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었다면
큰형님뻘이었을
큰누님뻘이었을
아무개의 子, 혹은 女라고만 새겨진 위패 앞에서
겨울바람에 떨어져 누운
동백의 흰 눈동자를 떠올렸습니다
뼈와 살이 채 자라기도 전에
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스러져
까마귀 모른 제삿날에도
술 한 잔 받아보지 못하며
애써 잊혀진 목숨들
거친오름의 그림자를 밀어낸 양지바른 터에
복수초 노란 빛깔보다 선연한
이름씨 하나씩 꼭꼭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이 섬에 피는 꽃과 바람들
곶자왈 숨골로 스미는 비와 태풍들
저 이름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4.03.31. -
4월이 오면, 붉은 동백꽃이 떠오른다. 동백꽃은 제주도 4·3을 상징한다. 동백꽃은 겨울에 피는데, 질 때는 통꽃으로 툭, 떨어진다. “동백꽃의 흰 눈동자”는 “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스러”진 사람들의 표상. 오랜 시간 4·3은 금기어였다. 제주도 방언인 ‘속솜허라’는 ‘조용히 해라’는 말. 한 집 걸러 한 집, 국가 폭력에 희생당했지만 무서워서 울지도 못하고, 까마귀조차 모르게 조용히 제사 지내야 했다. 시인은 “아무개의 子, 혹은 女라고만 새겨진 위패”들에 “이름씨 하나씩 꼭꼭 심어”주고 싶다고 고백한다.
속솜하며 살아야 했던 4·3의 이름 없는 붉은 꽃들에 우리 모두 빚을 졌다. “아무개들”의 입속에 갇혔던 말들, 감지 못하는 눈 속에 갇혔던 진실들, 검은 돌처럼 굳은 심장들, 그 위에 “거친오름의 그림자를 밀어”내고, 누운 백비(白碑)가 “복수초”처럼 환하게 이름을 얻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