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떴다 떴다 차범근 ♪ 날아라 이회택 ♩높이 높이 날아라 헤딩슛 골인 ♬”
뚜렷한 연고팀 하나 없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뒤지지 않았던 대구의 지난 날,
대구 지역 축구의 역사를 함께 한 그곳은 나의 아버지의 학창시절 속 주된 무대였다.
한국 축구계의 스타들이 몸담았던 청구중학교, 청구고등학교.
나의 아버지는 중학교 시절 지금의 현장학습과 같은 취지로 모교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기억 속 조금은 유치하지만 그 시절의 모습은 그대로 담겨진 노랫말, 어떤 팀인지는 모르지만 소리 높여 응원했던 모습.
그때 그 시절의 수줍은 미소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들어나는 모습보단 한 경기 한 경기 소중한 경기를 치러냈던 그곳, 대구시민운동장을 찾았다.
대구시민운동장이 지나온 역사
대구시민운동장은 1948년 4월 20일 개장한 종합경기장으로 59년의 역사를 지켜왔다.
운동장이 자리한 대구광역시 북구 고성3동은 미군 기지였던 곳으로 기지 이전이 후 경기장이 준공되었다. 시민운동장은 주경기장을 비롯해 보조경기장과 야구장, 체육관 등의 시설이 갖추어진 곳으로 지역민의 생활체육과 스포츠 발전을 위해 건설되었다. 주경기장은 24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최대 3만 명을 수용한다. 이 후 1975년 주경기장을 증축 및 개축하였고 1986년 열린 제10회 서울아시안게임과 제24회 서울올림픽 축구 예선을 치러냈다.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 불꽃 튀는 축구 열전의 시작을 알리다
86아시안게임은 한국에서 열린 큰 국제대회로 이 대회에서 우리 축구대표팀은 노수진, 최순호, 박창선, 변병주, 조광래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출전시키며 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둬냈다. 대회에 앞서 출전했던 월드컵에서 강팀과 맞서며 1무2패로 선전했지만 고배를 마셔야만 했던 대표팀은 3개월이 지난 10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결승전에서 2대0으로 승리를 거두며 아시아 최고의 모습을 드러냈다.
주최국으로써 결과도 좋았지만 뒤를 든든하게 받치며 묵묵히 그라운드를 내어준 경기장과 지역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뒤를 이러 88서울올림픽을 개최했다.
88올림픽에서는 감독의 사퇴로 인해 정돈되지 못한 상태에서 출전해 예선 탈락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김정남 감독이 새 사령탑으로 자리를 채웠지만 시간은 짧았다. 우리 대표팀은 소련, 미국과의 대결에서 모두 무승부를 기록하고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노수진이 득점하며 활약하였지만 1 : 2로 패했다. 한국으로써 많은 아쉬움이 남는 대회이지만 정돈된 경기장과 쾌적한 환경으로 예선을 위해 대구를 찾은 외국팀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으며 타 종목에 밀려 자리를 잃은 대구 지역 축구의 발전을 도모했다.
좋은 환경, 그러나 대구 팀의 부재. 그 자리 메운 포항
대구시민운동장이라는 좋은 환경은 있었지만 그 안을 채워줄 팀은 존재하지 않았던 대구.
그러나 가까운 포항을 비롯해 주변 지역 리그 소속팀들이 정기적으로 경기장을 이용하며 대구 축구팬들의 목마른 마음에 단비를 내려주었다. 86년에는 6경기, 87년에는 포항이 홈구 장과 같은 형태로 이용하며 14경기를 치렀다.
포항은 87년 64골이라는 팀 내 최다득점을 만들어내 그 해 대회순위 2위를 기록했다.
현재까지도 포항은 한 해 최다득점으로 64골이 기록되어 있다.
골과의 인연
80년대 프로축구 초반 해트트릭의 선두주자였던 정해원 선수가 대구 열린 유공과의 경기에서 역대 개인 통산 두 번째 해트트릭을 연결하며 골잡이로써의 면모를 드러내어 87년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현대의 임고석 선수와 럭키금석의 박윤기 선수가 역대 통산 900호 골과 1000호 골을 나란히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성공시키며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987년 10월 31일이 포항과 럭키금성의 경기에서 터져 나온 박윤기 선수의 1000호 골은 왼쪽 골 에어리어에서 왼발로 강하게 슈팅, 득점으로 성공시켰다.
한국프로축구의 첫 번째 골과 천 번째 골을 기록한 사나이, 그 두 번째 기쁨의 순간을 대구에서 함께 했었다.
포항이 87년 14경기를 대구에서 치르면서 대구는 포항 득점의 원동력이 된 지역이 되었다.
포항은 대구에서 경기를 가지면 평균 3골 이상의 득점을 올렸으며 현대와 대우, 럭키금성과의 각 1경기를 제외하고 모두 승리하며 이듬해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포항이 90년 포항전용구장을 완공해 더 이상 대구에서 경기를 갖지 않게 되면서 대구는 다시 축구와는 거리가 멀어진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청소년들의 축구 대회로 간간히 경기장을 활용하였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며 아쉬움을 나타냈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 이 후 고조된 한국 축구 속에 새로운 프로축구팀이 탄생했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프로 축구팀 하나 없던 이 곳에 2003년 박종환 감독을 사령탑으로 세운 대구FC가 창단되면서 대구시민운동장의 축구 열기는 다시 한번 고조되었다.
K-리그 명예기자 이솔희
첫댓글 그렇지 ㅜㅜ 내가 초등학생 때 포항경기 몇 번 보러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