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회의 효시 고성 건봉사(1/2)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8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우리나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의 효시가 되는 금강산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천년 사찰이다. 염불만일회는 일명 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하는데 10,000일 동안을 기간을 정하여 염불수행하는 것으로 년으로 계산하면 무려 27년이 넘는다. 100일 기도도 힘든 작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정말 지극정성의 신심(信心)없이는 불가능 한 것인데 그것도 무려 3회나 걸쳐 수행한 기록을 남긴 사찰이다.
(이른 새벽이라 건봉사 가는 길은 짙은 안개가 가리고 있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로 소속되어 있는 건봉사의 창건연대를 보면 신라 법흥왕 7년(520년)에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고,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황을 닮은 돌(봉형:鳳形)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1358년(공민왕7년) 나옹(懶翁)화상이 중건하고 건봉사라 하였다. (건봉사기행은 진부령을 넘어가는 코스를 택했다. 사진에서 좌측길로 접어들면 된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한 후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다. 원당은 왕실의 소원을 빌기 위한 지정 사찰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 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건봉사 입구.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으며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웠으며(등공대) 1911년 9월에는 조선사찰령에 따라 31본산의 하나로 9개 말사를 관장하는 위용을 누렸던 건봉사다. (건봉사 입구 전경) 건봉사는 두 차례 대화재를 입었는데 첫 번째 화재는 1878년 4월 3일 산불로 3,183채의 전각과 요사채가 전소되었고, 그 후 다시 중건된 건물과 요사채마저 6.25동란으로 전소되었다. 6.25 동란에 전소되기까지는 642채의 요사채와 보리암을 비롯하여 124칸의 18개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니 전소되기 까지만 보드라도 옛적에는 정말 거대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불타버린 고성 건봉사지는 현재 강원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고, 6·25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不二門)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능파교와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새겨진 돌기둥 등이 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도금원불(鍍金願佛)·오동향로·철장(鐵杖)·대종·절감도·차거다반(??茶盤) 등과 불사리탑 등 탑 8기, 부도 48기, 비 31기, 고승 영정 44점 등이 있었다. (주차장 한쪽 공간에 마련된 돌확) <만해당 대선사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금강갑계는 구한말 의병으로 활약하다 건봉사에 은신하여 수행승이 된 이금암(李錦庵:1879-1943) 선생께서 만들었다. 이금암씨는 건봉사의 염불만일회 제5대 화주로 정토불교의 진면목을 세우고자 이웃사랑과 구국개화운동을 실천하고 신학문을 통해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이 자리에 봉명(鳳鳴)학교를 설립하셨고, 또한, 수성(狩城)청년회, 명덕청년회, 봉루소년회 등을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마을마다 상두계, 세찬계, 혼수계, 장학계 등을 통해 친목도모와 우의를 다질 수 있는 초석을 놓은 분이다. 이러한 상부 상조계를 금강갑계로 통칭하며 현재는 기묘계(1879년생) 후손들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이 표지석은 그 분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1919년 능허선사가 새로 지었다. 6.25 동란에서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다. 불이문의 편액은 해강 김규진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해강김규진(海岡金奎鎭; 1868(고종5년)~1933.)선생은 서화가이며 사진가로서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이며 해강(海岡)은 그의 호가 된다. 중국에 유학, 명승 고적을 유람하고 진ㆍ한ㆍ당ㆍ송(秦漢唐宋) 명가의 진적(珍籍)을 연구한 분으로 귀국 후 영친왕(英親王)의 스승, 시종원(侍從院) 시종장을 역임했다. 예서ㆍ해서ㆍ행서ㆍ초서 등 전반 서예에 능하고 묵란(墨蘭)ㆍ묵죽(墨竹)ㆍ묵목단 등 묵화를 잘 그렸다. 한국 최초로 서화 연구회를 조직, 서화 미술 발전에 공헌하였다. 산수화 중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벽화는 유명하다. <출처;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불이문 기둥은 금강저(金剛杵)가 양각되어 있다. 금강저는 범어로는 vajra. 복절라(伏折羅)라 한역된다. 승려들이 참법(懺法)할 때에 쓰는 법구(法具)의 일종. 번뇌를 끊고 악마를 항복 받는 보리심을 상징한 쇠붙이로써, 쇠 돌로 만들었다. 저(杵)는 원래 인도 고대의 무기 가운데 하나였다. 제석천이 아수라와 싸울 때 코끼리를 타고 금강저를 무기로 삼아 아수라의 무리를 쳐부순다고 한 신화에서 그 신비한 힘이 유래되었다. 그리고 인도의 여러 신과 역사(力士)들이 이 무기로써 적을 항복시킨다고 한다. 뒤에 밀교에서 악마를 쳐부수는 의미로 이 무기를 불구(佛具)로 채용하여 여러 존상의 지물(持物)로서, 또는 수행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밀교계 종파에서도 진언(眞言)을 외면서 수행하는 자는 항상 금강저를 휴대하게 되었는데, 그 근본 뜻은 여래의 금강과 같은 지혜로써 능히 마음속에 깃든 어리석은 망상의 악마를 파멸시켜 자기 심성의 청정한 지혜 광명을 발현시키려는 데 있다. 밀교의 만다라(曼茶羅)에는 금강부(金剛部)의 여러 존상이 모두 금강저를 지닌 것으로 되어 있다.
≪열반경≫에는 밀적금강역사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금강저로써 모든 악마를 티끌과 같이 부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 나라의 신중탱화(神衆幀?)에서는 중심이 되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은 반드시 금강저를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불구의 형태는 손잡이 양쪽이 뾰족한 독고(獨?)만 있는 것과, 양끝이 2·3·4·5·9갈래로 갈라진 2고저(?杵)·3고저·4고저·5고저·9고저 등이 있다. 최초에는 그 형태가 일종의 무기형으로 뾰족하고 예리하였으나 불구로 사용되면서 끝의 여러 가닥이 모아지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불경에는 금강저 외에도 여래최상금강저(如來最上金剛杵)·분노금강저(忿怒金剛杵)· 미묘심금강저(微妙心金剛杵)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으나 이들은 실제로 만들어지거나 사용되지는 않았다.
(불이문 천장)
이들 중 독고(獨?)가 가장 오래된 형식이라 하며, 손잡이 좌우에 불꽃문양 형태를 조각한 경우 이를 보저(寶杵)라고 하고, 탑을 조각한 것은 탑저(塔杵)라고도 한다. 이들은 2고·3고의 금강저와 함께 밀교의 단(壇)에 배치된다. 독고와 2고·3고 및 보저와 탑저를 가리켜 5종저라고 하는데, 단을 설치할 때는 탑저를 중앙에, 그리고 나머지는 사방에 배치한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금강저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길이 22㎝의 청동오고금강저가 있으며, 일반 사찰에서는 조선시대의 금강저를 볼 수 있다. 또, 고려시대의 사경(寫經)·변상도(變相圖: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에는 가장자리를 금강저문(金剛杵紋)으로 장엄한 예가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현존하는 신중탱화에서는 대부분 이 불구를 찾아볼 수 있다. <연화교> 연화교는 칠보교와 더불어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불국사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유명한다. 건봉사의 이 연화교는 옛날 그 모습에 대한 회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봉서루, 능파교를 건너간다. 현판은 금강산 건봉사가 걸려있다. 앞에는 건봉사의 자랑인 십바라밀 석주가 서 있다. @건봉사 봉서루 입구는 여느 절과 달리 특이한 십바라밀(十波羅蜜)를 새긴 석주가 세워져있다. 10바라밀은 주로 유식학에서 거론되는 것인데 유식학에서는 십승행(十勝行)이라 하며 보살 십지(十地)의 행법(行法)이 된다고 했다.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에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智)를 합쳐 십바라밀이라고 한다. 방편바라밀은 회향방편선교(廻向方便善巧) 발제방편선교(拔濟方便善巧)의 2종이 있고, 원(願)바라밀은 구보리원(求菩提원(願)과 이락타원(利樂他願)의 2가지가 있다. 력(力)바라밀에는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思擇力)의 2종이 있고, 지(智)바라밀에는 수용법락지(受容法樂智)와 성숙유정지(成熟有情智)의 2가지 있다. 대웅전 주련 天上天下無如佛 十方世界亦無比 世間所有我盡見 一切無有如佛者 천상천하에 어디에도 부처님같이 거룩한 분 없나니 시방세계 어디에도 비교할 데 없네 세상천지 온 누리 다 돌아보아도 부처님같이 존귀한 분 다시없도다. (봉서루, 앞의 편액은 금강산건봉사가 걸려 있다.) 명부전 주련 地藏大聖威神力(지장대성위신력) 恒河沙劫說難盡(항하사겁설난진) 見聞瞻禮一念間(견문첨례일념간) 利益人天無量事(이익인천무량사)
지장보살님의 위대한 신통력이여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렵도다. 보고 듣고 예배하는 잠간 사이에도 인천에 이익된 일 무량하여라. 진신사리 국내에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찰은 더러 있으나 건봉사처럼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곳은 없다. 그런데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는 사명대사가 봉안한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치아사리는 세계에 15과 뿐인데 건봉사에 12과 스리랑카(불치사)에 3과가 보관된 희귀한 보물이라고 전해진다. @ 등공대 가는 길은 참배객 인원수제한과 더불어 군부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만임염불의 가피처 등공대는 758년 발징화상이 정신, 양순 등 수행승 31인과 신도 1,820명의 참여로 아미타 만일염불회를 결성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만일동안 신행을 닦았다. 해마다 신도 1,700인은 쌀 한말과 향유 한 되의 시주를 하였고, 신도 102인은 오종포 한 단의 의복시주로 만일을 공양하였는데 29년이 지난 787년 7월17일 아미타부처님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나타나시어 크게 칭찬하시고는 수행승 31인을 극락세계로 이끌자 신도 1,820인이 크게 기뻐하고 경사스러워 1,300여 번의 절을 하였다. 이에 아미타부처님은 신도 913인 또한 극락세계로 이끌었으며 나머지 신도 907인은 그 자리에 남아 수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후 두 번 더 아미타부처님께서 나타나시어 18인과 30인을 극락으로 이끄셨고 발징화상은 “나머지 859인은 부처님수기를 입고 다시태어나 세상을 제도하라”고 하였다. 신도들은 이를 기념하여 건봉사에서 5리 떨어진 북쪽능선에 세운 기념비가 등공대다. 능선끝이 봉긋하여 연꽃의 분술이요, 어우러진 산봉우리는 연꽃잎의 형태의 성지가 된다. 상서롭기 이를 데 없는 이곳 등공대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지극정성으로 염송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아미타부처님의 가피를 입는다고 전해오고 있다. (출처:건봉사 홈피에서> <장군샘> 원명은 냉천약수인데 냉천은 지명을 의미한다. 예부터 무색, 무미, 무취의 광천약수로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시 왜군과 대치하여 이곳에서 승병을 훈련시켰던 사명대사는 이 샘에서 물을 길어 질병까지 치료하였다고 한다. ~2부로 계속~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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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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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대자대비관세음보살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_()_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