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성공원엔 작은 동산이 있고, 그 위에 金庾信(김유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은 김유신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다. 칼을 뽑아 든 김유신이 가리키는 칼끝은 북쪽을 향한다. 오늘 저녁 6시30분쯤 동상 밑에 섰다. 서쪽 하늘은 해가 떨어진 직후라 붉은 노을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동쪽 하늘엔 보름달이 떴다. 그야말로 신라의 달밤이었다. 청년 장군 김유신이 바라보았을 달이고 夕陽이다. 하늘은 투명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애국가의 3절 그대로였다. 이 동상은 경상북도가 1977년 9월1일 준공한 것이다. 동상 건립문에 따르면 朴正熙 대통령이 1975년 4월1일에 기존 金庾信 동상을 더 웅장하게 만들고 방향을 東向에서 北向으로 하라고 지시하여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왜 朴 대통령이 김유신으로 하여금 말을 타고 북쪽으로 달리도록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李殷相(이은상) 선생이 쓴 碑銘(비명)에 "화랑정신을 받들어 국토통일의 맹세를 짓다"라는 대목이 있다. 김유신의 삼국통일 정신을 대한민국 주도의 남북통일 정신으로 이어받자는 뜻을 담아 세운 동상인 것이다. 이 동상은 크고 힘 차다. 전쟁이 많았고 장군들도 많았던 유럽에서 많이 보는 騎馬像(기마상)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다. 이 동상을 만든 분은 慶州의 조각가 故김만술 선생이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이 靜的(정적)인데 비하여 김유신 동상은 動的(동적)이고 야성이 넘치며 指向點(지향점)이 있다. 밤이 되면 김유신의 청동騎馬像은 조명을 받아 언덕 위에서 빛난다. 환하게, 웅장하게. 어릴 때부터 이를 보고 자란 경주인들 가운데서 한국 주도의 자유통일 과정에서 김유신처럼 主役이 될 인물이 나올지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엔 아산 현충사를 확장하여 聖域化함으로써 이순신의 비장한 생애를 기리려 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선 경주에 관심을 기울였다. 남북통일의 시기에 신라의 삼국통일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그런 뜻을 담은 기념물과 교육장을 경주에 많이 만들었다. 이순신은 군인을 알아주지 않는 조선조에 태어나서 悲壯(비장)한 생애를 살았다. 김유신은 군인을 알아주는 신라에서 태어나 통일大業의 주인공이 되었다. 79년의 장엄한 생애였다. 네 왕을 모셨고, 40년간 兵權을 잡았으나 쿠데타를 하지도, 제거당하지도 않았다. 삼국사기의 著者 김부식은 신라가 김유신이 하자는 대로 밀어주었으므로 김유신과 신라 사이엔 틈이 없었다고 평하였다. 김유신이란 巨人을 알아준 신라 지배층의 분위기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였다. 서기 660년 황산벌에서 계백의 백제군 5천 결사대를 만나 苦戰(고전)하던 김유신의 신라군은 두 청년 장교 관창과 반굴을 특공대로 출전시켜 희생시킴으로써 사기를 올리는 전술을 썼다. 관창과 반굴은 김유신 바로 밑에 있던 부사령관 두 사람의 아들이었다. 김유신은 아들인 원술이 고구려 군에게 패하여 살아서 돌아오자 父子관계를 끊었다. 김유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를 때 김유신의 부인은 문상 온 원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모진 公的 마인드가 신라의 통일정신, 그 핵심이었다. 오늘 군 복무 경험이 없는 鄭雲燦 총리는 노무현과 비슷하게 양극화를 선동하는 연설을 하고, 용산방화사건 현장을 찾아가 농성중인 유족들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잘잘못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투의 말도 했다. 선거운동을 하는 건지, 國政운영을 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모든 조건은 자유통일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이런 대통령과 이런 총리가 있다면 찬스를 놓치게 될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더욱 김유신이 그리워진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상(彫像)에 역사와 혼을 담은 수월 김만술 선생님 故최용주/(전)신라문화동인회원, 경주상업고등학교 미술교사 경주 시가지 북쪽에 있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고성 숲 동쪽의 큰 무덤같이 생긴 둥그런 산인 독산위에 말 탄 모습의 장군상이 세워져 있으니 유명한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다. 이 씩씩하고도 늠름한 모습의 동상을 만든 수월 김만술 선생이 돌아가셨다. 1996년 2월 22일, 음력 병자년 정월 초나흗날, 동국대 경주병원에서 영면하셨으니 향년 86세이시다. 한 평생 조각에 온 정열을 쏟아 부으시고, 동남산자락 새각단 작업장에서 생애의 마지막 작업으로, 경주의 예술가들 모습을 만들어 2 천여 평의 대지위에 조각공원을 만들고 싶어 하시더니, 마지막 꿈은 이루지 못하신 채 눈을 감으셨다. 황성공원 김유신 장군 동상 살아생전에 “나보고 조각가라 하는데... 실제는 돌이나 나무덩어리를 파 들어가서 만드는게 조각인데 나는 주로 흙을 빚어 만들어 거기에다가 ‘가다’-우리 세대들은 일본말 찌꺼기가 입에 배어있단 말이야.”“아니 우리말로는 거푸집이지, 그 거푸집에다가 청동이나 석고반죽을 부어 만드는 걸 주로 만들었지 조각이라고 하기보다는 소상이라는 말이 적당하지, 만드는 건 한가지니깐 보통 조각이라 하는데, 수없이 많은 소상을 만들고 청동을 부어 상을 만들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니 뭐니 해도 김유신 장군 동상이지. 김유신 장군 동상은 두 번 만들었는데, 1960년대 처음 만들 때는 모든 게 다 어려울 때였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던 때라 경주에 신라문화제도 열리고 하는데, 그 지방 인물의 동상은 그 지방 조각가가 만들도록 하는 방침이 있어서 서울사람 제쳐놓고 내가 만든 거지. 혼자 하기에는 일이 벅차서, 그 왜 이북에서 내려온 시몽 현성각이라고 있지. 그 시몽하고 같이 만들었지. 그런데 그 뒤에 천마총이 발굴되고 황남대총이 발굴되어서 신라시대의 많은 마구류들이 출토되었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만든 마구류, 장신구에 빈약한 부분이 많더란 말이야. 그래서 다시 만들게 되었지. 그게 1976년이었거든. 처음에는 바다 쪽으로 보도록 세웠다가 새로 만들게 되면서 대륙을 향하도록 세웠는데, 어떤 사람은‘북쪽 공산당을 쳐 부신다고 그쪽으로 향해 칼을 뽑아들고 있느니’하는데 그런게 아니야. 이건 잘 들으라고! 신라가 강한 고구려와 백제의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남을 라고 안간힘을 쓸 때에, 백제가 신라 변경을 자꾸 침범하여 여러 성을 뺏고 못살게 하는데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그래서 백제를 반격 하려고, 김유신 장군이 지금의 건천 작성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백제왕은 은근히 걱정이 되는 거야. 김유신이 지혜롭고 용맹스럽다는 소문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야. 그 때 백제왕에게는 한 딸이 있었는데, 지례가 뛰어나고 생김새도 아름다웠으며 또한 여러 가지 짐승모양으로 둔갑 할 줄 아는 재주까지 있었다는 거야. 이름은 계선인데 이 계선공주가 아버지의 걱정거리를 눈치 채고 말씀드리기를, ‘아바마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사옵니다. 우리 백제는 땅이 넓고 기름져서, 곡식이 풍족하여 모든 백성들이 아바마마의 덕을 칭송하오며 충성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거기다가 우리에게는 저절로 적을 물리치는 자용병기가 있사오니 만에 하나라도 판단을 잘못하고 김유신일 쳐들어온다 하여도 걱정 할 것 없사옵니다. 그러나 제가 가서 적군의 수는 얼마나 되며 무기는 어느 정도이고, 사기는 어떠한지 살펴보고 오겠나이다.’하더니 땅에 곤두박질을 하여 까치로 변해 신라 땅으로 날아왔다는 거야. 어때? 이야기가 되는 거지? 그 때 토성 안에서는 작전회의가 열렸는데 장막 앞에 세워둔 가장 높은 대장기의 깃대 위에 왠 까지가 날아와 ‘깍,깍’하고 우는 거야. 장병들이 모두 좋지 못한 징조라 여기고 있는데 장막 속 에서 나온 김유신장군이 칼을 쑥 뽑아들고 온 몸의 정기를 칼끝에 모아서는 광채 나는 두 눈으로 까치를 향해 쏘아보니까, 까치가 힘없이 땅에 떨어지더니 아름다운 백제 공주의 모습으로 변해 장군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더라는 거야. 이건 작성에 얽힌 전설이지만, 나는 김유신 장군이 온 몸의 정기를 모아 까치를 노려보며 칼날을 겨눈 그 순간이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어서 그걸 나타낸 거야. 허허”하고 말씀하셨지요.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운전면허증 소지자 선생님은 평소에 오토바이를 타시거나 소형차 프라이드를 타고 성건동 경주여고 앞의 살림집과 통일전 남쪽의 작업실을 왔다 갔다 하셨지요. “지금 경주 사람 가운데는 내 운전면허증이 제일 오래 된 기라. 이거 보라카이. 소화 연호로 적힌 건데 서기로 치면 1939년도 꺼라. 자네는 그 때 아직 엄마 배속에서 나올 생각도 안할 때지?” 이렇게 농담을 섞어가며 이야기는 계속 되었지요 “일제 때 운전면허 따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치나 어려웠는기라. 그라고 운전수 인기가 대단했지. 이 이야기는 자주 하는 이야기고... 내가 우예가 조각하는 사람이 되었는고 하면, 어릴 때 보통학교, 요새 초등학교 말이야, 거기 다니는데 다른 거 보다는 흙으로 만드는 게 우예 그래 재미가 있었지, 밥만 묵고 만들기만 했지. 그 때 공작을 수공리라고 했는데 그 수공선생님이 나를 얼마나 칭찬을 하는지... 그래서 신바람이 나서 더 만들었고 그 분야에서는 나를 따를 사람이 없었지. 그 때 우리 아버지는 재목 용달소를 하셨거든. 요즘 치면 목재소지. 그래서 나무토막은 흔했는기라. 어른들 눈에 안 띄는 고방 창고 같은데 물건을 숨겨놓고 만들었지. 그러다가 직업을 가지려고 운전을 배운거지. 운전시험에 합격하니 신문에 발표가 났는데 내 이름이 있는 기라.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그 신문지를 오려서 수첩에 넣고 다니면서 면허증이 나올 때까지 써 먹은 기라. 임시 면허증이라 할까? 순사한테 그걸 보이면 알았다고 경례까지 척 하더란 말이야. 얼마나 신이 났다고.거기다가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도락구, 그 때는 트럭을 ‘도락구’라고 했지. 그 놈을 몰고 지나가면 동네 처자들이 빨래하다가도, 나물 캐다가도 손을 흔들고 야단이었지. 요즘 파일러트 인기 유가 아니었지. 그 때 인연인 있어 골라골라 만난 사람이 내 마누라야. 안타깝게도 자기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갔지만.” 그러시고는 술을 한잔 쭉 들이키셨지요. “무슨 이야기까지 했더라?” “처자들이 주렁주렁...”“알았다. 그래서 짐 도락구 몰고 다니면서 좋은 흙만 보이면 무조건 차 세워놓고 가마니에 퍼 담고는 저녁에 여관에 가서 밤중에 그 흙으로 소상을 만들었지.운전이 본업인지 소상 만드는 게 본업인지... 하여튼 두 가지를 같이 하니 어깨에 신바람이 났지. 그래서 내 실력을 인정받아 보자 싶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을 했지. 1942년 21회 선전에 ‘박 군의 상’이 입선되었고, 23회 때는 ‘와다나베씨의 초상’이 입선되기도 했지. 이 와다나베씨는 청진과 경주를 왔다 갔다 하는 토목공사 업자였는데 우리 목공소와 거래를 한 사람으로 그 분이 나를 보고는 ‘이런 예술가가 전쟁에 나가 죽으면 국가적 손실이야’하면서 여기저기 손을 써서 나를 징용에 끌려가지 않도록 해준 은인이었지. 환쟁이 덕 톡톡히 본 거지. 그 후로는 집안에서도 내가 만드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지. 해방, 요새는 광복이라 카더라 마는, 후에는 다 어려울 시절이었지만 운전수 인기는 떨어지고 시골 예술가는 빌어먹기 알맞고 그래서 가정을 버려두고 서울로 올라갔지. 행여나 서울가서 큰물에 놀면 조각으로 먹고 살 길이나 있나 해서 말이야... 그 때 내 마누라 고생 많이 시켰지. 애들은 여섯인데 서울 간 남편한테서는 돈 한 푼 안 오지. 지금 내가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하지마는 말도 마소. 그래서 밀주 같은 거 해 팔고 나무 해다 때고, 포시랍게 큰 마누라 죽을 고생을 했지. 그래서 마누라한테 죄지은 사람이 되어 살아있을 때는 어지간히 내 기분에 안 맞아도 내가 참고, 내가 머리 숙이고, 웃고 지냈지. 그런 마누라도 나만 두고 먼저 가버리고... 이제 남은 세상 무엇 하나 남겨야겠다 싶어 이렇게 경주에서 살다간 예술가들 모습을 만들어 저기 서출지 못 가에 모셔두고 싶다네...”라고 하셨지요? 물처럼 흐르고 달처럼 살아오신 길 수월 선생님! 물처럼 흐르고 달처럼 살고 싶어 수월이라 하셨지요. 육신은 가셨어도 선생님이 심혈을 부어 만드신 작품은 매일 대하고 있답니다. 제가 봉직하고 있는 학교, 경주상업고등학교 양지바른 정원에 모셔진 수송 김경제 선생 동상을 들며 날며 대합니다. “나하고 잘 알고 지내던 김교장 모습은 내가 만들어야지”하시면서 20여년 전 만드셨던 그 모습을. 오늘은 하루 종일 선생님의 체취가 서린 데를 보았습니다. 경주여자고등학교 동쪽 길 건너 남향집에 들렀습지요. 선생님이 안 계시는 줄 알면서요. 담이랄 것도 없는 나지막한 경계 표시. 시가지 도로마다 꽃향기 나도록 만드신 대형 화분. 연꽃잎을 새겨 만든 시멘트 화분 몇 개를 담 삼아 둘러놓고 살던 집.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선생님이 계시는 표시로 프라이드가 정차해 있었건만 오늘은 보이지가 않더군요. 운전면허 최고참을 은근히 뽐내시며 몰고 다니시던 그 차, 임자도 차도 없더군요. 초인종을 눌렀지만 인기척은 없었고 오순도순 사시던 건물만 있더군요. 차를 돌리어 동남산 작업장을 찾았습니다. 서출지 못에서 탑마을 사이에 있는 ‘새각단’경주시 남산동 1008의 22번지. 본디 없는 대문이지만 문설주에 씌어 있던 연구원 글씨는 희미하게만 보이고 마당에는 온갖 폐기물이 여기저기 쌓여 있더군요. 작업장의 출입문이야 당연히 잠겨 있겠지만 그래도 평소에 하듯이 손잡이를 잡고 비틀어 보았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창문 있는 데로 찾아가 버려둔 걸상 위에서 발돋음 하고 들여다봤지요. 어쩌면 평상시 꼭 그대로입니까? 긴 의자 위에는 금방 앉았다가 나간 것 같이 깔고 앉았던 담요가 그대로 놓여 져 있고, 탁자 위에는 평소에 우리네들이 찾아가면 내놓으시던 소주잔이며 찌개그릇 등이 깨끗이 정돈되어 그대로 얹혀 있었습니다. 그보다는 여기저기 선생님이 만지시던 흙 칼이며 연장 등이 눈에 띄어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이미 만드신 지홍 박봉수 선생상, 김동리 선생상, 박목월 선생상 등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조각 회전대위에는 만드시다가 흙이 마르지 않도록 비닐자락을 덮어서 매어둔 누구의 모습인지 알 수 없는 상도 세 개나 있었습니다. 작업장에서 말씀하셨지요. 경주 출신 예술가 20여분의 흉상을 제작해 경주시에 기증하여 자랑스런 오늘날의 경주사람들을 후세에 전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100m쯤 떨어진 서출지 못 옆에 2천여 평의 밭까지 마련해 두셨지요. “지금은 가수로 활약하고 있는 아들이 맡아서내 뜻을 이루어 줄런지?”하고 말씀하셨지요. 또한‘조카인 번이는 조각을 하니까 작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을 겁니다.’이런 생각에 잠기면서 밭으로 갔습니다. 지난해 자란 풀대궁이가 허리춤에 채이는 밭이랑에는 생전에 세워두신 시멘트 소상이 몇 구 있었습니다. 서라벌 문화회관 뜰에 세워진 어린이 헌장비 소상은 선생님의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알알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지요. 평소에도 어린이들에게는 친근하셨던 할아버지셨지요. 우스개나 하시면서 말입니다. 한창 나이의 여자가 머리에 비녀를 쫒고 한복치마 저고리를 입고서 꼬치가 쏙 나온 남자애를 오른 팔에 안고, 서있는 아이는 왼 팔로 감싸 안은 그 모습은 1965년에 만드셨더군요. 어린이 헌장비를 만드실 그 즈음, 60년대 초반에 신라문화제가 시작되었지요. 선생님을 비롯한 미술가들이 힘써 가장 행렬에 들고 나갈 도구들을 만드셨지요. 고청 윤경렬 선생, 강통남 선생, 시몽 현성각 선생, 취석 최기석 선생, 김준식 선생, 손수택 선생, 지홍 박봉수 선생, 청릉 최현태 선생, 박재호 선생등 이 솜씨를 발휘하여 ‘김현과 호랑이’에 나오는 탈도 만들고, 신라시대 화랑의 모습, 원화 아가씨도 만들었지요. 문화제가 끝나는 날 밤, 내물왕릉 솔숲에서 열린 ‘새벌 향연의 밤’미술가, 문학가, 국악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위대하신 문화 선사님들께 잔을 올리고 다 같이 어울려 취하도록 마시기도 했지요. 파장이 되어서는 손수 만드신 탈바가지를 덮어쓰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 장사하는 집에서는 막걸리 동이를 길가에 내어놓아 거저 퍼마시고 가게 하기도 하였지요. 그런 집 가운데 하나가 선동 집 이었지요. 새벽마다 미추왕릉 동쪽에 있는 해장국집인 선동 집에는 많은 단골들이 만났었지요. 그 때는 전화도 귀 할 때라 그 집이 사랑방이자 연락처였다지요. 취석, 시몽, 삼성방, 연극하던 황선생, 때때로 김선생, 박선생도 다니셨지요. 선동 아지매는 이런 말을 자주했지요. “아이고, 수월선생님 고맙지! 내 딸아이 시집보내는데 돈이 없어 쩔쩔 맬 때, 그 어른이 보증을 써줘서 생광스럽게 돈을 빌렸지. 그 많은 손님 가운데 보증 설만한 유지도 드물었고 설사 형편은 괜찮더라도 우리 같은 대포장사한테 뭐 믿고 보증 서 주노. 그런데 조각가 할배 고맙기도 하지...”흔감해 하며 손님들에게 이야기했지요. 이제는 그 해장국집도 다른 업종으로 변했고 단골손님들도 다 어디로 가고 흩어져 버렸지요. 선생님 장례 때는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명복을 빌었습니다. 20년도 넘는 시몽 현선생의 장례식과 선생님의 장례식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홀몸으로 월남해서 고생고생 하시다가 빈 방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현선생을 위해서 수월선생님께서 상주 노릇, 호상 노릇 다 하셨시지요. 모든 일 다 떠맡아 미협회원들과 함께 도당산 서쪽에 북녘을 향하여 묻어드리고는, 통일이 되면 가족들이 찾을 수 있도록 비석도 세워야 된다면서 세운 빗돌 앞에서 1년에 한 번씩 소주잔을 부어 드리곤 했지요.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처럼 만날 수 있다면 먼저 가신 경주 분들 모두 만나서 우스개 소리로 일동을 웃기시겠지요.삼가 명복을 빕니다. http://www.chogabj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