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다음 아고라 난공 불락
조속한 민주주의정부 수립, 전두환보안사령관과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 운동입니다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으로 군부를 장악과 1980년 초부터 K공작계획을 실행하며 언론을 조종·통제하였습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참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5·17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등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하여 정치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5월 18일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신현확 전두환 퇴진을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전두환 노태우 등은 박정희대통령의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하여 진압했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운동권과 무관한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하여 무력으로 도청을 점령했다.
시민들은 집권세력에 의해 폭도로 매도당한 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얼굴형체도 알아볼수없게 죽인사람도 많았습니다
몆천 몇심만을 죽여서라도 투쟁운동을 진압하라고 한 분이시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재현되지 못했던 부분
1.신군부의 5.17군사정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광주 시민들이 시위를 벌인 동기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2.공수부대원들이 시위 진압 도중 대검을 사용하는 장면을 누락했다. 심지어 19일~20일 진압 도중에 19세 여성이 대검에 가슴을 찔린 사건도 있었다.
3.공수부대원들이 4인 1조로 올라가 주변 빌딩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는 장면이 빠졌다.
4.신군부는 시위대의 외곽진출을 막기위해 외곽도로를 봉쇄하라는 지침을 내렸는데 화려한휴가에서는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을 제외하면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량에게 발포한 사건들 상당수가 누락되었다.
5.광주 시민이 단순히 한두 사람에게 지휘를 받은 식으로 묘사한 것은 잘못되었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광주 시민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토론을 통해 결정하였다. 자율적으로 방범 활동도 벌여 시내 중심의 금융가,상점가에서 도난 사건이 단 한건도 없었다.
◎부마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대한민국의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시위인파는 5만명으로 불어났다. 폭발한 민심은 도심 곳곳에서 방화를 일으켰고
공공건물에 대한 습격은 이튿날도 계속됐다. 파출소와 공화당 지부 사무실은 시위대의 집중 타격 대상이었다.
10.16-11개 파출소 파괴, 방화
10.17-21개 파출소 파괴, 경찰차 6대 전소
부마항쟁에 구속자 1500여명 가운데 학생은 수십명에 불과했다.
폭력적인 공권력을 앞세운 계엄령 앞에 결국 부마항쟁은 막을 내렸다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부마항쟁의 심각성을 보고하자
박정희는 역정을 냈다.
"앞으로 부마사태 같은 것이 있으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
차지철도 박정희를 거든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며칠 뒤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20여 발의 총소리와 함께 숨졌다.
@광주항쟁과 부마항쟁
박정희이가 회장전두환으로 노태우.김보성등 경상도군인200여명으로 하나회만들어
(운영원칙 충격적이라고한다 막가파와비교되기도했다,고위직에 많이진출) 자신들의 반대세력을 빨갱이라고하고 민주화운동가들 탄압
전두환 노태우 등은 박정희대통령의 부마항쟁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하여 진압했다
박정희 -5.16쿠데타,국토건설단,부마항쟁(공수부대.탱크,장갑차),재산1조-5조
전두환.노태우-5.17쿠데타,삼청교육대,광주항쟁(공수부대,탱크,장갑차),전두환 노태우 비자금각각5천억 현제5조 둘이10조
전두환 광주학살과 박정희 부산마산항쟁의 둘의 공통점은 어느 언론에도 알려지지 않았고,시위대를 폭동이라고 부른것이죠.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은 대규모인명살상을 모의하고 있다가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한다. 박정희에 의해 무고하게 죽음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은 뒷전으로 밀리고 순교자 이미지가 덧씌워졌습니다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김영삼의 짓이라고 믿었고 전두환 노태우는 광주항쟁을 김대중대통령에게 덮어 쒸우고 사형선고를 하죠
반면 전두환은 광주에서 5.18로 인명살상을 현실화하고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려고 전두환우상화가 이뤄져왔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부마항쟁은 살인미수 그쳤지만 광주항쟁은 아무 방해없이 살인 범죄행위로 이어져 법의 심판을 받아 전직대통령자격을 상실했습니다
전두환우상화
언론에 보도지침보내고 언론사에서 제일중요한일 드라마나 재미있는 방송 편집해서 전두환에게 보내는 것
http://cafe.daum.net/kyongkim/FQ14/3200?docid=cY0N|FQ14|3200|20101026211054&q=��51ȸ ��������&srchid=CCBcY0N|FQ14|3200|20101026211054
박정희재산 최소1조원-최대5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27954&PAGE_CD=N0120
인터넷에 허위사실유포하고
친일 비판은 좌익이다 주장하던 지만원소장이 법정에 서다
이영조 진실위 위원장 김구를 테러분자라고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91221102822150&p=sisain
이영조 진실위 위원장“5·18은 민중 반란, 4·3은 폭동” 진실화해위원장이 과거사 폄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1182115205&code=940100
4.19 혁명을 데모 교과부 소책자 '기적의 역사' 6쪽 내용. '4.19데모'라고 써 있다.
http://www.allinkorea.net/sub_read.html?uid=17183
각종 역사, 진실위원회 폐지 발표 = 역사말살 및 근현대사 왜곡
1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 위원회 폐지발표
2 군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 폐지발표
3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폐지발표
4 친일 반민족 진상 규명 위원회 폐지발표
5 삼청 교육피해자 명예 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 폐지발표
6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 위원회 폐지발표
7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규명 위원회 폐지발표
8 동학 농민혁명 참여자 명예 회복 심의위원회 폐지발표
9 특수 임무 수행자 보상 심의위원회 폐지발표
10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폐지발표
11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 위원회 폐지발표
12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 심의위원회 폐지발표
13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 지원 위원회 폐지발표
32년만에 진실의 한 조각이 드러났다.'유신철폐·독재타도'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서 유신체제의 종언을 고했던 부마민주항쟁 당시 마산에서 사망자가 있었고, 사망자의 신원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동안 경찰과 정부는 "공식적인 사망자가 없었다"고 발표해 왔었다. '부마민주항쟁 특별법제정을 위한 경남연대'는 2011.9.1일 오후 경상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망자의 신원을 공개했다. 이번에 확인된 사망자는 고 유치준(당시 51세)씨다. 경남연대는 유치준씨의 부인과 두 아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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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민주항쟁특별법제정을 위한 경남연대'는 1일 오후 경상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마항쟁 당시 마산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당시 사망자 유치준씨의 가족들이 영정을 들고 묵념을 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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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된 첫 사망자는 유치준씨... 호적등본과 자료집 일치부마항쟁 당시 사망자의 신원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남연대는 지난 7월 발족한 뒤 고인의 아들인 유찬국씨가 찾아와 부마항쟁 당시 마산에서도 사망자가 있었음을 알게됐다고 밝혔다. 유찬국씨는 지난 8월 10일 마산중부경찰서를 방문해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요청한 뒤 이틀 후에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마산) 사무실을 찾았다. 정성기 회장과 허진수 경남연대 상임대표, 윤치원 집행위원장, 정인옥 사무차장과 첫 대면한 유씨는 고인의 호적등본을 내놓았다. 이후 기념사업회측에서 호적등본 기록과 '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에 실린 관련 내용을 대조했는데, 일치했다. 호적등본에는 "1979년 10월 19일 오전 5시, 마산시 산호동 소재 새한자동차 마산지사 앞 노상. 동년 11월 14일 동거인 유찬국 신고"라고 적혀 있었고, 자료집에는 "1979년 10월 18일 '경찰의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발생 보고서'. 변사자 발생, 목림여관 앞 도로변(새안자동차 영업소 앞)에서 50여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이라고 돼 있었다. 두 곳에 기록된 내용이 일치한 것이다. 경남연대는 자료집에 기술해 놓았던 사람이 바로 유치준씨라고 보고, 부인 천술옥(77)씨와 큰 아들 유찬국(57), 셋째 아들 유성국(52)과 면담한 뒤 이를 재차 확인했다.경남연대는 경찰 등 관계기관이 유씨 사망 사실을 은폐하고 불법 부검과 매장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고인은 마산 완월동에 살고 있었는데, 10월 18일 마산항쟁 당일 경남모직 인근 건설현장 노무 일을 나갔다가 밤이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아, 부인이 경찰서 등을 전전하며 수소문했지만 허사였고, 이후에도 가족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고 설명했다.경남연대는 "사고가 난 뒤 보름 정도 지난 뒤인 11월 초순경 파출소 직원이 가족들을 찾아와 유씨의 사망 사실을 통보해 주었고, 당시 마산경찰서에 가보니 시신은 임의 부검하고 가매장했다는 사실을 통보 받았다고 한다"며 "당시 경찰은 '고인의 신원과 유족은 고인의 소지품인 도시락 속의 주민등록증으로 알았다'며 건네 주었다고 한다"고 밝혔다.당시 고인의 시신 부검은 '남향외과 원장'이 했으며, 가매장한 지 보름 정도 지나 가족한테 통보됐다. 당시 가족들은 마산 서원곡에 가서 가매장된 시실을 확인했고, 시신을 인계받아 화장장에서 화장한 뒤 유골을 묻어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경남연대는 "새한자동차 영업소 앞에 있었던 '대림이용원' 주인의 증언을 듣고, 경찰공의였던 남향외과 원장을 면담해서, 유족의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남연대 "부마항쟁 진상 조사 필요"경남연대는 이날 회견문을 통해 "사망자나 행방불명자 발생설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계속 남아 있다"며 "더불어 지금까지 부마항쟁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남연대는 "공식적인 사망자가 없었다는 정부의 발표와 달리 그동안 진행된 민간단체 조사에서는 시위진압과정에서 사망자 3명이 발생했고, 여러 명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제기해 왔다"면서 "그런데 마침내 그 진실의 한 조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밝혔다.이들은 "부마항쟁 당시 마산의 시위 진압과정에서 사망자가 있었음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라며 "이 사건은 죽음을 방치한 것도 모자라 이를 조작 은폐한 유신정권의 천인공노할 만행"고 강조했다.이어 "사망자에 대한 신원을 파악하고도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시신을 보존하지도 아니한 채 가매장한 당시 공공기관의 가증스런 불법행위인 것"이라며 "억울한 죽음은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32년, 그동안 피해자와 가해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죽어가고 있다"며 "당시의 진실을 밝혀줄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 있을 때, 부마항쟁 진상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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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민주항쟁특별법제정을 위한 경남연대'는 1일 오후 경상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마항쟁 당시 마산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당시 사망자는 유치준씨로, 아들이 영정을 들고 서 있는 속에 옆에서 고인의 부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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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왜 신원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나"한편 고 유치준씨 유족들은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셋째 아들은 회견문을 읽으면서 목이 메이는 듯했고, 옆에 서 있던 부인과 큰아들은 눈물을 훔쳤다.유족들은 "32년 동안 잃어버렸던 제 아버지와 극적으로 상봉하는, 그런 심정이다"라며 "수많은 세월 동안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한 아버지의 사망에 관한 의혹과, 그 이후 행해진 경찰의 불법부검, 임의 매장, 그리고 사망자 신원조차 여태까지 숨겨왔던, 그 불법성에 대해 여러분 앞에 밝힌다"고 말했다.이어 "당시 상황과 사실들을 알려 억울한 죽음에 대해 그 진실을 밝혀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길 진정 바란다"면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져갔을 아버지의 사망 후에, 우리 가족들은 그 누구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아버지의 안타까움 죽음에 대해 서로 말하지 않았다"며 고개를 떨구었다.유족들은 "언젠가는 부마항쟁이 재조명되고, 다시 세상에 언급되어진다면 당연히 저희 가족들을 찾을 줄 알았다"며 "성공한 민주항쟁에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고통스럽게 죽어갔을 무고한 시민의 죽음에 대해 왜 밝힐 수 없는지, 왜 밝혀지지 않는지, 왜 신원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는지 묻고 싶다"고 밝혔다.
첫댓글 부마항쟁건으로 그거 하나 처리못하냐고 조인트까인 김재규가 박정희 암살하게 되는데 일조했다던 민성쌤 말이 떠오른다.. 부마항쟁 아니었음 몇년을 더 쳐해먹었을지ㅡㅡ..! 부마항쟁도 우리가 잊지말아야할 항쟁이야ㅠㅠ 박정희 개샤키가 대규모로 죽이려고 했다니...아오....ㅠㅠㅠㅠㅡ화난다ㅠㅠㅠ
내일 정독하게 누가 대댓 좀 주세혀ㅠㅠ
여기 대댓이혀
마산ㅠㅠ내고향ㅠㅜ자랑스럽긴한데 요즘 역사를 잊은것 같아 안타깝다..
김재규가 아니었더란면.. 부마항쟁부터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이 시작되었겠지..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미친것들
삭제된 댓글 입니다.
333맞아...부산마산분들도 다시 깨달으셨으면ㅠㅠ
잘읽고가여나중에또봐야지역사공부도해야지
부마항쟁경남쪽에서 일어났구나ㅜㅜ근데박근혜지지많이하지 왜.. 다은폐되서그런가..
근데 왜 다잊은거죠?...ㅜ
부산 마산도 민주주의의 성지인데...419혁명도 그렇고....부마항쟁도 그렇고...근데...새누리당 텃밭이 되다니 ㅠㅠ슬프다
아 부마항쟁....우리 큰이모랑 아빠 그때 저기 계셨댔는데
이거 전부 프린트 해서 경남 부산에 다 뿌리고 싶다ㅋㅋ 제발 다시 그때를 기억하세요.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