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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조선사연구회에 펌 해 올렸던 아고라 군대무기 계시판글이였는데...
몽골인의 뻥으로 몰아부치기엔 심상찮은 구절들이나오고...
현대 중원지명과 한반도 지명에 관한 뒤죽박죽은..오히려 그 의도가 주도면밀한 사기를 목적으로한 글이 아니란 느낌이 저 개인적으론 드는 글입니다.
한나라(중원)를 시종일관 니칸이라 통칭하고...본인을 욕하는 한국인들을 니칸의 종자들이라 부르고...
쉬르아(신라)와 니칸(漢)과 밀접한 지역에 뒀다 신라를 한반도로 해석하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주도면밀치 못한 점이 걸러 듣기에 따란 뭔가 진실에 부합됀단 추측도 하게 됍니다.
보장왕이 유배보내진 지역이 사천성이란 말...
남 니칸(南漢)에 카불(아프칸수도)란 지명...
북제(北齊)는 중원 약간 남쪽에 있단 말...
양원왕 때 분리됀 서고구려격 투르크"를 니칸(漢)의 사이비종교집단이라 칭하는 글...
지금와서보니 조금 이해가 됄려 합니다.
뭔 몽골인 스승에게서 전해들은 몽골(무쿠리)역사서라는 댓글쌈을 봤는데...
전 이 몽골분이 사기꾼 같진 않습니다.
문무선생님께선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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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도에
뭔 전쟁사 얘기 싸이트에...내몽골이나 브리야트 사투리 몽골어를 아는 몽골인으로 추정되는 분이
현 대륙조선사 연구회의 주장과 상당히 비슷한 주장을...
고려(조선)이 주체가 아닌...몽골(무쿠리)를 주체로 쓰신 글로 보입니다.
완전 정신병자거나...
정식 몽골어도 아닌 글로 때려 맞추어 소설을 썼다고...매일 뚜들겨 맞다...탈퇴(당?)한 분 같습니다.
제가 볼 땐 아주 환상적입니다.
고구려의 계보도에 몽골의 어느 부족 사투리를 적당히 껴 맞춘 창작이라 해도
그 언어적 연관성만 가지고도..제가 보기엔 상당히 가치가 있는 글이었는데...다소 국수주의적 시각들의 공격에
고구려를 그 이들 것이라 주장하니...공격을 당했지 싶고...
괸실이...나름대로 아주 희귀한 자료들을 잃은 듯 합니다.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몇 십년으로 하는게 우리 정설였었는데...
요즘은...한나라보다 3년 빠르다 수정되는 걸 봐선...이 분이 2003년 올리신 글이...무조건 우리 고구려 역사에 껴 맞춘 위작이 아닌..
나름대론 뭔가의 역사지식을 따로 습득하신 정황이라 예상됩니다.
만일 껴 맞춘 소설이라 하더라도...
고대사의 언어들을 몽골의 사투리는 어떻게 번역하는지...
당 연구회가 찾으려는 투르크어와 고구려말의 언어적 연결의 ...좋은 시도 정도로 봐도...가치가 있을까 해서 옮겨 봤습니다.
어느 정사에도 안 나오는...
왜놈들이 몽골까지 가서 깨지고 돌아온 얘길 하다...왜놈들 후손으로 보이는 분에게 엄청 당하고...
여타 회원들에게도 정신병자로 만신창이가 되는 댓글을 보건데...
밑에 분은 ...뭔가 우리가 모르는 걸 ...어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건 맞아 보입니다.
고구려 왕들의 호칭...
현 신장성과 그 이남(중가르&사천성)...양자강 일대 한족들을 내내 어떻게 부르는지 ...
몽골어로 번역하면 어떻게 불리는지...감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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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쿠리 칸의 계보
글쓴이: 카마이카노 조회수 : 257 03.05.16 23:54 http://cafe.daum.net/shogun/9xm/1799
1.투멘 메르겐 보그드칸
(Tumen Mergen Bogd Khan/BC 210~BC 168 )
무쿠리제국의 제1대 칸(재위 BC 199∼BC 168). 이름 투멘 (朱蒙.鄒牟,都慕은 음역어) 칭호는 투멘 메르겐 보그드칸이며 한자사서에는 이를 폄하하여 東明聖王이라고도 한다. 이때 코리부가 속해있던 바이칼호 동쪽의 동부리야트제국의 카불(Kabul,解夫婁)칸이 사망하고 키마(金蛙)칸이 등극하였다. 코리부의 코리챠 투멘은 활을 잘쏘는 재능을 타고나 활쏘기 대회에서 명궁에게 주어지는 '메르겐' 칭호를 얻고 부리야트제국의 투멘(만호장)이 된다. 그는 특유의 활쏘기 실력으로 초원을 누비며 공을 세우게 된다. 이에 키마칸의 장자인 타이소(Taiso) 타이시를 비롯한 일곱명의 타이시(왕자) 및 노얀(대신)들이 시기하여 그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에 어머니의 뜻을 따라 남쪽의 카라 무룬(흑룡강)으로 내려가서 부리야트족의 일파인 코르분부로 가서 코르분(Khorbun)부를 평정하고 199년 무쿠리제국을 건국하게 된다. 이때 코리챠 투멘은 정식으로 성씨를 코리챠로 하게된다. 197년에는 홀룬-부이르지역의 부이르의 칸 숭잉(Sunging) 칸의 항복을 받았고 195년에는 코르분지역에 '코르분'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194년에는 현재의 흥안령지역(Sangen)에 있던 Sangen부를 정벌하였다. 189년에는 오호츠크해 북변에 있던 아마르기 오호츠크를 멸망시키는등 대규모 정벌사업을 펼쳤다.
2.툴리 메르겐 칸
(Tulioi Mergen Khan/BC 200~ BC 160)
무쿠리의 제2대 칸(재위 BC 168∼AD 160). 이름은 툴리(類利·儒留·朱留). 정식 칭호는 툴리 메르겐 칸이며 니칸사서에는 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투멘 메르겐 보그드 칸의 맏아들. 어머니 옐뤼씨(Yelioi). 부인은 다이무크 후(多勿侯) 숭잉(Sunging)의 딸. BC 168년(투멘 메르겐 칸의 31년째 치세) 동부리야트제국으로부터 아버지 투멘 메르겐 칸을 찾아 무쿠리에 입국, 타이시로 책립되고 투멘 메르겐 칸에 이어 즉위하였다. BC 166 년 계비인 챠이 부인(雉姬)을 그리는 《시라친의 노래(黃鳥歌)》를 지었으며, BC 162년 시버(Sibe)를 공략하여 항복받았다. 161년 도읍을 코르분(Khorbun,忽本)에서 Guruni Hechen(國內城)으로 옮기고 우나안(Unaan) 방어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61년 부리야트(扶餘)가 침공해 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160년 군사 20만으로 동부지역의 송화강유역의 rang mukuri(梁貊:小水貊)를 쳤으며, 남부지역의 니칸 한왕조의 무쿠리현(高句麗縣:玄郡의 屬縣)을 탈환하였다. 투크투 나(Tukutu Na:豆谷東原)에 묻혔다.
3.타이 무크센 칸
(Tai Muksen Khan/BC 179~BC 120)
무쿠리 제3대칸(재위 160∼120). 이름은 무쿨(無恤). 투리 칸(琉璃王)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숭잉(Sunging,松讓)의 딸. 160년(투리 메르겐 칸의 8년) 타이시(太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보다가 투리 칸이 죽은 뒤 즉위하였다. 150년(타이 무크센 칸 10) 동부리야트를 공격하여 타이소 칸(Taiso Khan,帶素王)을 정발하고, 무쿠리에 병합(倂合)하였다. 또 145년(타이 무크센 칸 15) 카이마 국(Kaima Gurun,蓋馬國)을 쳐서 이를 병합하여 국토를 예니세이(薩水)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울투치(Ultuchi,乙豆智)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國事)를 맡겼는데, 142년 니칸 한(漢)왕조의 뤄둥 태수(遼東太守)가 무쿠리를 침략했을 때 그의 지략(智略)으로 이를 물리쳤다. 132년 니칸 한왕조와 인접한 나크란지역의 왕자(王子) 카이두(好童)를 시켜 니칸 한왕조의 속국으로서 아직 남아 있는 나크란 지역(樂浪郡)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130년 재차 공략(攻略)하였다. 칸의 시호(諡號)가 하늘을 크게 받드는 자인 타이 무크센인 것은 하늘의 명을 받아 재위 중에 주위의 많은 나라를 공략하여 무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칸의 무덤(陵)은 타이수켄바(Taisuken Ba,大獸村原)에 있다.
4.민투 칸
(Mintu Khan/BC 130~BC 100)
무쿠리 제4대 칸(재위 120∼100). 이름은 카수투(Kasutu,解色朱). 타이 무크센 칸의 아우. 타이 무크센 칸이 죽자 타이시 카이루(解優:무분 칸)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유언에 따라 만투 바(Mintu Ba,閔中原)의 석굴에 장사지냈다.
5.무분 칸
(Mubun Khan/BC 121~BC 76)
무쿠리의 제5대 왕(재위 100∼76). 이름 카이루(Kairu,解憂·解愛婁). 타이 무크센 칸의 아들. 민투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99년(모본왕 2) 니칸 한(漢)왕조의 베이핑(北平)·워잉(漁陽)·샹골(Shanggol,上谷)·타이유완(太原) 등을 공격하였으나, 뤄둥태수(遼東太守) 채동(蔡)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원래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결국 신하 툴로(Tulro,杜魯)에게 피살되었다. 장지(葬地)는 무분 바(Mubun Ba,慕本原)에 있다.
6.타이쥬 칸
(Taizu Khan/BC 83~AD 102)
무쿠리 제6대 칸(재위 BC 76∼AD 22). 한자이름 궁(Gung,宮). 본명 아이수(Aisu,於漱). 투리 칸의 손자이며, 칸의 일족인 쿠투가이(Kutugai,古鄒加) 쟈이샤(Jaisha,再思)의 아들. 국가를 새롭게 개창하였다 하여 구루니바반 칸(Guruni Baban Khan,國祖)이라고도 한다. 무분칸이 죽은 후, 타이시가 영특하지 못하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왕이 되었으나,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BC 72년(타이쥬 칸의 치세 4년) 동오호츠크(東沃沮)를 정벌, 영토를 동으로는 북태평양, 남으로는 송화강(薩水)에 이르게 하였으며, 59년 노얀중의 하나인 타르가이(Targai,達賈)를 파견하여 추나이(Chunai,藻那)부를 정벌하고, BC 31년 니칸 한(漢)왕조의 라오슈현(遼燧縣;구 니칸 한왕조의 요(遼)의 동서를 나누는 기준은 현재의 난하를 기준으로 한다.현재의 베이핑 근처)을 공격하여 라오둥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을 죽이는 등, 남동면의 영토를 넓혔다. 또한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니칸의 제도를 일부 도입,종래의 단순유목국가 형태에서 좀더 완벽한 세계제국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AD 22년 동생인 수르신(Sursin,遂成:차카타이 칸(次大王))이 칸위를 탐내자 그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처음 큰 제도를 변혁한 칸이라 니칸의 전례를 일부 도입, 타이쥬 칸이라 하였다. 102년(신타이 칸 1년) 119세로 서거하여 장수한 칸이 되었다. 타이쥬 칸 때부터 니칸의 사료에도 자주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타이쥬 칸의 시기에 무쿠리의 기존제도로는 부족하여 니칸의 제도를 일부 도입하자 니칸인들이 이를 칭송하였기 때문이다.
7.차카타이 칸
(Chagatai Khan /BC 75~ AD 102)
무쿠리 제7대 칸(재위 AD 22∼ AD 102). 이름은 수르신(Sursin,遂成). 타이쥬 칸의 동생. BC 3년(타이쥬 칸 69)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玄太守) 요광(姚光), 뤄둥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위의 채풍과는 동명이인) 등이 무쿠리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한 뒤, 초하이 구룬 암반(군국정사)를 맡았다. 타이쥬 칸의 연로함을 기화로 정권을 노리다가 타이쥬 칸의 양위를 받아 칸의 자리에 올랐다. 차카타이 칸은 사람됨이 용장(勇壯)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하지 못하였다. 23년(차대왕 2)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右輔) 코리챠 후투리골민(Koricha Huturigolmin,高福章)을 유배하고, AD 25년 타이쥬 칸의 타이시 마크쿠룬(Makkurun,莫勤)마저 유배한 후 칸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밍린타부이(Minglintabui,明臨答夫)에게 시해당하였다.
8.신타이 칸
(Sintai Khan/AD 25~179)
무쿠리 제8대 칸(재위 102∼179). 이름은 베쿠이(Bekui,伯固·伯句). 타이쥬 칸의 이복동생, 쟈이샤(Jaisha,再思)의 아들. 어머니는 부리야트 사람. 둘째 형인 차카타이 칸(次大)이 포악무도하여 숨어 살던 중 차카타이 칸이 밍린타부이(Minglintabui,明臨答夫)에게 살해되자 좌보(左輔) 우주류(Ujuliu,支留)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하였다. 102년(신대왕 2) 좌·우보(左右輔)의 직제를 국상(國相)으로 고치고 Minglin Tabui,(명림답부)를 이에 임명, 버이제(Beise,沛者)의 벼슬을 더하여 내외병마를 맡기고 나라를 다스렸으며, 차카타이 칸의 타이시 투르얀(Turyan,鄒安)을 양국군(Liang Gurun Gun,讓國君)에 봉하였다. 169년 니칸 한(漢)왕조의 현도군태수(玄郡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이를 격퇴하였으며, 이듬해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公孫度)을 물리치고 이와 함께 하던 고비사막근처의 부르산(富山)의 도적을 토벌하였다. 능묘는 Gugu ba(구구 바,故國原)에 있다.
9.코리구루친 칸
(KhoriGuruchin Khan/157~197)
무쿠리 제9대 칸(재위 179∼197). 이름 나무(Namu,男武) · 칭호-이리무(Irimu,伊夷謨:백성들의 책임자) . 신타이 칸(新大)의 둘째 아들. 구룬 쿠부허 칸(國襄王)이라고도 한다. 부인은 자이나부(Jaina Aiman,提那部) Uso(于素)의 딸이다. 신타이 칸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84년 한나라 뤄둥태수(遼東太守)의 침입을 좌원(坐原)에서 격퇴한뒤 요동으로 쳐들어가서 요동을 점령하였다가 다시 니칸에게 주는등 대승하였다. 191년 Ubasi(우바시,乙巴素)를 Gohika Amban(國相)으로 등용하여 현정(賢政)을 베풀고, 우바시를 천거한 안뤼(Anlioi,晏留)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194년 친타이 파푼(Chintai fafun,賑貸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주었다.
10.샨산 칸
(Shansan Khan/187~227)
무쿠리 제10대 칸(재위 197∼227). 이름 렌누(Lennu,延優)·칭호:이리무(Irimu,伊夷模:위의 뜻과 동일). 제8대 신타이 칸(新大)의 아들이며, 제9대 코리구루친 칸(故國川王)의 동생이다. 코리구루친 칸이 아들 없이 죽자 왕후 wu씨(于氏)에 의해 렌누가 왕위에 올랐다. 렌누 위에는 바카이(Bakai,發岐)라는 형이 있었다. 바카이는 이를 분하게 여겨 무쿠리를 떠나 훈누칸국으로 가서 훈누의 세르유(Seryu:직위명)로부터 그의 투르크 기병 3만 명을 얻어 무쿠리에 쳐들어왔다. 샨산 칸은 동생 카이수(Kaisu)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는데 이 싸움에서 바카이가 패하여 자살하였다. 207년(샨산 칸 11) 칸이 투퉁 투룬(酒桶村)에 미행(微行)하였는데 208년에 그곳의 한 처녀가 샨산 칸의 아들을 낳았다. 처녀는 소후(小后)에 봉해졌고 그 아들은 후에 제11대 둥친 칸(Dungchin Khan,東川王)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칸은 수도를 카한투(Khantu,丸都)로 옮겼는데, 카한투는 지금의 북몽골초원 오논강 근처의 후흐노르이다. 이후 이 근처에서 칭기스칸의 세력이 태동한다. 217년(샨산 칸 21) 8월에 니칸 한(漢)왕조 평주(平川)의 하요(夏瑤)가 백성 19,000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칸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남몽골의 옹구트족이 사는 지방인 체른 헤첸(柵城:현재의 후흐후트)에서 살도록 하였다. 칸의 무덤(陵)은 샨산 카능 메자르(Shansan Khanun Mezar,山上陵)이다.
11.둥친 칸
(Dungchin Khan/208~248)
무쿠리 제11대 칸(재위 227∼248). 이름은 우뤼크(Ulioike,憂位居), 초명은 코차이(Kochai). 샨산 칸(山上王)의 아들. 더르기 쿠부허 칸(Dergi Kuhuber Khan:동방을 키우는 칸)이라고도 하며, 213년 타이시로 책봉되었다. 그의 치세는 니칸이 위(魏)·오(吳)·촉(蜀)으로 대립하고 있던 삼국시대로서, 236년(둥친 칸 10) 오나라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파견하여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냈고, 238년에는 위나라가 오나라 공손 연(公孫淵)을 토벌할 때 군사 30,000여 명을 보내어 오를 견제하고 니칸의 세력균형을 유지하였다. 242년에 니칸과 나크란지역을 연결하는 고비사막 이남의 교통의 요지인 사얀핀(Sayanpin,西安平)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에 수도가 비워져 있다는것을 노린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이 카한투 헤첸(丸都城)을 직접 공격하여 함락되고, 장군 왕기(王)의 추격으로 남오호츠크(南沃沮)로 피란하였다. 이때 용장(勇將) 미리이(Mirii,密友)와 루르이(Lurii,紐由)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카한투헤첸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닝우타 헤첸(Ningguta Hechen,東黃城:이후의 바르하이제국의 수도)으로 옮겼다. 248년에는 쉬르아에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12.쥴친 칸
(Julchin Khan/224~270)
무쿠리 제12대 칸(재위 248∼270). 일명 두림바이 쿠부허 칸(中壤王:중심을 기르는 칸). 이름은 예푸이(Yepui,然弗:延弗), 둥친 칸(東川王)의 맏아들. 왕비(妃)는 예른 씨(Yerun,椽氏). 둥친 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동생 예르무(Yerumu,預物)과 사구이(Sagui,奢句)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259년(쥴친 칸 12) 니칸 위(魏)왕조의 장수 위지계(尉遲階)의 침입군을 량무크 골(Liangmuk Gol,梁貊谷)에서 격퇴하였다. 서거 후 쥴친카눙 메자르(Julchin Khanun Mezar,中川原)에 장사지냈다.
13.숫친 칸
(Suchin Khan/248~292)
무쿠리 제13대 칸(재위 270∼292). 일명 와르기 쿠부허 칸(西壤王). 이름은 야르우(Yarwu,藥盧·若友). 쥴친 칸(中川王)의 둘째 아들이다. 255년(쥴친 칸 8) 타이시로 책봉되고, 271년 서부대사자(西部大使者) 우수이(Wusui,于漱)의 딸을 카툰으로 삼았다. 280년 슈르센(Shurshen,肅愼:무쿠리 동부의 반란 세력)이 내침하자 동생 타르구트(Targut,達賈)를 보내어 이를 격퇴하고, 탄로이 헤첸(Tanloi Hechen,檀盧城) 등 여러 성을 빼앗았다.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이르우(Iruwu,逸友)·Sobai(소바이,素勃) 등을 주살하였다. 칸의 장지(葬地)는 숫친 카눙 메자르(西川原)이다.
14.푼샹 칸
(PunShang Khan/272~300)
무쿠리 제14대 칸(재위 292∼300). 이름 샹부이(Shangbui,相夫)·샤이시르흐(Shaisirkh,矢婁). 숫친 칸의 태자. 체르갈 칸(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자랄 때부터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칸위에 오르자 숙부인 안국군(安國君) 타르구트(Targut,達賈)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을 미워하여 살해하고, 이듬해 동생 토르구트(Torgut)마저 사사(賜死)하였다. 명신(名臣) 차주이(Changjui,倉助利)를 국상(國相)에 등용하여 무트바흐츠 시버족인 연(燕)나라 무트바흐츠 오르(慕容)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되었다. 298년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릴 때, 화려한 궁궐을 지으려 하여 차주이가 이를 말렸으나 끝까지 그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하였다. 무덤은 푼샹 카눙 메자르(烽山原)에 있다.
15.메르친 칸
(Merchin Khan/283~331)
무쿠리의 제15대 칸(재위 300∼331). 코리챠씨. 이름 우푸이(Upui,乙弗·憂弗). 숫친 칸의 손자, 구추가이(Guchugai,古鄒加) 토르구트(Torgut)의 아들. 사인 쿠부허 칸(好壤王)이라고도 한다. 큰아버지 푼샹 칸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民家)에 숨어 화를 면하였으며, 뒤에 국상(國相) 차주이(Chajui,倉助利) 등이 푼샹 칸을 폐하자 칸위에 올랐다.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켄두르군(玄郡)을 공격, 적군 80,000명을 사로잡았다. 311년 고비이남의 시얀핀(西安平)을 점령하였으며, 313년 니칸의 사주를 받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나크란지역(樂浪郡)을 공략하여 적군 190,000명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나크란 아이만(부족)은 멸망하였다. 314년 다이반부(Daiban,帶方郡)를 정벌하여 영토로 삼았다. 메르첸 메자르(Merchun Mezar,美川之原)에 장사지냈다.
16.코리구룬유완 칸
(Khorigurun Yuwan Khan/308~371)
무쿠리 제16대 칸(재위 331∼371). 이름 사이뤼(Sailioi,斯由,釗). 메르친 칸의 아들. 구루니 낫훈 구르칸(國岡上王)이라고도 한다. 314년(메르친칸 l5) 타이시로 책봉되고, 즉위하자 페르얀성(平壤城:현재의 심양,묵덴)을 증축하였으며 구루니 헤첸(Guruni Hechen,國內城)을 쌓았다. 342년 카한투성(丸都城)으로 천도한 뒤 수차례 무트바흐츠 시버인 연(燕)나라의 침입을 받게된다,이에 분노한 칸은 40만 군사를 거느리고 무트바흐츠 후왕(慕容)의 연왕조의 수도 돌론노르를 포위하고 무트바흐츠 왕조의 칸의 시체를 빼앗고,무트바흐츠 칸의 카툰과 구르카툰(왕모)을 사로잡아 포로로 잡아갔다. 343년 무트바흐츠 칸 무트바흐츠 후왕은 이에 조공을 바치며 찾아와 카툰과 구르카툰,그리고 시체를 찾아갔다. 369년 20만 군대로 무쿠리중앙의 협동작전에 협조하지 않는 베르체를 공격하였으나 해전의 열세로 패하고, 371년 제국의 패권을 노리고 쿠테타를 일으켜 수도에 침입한 베르체의 쿠툴루크 칸(근초고왕)과 페르얀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17.시유수린 칸
(Siyoosulin Khan/354~384)
무쿠리 제17대 칸(재위 371∼384). 아지게 카투르 칸(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쿠부이(Kubui,丘夫), 코리구룬 유완 칸(故國原王)의 아들. 355년(코리구룬 유완 칸 25) 타이시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코리구룬 유완 칸이 베르체의 쿠툴루크 칸(近肖古王)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화살(流矢)에 맞아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니칸 전진(前秦)왕조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수립하여 조공을 받았으며 동로마제국과의 교역에 노력하여, 372년 니칸의 전진 왕 부견(符堅)이 보낸 조공사절단에 속해있던 승려 순도(順道)가 가져온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여 니칸식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같은 해 타이 타치하 아문(Tai Tahchiha Amun,太學)을 설립하였고, 373년 처음으로 법령(Fafun,律令)을 반포하고, 375년 니칸식 불교절인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그 해에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또 전년에 무쿠리에 온 중 투르크 승려 아투르(Atur,阿道)를 위하여 이프란사(Ipran,伊佛蘭寺)를 지어 주지(住持)로 삼았으며, 같은 해에 베르체의 시유골 헤첸(Siyoo Gol Hechen,水谷城)을 빼앗았다. 377년 30만 대군의 베르체반란군 침공을 물리치고 베르체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였으며 이듬해 키타이(契丹)인 제후를 그곳에 임명하여 북방베르체(요서)지역의 통할을 맡겼다.
18.코리구룬 쿠부허 칸
(Khorigurun Khubuher Khan/353~391)
무쿠리 제18대 칸(재위 384~391). 이름 오치르치(伊連,於只支). 시유수린 칸의 아우.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Leli Toktobuha Ba Khan)의 아버지. 385년 군사 40만으로 요동(遼東)을 공격하였고, 이듬해 베르체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는 등 외치(外治)에 힘썼다. 불교,조로아스터교,마니교,네스토리우스교 등 다양한 종교를 널리 인정하고 양성하여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宗廟)를 수리하는 등 국가체제 확립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9.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
(Leli Toktobuha Ba Khan/375~413)
무쿠리 19대 칸(재위 391∼413). 코리구룬쿠부허 칸(故國壤王)의 타이시. 이름은 타르더(Tarde,談德)이며 시유수린 칸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유목 정복대칸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구룬 낫후니 러리 토크토 부하 바 타이핀 사인 구르칸(Gurun Nathuni Leli Toktobuha ba taifin Sain Gurkhan,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후투크 쿠문 보그드 칸(Hutuk Kumun Bogd Khan,永樂大王)이었다.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은 약칭이고, 그가 쓴 후투크 쿠문(Hutuk Kumun,永樂)이란 연호는 제국의 영원한 발전을 약속하는 뜻에서 쓰인 연호이다. 즉위 초부터 다이반(Daiban,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베르체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세크하르(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 6:베르체 아신 칸) 친히 수군 50만을 거느리고 베르체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칸의 동생인 아시하(Asiha) 옷치킨과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산동반도근처의 지역과 하느쿵반도의 서쪽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쉬르아 나이무르 왕의 요청으로 50만의 원군을 보내어 일번에서 건너온 남부베르체군를 격퇴시켰으며, 둥야이(Dungyai,東濊:현재의 나나이인)를 통합하고(410), 쉬르아와는 하스라(Hasra,何瑟羅:현재의 하느쿵 반도의 강원도지역)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나라의 무트바흐츠 키(慕容熙)를 공격하여 이체 헤첸(Iche Hechen,新城)·난솜(Nansom,南蘇)의 2성 등 7000여 리의 땅을 회복하였고, 405∼406년 후연(後燕)의 무트바흐츠 키에게 2번동안 항복권고를 하였으나 뤄둥성(遼東城)과 무치성(Muchi,木底城)을 주는 정도로 거부하였다. 407년 무트바흐츠 키에 반발하여 그의 신하로서 그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자립한 코리챠 운크(Koricha Unkh,高雲)과는 수교를 맺고 현재의 탕구트지역인 서부로 밀려난 무트바흐츠 시버군을 물리쳤다. 410년에는 북부 시베리아의 동부리야트(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오브강 연안의 동부리야트가 무쿠리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시라무렌선(황하)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로란(Roran)을 격파하고 서부시베리아를 확보하고 킵챠크/쿠만과 국경을 맞대고 그들을 속국으로 만듦으로써 명실공히 유라시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의 릉은 소재 미상이며 일번측이 주장하는 챠이슈트 칸이 414년에 세웠다는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비(中國 吉林省集安縣 通溝 소재)에는 그의 니칸정벌과 하느쿵반도로 범위가 축소된 수준의 기록만이 존재한다.
20.차이슈트 칸
(Chaishut Khan/394~491)
무쿠리 제20대 칸(재위 413∼491). 휘 커뤼이(Kerlioii,巨連:巨璉).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廣開土大王)의 맏아들. 모습이 괴걸(魁傑)하고 지기(志氣)가 호매(豪邁)한 대장부로, 409년(러리 토크토부하 바 19) 태자로 책봉되고, 413년 부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 니칸의 진(晉)·송(宋)·위(魏) 왕조 등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관계를 다시 확인하고, 427년(차이슈트 칸 15) 카라무룬(흑룡강) 지방의 구루니 헤첸(Guruni Hechen,國內城)에서 남쪽의 피르얀(平壤)으로 천도하여 적극적인 남하정책과 니칸정벌을 추진하였다. 인디아불교 승려 투린(Turin,道琳)을 베르체에 첩자로 파견하여 베르체의 허실을 탐지하는 한편 베르체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고 나서, 475년 친히 군대를 이끌고 베르체를 공격하여 그 수도 니칸 헤첸을 함락하였고 베르체의 카이루 칸(蓋鹵王)을 사로잡아 죽였다. 480년(차이슈트 칸 68) 무쿠리(靺鞨) 국내의 군사들을 모두 모아 함께 쉬르아 북부와 니칸지역을 공략하여 쿠이밍성(孤鳴城) 등 7성을 함락시켜 남으로는 황하의 발원지에서 동쪽의 동태평양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우랄산맥을 넘어 킵챠크를 차지하여, 몽골 역사상 최대의 제국(帝國)을 건설하였다. 내정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제도를 새로운 지방제도로 고쳐 5잔징(맹)를 신설하는 등 무쿠리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21.무차이 칸
(Muchai Khan/453~519)
무쿠리의 제21대 칸(재위 491∼519). 이름 라룬(Larun,羅雲). 차이슈트 칸의 손자이며 암바 구추가이(古鄒大加) 추다이(Chudai,助多)의 아들. 무차이 메르겐 칸(文咨明王)·메르겐 다산 사인 칸(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차이슈트 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여러 번 시버족 위(魏)왕조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494년 부리야트제국을 토크토부하(평정)하고 그 칸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497년에 쉬르아 우르산 헤첸(牛山城), 512년에 남니칸의 대도시인 베르체 카불 헤첸(Kabul Hechen)·유완샨 헤첸(圓山城)을 점령하였다. 한편, 쉬르아-베르체군사동맹을 통한 베르체와 쉬르아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차이슈트 칸을 거쳐 무차이 칸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세계제국으로 발전하였다.
22.얀쟝 칸
(YanJang Khan/519~531)
이름은 샹얀(Sangen). 빨간 돼지의 해(519)에 즉위. 치세는 12년간..
23.얀완 칸
(Yanwan Khan/531~545)
이름은 부이르(Buir). 노란 돼지의 해(531)에 즉위. 치세는 14년간.
24.랑완 칸
(陽原王/537~559)
무쿠리의 제24대 칸(재위 545∼559). 이름은 타이핀 헤첸(平城). 얀완 칸의 맏아들. 선 낫훈 구르 사인 칸(陽崗上好王)·랑걍 칸(陽崗王)이라고도 한다. 533년(얀완 칸 3) 태자로 책봉되고, 얀완 칸이 죽자 즉위하였다. 시버족 왕을 임명하여 제국의 일부지역을 동위(東魏)·북제(北齊) 등으로 지정하여 보다 효율적인 제국통치를 도모하고, 47년 사얀 투르 헤첸(白巖城)·이체 헤첸(新城:무크슌(Mukusun)) 등을 재건하였으며, 50년 반란을 일으키려는 북제의 왕을 폐하고 직접 통치를 도모하였다. 51년 자칭 투르크라 칭하는 니칸 사이비교단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쉬르아·베르체에게 하느쿵 반도의 한강 유역을 잃었다.
25.핑완 칸
(Pingwan Khan/545~590)
무쿠리 제25대 칸(재위 559∼590). 이름은 야르센(Yarsen,陽城). 타이핀 이 얼허 구르 사인 칸(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 랑완 칸(陽原王)의 타이시로 559년 즉위한 후 니칸의 진(陳)·수(隋)·북제(北齊:위의 국가와는 다른 시버족 국가 좀더 남쪽에 있었다.)·후주(後周) 등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일찍이 차이슈트 칸(長壽王)이 피르엔의 북서쪽 서 싱안옝(흥안령) 코리 투메트 알린 헤첸(大城山城)으로 국도를 옮긴 뒤 랑완 칸이 장안성(長安城:니칸지역의 성)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핑완 칸 28)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26.링얀 칸
(Lingyan Khan/576~618)
무쿠리 제26대 칸(재위 590∼618). 이름 암바수충가(Amba Suchungga,元·大元). 핑완 칸의 타이시. 피르엔 칸(平陽王)이라고도 한다. 즉위 후 니칸의 수(隋)왕조로부터 조공을 받다가 이들이 올바로 복속하지 않자,598년 무쿠리 철기병 1만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공(先攻),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섰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시키고,20만명의 포로를 잡아 모두 복속시켰다. 이와 함께 50만의 대군으로 수왕조를 공격하여 동북지역을 탈환하였다. 600년 태학(太學)박사 이문진(李文眞:니칸식 이름으로 개명된 무쿠리인)에게 명하여 《유기(留記)》 100권을 재편수,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다. 608년 쉬르아의 변경을 습격, 우밍 알린 헤첸(牛鳴山城)을 함락하고 군사 80,000을 포로로 잡았다. 612년 니칸 수왕조 양제(煬帝)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水陸軍)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울치 문더(Ulchi Munde,乙支文德)을 시켜 살수(薩水:현재의 난하)에서 적을 섬멸하고 그 뒤에도 계속 침공군을 무찔러 수왕조 멸망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27.영뤼 칸
(Yeongli Khan/598~642)
무쿠리의 제27대 칸(재위 618∼642). 이름 게르무(Germu,建武)·게르친(Gerchin,建成). 링얀 칸의 이복동생. 즉위하자 니칸의 당왕조로부터 조공을 받고 수왕조 양왕(煬王)의 무쿠리 공격 때 포로가 된 니칸인들(漢人)을 송환하고 무쿠리의 포로를 찾아왔다. 624년 당왕조를 정벌하고 당왕조의 고조(高祖)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631년 서북쪽의 부리야트헤첸(扶餘城)으로부터 서남쪽 바다에 이르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축조를 시작(현재 내몽골지역과 고비사막에 '고려장성'이라는 명칭으로 일부 남아있다.), 예른케 소만(Yerke Soman,淵蓋蘇文)에게 성 축조(役事)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되었다.
28.부르진 칸
(Burjin Khan/635~682?)
무쿠리의 마지막 제28대 칸(재위 642∼668). 이름 칭자이(Chingjai). 영뤼 칸의 아우·타이손 칸의 아들. 영뤼 칸을 시해한 예른케 소만(Yernke Soman,淵蓋蘇文)의 추대로 칸위에 올랐다. 643년 예른케 소만의 주장에 따라 당왕조에 사신을 보내라고 명을 내려 그들이 도교(道敎)를 바치게 하였다., 수크다르(Sukdar,叔達) 등 도사(道士)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받아들였다. 645년 당왕조의 태종이세민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예른케 수만이 독전, 격퇴하였다. 661년 당왕조 시유 칭바이(蘇定方)가 당왕조의 명령을 받은 쉬르아군과 합세하여 피르엔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예른케 소만이 다시 격퇴하였다. 그러나 예른케 소만이 병사한 뒤에 내분으로 국정이 어지럽자, 668년 쉬르아-당왕조 반란군은 다시 무쿠리를 침입하였다. 당시 예른케 소만의 장남 난새이(Nansei,男生)는 무쿠리를 배반하고 당왕조에 협력한 때이므로, 둘째 아들 난게이(Nangei,男建)가 마리치(Marichi,莫離支)로서 쉬르아-당왕조연합군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피르엔헤첸이 함락되면서 무쿠리는 동북방일부지역이 남아 저항하다가 바르하이 제국을 건국하게 된다., 어쨋든 그는 당왕조로 압송되었다. 뒤에 당왕조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책봉되었으며, 677년(문무왕 17) 요동주도독 조선왕(朝鮮王)에 봉해졌다. 그 지역의 무쿠리인들과 손을 잡고 무쿠리제국 부흥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681년(신문왕 1) 공주(州:쓰촨성 峽)에 유배되었다. 뒤에 당왕조의 고종은 그를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였으나 명목상이었을 뿐이었다. 이후 바르하이 제국이 건국되어 요동과 요서를 평정하고 당왕조를 제압한다.
첫댓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현재의 몽골지방은 옛 몽골인들이 아닙니다. 그곳은 고구려 땅이지요. 그 고구려 땅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몽골식으로 정리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현재의 내몽골이나 외몽골의 대부분 종족의 형상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입니다.
우리와 대동소이한 모습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몽고인들의 모습은 색목인이며, 구렛나루, 수염, 몸에 털이 많은 현재의 중앙아시아인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열쇠는 이곳에 있다고 봅니다.
연행사등이 인식한 몽골인은...이미 현 몽골고원에서 북원이 명(조선?)에게 제압됀 한 참 후의 몽골족들입니다.
북원의 정권은 현 몽골에 있을 수 없었고...북원은 조선 함경도에 흡수됐던 땅이였다가 다시 타타르(청)에 복속됀 땅이기에...조선 연행사들이 조선말기에 목격한 몽골인종은...당연 서역의 깊차크한국...즉, 러시아 튀기 몽골인들밖엔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의 시대적 상황였다 봅니다.
당대 서역 중남방은 타타르(청)이니...만주족이라 분류하지 이미 망한 몽골인들이라 호칭하지 않은 연유라 생각합니다.
다시말해...몽골의 초기 발흥 세력은 현 몽골이 맞으나...그들이 패망하곤 식민지에만 그들이 남았기에 그랬다 봅니다.
내외몽골자체가 곧 고구려의 발흥점이며...
고구려 북부 연방족인 말갈(메르키트?)...맥(貊)이라 불리우던 문화권이 몽골족으로 보이니...
당연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도 인식했을 가능성 많다 보이고...
몽골족의 대통일 이전 문명은...말갈과 고구려의 연합세력인 발해인 격이고...
발해는 후대엔 서쪽의 요나라에 동으로 밀려난 세력이니...알타이 동부 현 내외몽골이 가장 적합한 후기 중심지로 추정돼며...후발해의 마지막 부흥군 세력의 국호가 신장성&내몽골의 온위그루와 유사한 대원(大元)임을 보건데...
북부여의 주몽(朱夢),현 몽골(夢古),무쿠리,무굴(명?),이조선의 함경도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다 전 예상합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