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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44
생각만으로도 자신을 웃게 만드는 사람.
“나으리, 언주입니다.”
그렇게 그를 생각하며 하루를 마친 언주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조심스레 그의 방 앞에 섰다. 작은 불씨에 놀라 옷까지 그을렸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손에는 작은 반짇고리를 들고서. 어쩐지 방에 불이 밝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그가 이미 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보다는 방에 아무도 없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 슬며시 문을 연다. 두근대는 맘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다.
역시 방은 비어 있었다. 어둠 속이라 눈에 확실하게 짚이는 것은 없어도 대강의 위치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의자위에 걸쳐놓은 그의 관복을 발견했다. 관복을 두고 간 걸 보면 제가 오리라던 약속을 잊지는 않은 모양인데 어딜 가신 걸까. 언주는 궁금해 하며 탁자 앞에 앉았다. 다른 이들의 눈에 뜨일까 싶어 방에 불을 밝히는 것은 꿈도 못 꾸고, 대신 창을 활짝 열어 달빛에 의지해 바늘을 잡았다.
평소에 짬이 날 때마다 재미삼아 이런저런 문양들을 수 놓아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불에 그슬린 끄트머리 부분이 잘 가려지도록 제가 수놓은 천을 덧대고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시작했다. 어둡다고 불평할 사이도 없이, 아니 오히려 달빛이 훨씬 밝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언주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지막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우겸이 돌아온 것은, 언주의 바느질이 끝맺음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와 있었구나.”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관복도 입지 않으시고.”
우겸은 정확한 답을 피하며 그냥 웃어보이고는 언주에게 가까이 바투 앉는다. 매듭을 지은 언주가 자랑이라도 하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관복을 펼쳐 들어 보였다. 우겸은 장난스럽게 큰 눈을 하고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감쪽같죠.”
“감쪽같구나.”
“제게 빚지신 거예요.”
“언젠가 갚으마.”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방문 바깥에 멈춰선 누군가의 발소리로 인해 화급히 멎는다. 문에 누군가의 인영이 멈춰있었다.
“안에 계신지요.”
동궁 장상궁의 목소리였다. 은의 심부름이라도 온 걸까. 어느 구석에라도 몸을 숨겨야겠다는 위기감에 언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려하자 우겸이 팔을 잡아 세우며 검지를 제 입술에 갖다 댄다. 덕분에 누구의 심장은 터지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장상궁의 인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돌아갔다.
휴, 하고 안도하는 우겸의 입모양을 보자마자 더 이상의 여유를 두지 않고 언주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밤중에, 불도 밝히지 않은 방에 제가 마음에 둔 사람과 단 둘 뿐이라는 사실로 심장에 마비가 올 것만 같았다. 제가 가지고 온 반짇고리를 챙겨들고 분주히 방문 가까이까지 가서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굳은 듯 멈춰 선다.
“어두우니 조심히 돌아가거라.”
목소리를 낮춘 우겸의 친절한 배려를 듣고 있다, 갑작스레 돌아선다.
“그 빚, 지금 당장 갚으실 수도 있는데.”
“어떻게 갚으면 되겠느냐.”
“그냥, 제 얘기 하나만 들어주시면, 그걸로 되요.”
우겸은 싱겁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쪽으로 다시 앉기를 권했다. 긴 이야기가 될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주는 절레절레 고개만 가로저었다. 우겸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언주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응?”
“지원 나으리를요.”
//貢女 奇皇后//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다가가는 걸음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서궁의 한가로운 오후, 정원의 난간에 걸터앉아 아주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홍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다.
“아버님!”
소홍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진 대인을 맞는다. 황성 안의 한 궁에서, 그것도 손님으로 제 아버지를 맞는 것이 처음이라 들뜬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소홍의 양 볼이었다. 진 대인은 마땅히 황후를 대하는 예를 차려 제 막내딸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생각도 못했어요, 아버님께서 오실 줄은.”
“겨울바람이 이리도 찬데 나와 계십니까.”
“햇볕이 좋은걸요.”
소홍은 해바라기처럼 활짝 핀 얼굴로 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지그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진 대인의 눈과 마주했다.
“어째서 그렇게 보세요.”
“아비가 폐하의 배필이 되기를 권한 것을 후회하진 않으십니까.”
“물론, 후회하지 않지요.”
“폐하를 나눠가지셨는데도 말입니까.”
소홍은 가볍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맞는 말씀이세요. 동궁에 또 한 명의 황후가 있고, 저 후궁에도 많은 부인들이 있지요.”
“........”
“그렇지만 아버님, 어제 그 분과 만찬을 함께 하면서 저를 ‘황후’라고 불러 주셨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일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요.”
“바깥의 사람들은 황제께서 서궁으로 가는 길을 아예 잊고 계시는 모양이라고들 한답니다.”
“호호, 정말 그런 거라면 제가 알려드리면 되지요. 아버님께서는 아무것도 염려치 마세요. 마음은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이랍니다. 폐하의 마음을 얻는 것은 저의 몫이니 다른 이야기들에 신경 쓰실 필요 없으세요.”
아직까지도 황제는 서궁에 다녀가지 않았다고들 했다. ‘태자마마와 한 집에서 살고 싶어요.’ 철없는 어릴 적부터 그런 바람을 말해오던 제 막내딸이 혹여 의기소침해 있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들른 진 대인은 외려 제가 위로받고 있다는 사실에 가만히 웃고 만다. 나란히 앉은 부녀의 어깨위로 황금빛 햇볕 이불이 내려앉았다.
“아비는 요즘 퇴청하기가 몹시 싫어졌답니다.”
“어째서요?”
“마마께서 계시지 않으시니 집 안이 온통 적적하지요. 외로워서 막내딸을 하나 더 두어야겠습니다.”
“호호, 저는 괜찮지만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 들으시면 허락하실까요?”
진 대인은 소홍의 밝은 얼굴을 보며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흐뭇하게 막내딸의 얼굴을 바라보는 진 대인의 눈빛에는 애정과는 별개로, 무언가를 다짐하는 빛도 서려있었다.
//貢女 奇皇后//
동궁으로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갖가지 선물들이 도착했는데 그것은 대부분 자신의 편에 선 재상들의 부인들이 하나둘씩 보내오는, 아이를 위한 선물들이었다. 거의가 태자를 낳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보내온 사내아이용 물건들에 둘러싸여, 은이 곤란한 듯이 그것들을 내려 보고 있는 동안 장상궁이 돌아왔다.
“지원께서는 처소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을 좀 의논하고 싶었건만. 이런 시각에 어딜 갔다는 것인지.”
실은 그것을 핑계로 우겸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황제가 소란의 조섭도 허락한 차에 산사를 정하는 일이며 이것저것을 의논하려 했건만. 은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선물 받은 물건들을 몇 가지 챙기기 시작했다.
“소용에게는 다녀왔는가.”
“예, 황후마마. 곧 마마께서 찾아가실 것이라 조용히 일러두었습니다만, 이런 시각에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마.”
“그래도 마음을 좀 달래주어야질 않겠는가. 훤한 대낮에 이런 물건들을 가져다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자서 조용히 다녀올 테니 단속을 잘 하고 있게.”
“하오나 황후마마, 모두 마마를 위해 당도한 선물들인데 폐하께서 찾지도 않으시는 후궁에게는 너무 후한 처사가 아닐는지요.”
은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한다.
“어차피 지금 내게는 필요도 없는 물건이 아닌가.”
장상궁은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답이 없었다. 은은 마음에 드는 몇 가지 아니, 꽤 많은 것들을 챙겨들고서야 제 방을 나섰다.
...
가는 길목에 다른 누군가의 눈에 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되도록 아무도 알 수 없게 조용히 다녀오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은의 바람처럼 깊은 밤의 후궁 근처에는 어느 누구의 그림자도 있지 않았다. 미리 귀띔을 해 두었으니 소란이 호들갑스레 저를 맞을 일도 없을 것이었다. 은은 조용히 소란의 처소 앞에서 두어번의 헛기침을 놓았다.
“어서 오시지요.”
여전히 수척한 얼굴의 소란이 저를 맞아들였다. 불이 밝혀진 아늑한 방. 은은 들어서자마자 탁자 위로 가지고 온 것들을 내려놓았다.
“무얼 하고 있었는가.”
“방을 좀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마마.”
이제 곧 황성을 떠나야하니 짐을 꾸리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소란은 협탁이며 서랍들의 열려있는 문들을 닫았고, 은은 탁자위의 물건들을 하나씩 펼쳐놓으며 말했다.
“동궁으로 보내진 선물들이라네. 갈 때 이것들도 챙겨가서 아이가 태어난 뒤에 요긴하게 쓰시게. 모두 사내아이 것이긴 하지만, 혹여 여자아이를 낳더라도 그리-”
웃으며 돌아선 은의 얼굴에 당혹과 공포가 스쳤다.
“무... 무슨 짓인가..!”
소란의 손에 예리하게 빛나는 단도가 들려있었다.
“마마께 보내진 선물들을 제게 주시다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만, 아마 그것들은 제게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겁에 질린 은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소란은 두 걸음 다가선다. 은이 뒷걸음질 칠수록 소란은 자꾸만 가까이 다가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이 핏덩이를 마마의 손에 맡기느니 제가 데리고 가고 말지요.”
단도를 든 소란의 손이 하늘 위로 높게 치들렸다.
-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은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화들짝 놀라며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예리한 칼의 끝날을 소란 스스로 제 가슴으로 찔러 넣는 것을. 물러서던 걸음이 벽에 가로막혀 멈춰버린 은에게로 소란은 괴로워하며 자꾸만 다가왔다. 이미 자신의 가슴을 찌른 단도를 빼내어 들고, 공포에 짓눌린 은을 향해 힘겹게 말했다.
“마마를... 원망하진.. 않겠습니다...”
쿨럭. 피를 토하는 소란의 입이 무언가를 계속 말하려 했고, 은은 이미 이성을 잃은 사람이 되어 소란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를, 아이를 어떻게 해야만 해..
“하지만 저의 죗값은... 살아남은 마마께서... 짊어.... 지십시오..”
새하얗게 질려 목석처럼 굳어진 채 떨고 있는 은의 손으로, 소란은 피가 뒤엉긴 단도를 꾹 쥐어준다. 그리고 끝까지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힘에 겨운 듯 점점 주저앉는다.
“소용마마,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서야 소란은 기어이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소란의 주변으로 새빨간 붉은 피가 번지며 은의 발치를 적셨다.
“화...황후마마...!”
쓰러진 소란과, 제 손에 들린 단도를 번갈아 보는 궁인의 당황한 눈. 초점을 잃은 채로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은의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간 단도가 챙, 하고 바닥과 마찰했다.
첫댓글 오랜만에 1등으로 써보네요 ㅎㅎ 그러나 이야기는 어둡기 그지없고ㅜㅜ 언주의 고백은 아마도 받아들여지긴 여려울테고.. 소란의 일로 과연 은은 어떻게 될까요... 힘내라!!!!우리 은이!! 작가님도 힘내세요 ㅎㅎ
소란은 끝까지 은을 내버려두지 않는군요; 은이 이번 일로 또 곤경에 처하지는 않겠지요?ㅠㅠ 어째 일이 꼬이고 또 꼬이네요
에구, 은이에게 큰 일이 일어났네요.. 소란의 아이는 어찌 될까요. 은이 또한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다음편이 기대되네요!!!!
-0-와우...원망하지 않겠다면 단도를 손에 쥐어주면 안되죠...;;;;;아이를 그렇게 주기 싫으면 혼자 떠나면되지 정말;;
헐우리은이/....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