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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박정희,
하루에 담배 두 갑 피우고
스웨덴 경제학자 책을 읽었다”
1969년에 기록된
‘청와대 본관, 대통령의 하루’
----1973년 여름, 박정희 대통령이 휴양지인 거제시
저도의 해변에서 담배를 문 채 측근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조선일보 DB >
문화재청이 지난 3일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 연구’ 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여기서 경복궁 후원이란 청와대를
말합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국민에게 개방된
청와대에 대해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
어떻게 보존·관리할지 연구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400여 쪽 분량의 이 방대한
보고서에서 저는 무척 흥미로운 대목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청와대 본관에서의 대통령의 하루’를
기록한 옛 신문기사였습니다.
그 얘기 전에 먼저, 보고서에 적힌 1960년대
청와대의 변화 상황부터 언급해야겠습니다.
원래 이름이 경무대(景武臺)였던 청와대는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입주한 뒤 대통령
관저 겸 집무실이 됐습니다.
이것을 청와대(靑瓦臺)란 이름으로 바꾼 사람은
윤보선 제4대 대통령이었습니다.
‘경무대’는 원래 조선 말 경복궁 후원의
명칭이었으나 4·19 뒤에는 독재 정권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어서 사람들이 싫어했다고 합니다.
----1960년 8월 19일, 국회에서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장면(오른쪽) 총리가 경무대를 찾아 윤보선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
윤보선 대통령은 서울시사 위원 김영상이
제시한 두 이름, ‘화령대’와 ‘청와대’ 중에서
청와대를 선택했습니다.
전후 맥락 없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듯한
‘화령대’란 이름엔 사실 발해 때부터
유래된 깊은 역사적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예전 ‘돌발史전’을 통해서 짚은 적이
있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를 1년 7개월 동안
사용한 뒤 청와대는 1년 8개월 동안 주인 없는
기간을 거쳤고, 1963년 12월 1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이 취임 하루 전날 가족과 함께
이사하면서부터 다시 ‘주인 있는 집’이
됐습니다.
당시만 해도 청와대는 수시로 국민에게
개방되는 장소였는데, 1961년의 경우 4월 10일
이후 매주 월·수·금 오후 1~5시에 개방됐으며
4월 14일에는 하루에 4만 명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1962년 4월 28일부터 5월 5일까지는 6일
개방됐는데 9만2000명이 방문했죠.
----1993년 철거된 옛 청와대 본관----
< 조선일보 DB >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 뒤 청와대 시설을
확충했습니다.
5·16 당시 서울로 진입한 30사단과 33사단
병력 중 일부가 청와대 주변에 눌러앉았는데,
이들이 수도방위사령부 창립 핵심 부대인
30경비단과 33경비단이었습니다.
30경비단은 대통령 최근접 경호부대로서
경복궁 북서쪽 담장 안, 그러니까
북문인 신무문 근처에 있었는데
1996년까지도 이곳에 주둔했습니다.
제 친구 한 명이 1990년대 초 그곳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의병제대했는데,
복학한 뒤
“목봉체조의 원조는 삼청교육대가 아니라
30경비단”
이라고 주장하며
“매일 아침이 죽을 만큼 힘들었다”
고 토로했습니다.
1964년 2월 청와대 온실 옆 솔밭에
헬리콥터장이 만들어졌고, 1965년 11월
경호실과 비서실이 들어선 부속 청사가
지어졌습니다.
1966년에는 청와대 앞 청와대로가 확장되면서
청와대의 낡은 벽돌담장을 허물고
흰색 철책을 세워 밖에서도 청와대 내부를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청와대 개방 행사는 해마다 4월이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 김신조
등 무장공비 32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승만 정부 이후 계속됐던 청와대 개방이
중지됐고, 뒷산인 백악산 통행도 금지됐습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포함한 북측의 무장공비가
청와대기습을 시도 했다. 공비 김신조가 생포되고 있다----
문화재위원회의 반대로 철거되지 못했던
청와대 서쪽 칠궁(七宮)이 철거돼 옆으로
이전됐습니다.
칠궁은 조선왕조의 임금을 낳은 친어머니였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장희빈 등 일곱 명 후궁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이곳 역시 1·21 사태 이후 전면 통제됐고,
2001년에야 통제가 풀렸습니다.
현재의 칠궁 건너편 무궁화동산은 바로
1979년 10·26 사태의 현장인 중앙정보부
안가가 있었던 곳입니다.
1969년 8월에는 대통령 집무실이자 관저인
본관을 증축했는데, 후면으로 공간을 더하는
수평 증축이었다고 합니다.
증축 이후에도 본관은 여전히 1층은 집무실,
2층은 대통령 가족의 생활공간이었습니다
본관이 새로 지어져 관저와 떨어진 것은
훗날 노태우 대통령 때의 일이었고,
1969년 당시엔 같은 건물에 집무실과
생활공간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본관이 너무 좁아 가정집기들이 복도에
나와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지만,
예산 절감 등의 이유로 증축이 미뤄지다가
이때서야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 여기서 이런 기사가 출현합니다.
1969년 6월 3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청와대 본관에서의 박정희 대통령의 하루를
묘사한 글입니다.
기사 제목은 ‘전진하는 집념’이었습니다.
보고서에 기록된 표기를 그대로 살려 어떤
내용인지 보겠습니다.
<박대통령의 24시는 아침6시 청와대
본관 2층 침실에서 기상과 함께 시작된다.
6시 10분쯤 세면을 마치면 애견 방울이를
데리고 북악산 기슭의 정자에 이르는 길을
산책한다.
산책에는 간혹 지만 군이 뒤따를 때가 있다.
산책을 마치고 응접실에 돌아온 박대통령은
먼저 조간 신문을 펴들고 구석구석을 알뜰히
살핀다.
7시 30분쯤 잠바 차림으로 신관에 내려와서
이발소에 들르는 경우가 많다.
8시쯤에는 식구들과 한 자리에 모여
빵 수프 달걀프라이 정도로 가볍게
아침상을 든다.
기상에서 조반에 이르는 2시간 남짓은
시정의 한 평범한 시민과 다름없는 단순한
사생활이다.>
청와대 공보 파트에서 작성한 원고일
가능성이 있고 엄밀히 말해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단히 소박하고 실용적인데다
지나친 분식(粉飾) 같은 것이 잘 보이지 않는
하루 일과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무 모습----
< 국가기록원 >
<9시 정각 본관 아래층에 자리잡은 집무실에
들어선다.
의전비서실에서 미리 짜 놓은 스케줄을 책상
위에 꽂아 놓고 그 날 하루의 일을 정리해본다.
기억력이 남다른 박대통령도 그날 누구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생각을
미리 메모해 두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다는 것.
박대통령은 제일 먼저 이후락 비서실장을
맞는다.
이실장을 만난 자리에서 밤새 일어났던
일과 그날 스케줄이 다시 한 번 검토된다.
이실장과의 상의가 끝나면 결재서류가
밀려 닥친다.
제1·제2경제, 정무, 민정, 공보, 총무비서관 등이
차례로 한 사람씩 걸쳐간다.
일단 제출된 결재서류는 모두 읽어본 뒤
사인하고 처리방향까지 제시해서
내려보내진다.>
예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이하윤의 수필 ‘메모광’ 속 주인공의 모습은
알고보니 1960년대 청와대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가장 먼저 이후락을 만난다는 것에 섬뜩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
이었습니다.
<외래인의 접견은 보통 10시부터 시작된다.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부 장관의
보고사항,
고급관리들의 출입국신고, 외무사절의 이·취임
예방 등이 거의 매일 같이 계속된다.
12시 30분쯤 회의에 참석했던 국회의원 및
장관들과 식당에서 짜장면이나 냉면 국수
등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운다.
비서관들은 외식하는 경우가 있어도 박대통령
자신이 외식하거나 성찬을 드는 경우는 없다.
회의는 주로 하오에 열린다.
박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는 브리핑차트에
의한 보고사항으로부터 시작된다.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 모호한 점이 있으면
해명될 때까지 질문이 계속된다.
막료들의 실력을 평가하는 데 좋은 찬스이기도
하다.>
----기자들과 함께 청와대를 산책하는 박정희 대통령----
< 조선일보 DB >
‘점심을 때운다’는 말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식사를 거르거나 직장에서 대충 먹는 것은
이 세상 대부분 워커홀릭들의 공통점입니다.
브리핑에서 모호한 점을 참지 못하고 끈질기게
질문을 한다는 것에서, 이 실용적인 캐릭터는
상당히 장기지속을 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박대통령은 공식 스케줄이 비어 있을 때는
갑자기 헬리콥터나 자동차를 내어 서울
근교에 있는 목장과 공장을 돌아본다.
박대통령이 움직이는 데는 이후락 실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이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박경호실장은 신관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면서도
본관 대통령 집무실 주변을 떠나는 경우가
드물다.
5시 반 일과가 일단 끝나면 웬만한
일 없이는 비서관들을 찾지 않는다.>
훗날 10·26 당일에도 그는 헬기를 타고
삽교천 준공식에 참석했으며, 마치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눈에 담기라도 하듯 서울
상공을 한 바퀴 둘러봤다고 합니다.
<6시까지 잔무를 처리하고 그날 들어온
석간 신문을 빠짐없이 읽는다.
7시쯤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TV뉴스를 잠시 시청한 다음 곧 2층
서재로 들어간다.
박대통령은 최근 미르달의 아시아의 드라머,
슈라이버의 미국의 확전 등을 읽었다.
대통령은 역사와 경제 관계 서적을 탐독하는
편이다.
밤에는 간혹 저명한 학자 국회의원 혁명 동지
등을 불러들이지만 유명인만은 아니다.
그들과 저녁을 같이 하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
‘미르달’이란 인물은 197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1898~1987)입니다.
‘드라머’라고 표기됐지만 이 저서는 1963년에
낸 ‘아시아의 드라마(Asian Drama)’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아시아의 빈곤 문제를
분석했으며, 저개발국가의 경제개발 이론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의 이 책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어쨌거나 도움이 된 듯합니다.
‘슈라이버’란 인물은 미국의 정치인이자
사회운동가였던 로버트 사전트 슈라이버
(1915~2011)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매제이자 한때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장인이었습니다.
<체인 스모커로 알려진 박대통령은 하루 2갑
이상의 담배를 피운다.
정종을 즐기는 애주가이기도 하지만
육여사의 만류로 많이 드는 편은 아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주치의인 지박사의
건강진단을 받는다.
코수술로 한 번 입원한 병력이 있을 뿐
단단한 체력인 대통령은 하루도 공무를
거른 일이 없을 정도이다.>
‘주치의 지박사’란 인물은 1963년 11월부터
1970년 5월까지 대통령의 주치의로 일했던
지홍창(1921~1981) 박사입니다.
종두법을 도입한 지석영 선생의 장손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위장 전공 내과전문의였습니다.
----1966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방한한
존슨 미 전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함께한 모습----
< 조선일보 DB >
1969년 6월 당시 만 51세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하루 일과는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별세한
뒤에 한 차례 변화를 겪었을 것이고,
1979년 10·26 사태 직전의 상황과는 더욱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의 이 담백하고 건조하며
지나친 위화감이 없는 단면(斷面)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든 대한민국을 크게 변모시켰던
장기집권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이 기록 불과 3년 뒤 유신을 선포하고
사실상 종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독재자였으나
같은 시기 세계 다른 지역의 독재자들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유석재 기자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돈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료와
평가가 있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가려 대한민국의
발전에 거름을 주어야한다.
우리 역사에서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이룬 큰
전진의 변화는 너무 감동이고 벅차다.
그럼으로 모두가 동감할 객관적이고 정확한
자료발굴과 평가가 이뤄져야한다.
법림
우리민족의 성웅이신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평생을 오직 국가와 국민들의 안위와 기근을
없애버리는데 아낌 없이 바치신 분이시라고
기억한다.
성웅께옵서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날을 오로지 자나깨나 국가의 발전을 위한
구상에 쏟으셨을 것이다.
님께서는 농민들의 가난을 물리치시기 위해 그리고
아플 때 국민 누구라도 병원을 이용할 수 있게
하시려고 혼신을 다해 쉼 없는 구상과 실천을
위해 바치신 분이시다.
지금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나 농민들의 가난을
물리치신 것이며 자주국방을 위해 열정을 다하신
점 등 국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만도 어찌 다
서술할 수 있을까?
님의 헌신적인 국가와 국민을 위하신 부단한
노력에 의해 우리는 지금 세계적인 국가가 돼서
항상 더 큰 굳건한 국가로 거듭 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더욱 굳건한 국력을 일으켜서 님의 뜻에 부합된
실천으로 답하자.
술퍼맨
박정희대통은 그런 지식습득으로 유능한 경제관료를
발탁해 믿고 맏기지만 뭉가라면 어설프게 이해하고
자기가 경제에 대해 더 잘 아는척 하며 경제관료의
발목을 잡았겠지요.
gofori
글 잘 읽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생전 모습과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기억에 새롭습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된데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자유 민주공화정이라는 국체를
선택했고, 한미동맹을 맺은 공이 큽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과 대국민
정신교육이 주효했습니다.
비젼을 가지고 실행에 옮긴 위대한 대통령
두 분이십니다.
대한민국을 위한 두 분의 헌신에 감사합니다.
danke456
지금도 기억난다!
국민학교 시절! 박통 서거일 아침 기분 나쁘게
엄청 흐린 서울의 하늘이!
진짜 대통령 그 분이 없었으면 여긴 공산화되었고
배고픔에 굶주리고 있을 것이다!
danke456
우리 개버린 문도 책 좋아하는데 사상적으로 이상한
책 읽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진 찍어 올리는 게
목적! 비교되네
좌들은 지들이 북을 찬양하면서 북으론 안 가고
자식들은 싫어하는 미국 유학 보내는지 희한하네!!
MayFerry
다 잘 하셨지만 전라도 왕사기를 현해탄에 수장하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놈은 다 망해가던 북한을 살려내 통일을
방해하였고 핵개발을 지원하였습니다
eureka
박정희라는 인물은 우리 민족사에서 천년에
한 번 나올 민족중흥의 영웅입니다.
많은 이들이 비난하는 유신을 통한 종신 대통령
등극도 그의 마음 한편에는 국운융성의 한 마음이
자리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네
박정희 대통령이 유럽에 300조 숨겨 놓았다고
공갈 사기친 안민석이 대체 언제 구속 합니까
즐거운 희소식 기다리다 목 빠져 죽을 지경이다...
레떼라피노끼오
만 51세였던 박정희 대통령?
세월이 너무 빠르네.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더 많아졌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
harry
그분 같은 강력한 비젼 제시와 영도력을 가진분이
그립니다..
합리가 통하는 세상****
가장 공부안한 무식한 대통령 문재인!
질김
지금 정치판 보면 아찔하다.
그때 장기간 부국강병 안 했다면 세계 11위 경제대국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무시한 원론적 시각만으로 장기집권
독재라하는 건 굶고 산 국민들은 동의하
햇살님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 맞다.
오로지 나라 사랑하고,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데만
신경을 쓴 독재자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애국 애민 국가의 현대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의
유일한 독재라면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게 뭐 어떠냐?
사람들이 산소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듯이
그가 우리 5,000만 국민의 행복을 갖다준 고마움을
모른다.
미국의 정치가가 박정회 대통령을 일컬어 미국의
민주화에 꽃을 피운 링큰 보다 더 위대한 정치가라고
말한걸 들었다.
정말 박정의 대통령의 고마움을 잊지 말자!!!
우리가 진정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최소한 그게 안 되더라도 그에게 손가락질 하는
괴물 인간은 되지 말자!
무궁화 꽃이 피었네
노무현 고급 피아제 시계, 박정희 대통령은 낡은
시티즌 시계와 혁띠....
무궁화 꽃이 피었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1974년 박정희...
휘호 볼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뭉클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