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사노바
사람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지, 음악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지...... 어느 쪽을 먼저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요즘 새로 친구를 사귀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사실을 먼저 써야 할지, 아니면 요즘 새로 노래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나는 요즘 노래도 새로 만나고 있으며 새로 사귀고 있다.
‘새로’ 노래를 만난다거나 사귄다는 말은, 그 노래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노래라는 말, 즉 나로서는 생판 처음 들어보는 노래라는 말이 아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노래다. 아니, 자주 들어본 노래다. 그러니 새로운 노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노래가 어느 날 새롭게, 심지어 생판 새롭게 들릴 수는 있지 않은가? 요즘 나에게 그런 노래들이 생겼다. 제법 여러 곡 된다. 귓등으로 흘려버리곤 했던 가사와 곡조가 문득 뚜렷하게 인식되고 굳건하게 기억된다. “아, 저 노래가 저런 노래였구나.” 이렇게 되면, 당연히 그 노래를 좋아하게 된다. 귓등으로 흘려버릴 정도로 무관심했던 노래들도 많지만, 싫어했던 노래들, 그래서 흘러나오면 꺼버렸던 노래들도 없지 않다. 요즘 그렇게 듣기 싫던 노래 중에, 자리를 바꿔 듣기 좋은 노래 쪽으로 옮겨간 것들도 있다. “이것 봐라? 의외로 괜찮은데?” 이런 식으로 나는 요즘 새로 노래를 사귀고 있다.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요즘 사람도 사귀고 있는 것 같지만, 역시 사람 이야기 하는 것보다 음악 이야기 하는 것이 쉽다.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바뀐 노래라면, 이문세 노래를 들 수 있다. 특히 ‘가을이 오면’, ‘광화문 연가’, ‘빗속에서’ 등은 아주 자주 듣고 있다. 다 아는 대로, 이문세 노래의 상당수는 이영훈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하는 노랫말을 따라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혐오에서 애호로 바뀐 노래로는 조덕배 노래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특히 연가(戀歌)에 능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게 된 ‘나의 옛날이야기’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도 애절한 사랑 노래다. 정확하게 하자면 제 3의 부류도 분류해야 할 것도 있다. 원래 알고 있었고 좋아하기까지 하였으나,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더 좋아하게 된 것들이 그것들로, ‘시인의 마을’ 같은 정태춘의 노래를 예로 들 수 있다. 나는 예전에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과 같은 클라이막스만 알고 그 부분만 좋아했던 것이다.
“제 3의 부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첫 번째 부류와 두 번째 부류에 대해서는 의아한 것이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들은 “그렇다면 너는 여지껏 ‘가을이 오면’이나 ‘광화문 연가’ 같은 오래된 노래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하고 물으려고 할 것이고 “너는 예전에는 정말로 조덕배 노래를 싫어했다는 말인가?” 하고 물으려고 할 것이다. 조덕배 노래에 관한 한, 싫어하기까지 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그 창법 -- 단순히 ‘불량해 보인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뭐라고 할까, ‘병적으로 보인다’거나 ‘무엇에 취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해야 할 듯한 그 창법 — 이 싫었다. 그러니까 나의 감수성은 70년대 수준, 즉 어니언스나 김정호 수준에서 성장을 멈추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보잘 것 없는 감수성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난 후에는, 즉 80년도부터는 새 노래를 거의 듣지 않았다. 이것은, 그 때부터는 내가 직장과 학교(대학원) 이외에는 거의 방문을 하지 않았고, 직장 사람들과 학교 사람들 이외에는 거의 만나지를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러던 네가 어쩌다가 갑자기 새로 노래를 사귀게 되었는가?” 혹은 “고착되어 있던 너의 감수성이 어쩌다가 갑자기 성장을 재개하게 되었는가?” 당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나도 답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다.”거나, 같은 말이지만, “우연인 것 같다.”거나 “원래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역시 같은 말이지만, “그 간의 온갖 경험들 — 심지어 귓등으로 흘려들은 노래나 독서, 여행 등등까지 포함하여 — 이 쌓여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답해도 될 것 같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새로 노래를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이요, 그 노래들과 더불어 내 감수성이 약간 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 그 노래들은, 최소한 예전의 나의 감수성에 비하여, 높은 수준의 감수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물론 확실하다. 그러니까 이문세나 조덕배 노래는 내 감수성의 너머에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 ‘어렵다’는 말을 쓴다. 그들 노래는 예전에 나에게 어려운 노래였다. 어려워서 무관심했던 것이며, 어려워서 혐오했던 것이다. 어떤 노래가 나에게 어려운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알아보려면, 물론, 그 노래를 들어본 후, 인식이 되고 기억이 되는지, 혹은 호감이 생기는지를 확인해 보면 되지만, 조금 더 분명하게 알아보려면, 그 노래를 몸소 불러보면 된다. 자기가 반주를 하면서 불러보면 더 좋다.
‘가을이 오면’은 박자(혹은 장단)가 특이하다. 마치 틀린 노래 같다. ‘나의 옛날 이야기’는 멜로디나 화음이,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보사노바라는 어려운 리듬을 구사한다. 창작 생활의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이영훈과 조덕배는 자신의 감수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새로우면서도 완성도 높은 노래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나이 들어, 그들의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그들의 감수성을 따라잡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될 듯, 될 듯하는데, 잘 안 되네.” 그러다가 ‘되면’, 새로 노래 한 곡을 사귄 것이 되는 것이다. 어쩌다가 새로 노래를 사귀게 되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으며,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거기에는 내 편의 노력도 약간 요청되는 것 같다.
음악에 관한 이 모든 말이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오래 보아왔지만 내가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친구들도 있고 특별히 호감을 느끼지는 못했던 친구들도 있다. 이들은 나에게 어려운 사람들이다. 나의 감수성을 능가하거나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감수성을 발달시킨 사람들이다. 나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나는 그냥 기다리면 된다. 어느 날 문득 그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어느 날 문득 그들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이는, 노래들이 달라진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문세 노래건, 조덕배 노래건, 정태춘 노래건, 그 노래들은 예전 그대로 있다. 내가 달라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달라진 것이다. 물론 별의 별 경험이 장기간에 걸쳐 누적되고 누적되었다가, 그렇게 문득 피어난 것이다.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 때문이지만, 나는 요즘 보사노바 리듬에 끌린다. ‘안토니오의 노래’라든가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 등을 들을 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그 멜로디와 리듬을 인식하고 기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즐기게 되었다는 뜻이며, 약간은 부를 수도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보사노바는 프랑스 영화 같다. 극적인 것도 없고, 복선도 없고, 반전도 없고, 시선을 끄는 것도 없다. 싱거운 친구다.
첫댓글 보사노바와 카사노바 조차 헷갈리는 무식한 나는.... 어쩌다 노래방 가면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양희은 노래 밖에....
그간에는 예전에 대했던 음악이나 사람들 등에 무관심했지. 관심 갖을 겨를도 없었고,,나이가 드니 이제 좀 깊은 뭔가를 이해 할수있는 여유와 안목이 생기는 것 같아?? 조교수님 나는 요새 보사노바 리듬보다 뽕짝에 관심이 더 가던데~ㅎㅎ
그러고 보니 보사노바와 카사노바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ㅎㅎ 나도 얼마 전부터 뽕짝도 즐기게 되었어. 배호 노래도 좋고 말이야.ㅎㅎ
그래 맞다 배호 노래가 딱이다 ㅎ
그냥 기다리지말고 이제는 네가 다가가보렴.. 학주니는 마이크를 잡았다하면 야들 노래를 메들리로 부른단다..
하하 마이크 잡았다 하면 놓지를 않는구나. 메들리로 ㅎㅎ. 영욱 오랜만이네.
음악에 관해서는 많은 공감이 가는 글일세. 어느날 연가나 보사노바에 끌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내생각으론
첫째 연가에 끌리는 것은 옛추억을 그리는 나이가 됐기 때문일세. 특히 잔잔한 멜로디에 노랫말이 우리의 청소년시절 야그니까. ㅋㅋ 둘째 보사노바에 끌리는 이유는 귀를 열고 경청할 수 있는 여유랄까? 그 여유로움을 바탕으로 마음에 창이 열리는 연륜이 됐단 야그지. 암튼 추카하네. 이 나이에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게 돼서리~~~
나처럼 평생 한두곡만 뽑고 있는 사람에겐 굊아히 수준높은 음악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