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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조선 (요2-16) 2022년 4월 12일(화)
찬양 : 만왕의 왕 내 주께서
본문 : 요3:31-36절 ☞ https://youtu.be/SpDwmwE45RM
고난주간 둘째날이다. 주님이 백성들에게 각종 비유를 가르치고, 대제사장 서기관들과 논쟁하신 날이고, 결정적으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한 날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있었던 날, 제자 중 하나는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어제 목회코칭 6주차를 마쳤다. 벌써 절반이 지났다. 주어진 과제를 최선을 다해 감당하면서 자신들의 목회현장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드리며 목회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대안을 찾아가는지 함께 고민하고 있다. 답을 주지 않는 것이 더 힘들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목회현장에 주님을 향한, 영혼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담긴 목회가 실현되리라 믿는다.
오늘은 토브성경 강의와 젊은 세대 사역자 모임이 진행된다. 코로나로 2주간 중단되었던 토브성경이 다시 개강되어 진행된다. 강사님이신 이순남 목사님께 하늘의 풍성한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기도한다.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 아들이란 다양한 표현으로 고백하며 그분이 만물위에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며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신다. 이 모든 표현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것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 31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메시지 성경은 그래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위로부터 오시는 그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다른 어떤 심부름꾼보다 뛰어나신 분이다. 땅에서 난 자는 땅에 매여서 땅의 언어로 말하지만, 하늘에서 나신 분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아멘.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세례요한과의 분명한 차이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비록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뛰어난 자이지만 예수님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선지자와 주의 종과도 비교의 대상이 아닌 차원이 다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고난주간 묵묵히 자신을 부인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그 걸음을 묵상하게 된다.
재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나 권세가 부족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만물 위에 계시며 우리와 차원이 다르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함이다. 주님 ~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35-36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다 맡기셨다고 고백한다. 이 말씀을 묵상하니 마태복음 28장에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생각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 분임을 의미한다. 만물을 뜻대로 움직일 능력과 지혜와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를 위해 제자의 배신과 사람들의 변론에 겸손히 대응해 주셨고 십자가를 향해 한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나아가셨다는 사실이 큰 울림을 준다.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도 황당하고, 제자의 배신은 더없이 가슴 아프지만 인류 구원의 그 걸음을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신 그 사랑에 감격한다. 주님 ~
분명한 것은 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 사실을 받지 않았다. 32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실제로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은 가르치셨고,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겸손히 변론에 응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신 만물 위에 계신 분의 증언을 받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로 예수님을 매달아 죽게 하였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딱 이 찬양의 가사가 떠오른다.
<아아 아아 주의 사랑 깊고 크셔라 내 영혼에 파도처럼 메아리쳐 온다.>
알아 듣지도 못하는 이들이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가르치시고 끝까지 변론에 응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묵상한다. 나는 어떤까? 조금 하다가 알아 듣지 못하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그렇게 주님처럼 할 수 있을까?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요즘 자주 외침 <마지막 구조선>이란 말이 생각난다. 설교자는 이 설교를 듣지 않으면 그에게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는 마지막 구조선이란 심정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고난주간 둘째 날 오늘 주님 사역은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구조선> 그래도 듣지 않았던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를 묵묵히 지신 주님 ~
오늘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주의 종으로 살아가는 삶은 단 한 번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배신과 외면과 듣지 않음의 현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구조선>으로 보냄을 받았음을 신뢰하고 그 열정으로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주님처럼 걷는 것이어야 한다. 아멘.
순간순간 내가 꼭 이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많은 순간 육신을 입고 있기에 이런 삶의 자리에 처하면 <마지막 구조선>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배의 정원이 차서 배(내)가 위험하다고 올라탄 사람마저도 규정을 따지며 쫓아낸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주님 ~
이 하루 고난주간 둘째 날을 걸으며 주님처럼 마지막 가르침의 자리에도, 제자의 배신의 자리에서도 묵묵히 내게 주어진 자리를 마지막 구조선이란 심정으로 걸어내게 하소서. 주님, 이 종을 붙드사 이 사명을 감당케 하소서.
<중보기도가 수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30억 씨앗자금을 통해 작은교회에 비빌언덕과 플렛폼이 되게 허락하소서.
2. 온라인 플렛폼 스콘(스스로 창조하는 콘텐츠)앱을 통해 작은교회(젊은세대사역자)의 다리가 되게 하소서.
3. 2022년 예수님의 속도와 방향에 맞춘 새로운 라마나욧이 되게 하소서.
4. 땡스기브가 견고하게 세워져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5. 라마나욧선교회의 사단법인 작업을 통해 건강한 선교단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