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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최부가 쓴 서호의 전경을 마저 읽어 보자.
< 소공제는 가운데에 6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정덕관(旌德觀)은 소공제의 제1교 아래에 있었다. 원소(袁韶)가 주청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전당의 명인 허유로부터 장구성(張九成)까지와 절부(節婦) 5인등 39인을 취하여 전기를 적고 사당(선현당, 先賢堂)을 세웠다. 풍낙루(豊樂樓)는 성의 서쪽 용금문(湧金門) 밖 서호의 기슭에 있었고 그 북쪽에 환벽원(環碧園)이 있었다. 옥련당(玉蓮堂)은 용금문의 성 북쪽에 있었고, 문안에는 용금지(湧金池)가 있었다. 옥호원(玉壺園)은 전당문(錢塘門) 밖에 있었으며 소동파가 남의당(南漪堂)의 두견화(杜鵑花)를 읊은 곳이다. 문의 서쪽에는 선득루(先淂樓)가 있었다. 운동원(雲洞園)은 소경사(昭慶寺)의 북쪽에 있었고 꽃과 버들이 섞여 있었고 가운데에 부인의 묘가 있었다. 석함교(石函橋)는 수마두(水磨頭)에 있었는데 백낙천(772~846)166)의 호석기(湖石記)에 이르기를 ‘전당은 일명 상호(上湖)라 하며 북쪽에는 석함(石函)이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었다. 총의원(摠宜園)은 덕생당(德生堂)의 서쪽에 있었으며 소동파의 시에서 ‘옅은 화장과 짙은 화장이 모두 서로 알맞다’의 두 글자를 따서 어서(御書)로 당의 액자에 썼다. 단교(斷橋)는 총의원에 서쪽에 있었으며 소위 ‘단교의 지는 해에 오사모(烏紗帽)를 벗었다’는 것은 이것이었다. 서석두(西石頭)는 석함교의 서쪽에 있었으며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바다에 배를 띄었을 때 배를 닻줄로 매었던 곳이다. 고산(孤山)은 서호의 고산로(孤山路) 서쪽 산의 동쪽에 있었는데 임화정(林和靖. 즉 林逋)이 숨어살던 오두막집의 옛터와 무덤이 있었다. 삼현사(三賢祠)는 소공제 제3교의 아래에 있었으며, 곧 백문공(白文公, 백낙천)·임화정·소문충공(蘇文忠公, 소식)의 사당이었습니다.>
최부가 쓴 글을 기준 삼아 현 지도와 비교를 해보았는데 소제에 다리가 6개 있다는 것과 백제에 나오는 단교 석함교와 고산 말고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이를테면 소제의 6개 다리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순차적으로 영파(映波)、쇄란(锁澜)、망산(望山)、압제(压堤)、동포(东浦)와 과홍(跨虹)이다. 최부의 글에 따르면 정덕관(旌德觀)은 소공제의 제1교 아래라 하였으니 영파교 아래에 정덕관이란 표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풍낙루,옥호원, 운동원등도 마찬가지로 찾을 길이 없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최부의 글에는 제방 하나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분명히 서호에는 제방이 세개다. 백제 소제 그리고 양공제.양공제는 소제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서호는 개략 남쪽의 남병산록에서 북으로 서하령아래에 이르는 제방으로 압제를 통해 거룻배가 지나갔다는데 지금도 원형이긴 하지만 서쪽으로 양공제가 하나 더 생겼다. 그런데 최부의 글에는 전혀 이런 말이 없으니 적어도 최부가 오기전 해인 1487년까지는 양공제는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료를 찾아 보았다. 서호에 '양공제"를 만든 사람은 명나라 홍치연간의 항주지주 양맹영이다. 그는 아울러 서호의 흙을 준설하여 소제를 증축하였다. 최부가 항주에 다다른 해가 홍치 원년이니 최부가 떠나고 난 후 양공제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소동파가 만든 후 수백년이 지났는데 그대로 일 수는 없다. 즉, 오늘날 소제의 아름다움은 소동파 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고 더더욱 소제 옆을 준설하다보면 지금 최부가 적어 놓은 명소들은 자연 없어지거나 탈바꿈을 겪게 된다.
이에 반해 백제는 새로운 제방을 짓지 않았다. 그 덕분에 단교, 고산, 석함교라는 말은 원형 그대로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그렇다고 서호 안에 진흙으로 제방을 만들고 다양한 나무와 꽃을 심어 현재까지도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경치를 선사한다는 의미로서의
소제춘효(서호 십경중 일경)가 달라질 리 있겠는가. 남송
때
소제춘효(苏堤春晓)를
영파교(映波桥)는
화항공원(花港公园)과
인접해
있고
비
내리
듯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
있고
쇄란교(锁澜桥)는
가까이서
보면
운치 넘치는
요즘에 말하는 서호 십경을 잠시 떠올려 본다. 이르는 순서는 잘 모르겠지만 백락천이
만든 물 위에 걸친 아취형 돌다리에 눈 쌓인 모습(단교잔설).
호수 안에 외로히 떠있는 고산(孤山)의 누대에 뜬 가을 달(평호추월). 연꽃
활짝 피는 5월 술집 뜨락에서 피어난 술 향내가 정원의 연꽃 향기와 함께 바람에 떠다니는 기막힌 분위기(곡원 풍하).소동파가
만든 여섯 개의 아름다운 다리 아래로 봄날 물안개 피는 새벽,물오른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가운데 하얀 북숭아 꽃잎이 살짝 물 위에 떠 있는
경치(소제춘효). 추석날
배를 띄우고 달과 인공섬인 소영주(小瀛洲) 석등에 켜진 불이 셋으로 보이는 모습(삼담인뤌). 서호
남쪽 호반의 정원에 모란꽃이 활짝 피고,화려한 색 뽑내는 비단잉어 노니는 모습(화황관어). 남녂
골짜기에 운무가 끼어 마치 구름에 복고봉 봉우리가 꽃혀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쌍봉십운). 석양의
남병산(南幷山) 정자사(淨慈寺)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남병만종). 우뚝
솟은 영봉산(靈峰山) 뇌봉탑(雷峰塔) 너머로 지는 저녁
노을(뇌봉석조). 물
오른 버들잎이 봄바람에 살랑일 때 듣는 꾀꼬리 울음소리(유랑문앵).
백제의 단교잔설을 따라 평호추월에 이르면 호수 속 높이 38미터 섬 고산(孤山)이 나온다. 방학정이라 부르는 북송 때 가난한 시인
임화정(林和靖)이 20년 동안 은둔한 곳이 나온다.'성긴 그림자 기울어 얕은 물가 더욱 맑은데,그윽한 향기 살포시 황혼 무렵 달에 걸렸네‘라고
읊은 그의 시는 매화를 노래한 시 중에서 천하 절창으로 꼽힌다.그가 매처학자(梅妻鶴子),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고 고산에 살았다는
고사 때문에,지금도 항주의 장사치들은 임화정이 학을 부를 때 불었다는 작은 풀피리를 1위안에 팔고 있다. ‘일
위안 양꺼!’아마 지금은 그 가격도 열배는 오르지 않았을까싶다. 이러한
풍경에 목석인들 반하지 않을까. 이런 풍경에는 여인이 또 꼭 존재한다. 서시말고 소소소(蘇小小)라는 여인을 아는지 모르겟다.
소소소(蘇小小)는 남북조(南北朝) 시대 제(齊)나라 여성으로,
항저우[杭州]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다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기생이 되었다. 명기(名妓)로 이름을 날리던 소소소는 명문가의 아들 완욱(阮郁)을 처음 만나 인구에 회자된
시를 남겼다.
소동파의 절창 중의 절창 '서호상에서 한잔 할 때 처음엔 맑고 나중에 비(飮湖上初晴後雨)' 란 다소 긴 제목의 시.
水光澰灩晴方好(수광렴염청방호) 물빛이 찰랑이고 반짝이니 갠 날이 마침
좋고 이 시가 항주의 전설적인 미인 서시의 미색을 아름다운 호수 서호(西湖)와 견주어 읊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왕조운을 두고 노래한 것이라고 날하는 이들도 있다. 왕조운이 누구일까. 최부의 글에도 나오는 여인이다. ' 운동원(雲洞園)은 소경사(昭慶寺)의 북쪽에 있었고 꽃과 버들이 섞여 있었고 가운데에 부인의 묘가 있었다.' 라는 구절에 나오는 부인이 바로 왕조운이다. 누구는 소동파가 여복이 많다고도 하고 파란만장했다고도 하는 데 나는 둘 다 일리가 잎다 싶다. 소동파의여인은 모두 넷인데 모두 왕씨 성을 가진 여인들이다. 나는 그의 평전을 읽으며 첫번째 부인이 제일 안쓰럽다여겼다. 그녀는 동파가 출세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먼 길을 떠나 같이 산 경험이 별로 없는 여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조강지처를 여의고 남겨 놓은 시가 와락 내게 깊이 닿는다.
소동파와 네 여인, 그 이야기를 이참에 남겨 둔다.
소동파가 열여덟에 결혼한 첫째 부인의 이름은 왕불(王弗).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으나 착하고 헌신적이어서 소동파가 평생 잊지 못하였다. 왕불이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맞이한 두번째 부인은 왕불의 사촌 여동생인 왕윤지(王潤之)다. 소동파가 지방을 전전하던 이십 여년을 묵묵히 뒷바라지 한 둘째 부인마저 죽자, 소시적 항주(杭州)에서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 반해 기적에서 빼내 준 왕조운(王朝雲)을 첩실로 삼아 오십대 후반을 함께 하는데, 이 여인 또한 34세로 소동파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평생의 정적 왕안석과도 극적으로 화해하고 친하게 된 뒤 몇년이 못되어 죽었듯이, 그가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모두 오래지 않아 다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래서일까, 생을 초탈한 그가 말년 쯤에 그의 동생(蘇轍, 역시 唐宋 8대가)에게 보낸 시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雪泥鴻爪)의 시가 달리 느껴진다.
人生到處知何似(인생도처지하사) 인생 역정이란 게 무엇과 같은지 아시는가 應似飛鴻踏雪泥(응사비홍답설이) 날아가던 기러기가 내려 밟고 지나간 눈벌 같은 거라네 泥上偶然留指爪(니상우연류지조) 우연히 진흙벌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만 鴻飛那復計東西(홍비나부계동서) 그 기러기 어디로 날아갔는지 다시 알아 무얼하게
소동파가 18살에 맞아들인 첫 번째 부인 왕불(王弗, 당시 16세)은 글을 아는 여인으로, 남편이 과거공부하는데 도움을 줄 정도로 똑똑했으며 사람을 보는 안목이 깊어 교우관계도 조언하였다 한다. 그러나 결혼한지 11년 되던 해에 6살의 어린 아들을 남기고 스물 일곱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십여년을 같이 살았다지만 소동파의 방랑벽과 계속된 지방 좌천으로 실제로 함께 한 기간은 불과 3,4년에 불과하였다. 그 후 아버지(蘇洵, 역시 唐宋 8대가) 마져 돌아가시어 고향인 밀주(密州, 산동성)에 안장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할 때 부인도 함께 밀주로 이장을 하였다. 부인과 사별한지 10년 쯤 후 어느날 꿈에 죽은 아내가 나타난다. 그때의 쓴 글이 '강성자(江城子)'란 제하의 글(宋詞)인데 한문으로 된 글임에도 내 마음을 울리고 절절하게 다가온다. , 江城子(강성자) 十年生死兩茫茫(십년생사양망망) 삶과 죽음으로 갈라 선지 10년으로 아득한데 不思量 自難忘(불사량 불난망) 생각을 말자 해도 스스로 잊을 수 없네 千里孤墳 無處話凄凉(천리고분 무처화처량) 천리 외로운 무덤, 쓸쓸함을 말할 데 없네 縱使相逢應不識(종사상봉응불식) 설령 나를 만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하겠구려 塵滿面 鬢如霜(진만면 빈여상) 세상 먼지에 찌든 얼굴, 머리는 서리처럼 하얗게 변해 夜來幽夢忽還鄕(야래유몽홀환향) 밤새 깊은 꿈속에서 문득 고향집으로 돌아갔는데 小軒窓 正梳粧(소헌창 정소장) 작은 집 창가에서 그대는 막 머리를 빗고 있었지 相對無言 惟有淚千行(상대무언 유유루천행) 서로 대하고는 말없이 하염없는 눈물만 흘렸네 料得年年腸斷處(료득년년장단처) 해마다 애끊는 곳을 헤아려 보니 明月夜 短松崗(명월야 단송강) 달빛 환한 키작은 소나무 언덕 (그대 무덤)
그리고 소동파가 가장 사랑했다는 제3의 여인, 왕조운(王朝雲). 소동파가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다 고도 항주(杭州)로 좌천되어 통판(通判)이란 벼슬을 하고 있을 때(1071~74, 그의 나이 35~38세),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춤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당시 12세였던 그녀를 기적에서 빼내 시첩(侍妾)으로 데리고 있게된다. 그녀의 이름을 소동파가 직접 지어주기도 하였다. 바로 '조운(朝雲)'이란 이름.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회왕(懷王)이 꿈에 어떤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녀가 떠나면서 저는 아침에는 구름(朝雲)이 되고 저녁에는 비(暮雨)가 되어 이 양대(陽臺)에 항상 머물러 있을 거라고 한 고사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소동파가 호북(湖北)의 황주(黃州)로 좌천되고 남쪽 광동(廣東)의 혜주(惠周)로 유배되어 어려움을 겪을 때, 다른 첩들은 뿔뿔히 달아났지만 왕조운만은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킵니다. 황주에 있을 때는 소동파를 위해 유명한 '동파육(東坡肉)' 요리를 만들어주기도 하지요. 혜주로 간 지 3년째 되던 해(소동파 나이 58세) 왕조운은 남방의 풍토병으로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고향 항주와 같은 이름의 서호(西湖, 광동성 惠州 소재) 에 묻힌 것이다. 소동파가 먼저 죽은 왕조운에게 헌사한 시(西江月梅), 玉骨那愁瘴霧(옥골나수장무) 옥 같은 (매화) 줄기 남방의 습한 안개를 품고도 氷姿自有仙風(빙자자유선풍) 얼음 같은 자태 스스로 신선의 풍골을 지녔네 海仙時遣探芳衆(해선시견탐방중) 바다의 신선 때에 맞춰 보내 매화숲을 찾으니 倒掛綠毛幺鳳*(도괘녹모요봉) 초록 작은 새가 거꾸로 매달렸네 *綠毛幺鳳 : 전설 속의 녹색 깃을 지닌 작은 새
素面常嫌粉涴(소면상혐분완) 맨 얼굴에 항상 분단장을 싫어하고 洗妝不褪脣紅(세장붕퇴순홍) 화장을 씻어내도 붉은 입술 지워지지 않아 高情已逐曉雲空(고정이축효운공) 높은 뜻은 이미 새벽 구름을 하늘로 쫒아 버리니 不與梨花同夢(불여이화동몽) 배꽃과 더블어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조운이 묻힌 곳에 소동파는 육여정(六如亭)이란 정자를 짓는데, 六如란 그녀와 지낸 시간이 마치 如夢 如幻 如泡 如影 如露 亦如電. 즉, 꿈 같고, 환영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무릇 인생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도 같다. 연암 박지원이 그를 닮았다고 하고 또한 한유도 사주팔자가 같다고 했는데 풍기는 시 느낌도 서로 닮아 있다. 그런데 최부는 한유도 그렇고 소동파도 고스란히 표해록에 모셔두고도 있다. ************************** 아무튼 소동파의 명석한 두뇌로 세상을 보는 눈도 어쩌면 그리 연암과 똑같이 닮은 것인지 나는 놀란다. 그의 날카로운 눈을 한 번 생각하며 읽기 바란다. (소동파蘇東坡의 물부충생物腐蟲生)
물부충생物腐蟲生은 '생물이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긴다'는 뜻으로, 사람을 의심하고 나서 헛소문을 믿는 것을 말한다. 북송北宋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지은《범증론范增論》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소동파는 "생물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기고物必先腐也而後 蟲生之, 사람도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 남의 모함을 듣는다人必先疑也而後 讒入之"고 함으로써 항우項羽에게 버림받은 범증范增을 묘사하였다.
진秦나라 말년, 진시황이 죽고 2세 황제가 즉위하자, 곧 반란이 터졌다. 범증은 이때 반란을 일으킨 항량項梁의 모사謀士였는데, 항량이 죽자 유업을 물려받은 항우項羽(기원전 232∼기원전 202)의 모사가 되었다. 항우는 "힘이 항우장사"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천하제일의 장사였다. 그러나 항우의 지략智略은 그의 힘이나 용맹에 미치지 못하였다. 범증은 아직 항우에 미치지는 못하나 날로 세력이 커 가는 유방劉邦(기원전 247?∼기원전 195)을 크게 경계하였다. 그야말로 항우의 최대 적수임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과신한 항우는 유방 정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범증은 몇 번이나 유방이 더 크기 전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겨우 항우의 승낙을 받은 범증은 유방을 홍문鴻門의 연회에 초대하여 제거할 만반의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연회에 참석한 유방의 공손한 태도에 마음이 오락가락한 항우가 끝내 유방을 죽이기로 한 범증과의 약속을 모른 척 하여 유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극적으로 살아 나온 유방은 범증이 있는 한, 항우를 꺾기 어려움을 절실히 깨달았다. 유방은 각지에 첩자를 풀어 범증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려 항우가 범증 사이를 이간시키려 했다. 결국 여기에 말려든 항우는 범증에 대한 소문을 믿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 오래지 않아 병이 들어 쓸쓸히 죽었다. 항우 역시 유방에 패하여 사랑하는 여인 우희虞姬와 군사를 모두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말로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후일 소동파 소식蘇軾은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생물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기고, 사람도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 남의 모함을 듣는다"고 함으로써 항우에게 버림받은 범증을 묘사하였다.
▲ 중국 절강성 항저우시에 위치한 소호십경 중 쑤디춘샤오(蘇堤春曉, 소제춘효).
무엇보다 항저우 관광의 백미인 서호(西湖)가 있는데, 서호는 절경이 유명한 호수로 옛 중국의 미녀 서기(西施)만큼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2011년 6월에는 서호가 중국뿐 아니라 세계의 원림(園林) 설계에도 모범이 된다는 평가를 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둘레가 18k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와 더불어 수평선이 펼쳐져 있는 서호 주변으로는 십경(西湖十景)으로 불리는 필수 관광 포인트가 있다. 이 십경은 남송시대(1127~1279년)부터 선정돼 지금까지는 다양한 버전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버전이 지상의 천국이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약 9백년의 세월을 보내며 업그레이드된 현재 항저우의 십경은 과연 어떤 곳인지 총 2편의 연재를 통해 소개한다.
![]() ▲ 중국 절강성 항저우시에 위치한 소호십경 중 쑤디춘샤오(蘇堤春曉, 소제춘효).
1. 쑤디춘샤오(蘇堤春曉, 소제춘효)
중국의 문학사를 읽다 보면 소동파(蘇東坡)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소동파를 시인이자 문학가로만 알고, 항저우의 시장이었던 것이 잘 몰랐을 것이다.
소동파는 54세 때 항저우 태수(太守, 오늘날 시장과 같음)가 된 후에 시민과 같이 서호 안에 진흙으로 제방을 만들었고, 이 제방을 쑤디(蘇堤, 소제)라고 불렀다. 소제에는 다양한 나무와 꽃을 심어져 현재까지도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경치를 선사한다.
![]() ▲ 중국 절강성 항저우시에 위치한 소호십경 중 취위안펑허(曲院風荷, 곡원풍하).
2. 취위안펑허(曲院風荷, 곡원풍하)
서호는 계절에 따라서 다양한 경치를 보여주는데, 소제가 봄이라면 취위안펑허는 여름을 상징한다.
취위안(曲院, 곡원)은 중국 남송 시대 술을 제조하는 곳으로 근처에 홍련, 백련을 비롯한 희귀한 병체련(并蒂莲)까지 약 100여종의 연꽃을 심어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특히 여름에 바람이 불면 술의 향기와 연꽃의 향기를 혼합돼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 ▲ 중국 절강성 항저우시에 위치한 소호십경 중 핑후츄웨(平湖秋月, 평호추월).
3. 핑후츄웨(平湖秋月, 평호추월)
핑후츄웨는 다른 십경(十景)과 달리 정해진 장소가 없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에 배를 타고 서호 중앙으로 가서 호수를 노닐며 달을 바라보며 즐기는 것을 말한다.
특히 '月到中秋分外明(월도중추분외명, 달이 가을의 가운데 오니 특히 밝도다.)’란 시처럼 핑후츄웨는 가을에 진면목을 발휘한다.
![]() ▲ 중국 절강성 항저우시에 위치한 소호십경 중 핑후츄웨(平湖秋月, 평호추월).
4. 돤차오찬쉐(斷橋殘雪, 단교잔설)
돤차오(斷橋)란 끊어진 다리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실제로 끊어진 다리는 아니다. 서호의 겨울을 상징하는 돤차오는 눈이 올 때 다리 전체가 눈으로 덮여서 멀리서 다리 중간이 끊어진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중국 설화 '백사전(白蛇傳)’ 속에도 돤차오가 등장한다. 설화 속 헤어진 연인이 재회한 장소인 돤차오는 중국 연인들 사이에서 가장 로맨틱한 곳으로 꼽힌다. 현재는 사계절 내내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연인이 함께 걸으며 서로 행복한 미래를 기원하며 약속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 중국 절강성 항저우시에 위치한 소호십경 중 돤차오찬쉐(斷橋殘雪, 단교잔설).
한국에서도 유명한 중국 설화 '백사전(白蛇傳)’ 속에도 돤차오가 등장한다. 설화 속 헤어진 연인이 재회한 장소인 돤차오는 중국 연인들 사이에서 가장 로맨틱한 곳으로 꼽힌다.
현재는 사계절 내내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연인이 함께 걸으며 서로 행복한 미래를 기원하며 약속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 중국 절강성 항저우시에 위치한 소호십경 중 난핑완중(南屛晩鐘, 남병만종).
5. 난핑완중(南屛晩鐘, 남병만종)
난핑완중은 십경에 가장 먼저 지정된 관광지로 중국 북송시대(12세기 전반)의 화가인 장쩌돤(張澤端, 장택단)이 그린 <난핑완중도(南屛晩鐘圖)>를 통해 유명해진 곳이다.
![]() ▲ 중국 절강성 항저우시에 위치한 소호십경 중 난핑완중(南屛晩鐘, 남병만종).
서호의 남쪽에 있는 난핑산은 높이가 불과 100m인데, 길이가 몇 킬로가 된다. 산속에는 절이 많아 해가 질 때면 절에서 종을 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 '난핑완중’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또한 난핑산에는 절이 많다고 해서 '불국산(佛國山)’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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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