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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2>
이윤학 <그 병원 앞>
비오는 밤에
기적 소리를 듣는 병실들
형광들 불빛들, 넓은
창문 속에
목련이 활짝 피어난다.
목련이 피어 있다는 것만으로
그걸 한 번 쳐다보는 것만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신음소릴 간직하고
있는 것인가
외면하려 해도 한 번은
슬쩍 쳐다보게 되는 곳
하지만 이제는, 창백한
저 꽃과 향기는 지나간 것이다
비 오는 밤에
기적 소리는 뿌리치며 지나간다
그리고 형광등 불빛들
무엇인가 담고자 노력하는 유리 창문들
신음 소리만큼 긴 기도문을
들어본 적은 아직 없다
제1악장 Adagio molto - Allegro con brio
아다지오 몰토 3/4-알레그로 콘 브리오 D장조4/4. 서주에는 서정적인 윤기가 흐르며 극적인 힘도 존재한다. 특히 서주가 끝날 무렵 나타나는 강렬한 d단조의 하행악구는 인상적이다. 주요부는 소나타 혀익을 취하고 있으며 젊음으로 가득차 있다. 서주 마지막에 급속하게 하강하는 바이올린을 저음부의 현악기가 받아 활기차게 제 1주제를 제시한다. 이것은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에서도 발견 할 수 있는 주제이다. 그러나 처리하는 방식에서는 완전히 베토벤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동기는 다양한 각도에서 교묘하게 저리된다. 강력한 힘을 지니며 분명함을 지지닌 경과부 후에 목관과 호른이 행진곡풍으로 밝게 제 2주제를 내놓는다. 이것을 확보하면거 제 1주제 동기를 사용한 코데타로 들어가 제시부가 끝난다. 발전부는 제 1주제로 시작하여 차츰 이 주제를 카논적으로 처리해가며 ,이 주제의 동기를 처리하면서 제 2주제를 전개한다. 충실한 발전부라 할 수 있다. 재현부는 서주 끝부분에서처럼 제 1주제를 등장시키면서 시작된다. 아울러 두 주제를 재현시키고 나서 코다로 들어간다. 코다는 제 1주제에 토대를 두고 전개와 같은 처리를 보여주며 악장 전체의 클라이막스를 구축한다.
2악장 (Larghetto)
라르게토 A장조 3/8 소나타 형식. 절묘한 아름다움을 지난 악장으로 특히 그 선율은 빈의 춤곡과 연관된 것이다. 널리 알려지고 훗날 가사가 붙여져 가곡으로 편곡되기도 하였다. 제 1주제는 대위법적인 풍부한 울림을 수반하며 먼저 현이 풍부한 정서를 지니고 노래한다. 이것이 목관으로 옮겨져 발전하며 경과부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제 2주제를 바이올린이 애정어린 선율로 연주한다. 발전부는 제 1주제를 주로 취급하고 있으며 격렬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환상적인 성격도 지닌다. 재현부는 두 개의 주제를 차례로 보여주지만 음색에 대위법적 처리면에서 제시부와는 약간 다르다.
3악장 (Scherzo. Allegro)
스케르쪼 알레그로 D장조 3/4. 3부 형식, 앞서 말한 대로 기존의 미뉴에트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자유분방하며 청년 베토벤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중간부에 해당하는 트리오는 <교향곡제 1번>의 미뉴에트처럼 기본 조성이 D장조이다. 목관에서 부드럽게 시작하며 잠시 후 현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옮겨간다.
4악장 (Allegro molto)
알레그로 몰토 D장조 2/2 소나타 형식. 주제가 두드러지며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론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극도로 예리한 제 1주제로 시작하며 잠시후 첼로에 부드러운 선율이 나타나는데 그러나 이것이 제 2주제는 아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증대시켜 가면서 그 클리아막스에서 제시부가 끝나도 곡은 발전부로 들어간다. 이 발전부는 제 1주제를 이용하여 유머러스한 효과와 극적이고 강력한 힘을 드러낸다. 그리고 제 1주제가 본래의 모습대로 등장하여 재현부로 들어간다. 재현부는 제시부처럼 진행하면서 화려하고 정열적으로 곡이 마무리 된다. 이 악장에서는 발전부와 코데타에서 제 1주제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며 그 대문에 이 악장은 론도 소나타 형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구성
초연:1803년 4월 5일,빈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
헌정:리히노프스키 후작
편성:플루트2,오보에2,클라리넷2,파곳2,호른2,트럼펫2,팀파니,현 5부
작품개요 및 배경
이 교향곡은 정확히 언제 작곡되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802년 10월에는 이미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베토벤은 아마 교향곡제 1번 전 후에 이 <교향곡제 2번>을 머리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구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800년 베토벤의 스케치장에는 현재의 <교향곡제 2번 >제 1악장의 서주와 주요부의 메모가 적혀있다. 이를 토대로 소나타나 실내악적 작품이 작곡되지만 그 사이에도 이 교향곡에 대한 스케치는 계속된다. 그리고 1802년 여름과 초가을에 본격적으로 이 교향곡 작곡에 돌입하였다. 빈에서 가까운 하일리겐슈타트에서였다. 베토벤이 귀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1798년 무렵부터이다. 그 후 은밀히 여기저기서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1802년부터 5월까지 예정으로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쉬기 위해 머무르고 있었다. 10월6일 이 곳에서 바로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다. 이 유서는 베토벤이 동생들에게 보내기 위해 쓴 것으로 일반적인 유서와는 달리 죽기 직전에 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당시 베토벤의 베통한 심정과 분노에 찬 마음을 절실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베토벤은 그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예술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바로 그 직후에 완성 된것이 이 <교향곡제 2번 >으로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완성되었거나 빈으로 동아온지 얼마 지마지 않아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 곡은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병 때문에 고뇌하던 시기에 작곡된 것이다. 그런 비극적인 어두움이 제 1악장 서주나 제 2악장 일부에서 느껴진다. 그러나 곡 전체에 따스한 피가 흐르며 희망적인 기분이 나타난다. 고뇌를 극복한 후의 기쁨이라는 ,베토벤이 지속적으로 지녔던 믿음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 곡이 이런 분위기에는 또다른 사실도 연관된다. 이 곡의 스케치를 시작할 당시 베토벤은 경제적으로 매우 잘 풀리고 있었다. 1800년 이후 카를 리히노프스키 후작으로부터 연금을 받고 있었으며 악보 출판 전망도 좋은 상태였다. 게다가 하일리겐슈타트는 조용하고 마음에 드는 마을로 베토벤이 좋아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이 넘치는 곳이었다. 베토벤은 이미 언급한 대로 여기서 요양하면서 귀를 치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네서 베토벤은 격렬한 곡을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교향곡과 나란히 ,혹은 전 후에 작곡된 작품들은 어둡고 격정적인 작품보다는 밝은 장조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사실과 아울러 당시 베토벤과 여인들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그 주변의 여인은 먼저 부룬스비크 집안의 딸로 동생 요제피네와 함께 1799년 5월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된 테레제,그리고 테레제의 사촌이며 1800년 베토벤의 제자로서 줄리에타 귀차르디를 들 수 있다. 요제피네는 곧 다임 백작과 결혼 했기 때문에 이 곡과 연관된 문제의 여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줄리에타는 <월광소나타>를 헌정받은 여인다. 어쨋든 1799년부터 베토벤의 주변은 갑자기 화려해진다. 그러므로 이런 밝은 감정이 이시기의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한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베토벤은 때로 격렬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32세의 젊은 나이였으며 강한 예술적 의욕을 지니고 있었고 매혹적인 여인에 대한 감정도 있었다. 이런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파고 들며 '불행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에 열중하는것'이라고 썼던 것처럼 작곡에 열성을 다하며 불행에 맞서 대항한다.
이것은 베토벤 성격의 한가지 특성이다. 이 시기에 베토벤 양식은 놀랄만한 진보를 성취한다. 연달아 작곡한 <교향곡제 1번 >과 <교향곡제 2번 >사이에도 양식적인 변화가 충분히 나타난다. 외관적으로도 제 1악장 서주가 매우 장대해지며 ,제 3악장에서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쪼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더구나 서주는 <교향곡제 1번 >보다 훨씬 깊은 내용과 풍부한 감정을 보여주며 소재면에서도 이어지는 주요부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 교향곡에서 스케르쪼는 여기서 처음 사용하지만 피아노 소나타나 실내악곡에서는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아직 훗날에 볼 수 있는 스케르쪼의 특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지는 않지만 악기 사용법이 가볍고 묘한 변화를 보여주며 셈여림의 급작스러운 변환,조성 변화,휴지<쉼표>의 활용 등 일찍이 스케르쪼적인 효과를 내는데 성공한다.
이런 성향 외에도 이 교향곡에는 낭만적인 도취감이나 따스한 감정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제 1악장의 제 2주제부가 전통적인 성격과는 달리 고양적이다. 제 2악장의 유화적인 낭만성도 <교향곡제 1번 >의 느린 악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요소는 훗날 빈번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악기편성은 <교향곡제 1번 >과 완전히 같지만 용법에서는 목관악기,특히 클라리넷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현악기에서는 제 2악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를 분리한다.
글출처: 명곡해설 라이브러리-베토벤 편. 자료출처: 웹사이트
교향곡 2번 해설
1802년 완성한 제2번은 하이든,
모짜르트에 의해 확립된 고전 양식과 청년 베에토벤의 음악적 감정이
훌륭하게 조화된 작품이다.그는 이 당시
청각 장애로 고민에 빠졌고 그해 10월 유명한 유서 사건이 있기도 했으나
이 작품엔 그와같은 고뇌와 절망의 그림자 대신 희망에 찬 기쁨이 담겨져 있다.
제3악장에 스케르쪼를 처음으로 시도하는 등
그의 독자적 세계의 문을 연 작품이며.
32세때 귓병으로 신음하면서 비인의 근교 하일리시겐시타트에서 정양하던 때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로망롤랑의 말대로, 그의 청춘의 사랑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 그는 백작의 딸 줄리에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일화가 많은 '월광'을 작곡하여 헌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는 그의 젊은시절의 사랑이 반영되고 있으며,
작곡기법에 있어서도 제1번 교향곡에 비해
매우 진전을 보여, 마치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전환기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인류의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의 변모함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 베토벨라
빈(비엔나)에서의 베토벤
베토벤은 본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서북부 독일에서 즉흥연주에 능한 피아노의 장인으로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당시 모차르트도 훌륭한 즉흥연주가로 인기를 누렸지만, 모든 점에서 베토벤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감수성을 강조하던 당시의 시대사조에 힘입어 그는 과거의 어떤 연주자보다도 청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었다. 자연히 그는 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빈의 귀족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발트슈타인 남작은 사람들에게 베토벤을 모차르트의 뒤를 이은 위대한 음악가로 칭찬했으며, 빈 초기 시절의 후원자들이 스비텐 백작, 카를 리히노프스키 대공(모차르트를 죽을 때까지 후원했던 유일한 귀족이었음)이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1790년대 빈에서 음악은 날이 갈수록 귀족들의 오락거리로 인기를 더해갔다. 당시 그곳의 귀족들은 황제 프란츠 2세의 반동정치를 불신했고, 특히 음악을 숭배했다. 많은 귀족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았고 이들의 연주 실력은 전문 연주자와 겨룰 정도였다.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도 이처럼 아마추어 음악이 융성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작곡가로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해야 했다. 그는 하이든의 도움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서 하이든과 겉으로는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하이든 몰래 다른 선생들에게 레슨을 받곤 했다. 그중 한 사람인 성 슈테판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르거는 옛 대위법 양식에 능통한 사람으로 베토벤이 필요로 하는 여러 기법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또한 황제 직속 음악감독이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성악 작곡법을 배웠다. 1794년 하이든이 런던을 2번째로 방문하기 위해 빈을 떠나자 베토벤이 본으로 복귀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그당시 본은 공교롭게도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고 선제후도 그곳을 떠나 결과적으로 베토벤에 대한 보조금도 끊기게 되었지만, 그는 레슨과 연주 수입 이외에도 리히노프스키 대공으로부터 생활비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도 따르지 않았다. 1795년에 그는 빈에서 처음으로 공개연주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했고, 하이든을 위한 기금 마련 연주회에 참가했다. 한편 수많은 귀족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피아노·바이올린·첼로를 위한 3개의 3중주 작품 1이 출판되었다. 그후 3년 동안 그는 베를린·프라하 등지를 순회공연했으며, 이밖에도 상황이 허락되는 대로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1800년부터는 대대적인 규모의 공개 연주회를 시작해 외국에 널리 명성을 날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로 접어드는 시기는 베토벤의 작품활동 시기 중 제1기에 해당하며 그가 아직 18세기적인 기법과 사고에 묶여 있던 시기이다. 당시 출판된 그의 작품들은 대개 피아노 독주곡이나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위한 작품이며, 그밖에 현악 3중주 E♭장조 작품3, 3개의 현악 3중주 작품9, 6개의 현악 4중주 작품18, 교향곡 1번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서서히 자신의 영역과 기법을 확장해갔으나 아직까지는 주로 피아노 음악 작곡가로서 알려졌다.
귀머거리가 된 베토벤
연주가에서 작곡가로의 방향 전환은 점차 귀먹어가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최초의 징후는 1800년 이전에 나타났지만, 이후에도 몇 년 간 그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귀족의 저택에서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경쟁해 연주를 계속했고, 바이올린 연주자 게오르크 브리제토버(베토벤은 그에게 〈크로이처 소나타 Kreutzer Sonata〉를 헌정함) 등의 대가들과 공개 연주회를 같이 열었다. 그러나 1802년경에 이르자 그는 자신의 병이 영구적인 것이고 점차 악화되고 있음을 확실히 자각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시골이었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두 남동생 앞으로 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언장'을 통해 귓병으로 인한 고통을 표현했다. 그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있는 창작의 요구를 다 채우지 못하고서는 세상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인 프란츠 베겔러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 "나는 운명의 끈을 붙잡겠다"라고 적었고, 또다른 곳에는 "병에서 치유만 된다면 나는 온 세계를 담아낼 것이다"라고 적었다. 병세는 개선되지 않았으나 위에 나타난 그의 바람들은 모두 이루어졌다.
1819년경이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귀가 먹어 의사소통을 위해 노트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이 노트에 친구들이 질문을 적으면 베토벤은 말로 대답을 하곤 했다. 소리가 점점 안 들리게 됨에 따라 피아노 연주 수준도 점점 떨어졌다. 그는 그래도 간혹 공개연주회에 나타났으나 대부분 작곡에 힘을 쏟았다. 그는 5~10월 빈 근처의 조그만 마을들을 옮겨다니면서 살았고, 그곳에서 긴 시간 동안 산책을 하면서 악상을 떠올렸으며 스케치북에 이것들을 적어두곤 했다.
이 스케치북들은 오늘날까지 상당수가 보전되어 있으며, 베토벤의 작곡 방법에 대해 많은 것들을 제시해준다. 그는 복잡한 환상곡의 주제도 한순간에 즉흥연주할 수 있었지만 어떤 한곡의 모양새를 가다듬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의 스케치 악보에는 피아노 협주곡 〈황제 Keiser〉의 아다지오 악장이나 〈크로이처 소나타〉의 안단테 악장 등의 유명한 선율들도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는 평범한 형태로 나타난다. 베토벤은 한 곡을 완성한 뒤에 다른 곡을 시작하지 않고 여러 곡을 동시에 작곡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한 곡을 서둘러 끝내는 법이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1804년에 스케치 악보를 쓴 교향곡 5번은 18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스케치 악보에는 때로 비망록의 일종으로 글귀가 적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3번 교향곡 〈영웅〉의 스케치 악보의 경우에는 몇 소절을 빈칸으로 남겨두었는데, 그의 스케치 악보들은 종종 선율선과 베이스 성부만 적어놓아 곡의 연속적인 흐름만을 잡아놓은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들 중 특히 후기 작품들에서는 스케치의 과정이 아주 복잡해서 악보가 최종 출판되기 직전까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대체로 베토벤의 곡들은 작곡 초기에 기록한 스케치 악보 및 메모들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베토벤이 나중에 다른 곡을 작곡할 때에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초기 스케치 악보들을 따로 보관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베토벤은 한 곡을 완성한 뒤에는 더이상 작곡 과정의 모든 세부 작업과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J. M. Budden 글. 글쓴이 : 앗싸재수-김재수
첫댓글 그 병원 앞: 기적소리, 기다림일까, 설렘일까. 아니다. 미몽에서 현실로 돌아가라는 소리다.
병실에 누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신음소리, 그것은 기적소리라는 걸.
힘든 시간들, 그렇다. 병상은 힘든 시간들의 신음소리다.
97년인가, 응급실 옆 병상에서 죽어가는 환자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죽음
우선
욕 저주부터 시작한다
* 발
종교는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