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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으로 쓴 글(理論과 適用)
六六法은 6종류로 이루어진 6가지의 根境識觸受愛, (36가지) 법수들을 의미한다.
만약 受-愛사이에 <想思>를 넣으면 觸-受想思가 되고
愛에 의해 훈습(기억)되는 과정이 6尋-6伺이면 총 60법(D22)이 된다.
혹은 그 과정이 6界-5蘊(界)이라면 59법(S25~S27)이 된다.
즉 界로 수렴하게 되고, 이렇게 수렴된 界를 연하여 …
界를 연한 想見尋
[dhātuṃ,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saññā, uppajjati diṭṭhi, uppajjati vitakko”ti.]
界를 연한 [sañña-saṅkappa-chanda-pariḷāha-pariyesana-身口意]
[kāmadhātuṃ,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kāmasaññā,
kāmasaññ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saṅkappo, kāmasaṅkapp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cchando,
kāmacchand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pariḷāho, kāmapariḷāh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pariyesanā.
kāmapariyesanaṃ, bhikkhave, pariyesamāno assutavā puthujjano tīhi ṭhānehi micchā paṭipajja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감각적 욕망의 요소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을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의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의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기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기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추구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로 그릇된 도를 닦는다.]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ne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n”ti.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감각적 욕망이 아니로다.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그냥 그렇게 머물 뿐이어라.
슬기로운 자들은 그것에 대한 의욕을 길들이노라.]
身口意(新業)을 연하여 六六法 즉 5蘊(界)로 수렴하게 되고, 이렇게 수렴된 界를 연하여 …
[ime ca, thapati, akusalā saṅkappā kiṃsamuṭṭhānā?
samuṭṭhānampi nesaṃ vuttaṃ.
‘saññāsamuṭṭhānā’tissa vacanīyaṃ.
목수여, 이 해로운 사유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들의 일어남도 설했나니 인식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相(nimitta) 혹은 想(saññā)은 界(dhātu)에 대한 記憶(sati)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싶다.
1. 相(nimitta)과 연관된 記憶(sati) - 三界 2. 언어(vitakka/saṅkappā)적인 記憶(sati) - 欲界 |
[yaṃ kho, bhikkhu, divā kammante ārabbha rattiṃ anuvitakketi anuvicāreti —
ayaṃ rattiṃ dhūmāyanā.
비구여, 낮에 행한 것에 대해
밤에 사유하고 고찰하는 것이 밤에 연기를 내뿜는 것이다. ]
<*밤 : 名色상태(바왕가/潛在, anusaya) - 훈습 - 有(化)>
[yaṃ kho, bhikkhu, rattiṃ anuvitakketvā anuvicāretvā divā kammante payojeti
kāyena vācāya manasā — ayaṃ divā pajjalanā.
비구여, 밤에 사유하고 고찰한 것을
낮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에 적용시키는 것이 낮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낮 : 六入상태 - 현행 - 業>
[낮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에 적용] : (안이비설) 身 <口> 意
… 낮에 말(vācā)한 것을 밤에 사유(vitakka / saṅkappā)
밤에 사유(vitakka / saṅkappā)한 것을 낮에 말(vācā)하는 것 …
우리말 '생각'은 범주가 넓은데,
< 1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올바른 생각.
2 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대한 기억.
고향 생각이 난다.
3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관심을 가짐. 또는 그런 일.
우리 수영장 갈 건데 너도 생각이 있으면 같이 가자. >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생각'을 이상과 같이 정의한다.
대략 論理(量), 記憶, 意向(意圖)으로 정리할 수도 있는데
意向(意圖)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경문
[teva, mahārāja, rūpā ekaccassa manāpā honti, teva rūpā ekaccassa amanāpā honti.
yehi ca yo rūpehi attamano hoti paripuṇṇasaṅkappo,
so tehi rūpehi aññaṃ rūpaṃ uttaritaraṃ vā paṇītataraṃ vā na pattheti.
te tassa rūpā paramā honti. te tassa rūpā anuttarā honti.
대왕이여, 형색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떤 형색들을 즐거워하여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더 높고 더 수승한 다른 형색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 형색들은 최상의 것이고 그에게 그 형색들은 위없는 것입니다.]
paripuṇṇasaṅkappo : 경에 정형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마음에 드는 것이고 즐거운 것이므로 획득하고 싶다는 '의도적') 생각<판단>에 의한 성취.
이때의 saṅkappa<thought,intention,purpose,plan>를 흔히 '의도[intention]'로 번역들 한다.
우리말 용례는 <밥 (먹을) 생각을 한다.> 혹은 <그녀를 (만날) 생각을 한다.>와 상응한다.
그 결과 밥을 먹거나, 그녀와 결혼하게 되면 paripuṇṇasaṅkappa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생각한 것을 이루었다.>
[apariyositasaṅkappo, vicikiccho kathaṃkathī.
vicariṃ dīghamaddhānaṃ, anvesanto tathāgataṃ.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의심과 의문을 품고
오랜 세월 동안 저는
여래를 찾으면서 방랑하였습니다.
497) 원문은 apariyosita-saṃkappo인데 ‘완결되지 않은 사유를 가지고'라고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aniṭṭhita-manoratho)" (DA.iii.740)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복주서에서는 그 목적을 “수승한 존재의 성취와 열반의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것”(DAȚ.ii.349)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yassu maññāmi samaṇe, pavivittavihārino.
ambuddhā iti maññāno, gacchāmi te upāsituṃ.
제가 생각하기에
외딴 처소에 머무는 사문들을
깨달은 분들이라고 여기면서
그들을 섬기러 저는 갔었습니다.]
여기서는 口行인 論理(追論, takka), 尋(vitakka) 혹은 思惟(/意向, saṅkappa)라고
범위를 좁히고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언어를 통한 '생각'에 대한 의견이다.
또한 '생각'이 독립적인 과정이 아니라면, 記憶과의 연관성도 검토해 보겠다.
'생각'은 대략 理論단계의 (bad or good idea) '꿰맞추다(→ 適用).'와 상응하는 어감이다.
[takko vitakko saṅkappo appanā byappanā cetaso abhiniropanā vacīsaṅkhāro
사색, 생각, 사유, 전념, [마음의] 고정, 마음의 지향, 말의 작용[口行]]
[pubbe kho, āvuso visākha,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도반 위사카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나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입니다.]
[daharassa hi, thapati, kumārassa mandassa uttānaseyyakassa saṅkappotipi na hoti,
kuto pana pāpakaṃ saṅkappaṃ saṅkappissati, aññatra vikūjitamattā !
목수여,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뒤척이지도 못하고 반듯하게 누워만 있는 갓난아이에게는
사유라는 [개념도] 없이 단지 부루퉁할 뿐인데 어떻게 나쁜 사유를 하겠는가?]
*vikūjita - vikūjati:[vi + kūj + a] chirps; warbles; coos; sings.*옹알이?
먼저 이러한 口行은 (색계 초선을 제외하면) 전적으로 욕계(인간)와 관련된 법수이다.
대다수의 경문이 그렇듯이 대부분은 욕계 인간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인간과 관련된 사건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適用/推定/比量, anumāna/anvaya)'한다.
말한 김에 anumāna는 mano/mānasa(意)나 아래 vīmaṃsī(vīmaṃsati ; 適用/調査/확인)의
mān/man(測,量)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vīmaṃsā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ṃ
검증을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 ]
[kiṃ nu kho me ayyā santaṃyeva nu kho ajjhattaṃ kopaṃ na pātukaroti
udāhu asantaṃ udāhu mayhamevete kammantā susaṃvihitā
yena me ayyā santaṃyeva ajjhattaṃ kopaṃ na pātukaroti, no asantaṃ?
yaṃnūnāhaṃ ayyaṃ vīmaṃseyyan’ti.
그런데 우리 마님은 정말 안으로 화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안으로는 실제로 화가 있지만 드러내지 않을 뿐인가,
아니면 우리 마님은 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화가 있지만
내 일솜씨가 뛰어나니까 드러내지 않을 뿐인가? 나는 마님을 시험해 보리라.']
[bhūtapubbāhaṃ, bhante, senaṃ abbhuyyāto samāno ime ca isidattapurāṇā
thapatayo vīmaṃsamāno aññatarasmiṃ sambādhe āvasathe vāsaṃ upagacchiṃ.
세존이시여, 옛적에 저는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아주 좁고 불편한 어떤 숙소에 머물면서
이들 도목수 이시닷따와 뿌라나를 시험한 적이 있습니다.]
[검증자 경 Vīmaṃsaka Sutta(M47)
“vīmaṃsakena, bhikkhave, bhikkhunā parassa cetopariyāyaṃ ajānantena
dvīsu dhammesu tathāgato samannesitabbo cakkhusotaviññeyyesu dhammesu —
‘ye saṃkiliṭṭhā cakkhusotaviññeyyā dhammā, saṃvijjanti vā te tathāgatassa no vā’ti?
tamenaṃ samannesamāno evaṃ jānāti —
‘ye saṃkiliṭṭhā cakkhusotaviññeyyā dhammā, na te tathāgatassa saṃvijjantī’ti.
비구들이여, 검증하는 비구가 다른 사람의 마음 길을 알지 못할 때 두 가지 법들의 측면에서,
즉 눈으로 알 수 있는 법들과 귀로 알 수 있는 법들의 측면에서 여래를 참구<*調査>해야 한다.
'눈으로 알 수 있고 귀로 알 수 있는 오염된 법들이 여래에게 있는가,
아니면 여래에게 없는가?'라고, 그가 그것을 참구할 때
'눈으로 알 수 있고 귀로 알 수 있는 오염된 법들이 여래에게 없다.'라고 안다.]
[“yato kho, ānanda, bhikkhu dhātukusalo ca hoti, āyatanakusalo ca hoti,
paṭiccasamuppādakusalo ca hoti, ṭhānāṭhānakusalo ca hoti —
ettāvatā kho, ānanda, paṇḍito bhikkhu ‘vīmaṃsako’ti alaṃ vacanāyā”ti.
“아난다여, 비구가 요소[界]에 능숙하고 감각장소[處]에 능숙하고 연기(緣起)에 능숙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능숙할 때 그 비구는 현자이고 검증하는 자라고 불릴 수 있다.”]
[“natthi samaṇassa gotamassa uttari manussadhammā alamariyañāṇadassanaviseso.
사문 고따마는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이 없다.
takkapariyāhataṃ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 vīmaṃsānucaritaṃ sayaṃpaṭibhānaṃ.
사문 고따마는 이론으로 완전 무장하여 법을 설하고, 자기의 영감에 따라 검증된 법을 설한다.]
論理(追論, takka)라는 단어의 용례
[Puna caparaṃ, sandaka, idhekacco satthā takkī hoti vīmaṃsī.
So takkapariyāhataṃ vīmaṃsānucaritaṃ . sayaṃpaṭibhānaṃ dhammaṃ deseti.
Takkissa kho pana, sandaka, satthuno vīmaṃsissa
sutakkitampi hoti duttakkitampi hoti tathāpi hoti aññathāpi hoti.
다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논리가요 탐구자입니다.
그는 논리에 의해 안출(案出)되었고 탐구를 거듭하여 스스로가 구명(究明)한 법을 설합니다.
산다까여, 그러나 논리가요 탐구자인 스승은
논리를 바르게 전개한 것도 있고 논리를 잘못 전개한 것도 있고
사실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takkī ; 논리 / vīmaṃsī ; 調査/헤아림/확인/판단/適用/검증>라는 표현은 D1에 많이 나타난다.
[yathā yathā, bhikkhave, bhikkhu yathāsutaṃ yathāpariyattaṃ dhammaṃ
cetasā anuvitakketi anuvicāreti manasānupekkhati
tathā tathā so tasmiṃ dhamme atthapaṭisaṃvedī ca hoti dhammapaṭisaṃvedī ca.
그러나 그는 들은 대로 외운 대로 마음으로 생각해 보고
지속적으로 고찰해 보고 마음으로 숙고해 본다.
비구가 들은 대로 외운 대로 마음으로 생각해 보고 지속적으로 고찰해보고 마음으로 숙고해 볼 때,
그는 그 법에 대해서 의미를 체득하고 법을 체득한다.]
듣고 배운 법을<기억에 의해서> 心으로 <반복적으로 意로 보고(이해/見解)> 尋伺한다.
[yaññadeva, bhikkhave, bhikkhu bahulamanuvitakketi anuvicāreti, tathā tathā nati hoti cetaso.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것에 대해 사유를 거듭해서 일으키고 고찰을 거듭하다보면
그대로 마음의 성향이 된다.]
kāmavitakka(66법의 6尋-6伺)는 욕界 중생들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cakkhunā rūpaṃ disvā
somanassaṭṭhāniyaṃ rūpaṃ upavicarati
domanassaṭṭhāniyaṃ rūpaṃ upavicarati
upekkhāṭṭhāniyaṃ rūpaṃ upavicarati,
눈으로 형상을 볼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1. 相(nimitta)과 연관된 記憶(sati) - 三界 2. 언어(vitakka/saṅkappā)적인 記憶(sati) - 欲界 |
무색界와 색界(초선은 제외)는 相(nimitta)에 의한 記憶(sati)이지만
욕界(색계 초선 포함)은 언어(vitakka/saṅkappā)적 이면서 相(nimitta)과 연관된 記憶(sati)이다.
그래서 記憶(sati)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욕계(색계 초선 포함)에서는 '기억과 생각',
혹은 '기억에 의한 생각', 기억은 생략하고 그냥 '생각'이라고 의역해도 되지만
그 이외에서는 이상과 같은 표현은 나타날 수 없다.
[idha, bhikkhave, bhikkhuno yaṃ nimittaṃ āgamma yaṃ nimittaṃ manasikaroto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어떤 표상을 의존하고(*having arrived) 어떤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탐욕과도 관련되고 성냄과도 관련되고 어리석음과도 관련된,
나쁘고 해로운 사유들이 일어나면 …]
여기서는 相<nimitta>과 尋<vitakka>가 함께 언급되는 경문이다.
[tamenaṃ tathāgato uttariṃ vineti —
‘ehi tvaṃ,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
vedanāsu... citte...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ī’”ti.
오라, 비구여. 그대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감각적 욕망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느낌에서 …
so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 pe ...]
[…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것에 대해 사유를 거듭해서 일으키고 고찰을 거듭하다보면
그대로 마음의 성향이 된다.
api ca kho me aticiraṃ anuvitakkayato anuvicārayato kāyo kilameyya.
kāye kilante cittaṃ ūhaññeyya.
ūhate citte ārā cittaṃ samādhimhāti.
그러나 '내가 너무 오래 생각하고 고찰하면 몸이 피로할 것이고,
몸이 피로하면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고,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삼매에서 멀어질 것이다.'라고 [꿰뚫어 알았다.]]
[ … 그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면
kāyārammaṇo vā uppajjati kāyasmiṃ pariḷāho, cetaso vā līnattaṃ, bahiddhā vā cittaṃ vikkhipati.
몸을 대상으로 하여 몸에 열기가 생기거나 정신적으로 태만해지거나 밖으로 마음이 흩어진다.
tenānanda , bhikkhunā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itabbaṃ.
그러면 그는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해야 한다.
tassa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ato pāmojjaṃ jāyati.
pamuditassa pīti jāyati. pītimanassa kāyo passambhati. passaddhakāyo sukhaṃ vedayati .
sukhino cittaṃ samādhiyati.
그가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면 환희가 생긴다. 환희가 생기면 희열이 생긴다.
마음에 희열이 있는 자의 몸은 고요하다. 몸이 고요한 자는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so iti paṭisañcikkhati — ‘yassa khvāhaṃ atthāya cittaṃ paṇidahiṃ, so me attho abhinipphanno.
handa, dāni paṭisaṃharāmī’ti.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내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마음을 향하게 한 그 목적이 이제 성취되었다.
이제 나는 거두어들이리라.'라고,
so paṭisaṃharati ceva na ca vitakketi na ca vicāreti.
그래서 그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찰을 하지 않는다.
‘avitakkomhi avicāro,
ajjhattaṃ satimā sukhamasmī’ti pajānāti”.
그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찰을 하지 않고
안으로 마음챙기면서 나는 행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evaṃ kho, ānanda, paṇidhāya bhāvanā hoti.
아난다여, 이와 같이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수행이 있다."]
위 경문에 나타나는 尋伺<vitakketi vicāreti>는
과거에 경험한 적이 있는 즉 기억(念)되어 있는 相<pasādanīye nimitte>에 대한 尋伺이다.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pasādanīye nimitte>에 대해 더 이상 作意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도 마음에 기억을 지닌<ajjhattaṃ satimā> 상황이다.
[Ye ca paṭhame jhāne dhammā
vitakko ca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초선에서의 尋伺<vitakko ca vicāro ca>는 三昧相에 대해 念念不忘(sati)하는 口行이다.
혹은 正思惟(sammāsaṅkappo ; nekkhammavitakko abyāpādavitakko avihiṃsāvitakko)이다.
삼매상이든 出離(감각적 욕망을 벗어남)에 대한 정사유이든
결국 慾이라는 界(틀)을 벗어난 心상태에 의한 尋伺이다.
[evamevaṃ kho, bhikkhave, idhekacco bhikkhu bālo abyatto akhettaññū akusal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taṃ nimittaṃ na āsevati na bhāveti na bahulīkaroti na svādhiṭṭhitaṃ adhiṭṭhāti.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비구가 있어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무는데 서투르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지 않고, 닦지 않고, 많이 [공부]짓지 않고, 바르게 확립하지 않는다.]
sarasaṅkappā
[idha, bhikkhave, bhikkhuno cakkhunā rūpaṃ disvā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tañce bhikkhu adhivāseti nappajahati na vinodeti na byantīkaroti na anabhāvaṃ gameti,
veditabbametaṃ, bhikkhave, bhikkhunā —
‘parihāyāmi kusalehi dhammehi’. parihānañhetaṃ vuttaṃ bhagavatāti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쇠퇴하는 법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본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난다.
만일 비구가 그런 것들을 인정해 버리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장 내지 않고
존재하지 않게 하지 않으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puna caparaṃ, bhikkhave, bhikkhuno manasā dhammaṃ viññāya nuppajjanti
pāpakā akusalā dhamm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veditabbametaṃ, bhikkhave, bhikkhunā — ‘abhibhūtametaṃ āyatanaṃ’.
abhibhāyatanañhetaṃ vuttaṃ bhagavatāti.
imāni vuccanti, bhikkhave, cha abhibhāyatanānī”ti.
… 마노로 법을 안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지배의 경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sarasaṅkappā라는 표현이 경문에 많이 나타난다.
'기억과 사유'라고 번역해도 되지만 欲界(gehasitā)와 관련되어 나타나면
'기억에 의한 사유'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tamenaṃ upadhipahānāya paṭipannaṃ upadhipaṭinissaggāya
kadāci karahaci satisammosā upadhipaṭisaṃyuttā sarasaṅkappā samudācaranti;
그가 재생의 근거를 버리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리기 위해 도를 닦을 때 이따금씩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재생의 근거와 관련된 기억과 사유들이 그를 압도한다.
dandho, udāyi, satuppādo.
우다이여, 그의 마음챙김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atha kho naṃ khippameva pajahati, vinodeti, byantīkaroti, anabhāvaṃ gameti.
그는 빨리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t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ṃ 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āraddho hoti;
satisambojjhaṅgaṃ tasmiṃ samaye bhikkhu bhāv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bhāvanāpāripūriṃ gacchati.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멀리 떠남을 갖추어 머물면서
그 법을 계속해서 생각<*기억>하고 계속해서 고찰<*생각>하면
비구에게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꾸준히] 닦는다.
그러면 비구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이러한 닦음을 통해서 성취된다.]
위 경문은 念<sati>과 尋<vitakka>가 함께 언급된다.
결론적으로 尋伺/思惟[vitakkavicārā/saṅkappā]는 우리말 '생각'과 그 용례가 일치하고
'기억[sati]'과는 연결되기는 하지만
sati를 '생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므로 잘못된 설명이다.
첫댓글
bad idea ? or
good ide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