다. 그래서 저도 대학 다닐 때 얼마나 시를 좋아했는지 날마다 세계적인 시만 들여다보고 시도 써보고 세계적인 시인이 된 것처럼 명상에 잠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절친한 제 친구가 “내가 너와 영원한 친구가 되고 싶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자신의 비밀스런 속사정을 막 털어놨습니다. 그때 저는 결정했습니다. 나를 이렇게까지 신뢰하는 이 친구가 나의 인생의 영원한 대화의 상대라 믿어서 둘이 얼마나 친해졌는지 사람들이 우리 둘을 보며 저 사람들 동성 연애하는가 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피차 떨어지고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어떤 경우에 있든지 이 우정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어느 날 시를 써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잘 있느냐는 인사말이나 다른 내용 없이 백지에 시만 써서 우표를 붙여 보냈습니다. 그것을 제가 지금도 기억합니다. “너는 내 앞에 노출되었어. 이제 이 지구상에서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야. 그러므로 내가 너를 가장 사랑하게 되었어. 내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들어있는 비밀이 내 영혼으로 옮겨진 거야. 너는 이제 내 앞에 꼼짝 못해.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너를 가장 선하게 아는 사람도 나요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나야.” 이렇게 시를 써서 보냈습니다. 답장이 왔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나와 똑같이 시만 써서 보냈습니다. “아! 들켰구나. 그것만은 감추고 싶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만 드리려고 숨겨온 나의 모습인데 어쩌다 네 앞에 다 내어놓았나? 나는 이제 추해졌어. 네 앞에서 벌거벗겨 졌으니까. 나를 벗긴 너! 너도 내 앞에서 벗어야 돼!” 멋있죠? 그 친구가 죽은지가 17년입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가 살아있으면 서로 그런 일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좋다는 우리가 뭡니까? 다 압니다. 모르는 게 없습니다. 예수님한테 거짓말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예수님! 그 분 앞에서 우리는 벌거벗었습니다. “너는 도망 못가! 내가 너를 너보다도 더 잘 알아. 너는 내 앞에서 벌거벗겼어. 어디로 갈 거야?”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내 앞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제 너는 내 꺼야.” 이런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나를 얼마큼 알고 있니? 네가 한번 말해봐. 내가 누구야?” “엘리야입니다.” “그렇구나.” “선지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구나.” “베드로야. 네가 말해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계시입니다. “이 사람은 내게 오는 자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할 거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너희를 쉬게 할 수가 있어.”
성경에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기대했던 사람들은 다 몰랐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지식계급!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를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말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지휘관으로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뭐라고 합니까?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빌라도는 “이 사람은 죄가 하나도 없어.”라고 말했고, 십자가 옆의 강도는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어. 와 봐라.”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예수님이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바로 알았습니다. 하다못해 귀신들린 사람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노니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고백하는 겁니다. 오늘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약간 섭섭한 반응으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를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메시야로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입으로 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한다면 그 자체가 고린도전서 12장 3절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영적 계시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격의 사람들이 오늘 “나를 기념하라.” 주님의 식탁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이 떡과 잔을 통한 영적 은혜가 모두에게 성령님의 임재로 나타나서 하나님 자녀의 행복과 기쁨이 영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계시를 받아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이 식탁의 영적 의미를 깨닫고 매우 행복하고 거룩하게 이 떡과 잔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참된 복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눅 10장 21~24절 / 최승윤목사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 신비로움은 그렇다고 모호하거나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고, 확실하며, 체험적입니다. 분명하고, 확실하며, 체험적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크고 영광스러운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70명을 따로 떼어서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동네로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70명의 제자들은 둘씩 짝을 지어서 이스라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귀신을 내어쫓고, 병든 자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행한 일을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 주의 이름에 귀신들이 항복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0:20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만 기뻐하지 말아라. 귀신들이 항복한 것은 단지 너희들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천국의 능력이 너희들을 통해서 나타난 것뿐이다. 더욱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은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다. 너희들이 천국 백성이 된 것,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항복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 때문이요,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 천국에 속한 자들이요,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과 능력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천국의 능력, 천국 복음을 모든 사람이 알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천국의 능력과 천국 복음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 젖먹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1절)”예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와 “갓난 아이”를 비교하시면서 천국의 능력과 천국 복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 매우 신비로운 것임을 밝혀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내어쫓고, 병든 자를 고친 것은 은밀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비밀 사교처럼 자신들끼리만 모여서 행한 것이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길거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행한 것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들을까 두려워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찾아가서 귓속말로 전한 것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마을회관에서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큰 소리로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고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 복음을 들었고, 제자들이 귀신을 내어쫓고, 병든 자들을 고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전한 천국 복음은 심오한 철학이나 교훈이나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천국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전한 천국 복음이 유치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듣기에 별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지혜로 판단했을 때 천국 복음이 수준 이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제자들이 행했던 놀라운 능력도 그들의 눈에는 하찮은 것, 아니면 마술이라고 생각했던지, 아니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천국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갓난 아이”에게는 나타내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은 사람의 지혜나 이성적인 작용이나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알게 하신 사람들에게 허락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알게 해주시면 갓난 아이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겸손과 순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도 천국의 실체를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대단히 신비로운 것입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인간의 논리와 추론과 합리적인 사고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이 작용해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갖고 있는 지혜와 능력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니요, 천국의 능력이 드러난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요,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인가? 이론적으로야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통해서 역사하셔야 된다는 것이요,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통하지 않고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오래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엎드려 구해야 합니다. 본인이 믿어지지 않기에 기도할 수 없다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천국 복음을 받아들이고, 천국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겸손과 순진의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깨닫도록 해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고 또 간구해야 합니다. 스펄존 목사가 기도했듯이 “하나님, 제 이름을 당신의 마음에만 기록하지 마시고, 제가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제 마음 위에 인쳐주십시오”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천국 복음을 받아들이고, 천국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신비로운 것이지만 모호하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하며 체험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다시 한 번 보시지요. 이 구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가지 사실입니다. 첫째는 천국 복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 복음은 누구를 아느냐? 그 아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들이 누구인지”하는 것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모호하게 알거나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온전하게 알고 있는 아들이,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알게 하기를 소원하는 그 사람에게 계시하신 것이기에 분명하고 확실하며 체험적이라는 것입니다.
“체험적”이라는 말은 소위 말해서 불을 받았다거나 뜨겁다거나 신비로운 어떤 경험을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을 내가 부정할 수 없고, 내가 범사에 인정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생활을 하며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신앙의 수준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과 우리들이 아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21절 초두에 기록된 대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인정하고 믿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내가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을 아시고, 나를 인도해주실 것을 믿기에 그 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고 체험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기쁨이요, 감격이요, 영광이요, 그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흥분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악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두려움이 되고,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가슴 아픈 현실을 경험할 때도 그 하나님 앞에 나가서 “아바 아버지여! 하나님을 부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엎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과 같은 현실 가운데서도 그 하나님을 의지해서 용서하고, 사랑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참된 지식이라면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위로와 안식과 자유와 담대함과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46:3절-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품는다”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은 “내가 너희의 짐을 져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짐을 대신 지리라”이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선택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자비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내가 너희의 모든 짐을 대신 지리라”우리가 그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가 지고 있는 모든 짐들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현실적인 모든 짐뿐 아니라 우리를 끊임 없이 괴롭히는 죄의 짐, 탐욕과 미움과 시기와 자존심과 불의, 우리를 옥죄고,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28절 이하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참된 안식과 평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자비롭고 겸손하신 예수님,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쏟아 부어 주신 예수님, 그 예수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능력, 그것을 알고 믿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과 평안과 소망은 바로 그 하나님과 그 예수님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고 의지할 때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경험적인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끼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앞에 계시고, 그분이 크신 자비와 권능으로, 그분의 귀를 우리에게 가까이 대시고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분의 거룩과 영광과 능력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십니까?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머리 속에서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전 인격이 부정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는 경험적인 지식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최상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아는 것이 영생이요, 자유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왕들, 아니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전하시는 천국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것도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시대를 멀리서, 희미하게 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갖고 기다리고 사모하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가 갖고 오는 천국 복음과 천국은 천사들도 보기를 사모하는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과 거룩과 친밀함과 위로를 체험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의 실체를 듣고 배우고 깨닫고 경험할 수 있도록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 백성들보다, 구약의 어느 성도들보다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축복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보다 더욱 분명하고 확실한 터 위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경배하고, 찬양하지 못하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보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헌신이 부족하다면, 그들보다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과 확신이 없다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돌이켜 반성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천국의 은혜와 축복에 대해서 우리의 귀를 막고 있고, 우리의 눈을 감고 있고, 우리의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은총과 능력이 확연하게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그 시대에 합당한 사람으로 그 영광의 은총을 누리며, 증거하며, 드러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원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해 주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노년에 이르기까지, 백발이 될 때까지 우리를 품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실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진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끊임 없이 초청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약속과 초청에 기쁜 마음으로 응하는 사람들은 천국의 능력과 은총을,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복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능력과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날마다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천국의 은총과 능력과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참으로 복된 것
눅 10장 21~24절 / 이수영목사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말고 칠십 인의 제자를 따로 세우셔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게 하신 일이 있습니다(눅 10:16). 그 때에 그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칠십 인이 기뻐하며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셨습니다(눅 10:17-20).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다지 길지 않지만 우리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알게 해주고 재확인해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분명히 해줍니다. 21-22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린 감사기도이고 23-24절은 제자들에게 하신 축복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시작하시며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란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이심을, 즉 당신께서 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감사하셨습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와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계시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 하셨는데 여기서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칠십 인이 예수님께 드린 말씀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드러난 사실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은 귀신들도 항복시키는 이름이라는 것, 예수님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와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것,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시라는 것,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는 것, 예수님의 오심과 그의 사역 때문에 귀신들이 물러가고 그들의 괴수인 사탄이 몰락하는 때가 왔다는 것, 사탄의 종말론적 멸망은 앞당겨 확실히 드러났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기 시작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악의 권세에 대한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승리는 확정적이라는 것,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악의 세력과 그 활동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으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해칠 자가 없다는 것,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기뻐할 것은 귀신들을 항복시키는 일 자체보다도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사실들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실들을 아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허락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세상의 아무리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라고 해도 알 수가 없고,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면 아무리 어린아이들 같이 단순한 이라 할지라도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진리는 이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해되거나 판단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지혜롭고 아는 것이 많은 줄로 여기는 교만한 자들이 알지 못하도록 당신과 당신의 나라의 진리를 그들에게는 숨기시고, 스스로를 어리석고 무지하며 무능하다 여기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그 놀라운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에로 택하심을 받고,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믿음과 순종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22절의 말씀은 이 21절의 말씀을 한 가지 예로 재확인하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그리고 하나님의 뜻밖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일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는 말씀입니다.
22절 말씀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달리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절대적 일체성을 드러내줍니다. 21절에서 이미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시고는 22절에서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신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누구에게 알게 할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가 아버지와 꼭 같이 아들에게도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누구나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와 임금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언제 메시야가 오실 것인가,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물음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했고 누구보다도 그 답을 알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그 약속된 메시야께서 이미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라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부인하며 배척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 모든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으니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에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자기의 이름이 하늘에 새겨진 것을 알게 되고 구원의 진리를 들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기에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크고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합니다. 또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깨우쳐줍니다. 본문 첫 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까? 칠십 명의 제자가 다른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항복하는 것을 목격하고 기뻐한 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을 기뻐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즐거운 여행을 하며 편안히 쉬고 온 것을 기뻐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정말 기뻐해야 할 것을 기뻐했으며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을 기뻐한 것 때문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합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적으로, 인간의 욕심을 따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하나님 뜻에 따라 마땅히 기뻐해야 할 바대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일로 기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일로 인해 주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도 아니고 성령께서 기뻐하실 일도 아닌 것을 추구하고 즐기며 살면서 그것을 복된 삶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고, 세상은 듣지 못하는 진리를 들으며, 세상은 보지도 못할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삶이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해서 고전1:18-31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도 바울의 이 말대로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고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할 것이 있는 것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이런 것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들로 여겨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과 아무 관계없는 것들을 추구하며 그것들 때문에 울고 웃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고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그런지 스스로 행복하다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신나는 일도 재미난 일도 별로 없는 것 같이 생각되는 때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주의 이름 앞에 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온갖 귀신들을 항복시키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 일로 기뻐하는 우리가 됩시다. 아무리 위태롭고 불안한 상황에 처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세상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기억하며 힘과 용기를 잃지 않는 우리가 됩시다. 아무리 살아가기가 힘든 때라 하더라도 우리가 은혜로 구원 받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백성 된 기쁨으로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나가는 우리가 됩시다.
70인의 보고를 받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눅 10장 21-24절 / 이천우목사
본문과 똑같은 내용을 마태는 마태복음 11장 25-30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서 마태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과 함께 그 아들의 소원대로 계기를 받는 자만이 아버지를 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아는 자에게 조상 때부터 그동안 짊어져 있었던 수고하고 무거운 멍에를 벗겨 내려놓게 하시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멜 것임을 강조합니다. 율법의 계율주의적인 의무에서 벗어나 참 평안의 안식에 참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본문에서 누가는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읽는 자에게 알게 해주고자 하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것은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는데, 그러한 계시를 받음에 있는 제자들은 그들이 보는 것을 인하여 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그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그 듣지 못한 것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만이 아는 아버지를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려고 택한 자인, 그래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들음에 있는 제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쁨도 이 기쁨에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우리의 귀로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이 가지신 뜻을 아는 기쁨에 있는 것 말입니다.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기쁨도, 우리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기뻐하는 기쁨도 세상이 주는 기쁨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기쁨에 있는 것은 세상에서 얻는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본문을 통해서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구속 사역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자신이 그동안 전파해온 하나님의 나라가 제자들을 통해 전파되고 확산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열두 명의 제자를 사도로 세우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며 각 동네에로 보내신데(마 10장, 눅 9:1-27) 이어서 칠십 명(또는 칠십 이명)의 제자들을 뽑아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칠십 명의 제자들에게 열 두 제자와 똑같은 권세를 주셔서 보내셨습니다. 사실 전도 파송 받은 칠십 명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순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어린 양이 이리 가운데로 보내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도 집회를 보면 집회를 가지면서 온갖 대우와 대접을 받고 관광을 즐기고 합니다만, 예수님이 보낸 칠십 명의 전도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숨이 위협받으며, 여행을 위하여 어떤 준비도 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그날그날 입으면서 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면서 복음에 예비 되어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역에는 언제나 자기희생적 헌신과 핍박에 의한 고난이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는 사단의 세력이 쫓겨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는 권능이 있게 됩니다만,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도시와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도시와 사람들에게서 제자들을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며 나와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심판 날에는 소돔 성이 그 도시보다 오히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얼마나 악함 가운데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0:1-12).
예수께로부터 분부와 권세를 받고 전도를 나간 칠십 명의 제자들이 과업을 마치고 기쁜 모습으로 예수님께로 돌아와 그 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칠십 명의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나타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이래로 모든 인류는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의 불행 속에서 살아왔는데 제자들은 복음 전파와 함께 주의 권능이 그들에게 나타나 사단의 세력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 굉장한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래 그 기쁨이 가득 찬 보고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그들에 의해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몹시 기뻐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원수의 세력을 꺾을 수 있는 권세, 곧 뱀과 전갈도 짓밟을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제어할 권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사단의 권세를 제어할 권세 아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권세는 베드로에게 주신 ‘교회적 권세’입니다. 어떤 죽음의 세력도 제자들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마16:18). 오히려 제자들은 적극적으로 사단의 세력과 대항하여 제압하는 권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더 기뻐해야 할 일은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17-20). 왜냐하면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전도 결과 보고를 받고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쁨이 충만하여 계시의 지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기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능력을 스스로 지식이 있어서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추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여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고 그 나라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또 아들과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하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없다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능력을 알게 된 것이 자신들의 인간적 지식과 능력 여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신 은혜를 입은 결과이며, 주님이 그것을 소원하신데 따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복을 받았습니다. 많은 선지자와 왕들이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제자들이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음을 생각하면 제자들은 그들보다 더 복된 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보고 듣는 것은 그것이 허락된 자에게만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어린아이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들어 말씀하신 것은 이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택받은 자들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스스로 지혜 있다며 슬기로운 자임을 자처하는 자들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의 지혜를 부수며, 슬기로운 자의 슬기를 숨김으로써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신다. 사 29:14. - 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알게 주신다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번 외에도 종종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막지 않도록 하시며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이 허락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참조. 마 18:1-5, 19:13-15)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지혜와 슬기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는 계시해주심에 따른 것이란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어린아이 같은 자, 곧 주님의 손에 붙들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보게 해주심이 있으니 참으로 복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복스러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은 그동안 그들이 조상들이 해왔던 것을 그대로 따랐던 율법의 교육과 그 계명의 준수에 있어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일생을 율법의 그물망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왔으며, 따라서 이들의 생애에서 율법의 각 계명이 이들에게 온전한 것이 되어서 벗어나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일생을 멍에로 지고 살아옵니다만, 그렇게 해서 이들에게 깨달아 알게 해주고 있는 것은 죄에 대한 의식과 그 책임을 통감하는 각성이며, 죄책에 따른 죽음의 형벌에 처해지는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멍에를 짊어지고 힘들어 하던 자들이 진리를 알게 하시는 하늘의 지혜를 힘입어 자신에게 나아와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무리에 들어올 때 그들의 어깨에 있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멍에를 벗겨주셨습니다. 조상 대대로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았어도 지혜와 슬기롭지를 못하였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6장 4-9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라. 또 너희는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여라."를 문자적으로 실행하면서 살아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만, 그들이 그렇게 앉았을 때에도 누웠을 때에도 집에 있을 때에도 여행할 때에도 보며, 손목에도 이마에도,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였던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혜와 슬기에 있지를 못하였습니다. 온 율법을 동원해서도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그들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율법 아래에 있을 뿐이며, 율법의 종이 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온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자가 되려고 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며 회개하여 다시 지키고자 하고, 그래서 의로운 자가 되어 영생을 얻고자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썼던, 그러나 결코 아무도 사람의 힘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던, 그렇게 그동안 있어왔던 그 모든 것이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와 슬기에 있어 그분을 의지함에 있는 믿음에 들어온 그때에 그들이 조상들이 해왔던 모든 행위를 그대로 짊어진 그 멍에가 그들의 어깨에서 벗겨지고 내려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그 순간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밖에는 그 아들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고, 또 아들과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아들이 택한 자들 밖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낸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아는 택하심에 있는 자들을 예수께 주신 권세에 의해서 예수께로 나아와 그 이름을 의지하는 따름에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는 모든 율법이 말해 온 분을 아는 지혜와 슬기에 있게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택한 사람들만이 아버지를 안다고 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를 통하여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며, 그들에게 허락된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향하여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니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에 있는 너희는 참으로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선지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70명의 제자에게서 보고를 듣고 매우 기뻐했던 것은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있게 될 사단이 번개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로서 있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제자로 삼으신 자들이 그동안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 사로잡혀 있었던 사단에게서 해방되어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말입니다. 구약시대에서 많은 선지자와 왕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이들이 듣지 못했던 것을 듣는 지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와 왕들과 견주어서 참으로 복 있는 자들임을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서 선지자와 왕은 제사장과 함께 메시야적 직무의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음의 택함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중에서 선지자는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와 그분이 하실 구속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에언 계시를 전달 받아 맡은 자로서 그가 맡아 알고 있는 예언 계시를 하나님이 택정한 백성, 곧 이스라엘에게 전하여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예언 계시를 받은 자로서 그 예언이 성취될 때의 기다림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봄에 있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장차 있을 하나님의 일을 예언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와 그 메시야가 하실 일을 내다보고 있습니다만, 메시야 그분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메시야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권능을 듣는 기쁨에 있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왕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맡겨진 통치권을 행사하여 장차 하나님의 의로 오실 메시야를 나타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과 그분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올곧게 있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이룰 샬롬[평화]의 세계를 드러내어 그 믿음에 있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 또한 그가 맡은 왕적인 권세를 행사하는 것을 통해서 여기에 약속되고 있는 장차 있을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알게 해 주는 예언 계시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만, 그래서 하나님의 예언 계시를 알고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와 그 메시야가 하실 일을 내다보고 있습니다만, 메시야 그분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그분이 전하시는 말씀을 기쁨에 있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서 많은 선지자와 왕이 보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메시야 예언에 의해서 그 기대를 갖고 기다려 왔으나 메시야를 그들의 눈으로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능력을 보고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제사장과 함께 선지자와 왕이 메시야적 직무의 사역을 활동하던 구약시대 당시에는 이들이 각각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맡은 직무를 통해서 예언하였던 계시에서 약속해 주시고 있는 메시야와 그분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언 계시에서 약속된 메시야 도래의 때가 그들의 시대에서는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 도래의 때가 이르기 전에 있는 이들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예언 계시를 통해서 선재하신 메시야[그리스도]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바라봄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선재하신 메시야를 알고 그분을 보는 복 있는 눈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온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그리스도]로 나타나신 것을 보는 기쁨의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메시야 도래의 때는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 예언된 온 세상을 심판하는 무서운 큰 날이 오기 전에 보내 주실 선지자 엘리야가 와 부모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려주고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게로 돌려주어서 부모와 자녀들이 화목하게 할 것이라는 선지자가 온 후에 있을 것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기 전에 있게 될 마지막 선지자가 와서 선지자 엘리야가 했던 일을 할 예언된 선지자야는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오시기 6개월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출생하게 될 세례 요한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말 4:5-6; 눅 1:1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선지자 말라기에 의해 예언된 세례 요한을 통해서 메시야에 대한 증거를 들으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의한 회개의 복음을 들었고, 선지자들과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이들이 결코 듣지 못했던 것을 들어 그 지혜에 있으므로 많은 선지자들과 왕들이 보고자 하였어도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기쁨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으로 복 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오실 것이 약속된 분으로서, 다윗의 씨(자손)가 유대 땅 베들레헴(삼하 7:2; 미 5:2; 눅 2:4, 11; 요 7:42)을 통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저희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자’인 예수의 이름(마 1:21)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권능을 행하셔서 그 모습을 나타내실 때,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와 왕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예수님에게서 보고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과 이적의 권능을 행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가 아무도 이런 말씀을 주실 수가 없고 이런 권능을 행하실 수가 없음에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마 7:28-29; 9:8),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복종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말이죠. 본문 21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대로 이것을 자신이 보낸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하시는데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의 지혜를 나타내셔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고 여기는 자들의 지혜와 슬기를 산산이 부숴 뜨려 그들의 지혜와 슬기가 공허한 헛된 것에 있게 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어리석은 자로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정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게 하여 그 의존에 있는 믿음에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22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바와 같이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또한 아들이 택한 자들에게만 아버지를 알게 해 주심에 의해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권능을 나타내실 때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흑암에 있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신, 곧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믿음에 있지를 못하였습니다(마 4:12-16; 요 1:9-11).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아들을 보지 못하였고 그분을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눈은 있으되 감겨져 있고 귀는 있으되 닫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는 그 지혜를 아들과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들에게는 아들이 아는 아버지를 알게 해 주십니다. 이들의 눈은 감겨져 있던 것에서 떠져 있었고, 이들의 귀는 닫혀져 있었던 것에서 열려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눈은 있으되 감겨져 있고 귀는 있으되 닫혀져 있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던 아들을 봄으로써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고, 아무도 듣지 못하였던 아들을 말씀해주시는 것을 들음으로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압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한 자신을 들음으로써 아버지를 아는 그들은 참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기뻐하신 기쁨이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앎으로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동네에 모습을 나타나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봅니다만, 그들이 보는 것은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외의 것을 결코 보지 못합니다. 이것에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이것에서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을 듣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은 육에 있는 한에서 보고 듣는 것으로 육의 것 외에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보는 예수님에게서는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그들의 귀로 듣는 것 외에 그들의 눈으로는 결코 보지 못하고 그들의 귀로는 결코 듣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으려면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떠져 있어야 하고 그들의 귀로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으려면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귀로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이 눈과 귀는 육에 있는 한에서는 감겨져 있고 닫혀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보는 예수님이 보아야 할 예수님을 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귀로 듣는 예수님이 들어야 할 예수님을 다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육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한에서 예수님과 그 하시는 일을 보고 있는 것이고 육의 귀로 들을 수 있는 한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자신들이 보고 듣는 것에서 파악되어지는 한에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임한 자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였던 것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떠져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였던 것 예수님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을 입으신 예수님에게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보고 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전파하시고 가르치시는 천국 복음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이적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인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인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슬기에 있는 지혜로운 자이며 슬기로운 자입니다. 이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이를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니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혜가 주어짐으로 위로부터 난 자에 있음으로서 그 이름은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기쁨이 이것이며,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였고 듣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고 들음으로 그를 통해서 아버지를 알아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에 우리의 기쁨이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거할 영원한 장막으로 제공되고 있어 그 안에 거하여 참 평안의 안식을 누림에 우리의 즐김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희락’이라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보는 눈의 축복
눅 10장 21-24절 / 조성훈목사
주님께서는 유대 마을마다 제자들을 보내시고 그들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여러 이적을 이야기하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주님은 단호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10:8)” 본문 말씀에서도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복음, 영생의 소식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한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13: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예수 그리스도께 나온 사람은 자신이 소경이고 병자인 것을 인정하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지혜 있는 자들에게 숨기셨을까요? 그들 스스로가 지혜 있다 하여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막10:23)”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실 때가 많았는데 나중에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실 때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저들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마13:10-11). 즉 그들이 듣고 혹시 고침을 받을까봐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방여인이 주님께 와서 “내 아이를 고쳐주소서”라고 했을 때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15:26)”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복음이 제한된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 “구원받은 사람이 적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고 답하셨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구원받을 확률은 매우 적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지혜로운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생각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18:16)”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더 복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자가 하나님을 찾을 확률이 더 낮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잔치에 먼저 유대인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소를 샀다고, 장가를 들었다고, 밭을 사서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그 때 주인은 산과 들로 다니면서 소경과 저는 자들, 가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을 데려오라 했습니다. 처음 초청받은 자들이 거절하자, 세상에서 미련하다고 무시당하는 자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오셔서 하신 역사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지만, 더 넓은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참 복되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제가 말씀을 전하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사람은 참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셔서 삶 가운데 역사하시고 열매를 나타내시는 것, 교회 안에서 일하시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복된 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실 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어떤 사람들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능력을 행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보는 눈이 달랐던 것입니다. 어 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고 감사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무감각하게 들립니다. 말씀이 내 귀에 들린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 들리게 하신 것,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추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원 얻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주시고 눈과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남은 생을 춤추게 할 만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 주님이 돌아가실 때 양쪽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평생 죄를 짓고 마음대로 살았던 자들입니다. 평생 구원받을 확률은 거의 없던 자들이 십자가 사형장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지옥에 갔습니다. 아무에게나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5)”
우리가 얼마나 복된 자들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그러나 우 리의 영적 눈이 흐려져 있을 때는 이와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가진 자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입니다. 보이는 자들은 모든 것이 감사일 것이고,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불평거리일 것입니다.
우리는 봐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를 봐야 합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우리의 영안을 밝히는 방법은 자주 닦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을 닦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닦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점점 밝아지면 우리가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 부한 자인지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고 들리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거듭난 자는 정말 복된 자입니다
눅10: 21-24 / 키 마스터(thechurch)
우리는 지난 주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들이 항복한 것으로 기뻐하자 예수께서 하늘나라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을 가장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현상보다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1절)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귀신들이 쫓겨나간 것을 보고하자 예수께서 성령으로 인해 기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을까요? 그것은 70인들을 통하여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성취되고 있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요한이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1 3:8)라고 말한 대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70인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복음을 증거할 때에 귀신이 항복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즉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하자 마귀가 항복하고 그들이 사로잡고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때문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쁨을 성령이 충만한 상태와 연관시킴으로 그의 기쁨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의 일로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로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듣고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신 다음에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1절).
먼저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면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까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38년 된 앉은뱅이를 고치신 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했을 때,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대답하자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으로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등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증인이 그들입니다. 여호와 증인은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데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느냐며 삼위일체론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같다는 말을 세상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개념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이해하면 얼마든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시 하신 것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존재의 방식을 바꿔서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후 기도를 드리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2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종종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기도하실 때도 먼저 감사하셨고(요 11:41), 성찬식을 하실 때도 먼저 감사하셨습니다(눅 22:17). 왜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종종 먼저 감사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감사는 하나님과 대화의 문을 여는 키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대화를 합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으면 상대방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야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감사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시 21절을 읽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뜻을 숨기시고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절대 의존관계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은 교만하여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머리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인 것을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기도 하고 알지 못하기도 한 것이 누구의 책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21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영적체험을 하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각각 복음에 대해 보인 반응의 결과를 설명한 것입니다. 즉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적 체험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구원을 받고 영적체험을 하게 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어린아이처럼 행동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것은 복음을 듣고 각자가 보인 반응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각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께 절대의존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22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짓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3-24절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3, 24절)
예수께서는 기도를 마치신 후 제자들을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들을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제자들은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하나님의 계시가 성취되기를 소망하였고 바랬습니다. 그러나 직접 메시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메시아를 보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였으니 얼마나 큰 복을 받은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들보다 더 복이 있는 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메시아를 만났을 뿐 아니라 그분을 마음에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18-19절입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정말 복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를 잃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의 영안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안경을 자주 닦아야 밝히 볼 수 있듯이 무뎌진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닦으면 깨끗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많이 닦을수록 우리가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의 풍요와 지식의 풍요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영혼은 더 피폐하여 기쁨과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자인지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누가 뭐래도 가장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가장 큰 복을 받은 자답게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순한 진실
눅 10:21~24 / 최형묵목사(천안살림교회)
두 주에 걸쳐 한 교우와 신앙 문제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난주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교회도 학교처럼 여러 단계가 있다면, 우리 교회는 암만 봐도 대학교나 대학원입니다." 제가 헤아려 듣건대,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유치원 같은 데 가면 먹을 것도 주고, 또 각 단계마다 재미거리가 있어 그것을 '미끼' 삼아 사람들을 유인하는 법인데, 우리 교회는 그렇게 '미끼'를 던지는 데 인색하고 그저 다들 스스로 성숙해지기만을 요구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받아 넘겼지만, 순간 머리가 '띵!'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서로 엇갈리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하나는 '살림교회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우 이야기는 '고급 학교' 다녀서 좋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미끼'를 던져야 사람들이 몰릴 것 아니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가지 든 생각이 '사람이면 누구나 바라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에 소홀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목사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과연 '미끼'를 던져야 할까요? '달란트 시장'도 열고, '경품'을 곁들인 시상도 하고 해야 할까요? 물론 우리 교우가 말한 '미끼'란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더 가까이 가야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저의 결론은 여전히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 '그리스도'가 빠져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그 진실에 접근하는 데 조금 더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인데 며칠 전 한 일간지(<한겨레신문> 2004. 9. 9)에 한국교회 유명 목사들의 설교 비평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 만하게 나왔습니다. 교계신문도 아니고 일반 일간지 한 면을 거의 다 차지했습니다. 이 사회가 교회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사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에서 교회가 음으로 양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평자의 시선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목사들의 설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대형교회들의 목사 설교 대부분이 신학의 부재, 교회중심주의, 역사의식의 빈곤, 개인주의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비평의 대상이 된 설교들 대부분이 현실에 영합할 뿐 진정한 예언의 목소리가 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어쨌든 목사로서 섬뜩한 비평이 아닐 수 없었는데, 어째서 그런 평가를 받아야 했을까요? 그 비평 대상 가운데는 제가 직접 들어보거나 읽어본 설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설교도 있었는데, 대개 어떠하리라는 것은 예상이 됩니다. 아마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서를 강조하고 예수를 강조하는 설교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신학의 부재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현실 영합적인 까닭 때문일 것입니다. 성서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예수를 말하지만, 오늘 이 세상을 변화시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까닭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성서의 용어로 포장되었을 뿐 그 진수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있으되, 그 예수는 '영웅'으로서의 예수, '스타'로서의 예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씨앗으로서 복음, 세상을 새롭게 하는 누룩으로서 복음이 사라지고 각자의 욕망만이 그럴싸한 '신앙의 상품'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는 역사의식입니다. 이 땅의 역사 안에 하나님께서 개입해 들어오신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있는 현실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이 세계의 현실이 바뀌도록 기도하게 만들고 그 현실이 바뀌도록 헌신하게 만듭니다. 그런 믿음, 그런 역사의식이 실종된 것이 문제입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내린 결론 역시 '정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복음으로 안내하는 말씀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정말 예수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말씀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묻고 묻지 않으면 순식간에 정도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신앙, 복잡한 것 같지만 전혀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군더더기를 떨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잡한 것은 이 세상이요, 그 세상과 영합하는 교회들입니다. 세간의 비판을 받는 많은 교회들이 아주 단순한 메시지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단순한 메시지 이면에는 복잡한 기제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가수 하나가 뜨는 데 얼마나 복잡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지 대개 알지요? 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순진한 개척교회 목사들은 밤낮 교회성장 세미나 등을 쫓아다닙니다. 가면 "기도 열심히 하라" "전도 열정을 가져라" 등등의 강사들의 '비결'을 듣습니다. 그 자리에 있을 때는 다 될 것 같은데 돌아오면 안 됩니다. 규모의 논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쏙 빼놓고 목사 한 사람의 헌신성만 강조하니까, 그걸 모르는 개척교회 목사들은 자책하며 가슴에 멍이 드는 것입니다.
살림교회는 그런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교회다운 교회 한번 일궈보자는 교회입니다. 예수를 믿고, 또한 사람들을 믿어보자는 교회입니다. 사람을 믿어보자는 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다른 어떤 것에 현혹되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거듭날 수 있는지 믿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믿음이 없다면 오늘 당장 해산합시다! 너무 과격했나요? 목사가 여러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이런 소리도 못하겠지요?
살림교회는 '대중적 스타 가수'가 아니라, 진지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서 그 진가를 인정받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그런 존재가 배곯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멀국이 아니라 진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란하지 않아도 그 맛을 보고 사람들이 찾는 음식집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느낄 때 뿌듯하지 않습니까? 그런 뿌듯함으로 살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에는 '예수의 감사 기도'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쳐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기뻤을까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께서 감사를 드린 '이 일'이 무엇인지는 바로 앞(17-20)에 나오는 대로, 사탄을 물리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을 받았던 일흔두 사람이 파송 결과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감사드린 일은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탄이 무력하게 무너진 사건입니다. '대적하는 자' '고발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사탄'은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다른 세상의 지배 원리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섬김의 길이었다면 사탄의 길은 지배의 길이었습니다. '사탄이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일',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그 지배의 욕망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진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연은 단지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의 진실을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께서는 더더욱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신 사실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은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와 지식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밑지지 않는 영악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며 그 권력자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그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때묻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영악한 세상의 지배원리에 능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은 세상의 지배 원리에 능하지만 하늘의 일에는 무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철부지 어린아이'는 세상의 지배 원리에는 무지하지만 하늘의 뜻에는 밝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앞에서 사탄은 무력해집니다. 암만 화려한 권세도 무력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일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같은 말씀을 전하는 마태복음의 말씀은 바로 그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분명하게 전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바로 오늘 말씀에 이어지는 마태의 해석입니다. 세상 권세의 유혹, 대적하는 사탄을 물리치고 나면 그렇게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무거운 짐을 털어 버리고 가볍게 걷는 길입니다. 아주 단순한 진실입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세상 권세를 떨쳐버리면 남루하고 초라하게 사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고통을 억지로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남루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것들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작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의 진가를 아는 것입니다. 전혀 유명하지 않은 바로 내 곁의 형제와 이웃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좌우하며 거드름을 피우는 콧대 높은 백인을 선망하는 것이 아니라 저 후미진 공장, 저 귀퉁이 시골 농장에서 일하는 까무잡잡한 이방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저 그랜드캐니언이나 금강산만이 아니라 내 집 앞의 작은 공원, 내가 늘 지나치는 논둑 길과 들판의 진가를 아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생활의 발견, 삶의 발견입니다.
하찮아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의 진가를 알 때, 그 진가가 사람들에게 인정될 때, 세상은 변화됩니다. 우리는 그 단순한 진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그 단순한 진실이 진실로 위대하다고 믿는 교회입니다. 그 단순한 진실을 깨달음으로 그리스도의 길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똑똑하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
아이에게 나타내심
눅 10:21-24 / 이성훈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0장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하는데, 누가복음이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지,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특히나 이 말씀 속에서 어린아이를 이야기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난 ‘이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1장에도 나타납니다만, 마태복음에서는 21절과 22절의 구절만이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우리가 잘 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은 분명 감춰진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두 복음서가 말하는 ‘이것’은 조금 맥락이 다릅니다. 결론적으로는 같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은 확실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이야기를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마태복음은 11장에서 시대를 분간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마11:20-24). 그렇기에 낮아지려는 마음,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은 기쁠 때 즐거워하고 슬플 때에 슬퍼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마11:16-17).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와서 나에게 배우고 나의 멍에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낮아지고, 때를 분간하여 즐거워하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배우고 예수님의 멍에를 질 때에 우리는 쉼을,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마태복음은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의 ‘이것’
사실 제가 마태복음 11장을 읽을 때에, 딱히 슬기로운 자에게 감춰졌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난 ‘이것’에 집중해서 읽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을 읽어 가다보니 여기에까지 이어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 아이의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시대를 분간하라는 점에 집중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럼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라는 점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의 말씀 속에도 동일한 의미가 담겨져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려 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난 ‘이것’이 무엇인지, 누가복음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누가복음 10장의 흐름 속에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 70명을 세워 파송하시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6절까지의 말씀은 파송의 이야기이고, 17-20절의 말씀은 떠나갔던 70인의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 바로 이어서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개역개정 성경의 소제목으로 ‘예수의 감사기도’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제자들을 보시며 기쁨 가운데에서 이 말씀,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성경에 ‘성령으로 기뻐하시며’라고 되어있지만, 최근의 헬라어 성경 판본에는 괄호 속에 ‘안에서’라는 단어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저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셨다는 쪽이 맞다고 봅니다.
딱히 기쁘지 않았는데, 성령이 감동을 주어서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너무도 기뻐하셨기에 성령으로 충만해지시고 그 안에서 더욱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보다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셨다’가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감사 속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지칭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지만, 지혜가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보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특정한 계층을 겨냥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에 대비되는 사람들은 그 계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혜를 가졌다고 말하는 어른들, 성인들을 지칭하신 것이기에 대조적으로 어린 아이를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 어린 아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미련하다는 의미라고 들어왔습니다만, 미련하다는 의미보다는 아직 지혜가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 지식을 많이 쌓지 않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2절에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질 것으로 우상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주어는 일반적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성인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또 남들에 의해서 지혜롭다고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자기 손으로 신을 만들고 자기가 만든 신을 섬깁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지혜있다는 어른들에게 어리석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성인들은 어린 아이를 보면서 아직 지식이 모자라다, 지혜가 여물지 않았다, 성숙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어리석은 것은 성인, 어른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첨가하십니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렇기에 또한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을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문법 자체가 애매한 말씀입니다만, 간단하게 말해서 ‘이것’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인가?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답은 나와 있습니다. 22절에 아버지가 누구신지, 아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번 고개를 끄떡이게 되지만, 다시 한 번 말씀을 읽어보면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이걸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일,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일은 결국 지식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단지 여기에서 끝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지식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오히려 지식이 없고, 지식이 없다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지식이 있다”로 끝맺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고, 조금은 아쉬운 내용입니다. 또 어떻게 생각하자면 너무 철학적인 이야기인 듯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 없는 추상적인 신앙만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그저 추상적인 이야기만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를 과격할 정도의 행동 중심적인 신앙 집단이라고 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는 불의한 재물이라도 쌓아서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말 할 정도로 행동 중심적인 이야기를 하는 복음서가 누가복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선을 조금 돌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서 율법교사의 질문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나옵니다만, 사실은 연결이 상당히 자연스럽습니다.
율법교사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냐?’는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숨기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제자들에게만 따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율법교사는 앞의 이야기만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감추셨다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그는 이것이 영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판단합니다. 즉 저희가 찾아가고 있는 ‘이것’이 ‘영생’이라고 율법교사는 판단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 영생을 어떻게 얻느냐고, 당신이 그 지혜를 얻었다면 우리에게도 이야기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전에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돕지 않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이냐 생명이냐 라는 갈림길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율법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심플하게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가장 본질적인 마음. 생명을 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일을 가로막고 있는 어떠한 생각들이 있더라도, 그 생각들을 다 벗어버리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에서 어긋난 행동이니까, 지금 난 도울 수 있는 돈이 없으니까, 지금 내 힘으로는 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 하는 이러한 생각들 다 버리고, 돕는 일이 옳다고 생각한다며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미투운동의 반작용이라면서 올라왔던 기사가 있었는데, 지하철역에서 한 젊은 여성이 쓰러지자 남성들은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는 기사였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성희롱이니 성추행이니 고소당한다고 남성들 누구도 그녀를 돕지도 않고 보고만 있었다는, 그래서 결국 할머니께서 그녀를 도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다음날 가짜 뉴스, 조작된 뉴스였음이 드러났습니다. 한 남학생이 119에 신고를 했고, 구급대원이 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음이 알려졌습니다. 오히려 당시 사진을 촬영하고 있던 여성, 이 내용을 미투의 반작용이라며 남성들을 욕했던 여성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도움을 주지는 않고 촬영만 하고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남성 여성에 대한, 미투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이 많아지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남학생은 그녀 옆을 지켰지만, 실제로 많은 남성들은 못 본채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에서 건졌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옛 선조들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구해봤자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생각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뒤이어지는 이야기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접대하는 일, 디아코니아를 위해 분주했고, 원어로 보면 그냥 분주한 게 아니라 바빠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마르다는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동생 마리아에게도 일 좀 하라고 하십시오.’ 자신은 열심히 일하는데 마리아는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으니 일 좀 시켜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개역개정 성경의 각주에 “GNT(The Greek New Testament) 4판에는 ‘몇 가지만 하든지’가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원문을 조금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필요한 것은 한 가지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꼭 마리아처럼 ‘말씀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만 해라’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디아코니아, 섬김, 봉사를 위해 이것저것 하느라 너는 너무 괴로워하는구나. 하나만 해도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일로 시작했을지라도 그것이 너를 괴롭게 한다면,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나타난 것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합쳐서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 그 한 가지만 행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정말로 귀하고 중요한 일이라면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 일을 행하라. 남들을 위해 섬기는 일이 중요하지만, 섬김을 위해서 이것저것 하다가 괴로워하지 말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그 일 한 가지만 행하라.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행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내용도 상당히 심플합니다. 너희는 가서 평안을 전하고, 그 안부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에 머물며 능력을 행하고, 안부를 받지 않는 사람의 집에는 머물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려 하지 말고 평안의 인사를 받아준 그 집에서 병자를 고쳐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받아주는 집에만 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무슨 부흥회인지 간증 집회인지에 여신도 분들을 모시고 참석했던 적이 있는데, ‘진돗개 전도법’을 만드신 어떤 전도왕이라는 분의 ‘진돗개 전도법’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한 번 물면 교회 나올 때까지 놔주지 않는다고 해서 ‘진돗개 전도법’이라고 합니다. 곁가지로 교회 나올 때까지 찔러본다는 ‘고구마 전도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전도법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간단합니다. 받아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평안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안 받아주는 사람 집에는 들어가지도 말고 마을 전체에서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마을에서 나와라.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이것이 감춰진 이유는 그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게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행동에 이유를 붙이고, 그 이유에 따라서 행동하려고 하고, 그 이유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다릅니다.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지키라고 하면 지킵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행동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어린 아이들의 행동은 본질적인 곳에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간혹 일반의 범주에서 벗어난 아이들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생명을 살리려는 행동을 합니다. 자신이 그 행동을 할 수 없다면 주변에 있는 어른이라도 불러오려고 노력합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렇게 들어왔고 봐왔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픈게 싫기 때문에 남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커가면서 남을 아프게 하며 자신의 무언가를 해소하는 방식을 배워가기에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은 슬기로운 사람들보다 오히려 지혜에, 진리에 가까운 행동을 합니다.
나가는 말
담임목사 생활을 오래 하지도 않았지만, 6년차가 되면서 계속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학술적인 내용을 설교에 더 녹아들어가게 할 수 있을까? 저는 지금까지 신학교에서 이 둘은 양립 불가하다고 들어왔습니다. 신학과 신앙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너무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 머릿속에는 늘 ‘조금 더 은혜롭게’, ‘조금 더 학술적으로’, ‘조금 더...’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답답해하고 있던 중에 초등학교 2학년인 제 아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아빠 이번 주에 설교 뭐할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아주 가끔씩 장난으로 아들한테 물어봅니다. 그러자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개그콘서트처럼 재밌는 설교’ 그때는 그냥 웃어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정답 같습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또한 전하면서 재미있어야 하고, 성도님들도 말씀을 들으면서 재미있어야 거기에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개그콘서트 같은’ 설교는 좋은 설교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재미있다’는 표현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가벼운 재미가 아니라 깊이 있게 재밌는 설교라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아직까지 도달하지 못한 이상이긴 합니다만, 결국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삶은 복잡합니다. 계산할 일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고 신경 써야 할 일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만 해라”,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해라” 그리고 그것이 참된 진리.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고 예수님을 아는 지혜라고 하십니다.
제가 처음에 마태복음과 과정은 다르지만 결론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결론은 이것입니다. 본질적인 것,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복잡한 계산을 벗어버린 것, 그것을 행하는 일이 참된 일이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행할 때에 우리의 눈에는 참된 진리가, 감춰졌던 지혜가 보이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방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짐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 내려놓으시고 참된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쉼을 얻으시고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생각들을 내려놓으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명 평화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누가의 의도적 모음
눅 10:21~24 / 최덕훈목사(울산남교회, ATTS 성경연구원장)
다른 복음서의 경우와는 다르게, 누가가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한 장에 모아놓은 경우를 종종 봅니다. 첫 번째 경우가 7장 즉, 메시아장이요, 둘째가 10장이니, 별칭하여 ‘교회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 날개가 있다고 하는 표현들을 봅니다. 건강한 두 날개라든지,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교회라든지 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표현은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다는 이사야 40장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진정 교회에 날개가 있다면, 어떤 날개이겠습니까? 누가는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세 가지로 가르치고자 사건이나 교훈들을 의도적으로 10장에 모아 놓았습니다.
교회에 날개가 있다면, 당연히 몸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몸통은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조금 확대해석하면, 예배입니다. 누가는 10장 중간에 예수의 기도를 기록해 놓았습니다.(21-22절)
교회가 예배에 성공하지 못하고, 기도에 성공하지 못하면, 이미 교회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왜 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겠습니까? 기도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날개는 ‘전도’입니다. 누가는 10장을 시작하면서, 70인 전도대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70인의 보고를 받으시면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21절)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교회가 전도할 때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고 해석해도 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전도에 성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전도가 교회의 한 날개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두 번째 날개는 ‘구제’입니다. 누가는 10장 말미에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기록합니다. 한마디로 가장 아름다운 구제의 모습입니다. 이 사건에서 놓치면 안되는 것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 이웃’(29절)을 찾습니다. 내 주변에서 이웃을 찾지만, 주님은 강도 만난 자를 찾아가서 이웃이 되어주는 자를 찾고 있고, 이것이 진정한 성경적 구제임을 가르치십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종종 전도에는 성공해도, 구제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 교회의 역할은 ‘봉사’입니다. 말씀의 봉사가 첫째요, 분주한 봉사도 꼭 필요함을 교훈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까? 기도와 예배에 성공하고, 전도와 구제의 두 날개로 날아오르며,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봉사하는 교회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