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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보훈의 날, 65년 전 6.25전쟁에서 격전을 겪은 참전 용사들, 특히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이야기가 뉴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 장진호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고 이용각교수 (38회 동문, 1924-2016)의 생생한 참전기를 소개 합니다.
이 내용은 미군 7사단의 일원으로 장진호 전투를 마치고 미해병 1사단에 전입하여 다음 해 서부전선의 야전병원에서 복무하고 있을 때, 전쟁기록에 관심을 가진 동료 군의관 Dr. Birney Dibble (Korean War Educator: Memoirs)에게 구술한 내용이 Naver Blog에 번역 게재된 것을 전재합니다.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ln7&fldid=J89v&datanum=23&q=%C0%CC%BF%EB%B0%A2&_referer=V7kfJwkeLEGOs5cpwax1KqmH7lqgHIMNLRccWHZgqYovONUpkZqozEPKaDQlM7G4&search=true)
같은 내용의 축약본이 고 이 교수의 자서전 (갑자생 의사; 아카데미아사 1977)에도 실려 있습니다.
1950년 11월 말,
승리로 의기양양했던 모래시계사단(미육군 7사단)은 북한 끝까지 달했고 지형은 거칠고 가차 없이 추웠다. 흥남을 떠날 때는 바람이 부드러웠으나 2,400피트 고도로 가자 하루에 네 번 눈이 내린다. 아침 서리가 눈처럼 내리는 게 눈에 직접 보인다.
모든 GI들은 이제 크리스마스를 미국에서 보낸다고 생각했다.
우린 계속 올라갔고, 하갈우리에는 동계장비를 잘 갖춘 해병대가 있었다. 우린 장진호 북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난 한국군이 아니고 미 육군 32연대 1대대에 속했다.
결국 장진호 끝에 도달한 11월 27일 우린 임시 숙영을 준비했다. 몇몇 중국인 외에는 아무도 없는 무인지대였다. 미군과 한국군 병사들이 임시 대대 의무대를 텐트로 만들었다.
그때가 밤 10시. 난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침낭에 들어갔다.
“Dr. Lee, wake up! Dr. Lee!”
목소리가 내 취침을 중단시켰다. 나를 깨운 건 한국군 의무병이었다. 그때 타타타타 총소리가 들렸고 그가 말했다.
“중국군입니다.”
난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왜 여기 있어?’
의무대로 가니 군의관 나바레 대위가 보이고 의무병들이 한국군과 미군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긴장감은 있었지만 보통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전투는 빠르게 격렬해졌다.
한 소위가 가망이 없는 중상으로 들어왔고 노력은 했지만 결국 가톨릭 군목이 그에게 마지막 임무를 다했다. 이날 밤은 정말 느리게 갔다. 28일이 되자 부상자들이 늘어난다는 걸 깨달었다. 텐트가 다 차고 식당 텐트까지 들어찼다. A중대 일부가 전멸했고 한 부상자가 이렇게 말했다.
“우린 처음에 그들을 죽이고 물리쳤어요. 백병전이 시작됐죠. 그러나 수적으로 우린 완벽하게 압도당했어요.”
갑자기 포병 포격지원이 사라졌다. 이 중요한 순간에 왜 안 쏴주지? 박격포 장교의 사격 구령이 들리고 그들은 새벽까지 쐈다.
한 한국군 병사가 들것에 누운 상태로 죽었다. 의무대 첫 전사자였다. 부상자들을 후송해야 했으나 적이 길을 차단해 방법이 없었다. 우린 최대한 텐트에 부상자를 넣고 동 트기를 기다렸다.
하늘에 전폭기가 포효하더니 약 700미터 거리의 고지에 거대한 연기가 올라왔다. 중공군은 가깝게 침투해 있었고 전투는 점차 강도가 격렬해졌다. 첫날의 방어는 성공적이었고 돌파 당한 곳이 없었다. 우린 참호를 더 깊게 파고 밤을 대비했다. 의무대는 새로 들어오는 부상자치료하기에 바빴다. 결국 붕대가 떨어졌고 보급이 와야 했다!
중공군도 몇 명 들어왔는데 보기에 우스웠다. 군인이라 기에는 너무 어렸고, 한 중공군에게 다리를 치료하면서 중국말로 내가 물었다.
“몇 개 대대가 우릴 공격하는 건가?” 그러자 그가 답했다. “3개 연대가 이 미군부대를 공격한다. 그 나머지는 나도 모른다.” 3개 연대가 1개 대대를 공격한다... 거의 9대 1이다! 오늘밤 전투가 크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밤이 오자 부상자를 어떻게 후송시키나 걱정이 된다. 아군 증강병력이 오면? 그런데 이 보급품으로 언제까지 버티지?
간헐적인 사격이 이어지다 밤 10시 사방이 완전히 격렬하게 쏘기 시작했다. 우리 의무대는 육체적으로 지쳤지만 정신만은 최고로 또렷했다. 상황은 전날밤과 달랐다. 전투가 강하게 지속되면서 일부 부대가 차단당했다. 병사들이 무너진 방어선을 보강하기 위해 총을 들고 달려갔다.
동이 틀 무렵 우리 동쪽 측면이 완전히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거긴 B중대였다. 적군 총알이 의무대 위를 날기 시작했다. 한 용감한 소위가 병사들을 이끌어 뚫고 들어온 적을 그 때 물리쳤다. 그러나 이제 수적으로 우린 기울고 있었고 정말 빠르게 위기에 빠졌다. 하룻밤을 더 버틴다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나바레 대위는 대대장으로부터 명령을 들었다. “이동한다.”
앤더슨 선임하사가 재빨리 편성해 모든 부상자를 트럭과 응급차에 실었다. 29일 아침 전투기들이 상공에 나타나 우리 퇴각 행렬을 엄호하면서 적을 공격했다. 의무병 몇 명이 뒤에 남겨진 부상자를 데리러 갔다가 일부는 돌아오지 못했다. 공중폭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누군가 찾는다는 건 어려웠다.
동이 트자 트럭 행렬은 출발했다. 전투기들이 우리 앞을 청소했으나 숲에 숨은 적은 여전히 우릴 향해 쏘면서 우릴 저지했다. 그 상황에서 1개 소총소대가 거의 전멸되자 이동은 더욱 느리어졌다. 의무대는 길에 쓰러진 부상자를 수습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도 사격이 노출된다. 부상자를 향해 달려가던 스코빌 하사가 적 저격수가 쏜 총에 얼굴을 맞았다. 금발에 잘생긴 그는 이제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아무 말도 못 했다.
5마일 정도 이동해 정오 경에 31연대 3대대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3대대는 어디 있는 것인가? 그냥 황망한 계곡만 보인다. 과거 대대-지휘소였던 곳은 그냥 아군과 적군 시체로 덮여 있다.
호수 옆을 지나는 철도변은 일종의 방어선으로 쓰였다. 그 철도 제방이 최후의 보루였다. 그 철도 위로 중공군 시체 한 백 여 구가 쓰러져 있었다. 그 중공군 시체들 속에 미군과 한국군 시체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사수하다 거기서 죽은 것 같았다. 시체 몇은 여전히 M2 카빈을 쥐고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일어난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중공군은 우리 방어선을 향해 줄을 맞춰 행군해왔다. 맨 앞 제대는 즉각 우릴 공격했고, 그 다음 제대는 그냥 거길 통과해 후방부대를 공격했다. 그래서 포병부대가 공격받아 포격이 갑자기 끝난 거다. 불타고 조각난 포병장비를 봤다. 31연대 3대대를 마지막까지 지켜낸 건 이들 미군과 한국군이다. 그들은 철도 500야드 북동쪽에서 탈출하는 중공군에게 총을 쐈다. 이 중공군은 아군 전폭기에 의해 공격당했다.
잠시 돌아보니 중공군 시체가 여기저기 정말로 많았다. 죽은 적을 밟지 않고 다섯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철도 부근에 한400구가 있었다. 그 5-10명 중 하나는 미군이나 한국군이다.
중공군 대부분은 미국제 야전 삽을 가지고 있었고 아마도 국민당에 의해 흘러 들어간 것 같다. 토미건을 가진 자도 있었다.
우린 다시 야간방어를 준비했다. 전날 밤보다 더 큰 적 병력이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우린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고 있었다.
오후 1시 난생 처음 공중투하가 있었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과 하얀색 낙하산들이 밑에 박스를 달고 떨어졌다.
우리 대대장 페이스 중령은 32연대 1대대와 31연대 3대대 병력을 모아 재편성해 1개 대대로 만들었다. 우린 철도 도랑에 의무대를 만들었다. 급조 텐트를 만들자 다시 부상자로 가득 찬다.
페이스 대대장이 의무대를 찾아와 나에게 너무 피곤해 보인다고 말했다. 내가 “No, sir, I’m as fresh as you are,”라고 하자 대대장이 찡그리며 웃었다.
그날 밤 아침에 실종되었던 한국군 한병장이 돌아왔다.
“부상자를 데리러 한 고지에 돌아갔어요. 그 옆에 중공군 다섯 명이 가까이 있었는데 우릴 못 봤습니다. 우린 기다렸다가 가까워졌을 때 쐈죠. 셋은 쓰러졌고 둘은 기관단총으로 응사하더군요. 결국 모두 사살했지만 같이 있던 한 명이 죽었어요. 복귀하니 이동하고 부대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걸었습니다. 공중폭격에 저도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래도 그 폭격 때문에 적이 물러가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29일 밤은 즉각 살벌해 졌다. 전상자가 쏟아졌고 의무대에도 총알이 날아왔다. 우린 바쁘게 부상자를 치료했다.
아침이 되어 보니 우리 방어선은 뚫리지 않았고, 공중폭격과 공중재보급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뜨거운 식사는 엄두도 못 내고 우린 차가운 C-레이션 밖에 없었다. 연료나 물도 없었고 우린 눈을 먹었다. 커피는 부상자에게만 끓여줬다.
11월 30일이 되자 병사들은 3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싸워 지쳤다. 게다가 쓰라린 추위는 우리 손과 발을 얼게 만들었다. 동상을 입기 시작했고 우리 병력 숫자는 매우 적었다.
다시 불길한 밤이 시작되었다. 광적인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밤에 우릴 쓸어버리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페이스 중령은 긍정적으로 봤지만 우리 병력은 줄고 적은 늘어나고 있었다.
전투는 정말 격렬했고 밤은 혼란스러웠다. 한밤중에 우리 의무대 주변은 물론 사방에 박격포탄이 떨어지고 더욱 위험해졌다.
뚱뚱한 장교 하나가 중박격포를 정말 효과적으로 운영했다. 밤새도록 그의 “쏴!” 소리가 들렸다. 새벽 2시 적의 박격포가 아군 박격포반 지역에 떨어져 박격포 몇 대가 박살나고 병사들이 다쳐 울부짖었다. 그러나 몇 대 남은 우리 박격포는 다시 포격을 시작했다.
밤새도록 한 기관총 사수는 가장 용감했다. 적이 그 사수를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가 잡은 50기관총 예광탄이 적이 있는 능선으로 날아가 박히는 게 보인다. 그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 기관총은 우리 모두에게 분발하는 역할을 했다.
의무대는 병사들이 더 쏟아져 들어왔고 12월 1일 새벽 4시가 되자 적은 마침내 인해전술로 우리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우린 빠르게 재편성한 인원을 보내 관통한 중공군을 새벽 5시 결국 밀어냈다. 우리 의무대 병력도 부상자를 운송하다 몇 명 돌아오지 않았고, 나를 돕던 한국군(Chisai)도 넓적다리에 맞았다. 그 친구는 17세였지만, 말하자면 작은 악마였다.
새벽 다섯 시, 매우 약하기는 했지만 우린 여전히 버텼다. 측면이 노출되면서 혼란이 일어났고, 의무대 박에 있던 한국군 김상병이 중공군 총알에 심장을 맞았다. 부상자를 이끌고 돌아오던 순간이었는데, 총에 맞아 즉사했다. 의무대 밖에서 거대한 금속성 소음이 났고 우린 모두 엎드렸다. 중공군 포탄이 터진 거다. 나가보니 이미 밖에 있던 대부분이 즉사했고 몇 명이 다쳐 거기 앉아 있었다.
일곱 시가 되자 동이 텄고 그러자 다시 공중지원의 보호를 받았다.
난 의무대에서 가까운 참호 몇 개를 둘러봤다. 거기 병사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싸우고 있었다. 보통 미군 두 명에 한국군 한 명이었다. 미군이 기관총을 잡으면 한국군이 탄약수, 미군이 박격포를 잡으면 한국군이 부사수였다.
그들은 이제 마치 형제처럼 서로 믿으며 싸우고 있었다. 참호 여기저기서 생존자들이 기어 나왔고 모두 극도로 피로한 상태다. 이미 전력은 1/3이 이탈해 2개 중대급으로 줄어 있었다. 많은 수가 죽거나 다쳤고 장교도 몇 남지 않았다.
페이스 중령은 다시 이동명령을 내렸다. 해병대 주둔지까지는 너무나도 멀고 먼 퇴각로였다. 하늘에는 온통 전투기들이 나타나 적에게 기총소사했다. 모든 트럭과 지프가 도로에 열을 지었다. 공중지원 30분 동안 이제 모든 부상자를 실었고 나자레 대위는 길가에 쓰러진 병사도 실었다.
적은 우리 차량대열을 향해 박격포를 날리기 시작했다. 몇 명이 또 다쳤고 우리가 치료했다. 우린 남쪽으로 천천히 나갔다. 광란의 적 몇 명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릴 공격했고, 우리 전투기들은 그들을 보자 마자 네이팜으로 태워버렸다. 당시 지원중대 소속 탄약 및 공병장교인 에머리 중위는 정말 가장 용감했으나 네이팜으로 인해 큰 화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차량에 타라는 말을 거부하고 자기 일을 계속했다.
도로는 얼어붙은 장진호 가장자리를 따라 꾸불꾸불했다. 전투부대는 도로 왼쪽의 산악을 경계하면서 이동했다. 많은 중공군 저격수들이 이런 측면 경계 병력을 저격해 죽였다. 도로를 따라 중공군들이 한 5미터마다 참호를 파고 있었고 각 참호 당 중공군 한 명이 있었다. 놀랍게도 참호마다 있는 중공군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우리 경계부대가 나가면서 사살한 것이다. 또한 우리 기관총과 네이팜에도 당했다. 그렇게 길가에서 죽은 중공군만 5-600명이다.
12월 1일 오후 1시,
콘크리트 다리에 도착했으나 중공군이 폭파한 상태였다. 그곳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우리가 가려는 남쪽은 산악으로 향하고 거긴 중공군 매복이 있을 게 분명했다. 차량들이 강변으로 내려갔다. 너무 울퉁불퉁해서 트럭조차 통과하기 힘들었고 지프들은 반도 가지 못 했다. 중공군이 삼면에서 쏘기 시작했다. 우리 차량들이 늘어졌고 중공군은 가진 모든 걸 쏴 우릴 때렸다. 유일한 트랙터가 차량을 한 대 씩 끌어올렸다.
그러는 동안 걷는 병사들이 한 명씩 총에 맞았고, 의무병들은 그들을 트럭에 태웠다. 이제 더 이상 차량 안에 공간도 없었다.
이제 차량 안에 사람을 쌓다시피 했고 긴급요청으로 전투기들이 날아와 적 벙커에 기총소사하고 폭탄을 투하했다. 적은 그게 기회라고 생각하고 우릴 잡으려고 광적으로 날뛰었다.
페이스 중령은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총을 쏘라고 했다. 고지를 점령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간에 전투기의 호위 속에 빠져나가는 게 유일한 전술이었다. 차량들이 강을 힘겹게 건너는 동안 많은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 동안 우리 중 일부는 앞으로 나가 적이 도로 상에 만든 벙커와 장애물을 파괴했다.
오후 5시 차량들이 2/3가 건넜을 때 이미 어두워졌고 전투기들은 돌아갔고 우리만 남았다. 걸을 수 있는 병사는 적었고 몇몇 장교와 운전병 뿐이었고 나머지는 다쳐 모두 트럭들에 있었다. 누군가 나바레 대위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고 전했다.
충격 받고 슬펐지만 울 수는 없었다. 이제 울 힘도 없었다.
이제 미군과 한국군 생존자는 줄어들었다. 공격이 가능한 병사들은 곧 기관총과 소총에 쓰러졌다. 첫 공격은 실패했고 그러자 페이스 중령이 공격 2파를 내보냈다. 이 역시 적의 강력한 사격에 막혀 중단되었다. 우린 개활지에서 대책 없이 맞고 있었다.
이때 한 체구가 작은 병사 하나가 고지에 오르는 걸 봤다. 그 병사는 가장 강력한 벙커에 접근했고 결국 그 벙커 위에 올라서는데 성공했다. 그는 M2카빈을 자동으로 놓고 벙커 안에 긁었다. 한 탄창을 다 쏜 것 같다. 그러자 적 사격이 사라졌고 곧 그 차단점은 제거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용감한 병사는 미군이 아니라 한국군으로 성이 채(Chae)였고 네 아이의 가장이라고 했다.
이 사건 이후 더 이상 사격은 없었지만, 또 이동하면 다른 매복이 있을 것 같았다. 밤 10시가 되어 모든 차량이 강을 건넜고 다시 이동이 시작됐다. 이날 만월이 떠서 눈에 빛나 정말로 세상이 밝았다. 추위와 강풍은 또 다른 적이었다. 우리 발은 감각이 없었고 손도 곱아 방아쇠를 당기기도 힘들었다.
아무도 이틀 동안 뭘 먹거나 잔 사람이 없다. 깡통식량은 얼어서 먹을 수조차 없다. 게다가 이 깡통식량은 휴대하고 가기에 너무 무거웠다. 약해지고 약해지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작은 꽁초를 돌려가며 피웠다.
우린 최종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나갔고 그게 얼마나 남았는지도 몰랐다. 트럭에 가득 찬 부상자들은 그저 따뜻한 병원을 기대하며 갔다. 이제 선도하는 병사와 장교는 한줌 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차량들이 가는 동안 한 병사가 나에게 총을 바꾸자고 물었다.
“내 M1은 오늘 얼었어요. 지금 쏠 총이 필요해.”
난 내 총을 줬다. 난 총을 잘 닦아 두었다. 차량 옆에서 난 총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노리쇠가 꼼짝을 안 한다. 눈과 진흙이 끼었기 때문이다. 내가 총을 수직으로 땅에 대고 발 뒷꿈치로 눌러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움직이지 않는다. 다른 병사가 시도했지만 또 실패했다. 아마 우리가 약실을 열 힘이 없어서 그랬는 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냥 휴대했다.
우린 다시 강을 만났고 다리는 파괴되어 있었다. 누군가 나바레 대위를 봐줄 군의관을 찾았다. 난 응급차 뒤로 가 문을 열었다. 대위는 접이식 의자에 다른 병사들과 앉아 있었다.
“나자레 대위님, 어디 다친 겁니까?”
“난 괜찮아, Dr. Lee.”
정말 씩씩하고 성실하게 부단하게 병사를 치료하던 군의관이었으나 이제 본인이 다쳤다. 그는 큰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나를 격려했다.
“앤더슨 선임하사나 펠티와 다른 의무병들은 어떤가? 다쳤나?”
“그들은 괜찮습니다. 다른 차량들 상황은 다 알지 못 합니다. 대위님, 뭐 해 드릴 게 없을 까요?”
“목이 말라. 어떻게 물 좀 구해올 수 없을까?”
“알겠습니다. 찾아오겠습니다."
난 부서진 다리 아래 강으로 갔으나 꽁꽁 얼어 있었다. 찾다찾다 얼음이 갈라진 틈을 발견해 거기 수통컵을 넣고 물을 채웠다.
“나바레 대위님, 여기 물.”
“고마워.”
대위는 물을 마시더니 다른 병사들 속에서 쉬었다. 물이 너무 없어 눈이라도 먹어야 했다. 난 장진호 호수 위로 가 신선한 눈을 철모에 퍼 담아 물을 더 만들었고, 나바레 대위에게 가서 코코아를 꺼내 나누어 먹었다. 나도 정말 배가 고팠는데 그 코코아 가루는 정말 맛이 있었다. 작은 코코아 봉지를 줬지만 대위는 나에게 주더니 반 씩 나눠 먹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Thank you, sir. See you later.” 난 응급실 문을 닫았다.
12월 2일 새벽 2시,
파괴된 교량이 있는 강을 차량들 반이 건넜고, 이때 다시 적이 집단으로 공격을 해왔다. 우리에 대한 최후의 공격 같았다. 중공군은 근처의 병력을 모조리 끌어 모아 온 것 같았다. 포탄이 갑자기 떨어지더니 이어 기관총 소총 기관단총이 모두 발포하고 수류탄이 날아왔다.
차량들은 빠르게 이동했다. 나바레 대위가 탄 응급차는 내 앞에 있었다. 그러나 곧 도로에 장애물이 나타나면서 적이 총을 쏴 속도가 줄어들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Let’s go.”
몇 명 안 되는 호위병들이 고지들의 적을 향해 응사했다. 전투가 격렬했으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적의 강력한 사격에 서 있는 아군 대부분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트럭 안에 있던 부상자들도 재차 기관총알에 맞았고 수류탄도 터졌다. 정말 그 이상 최악의 장면을 없을 것이다. 서 있던 병사들이 하나 둘 씩 쓰러졌다.
잠시 야만적인 전투가 있은 후, 이제 쏘는 건 적 밖에 없었고 우린 응사가 불가능했다. 전투는 끝났다. 그들은 우리 왼쪽에서 싸우며 들어왔다. 이때 페이스 중령과 장교들이 총에 맞아 죽었고 곧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내 근처에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일부 트럭은 불타고 있었다.
내 M1은 소용이 없었고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적이 다가온다...'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적에게 항복하던가 아니면 살아서 아군에게 도달하는 것.
내 마음 속에는 공산군의 서울 점령기간 동안 죽임을 당한 내 의부(義父)와 사촌들 얼굴이 스쳐갔다. 이 내 친척들은 서울의 장로교회 앞마당에서 비무장 민간인 상태로 총살 당했다.
난 적에게 포로로 잡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른 선택이 있다면 당장 자살하는 것. 그러나 그건 차후 문제였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또한 아군 진영이 어딘 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곳은 나나 미군이나 생소한 곳이었다. 또한 적의 포위를 뚫고 가야 하는 위험도 있었다.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난 위험에 목숨을 걸었다.
운명을 하느님께 맡기고, 난 즉각 기어가기 시작했다. 적은 가까이 오고 있었다. 다행히 둥그런 달이 떠 있어 그 어떤 것이라도 정말 쉽게 눈에 보였다.
난 얼어붙은 장진호 쪽으로 갔고, 하늘의 북극성을 보고 반대편인 남쪽으로 향했다. 얼음 위를 약 500야드 기었을 때 총알로부터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력이 극단적으로 떨어졌다.
목마르고, 배고프고, 졸리다!
눈을 깨물어 먹는 건 갈증에 큰 도움이 안 된다. 더 이상 기어갈 힘이 없었다. 난 걷기로 했다.
그 순간 저 멀리 남쪽에 빨간색 예광탄 몇 개가 보였다. 저건 아군 거다! 저 방향이다! 그건 희망의 상징이었다.
난 예광탄 방향으로 걸었다. 아주 아주 멀었다. 그러나 빨간색 예광탄을 보면 희망이란 자극이 이어진다. 시간은 알 수 없었다. 그 희망조차도 체력의 고갈을 막아줄 수는 없었다. 모든 게 귀찮아지면서 모든 게 흥미를 읽고 그냥 자고만 싶다. 앞에 환각이 보였다. 우리 집의 따뜻한 방이 보인다. 난 눈에 쓰러져 곧 잠이 들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Here, wake up. Wake up!”
난 눈을 떴다. GI 세 명이 보였고 그 중 하나가 날 일으켜 세우려 했다. 아마 몇 분 정도 잠들었나 보다. 한 미군이 나에게 물었다. “해병대 위치가 어딘 줄 아시오?”
나는,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리 와서 우릴 도와 주시오. 같이 갑시다.”
그들은 나를 끌다시피 데려갔다. 긴, 아주 긴 행군이었다.
그렇게 네 시간 정도 장진호 위를 걸었고 마침내 해병대 전초에 도착했다.
“Halt!” 경계병이 나타났다. “Password.”
“우린 암구호를 몰라. 마지막 암구호 들은 게 2-3일 전이야.”
“영어로 말해봐.”
한 친구가 영어로 길게 말하자 해병대 초병이 아군임을 알았고 우리에게 말했다.
“손을 머리 뒤로 하고 앞으로 나와.”
우린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게 하갈우리다.
12월 3일 오전 일곱 시.
그들이 우리에게 먹을 걸 줬다. hot chow!
난 식기에 두 번이나 타서 다 먹고 내리 24시간을 잤다. 거기 역시 포위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난 편안했다.
다음날 보니 장진호를 돌파해서 탈출한 우리 부대원들이 몇 명 있었다. 앤더슨 선임하사와 한국군 몇 명도 안전하게 탈출했고, 해병대 구조팀이 일부를 구출했다. 그러나 이미 하갈우리도 중공군에 포위되어 있었다.
우린 살기 위해 다시 돌파해야 했다.
[끝]
첫댓글 한국전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장진호 전투. 1951년 춘계 대공세를 벌리기로 되어있는 중국군은 오산 인근에서 중국군
9군(장진호 전투를 했던 중국군)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12만 중에서 5만명 가까이 죽은 9군의 생존한 병사들은 굶고 아프고 하여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지요? 9군이 빠진 대공세는 실패하고 연합군이 단 번에 서울을 재 탈환했다는군요. 포위된 속에서 퇴각하며
미 해병 1사단이 중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미 10군단 병력 대부분이 흥남까지 무사히 철수 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