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이 신바람 나서 불어오던 어느 날 아침 숲길을 산책하다가 멀리 내다보이는 산등성이 위로 바람꽃이 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안개처럼 피어나는 바람꽃이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점점 밀려오는 모양새가 마치 숲속의 습기와 찬 공기를 품에 안고 한바탕 노닐러 온 듯합니다. 이렇게 피어나는 바람꽃은 곧 큰 바람이 닥칠 것을 알리는 자연의 일기예보이기에 오두막으로 돌아가 이들의 신바람 맞을 채비를 했지요. 아니나 다를까 늦은 오후부터 시작된 바람놀이는 밤새 요란하게 숲에서 이어지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잠해졌지만 매일 텃밭과 산을 오가며 즐겨보던 백당나무, 귀룽나무, 고광나무(산 매화)의 흰 꽃잎들을 온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여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밭일하기가 쉽지 않을 때, 특히 산 매화꽃 향기가 콧속에 들어오면 잠시 힘든 일을 멈추고 꽃을 따다 차로 마실까 그냥 꽃으로 볼까 생각하는 것조차 행복이었는데, 그동안 아껴두었던 산 매화꽃 향기를 빼앗겼다는 마음에 아주 잠깐 제 눈꼬리를 올려 얄궂은 바람꽃 뒷자락을 흘겨보았답니다. 이곳에 사셨던 어르신이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오두막 주변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백당나무 열매는 겨울철 체기가 있을 때 먹는 상비약이고 귀룽나무는 무좀 치료에 효과가 있다더군요. 그러나 제게는 약재로 사용되는 나무라기보다 한겨울에도 새빨간 열매가 달려 있어서 흰 눈으로 덮여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숲에서의 고독감을 달래주는 반가운 백당나무랍니다. 그런데 이번 바람에 꽃잎이 모두 떨어졌으니 얼마나 열매를 맺으려나, 순전히 나를 위한 걱정을 해봅니다. 아무쪼록 올해에도 새빨간 백당나무 열매로 저의 겨울이 쓸쓸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여름 햇살을 피해서 마음으로 먹는 여유로운 아침 겸 점심 여름으로 들어가면서 온도가 높아지자 숲속의 온갖 가을 나무들이 다투어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밤나무, 산배나무, 산사나무, 참개암나무, 아카시아나무, 오미자, 산머루, 다래……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제 코를 자극하는 아카시아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며 온 숲을 향기로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내 맘은 왜 이리 앞서만 가는지? 저 모든 아름다운 꽃과 향기가 지고 나면 그 자리에 열매를 맺었다가 가을이면 모든 열매들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을 터인데, 그게 숲의 자연스런 모습인데, 이렇게 미리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왜 그럴까요? 아마도 이렇게 한 철이 가고 한 해가 가면서 덧없는 세월만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제 마음에 물어봅니다. 그러자 심술궂던 바람꽃이 아카시아 향기를 담은 살랑바람을 저에게 보내어 대답해 주는군요.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보내면 좋겠어!” 그동안 텃밭과 집터에 엄청난 번식력을 보여준 아카시아나무가 애물단지였는데 오늘은 꽃향기를 따라 아카시아나무에게로 다가갑니다. “나를 줄게”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니 벌들이 꽃 속에 들어 있는데 어찌나 그 달콤함에 취해 있던지 꽃을 건드리는 저한테는 관심조차 없더군요. 그래서 벌이 앉았던 아카시아 꽃과 벌이 없는 활짝 핀 꽃을 하나씩 따서 먹어보았어요. 그런데 반쯤 핀 꽃 한 송이에 담겨진 단맛과 향이 너무나 진해서 금방이라도 요리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정도로 저를 심하게 유혹하는 겁니다. 아카시아 꽃을 따는 시기가 벌들이 모여드는 바로 이때겠다는 생각이 들기에 서둘러 광주리를 가져다가 벌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신나게 꽃을 따기 시작했지요. 벌들도 꿀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꽃 속에 박혀 있어서 저의 출현에는 관심조차 없더군요. 그러니 벌에 쏘일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어요. 바야흐로 서로를 상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휘어짐이 부드러운 아카시아나무 가지를 장대로 몸 가까이 끌어내리고 연한 끝자락에 피어난 꽃들을 목장갑 낀 손으로 훑어 광주리에 담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두막 주변에 피어난 아카시아 꽃으로만 거의 11㎏을 땄어요. 제법 많은 양이라서 효소도 담고 남은 것으로 아카시아 빵을 구워 우아한 숲속의 브런치를 만들어봅니다. | | | ▲ 아카시아꽃 수수빵 ⓒ용서해 |
아카시아를 이용한 숲속의 브런치 메뉴들 1. 브리치즈를 얹은 아카시아 꽃 수수빵 수수가루 100g, 소금 조금 넣고 끓인 물 70g(여분의 물로 농도 조절), 올리브 오일 1티스푼, 아카시아 꽃 한 줌. 만드는 법 : 끓인 소금물과 오일을 섞은 후, 조금씩 수수가루에 넣으며 익반죽하듯이 반죽한다. 어느 정도 반죽이 뭉쳐지기 시작하면 아카시아 꽃을 넣어 여분의 물을 조금 넣고 반죽을 완성한다. 2. 아카시아 꽃송이 튀김 3. 아카시아 꽃 차 4. 어수리 오믈렛 | | | ▲ (왼쪽부터) 아카시아 꽃 튀김과 꽃 차 ⓒ용서해 |
저와 아카시아나무의 인연은 자연 속에서 살아보겠다며 문명의 이기를 들이지 않으리라 결심한 나와 어떻게든지 땅을 훼손하지 않고 아카시아나무의 번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내심을 품어야 했던 나의 만남으로 비롯되었습니다. 1,100고지에 오두막을 지어줄 고마운 친구들과 함께 첫발을 들여놓던 날, 주변을 살펴보니 사방이 온통 아카시아나무로 덮여 있어서 집터는 물론 텃밭을 만들 엄두도 낼 수 없었지요. 아카시아나무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긴 뿌리를 파다 보면 여러 갈래로 번지면서 성장하는 그 힘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이쪽 나무의 뿌리를 다 캤다 싶으면 어느새 저쪽 나무의 뿌리에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결국 아카시아나무를 없애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텃밭과 집터를 장만해야 하는 저로서는 땅속 깊이 뿌리박은 아카시아나무가 몹쓸 나무로 될 수밖에요. 그런데 숲 전체가 온통 아카시아 꽃향기로 가득한 오늘, 그렇게도 밉상이던 아카시아나무한테서 ‘오늘 하루의 행복’을 배운 겁니다. 그러다가 얼핏 이기적인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지만, 어떤 사물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는 미워지고 같은 사물이 제 맘에 드는 짓을 하면 예뻐진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이기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저의 이기심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카시아나무 꽃을 쉽게 따기 위해서 아카시아나무를 베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다른 야생 나무들까지 관리해야겠다고 다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자연에 살면서 자연으로부터 사람다운 삶의 길을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이 지독한 이기심을 벗어버릴 수 있을는지요? | | | ▲ 어수리오믈렛과 아카시아수수빵, 아카시아차 ⓒ용서해 |
밤꽃의 향기에 취해서 아카시아 꽃향기가 사라지면서 꽃잎이 떨어질 무렵, 1,100고지의 숲에서는 야생 밤꽃이 피어날 준비를 하지요. 밤꽃 향기를 맡고 날아든 흰나비들의 팔랑거리는 날갯짓이 마치 흰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흰나비인지 어느 것이 바람에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잎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인형>을 발레단과 함께 공연하던 날 그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음악소리가 들려옵니다. 제 상상 속에서는 호두까기인형이 왕자로 변하여 파티를 하려고 클라라와 함께 과자나라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에 눈이 내리고, 이곳 현실에서는 하얀 꽃잎들이 떨어지는 오두막 방 창가 앞에서 밤꽃 향기에 취한 흰나비들과 숲의 요정들이 춤을 추고 있는 거예요. 밤나무 숲으로 장식된 무대에서 나비 발레리나가 춤을 추는 숲속의 공연을 무료로 관람하다 보니 많은 시간을 무대 위에서 보낸 음악가의 추억이 소박한 웃음으로 제 얼굴에서 피어납니다. 이제 몇 달 뒤 갈색으로 농익은 알밤들이 흙으로 떨어지는 날, 밤을 까면서 오늘을 기억하겠지요. 본인의 의지나 선택에 상관없이 앞에 닥치는 고된 삶을 자연스럽게 찾아온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사람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인생에 얽힌 근본적인 질문들을 가슴에 품고 숲에 들어온 지 벌써 3년을 넘겼습니다. 마음속 질문들에 대한 답을 기다리며 한 가지 소망을 품어봅니다. 동 트기 직전 달빛마저 산을 넘어가면 손으로 만져봐야 자기 몸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칠흑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새벽을 기다리듯이, 자연 속에서 호스피스 요리를 연구하기 위해 음악가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이곳에 들어왔지만 내 존재가 이대로 어둠 속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언젠가 그분이 정한 때에 나를 본디 자리로 되돌려주실 것을 생각하며, 고요하게 제 인생의 동 트는 아침을 기다립니다. 긴 장마가 시작된 숲속에서 산 속에 살면서 가장 한가로울 때가 여름 장마철과 겨울이지요. 이렇게 비 오는 날에는 밭일을 멈추고 빗소리를 들으며 책도 읽고 낮잠도 자다가 부침개라도 부치면 오두막 주변에 기름 냄새가 퍼지면서 혼자 있는 숲속이 풍요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장대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날,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일거리를 찾아보다가 마침 알맞게 삭은 매실청 건더기 걸러낸 것으로 이탈리아식 올리브오일 매실 절임과 양배추를 이용한 겨울철 저장 식품들을 만들어봅니다. 와인에 절인 양배추 : 집에서 드시고 난 와인이 있으면 양배추를 잘게 썰어서 와인을 붓고 돌로 눌러놓습니다. 15일 정도 후엔 알맞게 익습니다. (각 집마다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시기도 다르다는 것을 참고해 두면 좋겠죠.) 독일식 사워크라우트 : 오히려 우리네 사람들 입맛에 이 방법이 좋을 듯합니다. 양배추 1㎏ 양의 0.7%의 소금에만 절입니다. 올리브 오일 매실 절임 : 레몬, 와인식초, 텃밭에 키운 로즈마리, 다임, 민트 등의 허브와 월계수 잎, 고추를 넣고 마지막에 올리브오일로 공기와 차단을 시키면 오래 보관해서 먹을 수 있습니다. | | | ▲ 올리브오일에 절인 매실 ⓒ용서해 |
늙어간다는 것은 올해는 장마가 길지 않아서 숲속에서도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지냈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숲길을 산책하다 보니 벌써 오미자, 산머루 열매가 자그마한 모양으로 파랗게 매달려 있네요. 자연의 생명체들은 마치 누구의 보살핌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 피어날 때와 질 때와 열매 맺어 이듬해에 다시 태어날 씨앗으로 익힐 때를 어쩌면 그렇게 잘도 아는지요. 봄과 여름에 활짝 핀 화려한 시절의 꽃보다는 바람 부는 대로 자연스럽게 한 장씩 꽃잎이 떨어지는 가을의 모습에서 인생을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늙어감의 아름다움을 배웁니다. 텃밭의 배추와 상추에는 어느새 씨앗이 맺혀 있는데, 토종 호박은 주먹만 한 것은 찌개거리로 따 먹고 큰 것은 겨울을 위해 호박고지로 말려놓습니다. 아직 씨가 여물지 않은 호박은 종자를 얻기 위해서 겉이 노랗게 늙을 때까지 따지 않고 놔두기로 합니다. 고추와 토마토도 빨갛게 익어가고 옥수수와 노란 콩도 햇볕을 받으며 익어가고 씨앗을 맺기 위해 늙어갑니다. 저도 제 마음의 씨앗 하나 맺으려고 또한 늙어갑니다. 용서해 교향악단에서 24년간 활동한 플루티스트. 호스피스 센터에서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음악 봉사를 했고, 이들이 먹는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호스피스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환자와 가족들을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 나누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용서와 화해, 평화 속에 보낼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이야기를 담은 저서로 <삶의 마지막 축제>(샨티, 2012)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