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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태호석과 수호지
2월 16일 평망역이라는 곳을 떠나 배를 당겨 평망하를 거슬러 앵두호 오강호를 지나 이윽고 태호를 만난다. 태호라 하면 서울의 두 배 넓이의 엄청난 호수다. 최부는 태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태호는 우공이 진택(震澤)을 정하였다는 것과 『주례』 직방(職方)이 양주의 수택(藪澤)을 구구(具區)라고 하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혹 이것을 오호(五湖)라고도 말하는데 그 (호숫가의) 길이가 오백 여 리나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또 범려(范蠡)가 놀았던 곳이다.>
최부가 말한 ‘우공이 진택(호수)을 정하였다는 말’, 이 말은 書經[서경]-89 하서(夏書)(1)제1편 우공(禹貢)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하(夏)는 우(禹)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렸던 왕조를 가리킨다. 하서(夏書)는 하 왕조(夏王朝)의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 것이라고 한다. 중국민족을 화(華) 혹은 화하(華夏)라고 일컫게 된 것은 하왕조(夏王朝)의 하(夏)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왕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로서, 중국의 민족과 정치와 문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개로 간주되고 있다. 14대에 걸쳐 17명의 임금이 다스렸으며, 약 400여 년 동안 왕업(王業)을 누렸는데, 서기(西紀)로는 대략 기원전 2183년 경에서 1752년으로 잡고 있다. 하(夏)의 역사로는 곧 이 하서(夏書)에 수록된 우공(禹貢)과 감서(甘誓), 오자지가(五子之歌),윤정(胤征)등이며, 그밖에는 유실 되었다고 한다. 그 글에 나오는 해당 문장은 다음과 같다.
<회수(淮水)와 바다 사이에 양주(揚州)가 있다. 팽려(彭蠡) 호수에 이미 물이 모여 흐르니,양 조(陽鳥)[기러기]가 살게 되었다. 세 개의 강줄기가 이미 바다로 들어가니, 진택(震澤)이 안정되게 되었다 살대와 큰 대가 이미 퍼져 잘 자라고, 풀은 여리게 자라며 나무는 높이 자라고 흙은 진흙이다. 전(田)은 하(下)에 하(下)이고, 부세(賦稅)는 하(下)에 상(上)이니, 간혹 그 위의 등급으로 섞어 내기도 하였다 >
그 글에는 중국의 지리나 수리 산등을 이런 식으로 펼쳐 놓았는데 한마디로 다스리는 치세의 범주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이 양주나 소주등 절강성과 강소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여기서 진택은 호수로 바로 태호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주례 운운 구구(具區) 같은 의미도 또한 태호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우공이라 하여 나는 우공이산을 처음 생각했었다. 나는 그 일화가 아주 재미나 이 글과는 전혀 무관한데 껴 넣었다. 여러분들도 조운로를 따라가는 2천리 긴 여정 이참 한 번 웃고 가기 바란다.
<옛날, 중국의 북산에 우공이라는 90세 된 노인이 있었는데, 태행산과 왕옥산 사이에 살고 있었다. 이 산은 사방이 700리,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큰 산으로, 북쪽이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했다. 우공이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저 험한 산을 평평하게 하여 예주의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는 동시에 한수의 남쪽까지 갈 수 있도록 하겠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 모두 찬성했으나 그의 아내만이 반대하며 말했다. 『당신 힘으로는 조그만 언덕 하나 파헤치기도 어려운데, 어찌 이 큰 산을 깎아 내래는 겁니까? 또, 파낸 흙은 어찌하시렵니까?』 우공은 흙은 발해에다 버리겠다며 세 아들은 물론 손자들까지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와 광주리 등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황해 근처의 지수라는 사람이 그를 비웃었지만 우공은 『내 비록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내가 죽으면 아들이 평평해 질 날이 오겠지.』 하고 태연히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쉬지 않고 파들어 갔다. 이를 지켜보던 산신령이 이러다가는 자신의 거처가 없어질 형편이라 천제를 찾아가 호소했더니, 천제는 우공의 우직함에 감동하여 역신 과아씨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두 산을 하나는 삭동에, 또 하나는 옹남에 옮겨 놓게 했다고 한다.이로부터 기주의 남쪽과 한수의 남쪽에는 언덕조차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나온다. 은토는 고대 전설에 나오는 지명이다.>
태호에 대해 아무튼 서울 두 배 크기답게 최부도 글에서 호수길이가 오백리라고 적고 있다. 최부는 태호의 지형에 대해 또 이렇게 적고 있다.
<호수 가운데에는 동정(洞庭)의 동서로 산이 2개 있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포산(苞山)입니다. 한눈으로 천리를 볼 수 있는데, 높은 바위와 여러 산들이 넓고 아득한 곳에 산재하여 있다. 호수의 동북쪽에는 영암산(靈岩山)이 아래로 태호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일명 연석산(硯石山)이라고 하는데, 오가 연석 관왜궁(館娃宮)를 지었다는 곳이 이곳입니다.>
실제 태호는 옛날에는 바다였으나 양자강 어귀의 삼각주가 발달함에 따라 형성된 담수호다. 태호에는 크고 작은 섬이 48개가 있으며, 섬과 호수 주위의 산봉우리가 도합 72개가 있어 “태호72峯”으로 불린다. 태호를 가리켜 말하기를 “ 山外有山 , 湖中有湖 , 山巒連錦 ,”이라 하였다. 즉 산밖에 산이 있고 , 호수안에 호수가 있으며, 작은 산들은 비단을 이어놓은 듯 하여 층층이 중첩하여 놓은 천연의 화폭과 같다고 하였다. 태호의 동, 서쪽과 북쪽에는 구릉이 있고, 호수 가운데는 최부가 말한 대로 西洞庭山, 동동정산등 작은 섬이 48개가 있다.
그림에서 보듯 최부는 가흥시에서 오강시를 거쳐 소주시로 향하고 있는데 경항운하는 그리로 해서 무석시 상주시로 이어져있다. 호수가 어찌나 큰지 접한 시만도 다섯 개나 된다. 태호 주위는 오월문화의 발원지로 춘추시기(春秋時期)의 합여성(闔閭城), 월성(越城)유적지, 수(隋)나라 대운하(大運河), 당(唐)나라 보대교(寶大橋), 송(宋)나라 자금암(紫金庵), 원(元)나라 천지석옥(天池石屋)이 있다. 최부 일행은 북쪽에 고소산을 바라보며 북으로 향했는데 오강현에 이를 쯤 놀라운 경관에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최부가 그곳에서 고소역에 다다르는 상황의 정경묘사를 한 번 읽어보자.
< 곧 바로 오강현에 다다랐는데, 그 사이에 또 돌로 된 대교 홍문이 대략 70여 개나 있었습니다. 역과 현은 모두 태호 안에 있었으며, 건물은 아름다워서 아래에 초석과 섬돌(돌계단)을 펼치고 위에는 돌기둥을 세워 조영되었습니다. 호수가 둘러싸고 돌아 돛과 돛대가 마을 중에 빽빽이 들어 서있는 것 같았습니다. 소위 “사면의 고기잡이 집이 현성을 위요(圍繞)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보대교(寶帶橋)에 이르러서는 또 홍문이 55개나 있었고 바로 배와 수레가 왕래하는 요충이었습니다. (보대교가) 담대호(澹臺湖)에 걸쳐있는데 호수와 산이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허리띠와 같았습니다. 밤 삼경(저녁 11시~1시)이 되어 소주성 가까이 가서 남쪽으로 서쪽으로 향하여 고소역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보대교로부터 이 역에 이르기까지 양쪽 호숫가에 시가와 상점이 서로 이어져 있었고 상선(商舶)이 성시를 이루고 있어서, 진실로 이른바 “동남 제일의 도회지”였습니다.>
최부 말대로 동남 제일의 도회지에 온 것이다. 그가 본 55개의 홍문이 연이어진 보대교는 317미터의 중국 최장의 석교로 현존해 있다. 소주남쪽에 지금도 소주는 부자동네 답게 예쁘고 탐나는 정원이 많다. 지금도 소주는 정원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이 엄청나게 많다.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값나는 돌이 필요한데 혹시 태호석이라고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태호석(太湖石) 이란 바로 태호 주변의 구릉에서 채취하는 까무잡잡하고 구멍이 많은 복잡한 형태의 기석이다. 태호 부근의 언덕이나 호수에 떠오른 섬은 청백색의 석회암이 많지만, 이전에 내해였던 태호의 물에 의한 오랜 기간 잠식된 석회석에는 많은 구멍이 숭숭 뚫려, 가무잡잡한 바위가 기괴하고,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된다.
태호석은 소주의 정원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그 정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사람들에 의해 수요가 늘어나 중국 각지의 정원에 감상이나 명상 등을 위해 놓이고 있다. 이화원의 태호석이나 청나라 황제의 휴식처인 열하의 피서산장도 소주의 정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소주고전원림은 모두 이 태호석을 주재료 중의 하나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태호석 때문 반란이 일어나고 급기야 나라가 망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믿을 텐가.
송나라 황제 휘종(徽宗)은 취미가 희한했다. '축산조원(築山造園)'하는 취미였다. 세상에 있는 그럴 듯한 나무와 암석을 모조리 수집, 대궐에 정원을 꾸미는 취미였다. 이런 것들을 모으려면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나무와 암석을 수집하는 비용이 아니라, 운반하는 비용이었다. 마침 당시 중국의 재상은 채경(蔡京)이라는 간신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간신이었다. 채경은 휘종에게 "태평성대를 즐겨야 하는데 세월이 얼마나 남았다고 고생을 하고 계십니까"하며 아부를 했다. '간사한 재주'로 휘종의 교만과 사치를 부채질한 것이다.
채경은 주면(朱面)이라는 '업자'를 불러서 강남에 있는 진기한 나무와 암석을 수집, 진상하도록 했다. 주면은 백성의 집에 마땅한 것이 있으면 천자어용(天子御用)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강제로 빼앗았다. 빼앗기기 싫어하는 백성은 불경죄로 잡아넣었다. 빼앗은 것을 대궐로 운반할 때에도 백성을 멋대로 징발해 인부로 부렸다. 운반하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집이든, 묘지든 가리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운하에 있는 수문까지 깨뜨려버렸다. 원성이 들끓었다.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진상 규모는 갈수록 커졌다. 마침내 대규모 선단(船團)까지 조직, 운하를 통해 나무와 암석을 운반하게 되었다. 이 선단을 '화석강(花石綱)'이라고 했다. '강(綱)'이란 각 지역에서 거둬들인 물건을 운반하는 선단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중국소설 '수호지'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청면수 양지는 황제 휘종의 대궐에 바치는 암석을 운반하는 책임자였다. 양지는 어느 날 암석을 싣고 황하를 건너다가 거센 바람이 부는 바람에 모두 물에 빠뜨리고 문책이 두려워 도망치게 되었다. 그러다가 '자수해서 광명을 찾기로' 했다. 북경 대명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양지는 무술이 뛰어났다. 귀양지인 북경에서 양충서라는 사람의 눈에 들었다. 양충서는 양지에게 실력자 채경에게 보내는 생일선물 10만금을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생일선물을 운반하던 양지는 황니강이라는 언덕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탁탑천왕 조개에게 속아 선물을 송두리째 털리고 말았다. 두 번이나 운반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양지는 갈곳이 없었다. 유일하게 갈 곳은 '양산박'뿐이었다. 수호지에는 그렇게 적혀있다.
아무튼 채경은 엄청난 거부였다. 엄청나게 긁어모았던 것이다. 보유하고 있던 땅만 1천만 평이 넘었다. 채경은 자신의 생일잔치 때 꽃게 알을 넣은 만두를 만들어 손님을 대접했는데 그 비용이 무려 1,300,000냥이나 들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생일선물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어지간한 지방관리는 모두 선물을 '바쳤다'. 바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얼마나 선물이 많았던지 생일선물만 전문적으로 운반하는 조직이 생겼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이를 '생진강(生辰綱)'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러니까 화석강은 나무와 암석을, 생진강은 생일선물을 각각 전문적으로 운반하는 조직이었다. 화석강의 주면과, 생진강의 양지는 운반책임자였다. 물건의 '종착지'는 황제인 휘종과, 재상인 채경이었다. 그렇다면 주면과 양지는 말하자면 브로커였다. 말하자면 ' 휘종과 채경은 실력자 몸통이고 그들은 깃털'이었다.다. 이른 바 方臘(방랍)의 亂(난)의 동기라고 할까.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백성들의 불만이 커져 급기야 1120년 방랍(方臘)이 반란이 일어난다.
과정 1120년 방랍은 반란을 일으키고,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개칭하고, 독립적인 국가수립을 지향하여 항주, 목주 등을 공격하였다. 이어 안휘와 강서 등으로 확대되었고, 난을 일으킨 지 10일 만에 10만여 명의 농민들이 가담하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휘종은 요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동관의 군사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백성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휘종은 기석 수집을 중지하고, 강온양책을 쓰기에 이르렀다.
방랍의 난은 1121년에 평정되었지만, 결국 진압 과정에서 협력한 엄청난 백성(300만명이라고 하는 데 믿기는 어렵다.)을 도륙함으로써 국력의 약화를 불러왔다. 결국 1127년 금나라에 의해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과 아들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가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이때 휘종의 9남이자 흠종의 아우인, 조구(趙構)는 난징으로 도망쳐와 남송을 세우고 고종이 된다. 이 무렵 방랍의 난을 진압했던 한세충과 소작농 출신의 악비는 금나라에 저항하는 의용군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고전 소설 수호전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며, 송강 등의 일부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태호석이 수호지를 만든 셈이다. 지금도 수호지에 등장인물 중에 실존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의견들이 팽팽하다. 설마 무대와 반금련은 실존인물이 아닐테지. 최부도 수호지를 모를 리 없을 것인데 말을 안하는 것은 임금에게 받치는 글이라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제는 보대교로부터 이 역에 이르기까지 양쪽 호숫가에 시가와 상점이 서로 이어져 있었고 상선(商舶)이 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최부가 말한 소주탐방을 할 차례다.
♬ Over Valley and Mountain - James Last
첫댓글 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