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오늘의 부처님 말씀]
분노가 독의 근본이 되고
분노가 모든 선을 모두 없앤다.
<법원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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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힐링레터]
한국 산사의 불화 - 신광희
mangong.bbs.or.kr/S1938
불화로 읽어내는 한국의 불교
한국 산사의 불화
<신광희 지음>
조선불화의 서막이자 불교벽화의 최고봉
강진 월출산 무위사 아미타삼존도
여래의 좌측에는 관음보살이 높은 보관에
화불, 즉 아미타불을 모신 채 두 손을 모으고
정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서 있습니다.
관음은 긴 보발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채
투명한 듯 보이는 베일을 걸치고
유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우측에는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각기 손에 보주와 석장을 들고 서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당초문, 원문, 연주문 등
각종 문양이 그려진 군의와 가사를 걸치고
당당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아미타삼존은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극락에서의 설법을 연상시키듯
존엄하게 느껴집니다.
아미타삼존의 뒤로는 여섯 명의 불제자가
합장을 한 채 엄숙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부처님을 향해 서 있는데,
그 모습에서 경외감이 들기까지 합니다.
천상에는 꽃이 가득하며 대좌의 아래 바닥에는
법당 바닥에 깔린 전돌을 표현한 듯 격자문이 빼곡합니다.
이렇듯 무위사<아미타삼존도>는
숭고미와 우아한 화취가 공존하는 명작입니다.
또한,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의 불화 중
시기가 명확한 가장 이른 사례로,
조선 초 불화의 양상을 파악하는데 기준이 되는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당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강진에서 그려진 것이긴 하나,
본래 무위사가 효령대군 등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있었음을 염두에 둘 때 뛰어난 기량의 화사들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화기의 이름을 올린 화승들이
'대선사'로 기재된 것만 보더라도
장인으로 참여한 스님들의 지위와 역량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림사 중창과 유례없는 불화의 탄생
경주 함월산 기림사 삼불회도와 창건설화도
기림사에서는 '삼불회도'와 '창건설화도'를
왜 한 폭에 그렸을까요?
기림사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습니다.
따라서 전란이 끝난 후 재건 불사가 시급했으며
승려들은 힘을 모아 건물도 수리하거나
새로 짓고 불상과 불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8세기에는 창건 연기까지 수록한
사적기를 간행하여 사찰의 역사를 정리하고
대적광전, 오백나한전, 진남루 등의 중수를 진행했으며
각종 주제의 불화를 제작해 건물 내에 봉안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림을 통해 창건설화까지
시각화함으로써 사찰의 정통성과 위상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창건설화도》를 통해 극락왕생과
그 인연을 좀 더 강조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정토사상을 좀 더 효과적으로
설파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불회도》와 《창건설화도》를 한 폭에
함께 구성한 의도 역시 기림사의 사적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적기의 내용 끝부분에는
창건 연기를 이끌어 온 인물들을 열거하며,
광유성인은 석가모니불이고,
사라수대왕은 아미타불이며,
원앙부인은 관음보살,
안락국은 대세지보살이라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그림에도 반영해
상부의 석가·약사·아미타의 도상인
'삼불회'와 하부의 '창건설화'를
유기적으로 융합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찰이 고유의 창건설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림사의 사례처럼 시각화하여
불전에 봉안한 사례는 극히 드뭅니다.
이러한 점에서 기림사 불화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삼불과 기림사 창건 연기를
한 화폭에 유기적으로 구성한 유례없는
불화라는 점도 가치가 큽니다.
사찰에 자리한 도교 신선
공주 태화산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조선 후기 불전을 보면 벽면에서
간혹 도교 신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안 개암사 대응전, 통도사 대광명전,
논산 쌍계사 대웅전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불교 공간에 도교 신선이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들이 신통력을 지닌 성인이고
그 풍모가 '나한'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여,
그림을 그리는 화사들이
불교 수행자로 오해했을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불교에서 '도교를 수용'하려는 태도가
반영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도교의 뿌리는
매우 깊었고 민중들에게도 친숙했기에
자연스럽게 수용, 습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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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깨우는 오늘의 부처님 말씀 682)
"한생각이 바르면 그 생각이 밝아지고.
한 선택이 바르면 그 삶이 복이된다."
<증일아함경>
불기 2570년 7월 17일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3번)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3번)
♣멸업장진언 : 옴 아르늑게 사바하(3번)
♣법신진언 :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3번)
♣소원성취진언(所願成就眞言)
옴 아모카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훔(3번)
♣광명진언(光明眞言)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 타야훔(108번)
♣보회향진언(普回向眞言)
옴 삼마라 삼마라 미만나 사라 마하 자거라 바라훔(3번)
"상대의 말에 주위를 기울여라.
자주 꾸짖고 욕설하여도
잘 제어하여 화합하여라.
만일 진실한 그 뜻을 생각하면
매힌 원한도 반듯이 풀 리리라".
<법림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