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1년 11월 7일 주일 오전 예배
시편 설교
성경낭독 : 룻 3:1-5, 4:13-17; 막 12:38-44
본문 : 시 77:1-20
제목 : “기억”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32편 4,5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38편 1,8,11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111편 1,2,3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5편 8,9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77편 5,6,7,8
성찬식 찬송 – 시 132편 8,9 (고정)
폐회찬송 – 시 139편 1,3,12 (고정)
* 아멘찬송은 해당 시편으로 할 것
기억
시편이 신자의 삶의 전반을 다룬다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멋진 것’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 같은 경우는 그것이 그다지 멋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하나님의 멋진 일들’을 쓰신 책으로 배웠고 또 배우기를 원했고, 이런 것을 주로 ‘구속사적’ 방법이라고 불렀습니다.
만약에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읽는 것이 옳다면, ‘우리네 인생’, ‘신자의 삶의 전반’을 다룬다는 것은 제게는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고통이 어떻고, 그 고통으로부터의 건짐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역사서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지를 그리고 있는 이야기들에 비해 너무나도 ‘개인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제아무리 시편이 성경이라고 해도, 구원역사 그 자체를 다루지 않으면 함량이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시편을 매달 설교해나가면서, 그런 저의 생각이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신자의 삶에의 적용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사람의 삶에 관련된 것인가?”, “신자의 인생에 대해 시편이 다룬다는 말은, 그저 인생 문제를 논한다는 이야기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차차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편은 그런 점에서 (오늘날 저의 이해로는) ‘구속 역사의 차원 높은 적용’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전반의 주제인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대결” 혹은 “군왕과 세상의 도발과 그에 대한 메시아의 응전” 같은 주제는, 결코 ‘인생의 문제’, ‘사적인 문제’라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시편 안에서 시인이 자기를 둘러싼 악인과 대척 관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사적인 원한 관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구속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런 시편을 읽으면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메시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바로 이 시편을 읽은 신자들은 이제, 그렇게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 메시아의 뒤를 따라가는, 자신이 고난 받는 삶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런 이야기들의 거대한 집합체입니다.
하나님은 구속 역사를 진전시키시고, 거기에 ‘메시아’의 표식으로 사용된 시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인의 시를 읽은 우리는, 시인의 삶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배워서, 이제 그것을 소화한 후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편에 나오는 각양 종류의 인생사의 이야기들은 ‘삶의 여러 가지 파편들’이라기보다는, ‘구속 역사의 적용’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와 여러분은 시편을 읽고 배우는 일을 통해서 ‘구속 안에 있는 신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고, 이것을 저는 ‘구속 역사의 차원 높은 적용’이라 하였습니다.
삶의 고난과 하나님을 생각함, 그리고 질문
구속 역사에서
자, 그러면 이제 오늘 시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시편 77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혹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 부분을 보십시오. 첫 부분은 4절까지, 그 다음은 9절까지입니다. 둘을 함께 보면 전체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둘을 나누면 전체를 세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4절 까지에서 시인은 고통을 호소합니다.
1절 :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2절 : 내가 주를 찾았고 손을 들었습니다.
3절 : 하나님을 생각하며 불안하고 근심하였습니다.
4절 :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습니다.
4절까지 내용에서 시인은 ‘단지 괴로워’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고통스러워합니다. 심지어 시인은 3절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했는데 도리어 더 불안하고 근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칼빈 선생님은 “재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성도들의 고뇌와 근심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라고 하면서 이런 예를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진노하고 계심을 생각하는 경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서 시인이 처해 있는 고통이라는 것이 약간 특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어려움에 처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심판 같은 것, 하나님께서 책망하고 계신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2)
이것이 무엇인지는 그 다음 부분인 9절 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조금 더 분명해지게 됩니다.
이 둘째 부분은 여섯 개의 질문이 핵심인데, 7절과 8절과 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각 절마다 질문 두 개씩, 시인은 총 여섯 개의 질문을 던지는데, 이 질문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 오셨던 일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7절 :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8절 : 인자하심이 다하였는가/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9절 :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긍휼을 막으셨는가?
이 각각의 질문과 탄식들이, 단순한 질문이 아님에 유의해야 합니다.
지금 시인은 ‘그저 불만에 찬 탄식’을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실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은혜 베푸시는 일을 그치실까?”,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향하여 등을 돌리신 일을 영원히 하실까?”에 대한 것, 곧 이것은 ‘언약 관계의 파괴’에 대한 전망입니다.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이전에 존재해왔던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련된 탄식”인 것이지요. 단순히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관계가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즉 시인은 단지 삶에 조그만 돌맹이를 만나서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을 당하게 될 수 있는 상황 앞에서, 그 주제를 놓고 탄식하며 묻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하나님?”, “정말로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죠.
7,8,9절을 이렇게 읽을 때 5절과 6절이 이 질문들의 서론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은 “내가 옛날을 생각했다”했고, 6절은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했다.” 했습니다. 6절 끝의 “궁구했다”는 것은 “간절히 찾았다”는 뜻이므로, 이후 7,8,9절 질문이 그 “간절히 찾았다” 뒤에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이후의 질문들은 “옛 일을 생각하고,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고” 그 다음에 간절히 찾아 살폈던 질문들입니다. 말하자면 옛 일을 생각했더니 “지금은 왜 이렇지?” 한 것입니다. 옛 일을 생각했더니, “왜 지금은 이렇게 되어버렸나?” 한 것이지요.
그러면 시인이 노래하고, 질문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상황이란,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은총을 받던 시기(5,6절에서의 ‘기억’ 부분)를 벗어나버려서, 이제는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징벌을 당하고, 그래서 저 멋진 지위로부터 떨어져 있는 상태가 현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5절과 6절에서 “옛날을 생각했더니”, 즉 옛날에는 우리가 참 좋은 시절이 있었는데! 우리는 하나님과 아름다운 언약 관계 중에 있었는데! 이렇게 말한 것이고, 현재의 떨어진 상황을 보고서는 7,8,9절에서 “우리를 완전히 버리시겠습니까? 언약관계는 완전히 끝이 났습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시가 포로기의 시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듯한 시기, 언약이 거의 망가져버린 시기, 그래서 “정말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려 하시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된 시기, 아마 그런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에서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유사한 일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74편에서도 “절망”이라는 주제, 언약관계의 파산에 대해서 살핀 적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신다, 반대하고 공격하고 계신다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완전히 박살나버린 것은 아닌가고 생각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낙심하거나 절망에 빠지게 되는 때가 있는데, 신자들은 공통적으로 그런 위기에 떨어지게 되면 비슷한 생각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이것이 마치 포로기의 이스라엘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옛부터 항상 있었던” 언약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그들은 불순종했기 때문에 ‘언약에서 이제 이탈되었는가’를 불안해 했습니다. 오늘 시편 4절까지에서 잘 나타나지만, 시인은 불안감에 잠도 잘 못 잡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어떻게 잠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신자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고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떨어질 때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고전적인 질문, 그러니까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던졌던 똑같은 질문들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아니면 나는 애초에 선택받은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위태로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고한 질문의 내용이 이 시편 77편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부분 : 오른손, 기억
1)
그러면 이런 생각과 질문들에 대하여, 시인은 어떤 대답을 주고 있습니까?
10절과 11절은 대다수의 주석에서 “이 시의 전환”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앞에서는 계속해서 탄식하고, 질문하던 시인이, 이제 태세를 바꾸는 것입니다. 시인이 어떻게 태세를 바꾸게 되었는지를 10절과 11절을 통해서 한 번 보도록 합시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칼빈 선생님은 여기 “나의 연약함이라”를 “나의 죽음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른 주석가는 “나의 슬픔, 괴로움, 상처, 십자가”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했습니다. 번역은 다양하지만 주제는 선명합니다. 10절의 첫부분은 시인의 한계, 시인의 극한을 말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나의 연약함이며 한계이다, 이것이 나의 사망이다, 이것이 나의 상처이고 십자가이다.” 그런 의미입니다.
하지만 10절은 뒤이어 이 단어들을 붙여 놓았습니다. 우리말로 읽어도 좀 어렵기는 하지만 히브리어 본문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나의 죽음이다”라고 한 뒤에 곧바로 그냥 명사들의 나열입니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이렇게 보면 시인이 둘을 대비시키려 함이 분명해 보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연약함”을 말하고 나서 곧바로 붙여서 “하지만 지존자의 오른손”을 말했습니다. 여기 “해”라는 말은 year, 말 그대로 년, 해를 의미합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 말의 의미를 “순환하고 되풀이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사망의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지존자의 손은 여전히 그대로다.”라는 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우리도 비슷하게 읽어봅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칼빈 선생님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는 명확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지존자의 오른손의 날을 기다린다.”
말하자면 10절은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변함없는 강한 손’을 대비시킨 것입니다.
2)
이것은 11절을 보면 조금 더 명확해집니다. 1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조금 더 서술을 붙입니다.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히브리어의 순서대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진술하리라, 여호와의 행하신 일, 곧 나는 기억한다, 옛적 기사를”
그러니까 11절 말씀을 읽으면 왜 시인이 10절에서 ‘순환하듯이 변하지 않는 지존자의 손’을 말했는지 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가장 약한 순간에 “여호와의 행하신 일”, “옛적의 기사”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자신은 죽음의 궁지, 가장 연약한 순간에 머물러 있지만, 항상 강하시고, 항상 능하셨던, 과거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오른손
여기 10절과 11절에 등장하고 있는 중요한 두 단어를 살펴봅시다.
먼저는 “오른손”입니다. 시인은 10절에서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라고 하였습니다. “변함없이 계속 있는 지존자의 오른손”이라고 해도 괜찮겠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편 77편은 ‘수미상관’을 가진 시입니다.
제일 첫 머리에 나온 단어들을 제일 끝에 다시 사용함으로써 시의 의미를 증폭시키고 있는 그런 시입니다.
1)
보십시오. 1절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가 나옵니다. 여기 “음성”이 나오지요? 히브리어로 “목소리”는 ‘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편 77편의 제일 첫 절에는 ‘시인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부분에서 살펴보았지만, 이때 시인의 목소리는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탄식이고, 절망입니다. 시인은 고통스러워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는 시인의 “손”이 나옵니다. 2절, “나의 환란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제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여기 시인의 손이 나옵니다. 시인은 손을 듭니다. 그런데 역시 여기서 시인이 든 손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면서 손을 높이 들고 있지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면서 하늘을 향해 치켜든 손입니다.
2)
그러면 수미쌍관이 있는지를 봅시다.
18절을 보겠습니다. 18절에 히브리어로 동일한 단어 ‘콜’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우리 번역은 어떻게 되었나요?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레의 소리(이게 ‘콜’입니다)가 있으며......” 하나님의 목소리, 하나님의 ‘콜’이 있습니다.
1절과 대비되지요? 1절에서는 시인의 작고 갸날픈 목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요청하면서, 탄식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 끝부분인 18절의 ‘콜’은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천둥과 번개가 내려칠 때, 산이 진동하고 떨리는 바로 그 목소리! 위엄있고 무서운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이 대비를 잘 보십시오. 두려워 떨고, 탄식하고, 갸날픈 시인의 목소리와 천지를 진동시키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이 시에서는 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인 20절에 2절에서 나왔던 “손”이 다시 나옵니다. 내용 연결을 위해 19절과 함께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무리 양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목소리’라는 단어로는 ‘시인의 갸날픈 목소리’와 ‘하나님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대비되었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같은 단어인 “손”은 어떻습니까? 2절에서의 “손”은 도움을 구하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올린 시인의 손입니다. 우리가 이 시의 앞부분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가히 절망적이고, 사실은 도움을 썩 바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뻗어올린 손입니다. 우리는 2절의 하늘을 향해 든 손이, 7절과 8절과 9절을 지나면서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라는 결론으로 치달아 갔던 것을 봅니다. 시인은 비록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도움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버리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20절에 나오는 손은 “모세와 아론의 손”입니다. 그리고 19절, 20절을 같이 읽었지만 이때 “모세와 아론의 손”은 무엇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까? 모세와 아론이 왜 등장했나요? 왜 굳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의 손이었습니까? 19절에서도 보셨듯이 이 구절들이 보여주는 사건은 출애굽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셨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의 손”이란, 이들의 손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건지셨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자, 이 수미쌍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앞서 말한 10절과 11절을 보십시오.
10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이 태세전환의 구절에서의 “지존자의 오른손”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이제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시인의 손은 하늘을 향해 들어올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파괴된 것 같았고,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보실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을 “이는 나의 죽음이다”라고 10절에서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시인은 동시에 “해가 바뀌고 달이 가도 똑같이 시종여일한 지존자의 오른손”을 봅니다. 그 손은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바로 그 손이었습니다. 시인은 10절과 1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완전히 망하고 쓰러졌다. 그래서 심히 절망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 우리를 건지셨던 것처럼,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손을 펴시고 계시다.”
기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 때문에 이 시편 77편의 또 다른 키워드인 “기억”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수미쌍관을 살피려고 “음성”과 “손”을 살펴보았지만, 이 시에는 “기억”이라는 말도 여러번 반복됩니다. 한 번 보십시오.
1)
첫 “기억”은 3절에 나옵니다. 시인은 떠올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히. 자카르)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앞에서 살핀 “목소리”나 “손”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억”도 사용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기억은 그를 소생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생각했더니 도리어 더 위축되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칼빈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신자들은 죄와 그 죄의 형벌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도리어 더 큰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했지만, 그 기억은 그를 더 불안하고, 근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2)
두 번째 “기억”은 6절에 나옵니다.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시인은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도 살폈듯 5절과 비슷한 뜻입니다. “옛 일을 생각한 것”이지요.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일들을 떠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셨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두 번째 “기억” 또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긴 하지만, 이 기억이 시인을 절망으로 이끄는 질문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을 기억했지만, 도리어 7절과 8절과 9절의 절망의 질문으로 내몰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언약을 폐하셨는가?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실 것인가?”
3)
하지만 마지막 “기억”인 11절의 내용을 보십시오. 다시 한 번 10절과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우리는 시인이 이 말을 한 후에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을 쭉 진술하는 것을 봅니다.
시인은 3절과 6절에서 각각 하나님을 “기억”했지만, 그가 기억해냈던 하나님은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헤집어내는 것이었고, 그래서 시인을 도리어 더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반했고, 악을 쌓고 또 쌓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기억하고 기억할 때 결론은 바로 멸망이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버리셨는가!”, “언약은 폐하여졌는가!” 이 결론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0절과 1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겠노라!”라고 하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내용이 12절 이하의 내용들입니다. 시인은 무엇을 기억합니까?
12절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고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13절 “하나님과 같은 큰 신이 누구입니까?”
14절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15절 “주의 팔로 주의 백성을 구속하셨나이다!”
16절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였고, 깊음도 진동하였습니다!”
17절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합니다!”
18절 “회리바람 중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있고, 번개가 세계를 비취고, 땅이 흔들립니다.”
19절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20절 “주께서 양같은 주의 백성들을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전에 제가 설교에서 ‘기억’을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단순한 반추’, ‘단순하게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기억이란, 과거의 일을 현재로 소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향력과 파괴력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옛적 일을 기억하라”는 것은, 그저 머리로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그러면 지금은 어떻겠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에서 기억이란 그때 그 과거의 일 때문에, 지금 현재의 삶이 변화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두 기억 : 그리고 승자
그러면 보십시오. 오늘 시편 77편에서 기억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기억은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집니다.
3절과 6절의 기억은 우리를 ‘정죄’함으로 ‘하나님 앞에 소환’합니다. 우리는 떨게 됩니다. 이 기억은 우리를 이렇게 다그칩니다.
“어제도 그랬지 않니?”
“그제도 그랬지 않니?”
“너는 작년에도 약속하지 않았니?”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너에게 신실을 베푸셨으나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응대했느냐?”
한편의 기억은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기억’입니다. 우리는 이 기억 때문에 7절과 8절과 9절처럼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버림을 받았을까요?”
“하나님 저는 선택받지 못했을까요?”
“하나님 이렇게 죄를 지었으니 이제 저는 더 이상 가망이 없겠지요?”
“언약은 사라졌겠죠?”
하지만 두 번째 기억은 11절의 기억입니다.
이 기억은 우리에게 12, 13, 14, 15, 16, 17, 18, 19, 20절의 내용을 ‘각인’시키고, ‘떠올리게’ 하며, 따라서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닌, 현재를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이 기억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기사를 행하신 것을 기억하거라.”
“여호와께서 그 팔로 너를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거라.”
“여호와께서 물들을 떨게 하시고, 깊음을 진동하시며, 땅을 흔드신 것을 기억하거라.”
“그분이 너의 목자시며, 너는 그분의 양이니,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너를 인도하실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억’이라는 주제에 있어, 항상 두 가지 기억을 동시에 가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두 가지 기억을 동시에 소환당합니다. 한편은 언약이 망가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기억이며, 또 한편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큰 일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방식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같습니다.
그러면 승자가 누구일까요? 두 기억 중 승리하는 기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시편 77편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동병상련’을 느낍니다. 우리도 자주 그러니까요.
우리는 1절에서 4절의 내용을 읽으면서 절망을, 그리고 7,8,9절을 읽으면서 ‘우리도 종종 그러곤 하는 태도’를 보게 됩니다. 심지어 7,8,9절의 내용은 5절과 6절, 곧 “과거의 일을 떠올렸더니” 그려지는 탄식과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피셨다는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건지셨다는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놀랍게도 현재의 삶에서는 1,2,3,4절과 7,8,9절의 절망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언약이 끊어졌는가?”, “나는 버림받았는가?”, “더 이상 하나님은 인내하심을 멈추실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내던져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합시다!
성경의 ‘기억’은 현재에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반추’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회상 속의 연기와 같은’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억 속에 ‘과거의 일’로서 나타나시지만, 그것은 ‘단지 좋은 때의 꽃놀이 기억일 뿐’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시편 77편을 읽으면서, 이토록 절망의 상황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그가 들어올린 “손”은 좌절될지 모르고, 또 그래서 “하나님을 떠올려도(기억)”, 결국은 “하나님은 이제 언약을 포기하셨는가!”(7,8,9절)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들 속에 내몰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억’을 사용하셔서! 곧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을 우리로 하여금 떠올리게 하시는 일을 통해” 다시금! “그분의 오른손이 항상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가장 정열적이고 왕성하게’ 신앙 생활을 했던 때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때의 기억’은 ‘지금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때는 좋았었지”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시간대를 동시에 마주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의 일’을 ‘현재의 영향력’으로 바꾸는 일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이것! 곧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리에게’ 새롭게 힘을 주고 일으키시고, 또 강력한 영향력으로 살 수 있게끔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옛적 행하셨던 일’을 우리에게 다시금 떠오르게 하시고, 또 그 일로 인하여 지금을 헤쳐 나가게끔 하십니다! 즉 우리는 “그분이 과거에 나에게 이렇게 행하셨다는 사실”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를 어떻게 대우하시는지”를 충분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의 이 말씀을 붙들고, 이번 한 주간도 살아갑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