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찬송가 249장 (구 249장) / 로마서 8 : 23 - 30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249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로마서 8장 23절 – 30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아멘!
요한복음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으로 끌려온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기에 정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생명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간음죄란 율법에 의하면 사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군중들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 딱 세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율법에 명한 대로 충분히 행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고소할 조건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때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다 떠납니다. 마지막 그 여자와 예수님, 딱 두명만 남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자, 이 여자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현장범으로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자신이 죽지 않고 극적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기를 잡아온 사람들에게나 예수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시는 그런 짓 안하겠다고 서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잡힐 때도 죄인이었으며 용서받을 때에도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러한 여자를 살려 준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이 여자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율법으로는 정죄받아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을 만났기에 죄 사함을 얻었고 새 삶을 얻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두 가지 법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고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법 중 어느 한 쪽 법을 좇아 살도록 되어 있는데, 한쪽은 사는 법이요 한쪽은 죽는 법입니다. 사는 법은 처음에도 살게 하는 법이요. 삶의 과정이나 삶의 끝까지도 다 살게 하는 법이지만, 죽는 법은 처음부터 죽게 하는 법이요. 삶의 과정이나 삶의 끝까지도 다 죽게 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게 하고 어떻게 죽게 하는 것입니까? 살게 하는 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살게 하는 것이고, 죽게 하는 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죄를 통해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법을 좇아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시작은 비슷한 것 같으나 끝은 생명과 죽음이라는 전혀 다른 곳에 각각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죄인 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첫째는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됩니다. 둘째는 영의 생각을 하게 됨으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셋째는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항상 자나 깨나 "육신 육신" 이러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그 생각이 변하여 자나 깨나 "영혼 영혼" 이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는가? 주의 영이 내 속에 살아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고 주의 영이 내 삶을 지도하시고 지배하기만 하신다면, 결코 아누 것도 걱정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고, 주의 영이 내 삶을 주장만 하신다면 그동안 그렇게 애쓰고 노력해도 고치지 못했던 여러 습관들, 잘못된 몸의 행실들도 다 고칠 수 있게 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내 속에 있고 그래서 내가 그 성령의 법을 따라 살기만 하면, 죽을 몸도 살게 될 뿐 아니라 그동안 그렇게 애쓰고 노력해도 고치지 못했고 죽이지 못했던 몸의 행실도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죽일 수 있게 되어 완전히 새로운 사람, 완전히 새로운 존재,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개념은 육신의 법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법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주관자요, 내 삶의 주관자,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인도하는 선장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며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삶에 대하여, 중요한 두 가지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선언입니다.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특히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말씀은 "우리가 알거니와"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게 된 것입니까? 전에는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26절 말씀에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 전에는 이렇게 마땅히 빌 바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마땅히 빌 바를 알게 되었고, 우리가 그렇게 마땅히 빌 바를 알고 기도하게 되면, 반드시 기도응답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이루는 선"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 을 이룬다는 말은 "모든 것이 다 잘 된다." 하는 의미의 "선" 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 를 본받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신앙의 그 여정에서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되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형상, 나의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고, 나의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며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삶에 대하여 주시는 두 번째 중요한 선언은 만일 그렇게 살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가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천국에 가서 영화로운 존재가 된다는 선언입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황홀한 말씀입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영화로운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부름도 받게 되고 의롭다함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젠 영화롭게도 된다 하시니, 우리는 그저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당연히 육신의 법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야겠다고 생각은 들지만, 문제는 이것이 생각만 가지고는 잘 안된다는데 현실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성령의 사람이 되어, 주의 영이 나를 주장하셔서 내 생각, 내 입술, 내 눈과 귀를 주장하시고, 내 행동을 주장하시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과 삶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앙과 삶이 되고, 영화롭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