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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뚜렁길 위의 인문학
漢字한자놀이 한번 해보자. 우물 정 井 자 안에 점 点하나 찍으면 무슨 자?
그건 물론 퐁당 퐁 字, 그러면 논뚜렁에 갓 쓰고 가는 자는? 이 자 者는 분명 논임자 이다.
나는 시방 7.8월 "건들매" 맞으며 내 논은 아니더라도 논뚜렁길을 걷고 있다. 아주 거드렁거리고-
서울 같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 도시인이라 뻐기지만 3대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들 조상들의 대부분이 농촌 농민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너무도 잘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어 늘 안타까움을 버리지 못해 나는 이 논뚜렁길을 걸으며
. 8월의 강한 햇살을 받으며, 여물어가는 벼이삭을 보며, 벼농사 짓는 옛날로 돌아가 보려 한다.
하긴 내 생애 동안에도 농사법이 많이도 바꿨으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라 치부하기 쉽지만 잠시 귀기우려보자.
우선 벼농사를 학자들은 수도작(水稻作)이라는 어려운 말로 했다.
시대에 따라 또는 사항에 따라 벼농사 짓는 방법이 달랐다.
재래 농사법은 적어도 1970연대 이전까지 오랜 기간 우리가 해온 방법이고,
관행농법은 5.16후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오로지 증산을 위해 화학비료 농약을 많이 쓰던 시절의 벼농사 짓는 법이다.
이와 함께 최근 들어 웰빙이니 참사리니 오가닉 시대에 들어와서 가능한 한 비료와 농약을 적게
또는 전혀 안 쓰는 방향으로 가서. 저 농약, 무농약. 유기농법등의 방법으로 세분 된다.
저농약농법은 관행농법에 비해 약 30% 미만 비료 농약을 쓰고 무농약,
유기농법은 아예 비료와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소위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살균제. 살충제 등을
집에서 스스로 만들어 쓰고 그리고 퇴비 같은 유기물을 거름으로 하여 농사짓는 법이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재래농법에서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것들,
아주 힘겨웠으나 인간적이고 아름다웠던 것들에 관한 내 나름의 인문학이다.
우선 벼의 원산지가 어디냐는 많은 노란이 있으나.
인도 파키스탄 중국 남부 베트남 등지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우리나라에는 중국대륙을 거처 들어왔으며 근년에 김해 조개무지에서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었으며.
삼국사기의 백제 다루왕 6년에 논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구려 때에는 벼농사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신라삼국 통일 후 벼농사가 활발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자주 등장한다.
벼와 쌀을 나타내는 말은 여려가지가 있다.
벼 화 禾, 이 글자의 목 木은 벼의 잎줄기와 뿌리를 형상화 한 것이고 위에 빗그인 선은 잘 익은 벼이삭을 나타낸 것이다. 벼 도 稻는 벼를 절구통에 넣고 손으로 공이질 하며 찧는 형상,
쌀 미 米 햇살 빗살. 맨살 할 때 이 살과 같은 것이 경음화 된 것. 혹은 이두표기로 㐘,
벼 심는 논은 논 답 畓, 즉 물 있는 밭, 이 글자는 중국 자선에는 없고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글자인데.
진흥왕 순수비에 최초로 나타난다.
벼를 나락이라고 한 연원은 조선 후기 동의록(東醫錄)이란 기록에 영호남 지방에서 벼를 나락(羅落)이라는 방언을 쓰고 있는 데, 이는 신라시대부터 관리들에게 주는 급료(綠俸)를 알 곡식 米 대신에 곁곡식 도 滔로 줬기 때문에 신라 新羅의 봉록 俸祿이라 하여 나록 羅綠이라 한 것이 나락 羅落으로 됐다는 것이다. 이때의 쌀은 귀족층의 주식이었다.
지금이야 증산과 기계화농법을 위한 들판이 바둑판같이 정비 되어 있으나. 1970년대만 해도 거의 몇몇 평야지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꼬부랑 논뚝길의 좁은 논바닥이었다.
그 농사 순서를 보자.
우선 겨울눈이 녹고 자운영 양지꽃이 필 3월 삼짇날쯤 논뚜렁에 물이 세지 않도록 가래질로 깔끔히 손질하고.
물이 잘 마르지 않는 우멍배미 둠벙 앞에 못자리판을 준비 한다.
지금이사 비닐하우스 안에서 키운 폿트의 모를 이앙기라는 기계가 모내기를 쉽게 해주지만
그 때는 얕은 산 들 가에서 풀과 참나무류의 잎 붙은 잔가지을 베 와서 작두질 하여 밑거름으로 묘판에 깐다.
못자리가 반농사라고 어른들은 강조한다.
건강한 모를 만들기 위해선 우선 좋은 벼 종자를 택해야 한다.
볍씨 고르기는 큰 항아리에 소금을 풀고. 비중기가 없던 시절이니
그 소금물에 달걀 한 개를 띄워 물위로 지금 5백 원짜리 동전크기의 껍질이 뜨는 농도에서
물에 담근 볍씨를 넣으면 빈 쭉정이 부실한 볍씨가 뜬다.
이 뜬 벼를 가려내어 버리고 가라앉은 실한 놈을 물로 씻어 약간 싹이 틀 때
바람 없는 날 못자리판에 바로 뿌린다. 이 작업이 기술이다. 오랜 경험의 농부나 상머슴이 아니면 고루 뿌리기 어렵다. 그리고 못자리판의 피사리다. 피는 볍씨보다 잘 자라 바늘같이 곤두선 놈을 쉽게 가려 뽑으면 된다.
이제 볍씨가 못자리판에 오면 이름이 “모”로 바뀐다. 모가 한 뼘 이상 자랐을 때 논에 갔다 심는다.
이를 모내기 이앙(移秧) 또는 “모시집보내기”라 한다.
모가 바야흐로 “벼”로 탄생하게 된다. 대개 이른 아침 일꾼들이 못자리판에서 어린모를 손으로 뽑는다. 이를 모 찐다고 하고 한 움큼씩 고이 뽑아 흙을 물에 흔들어 씻은 다음 묶어 모춤이라 하는데,
이를 본 논에로 옮겨간다. 본 논은 이미 가래질 써레질을 하여 모내기하기 좋게 흙을 고르고
물을 적당히 대 놓은 상태이라야 한다. 이제 모내기 시작이다.
죽처럼 뻑뻑한 논흙에 모를 서너 포기 지르듯이 심으니 영어로 모내기가 paddy shoot 이다. 모춤을 무논 여기저기에 적당한 간격으로 던져 넣고 바닥이 좁은 논배미는 못줄 델 것 없이 눈대중으로 그냥 대충 심는 것을 말하고
바닥이 좀 넓거나 기다란 논배미이면 줄모로 심는다.
일정간격 색실 눈금 표시된 기다란 줄을 양쪽에서 한 사람씩 잡고 한줄 다 심으면
“넘긴다”로 소리 질러 또 한줄 이런 방식으로 뒤로 물러서며 심는다.
그러나 잘 경지정리가 된 제법 큰 논은 정조식(正條植)모내기라 하여
못줄을 가로세로 두 줄로 쳐 놓고 어느 방향에서 봐도 줄이 사관생도 사열대형 처럼 줄이 잘 맞게 심는 모내기 이다.
이래야 포기수가 최대한으로 들어가고 관리도 편하고 수확량이 많기 때문이다.
한때 일본 강점기와 서슬 퍼런 군사시절 큰길가에는 이 정조식이 아니면
시찰 나온 군 면의 높은 관리들 비위를 거스르기 때문에 면소 서기 양반들이
그 힘들게 모심은 논을 짓밟아서 다시 바로 심으라고 눈 부라린 시대도 있었다
. 이렇게 하여 모가 벼로 되고. 이어서 김매기 또는 논매기 이다.
모와 같이 있는 잡풀이 양분을 빼앗아가서 수확량을 줄이고 생장에 방해가 됐기 때문에
방동산이, 올미대, 피 등등 잡초를 제거하고 뿌리가 쉽게 뻗어 가지치기를 돕고 공기유통을 돕기 위함이다.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논매기는 최소한 한번. 심지어는 네 번 까지 하는 고장도 있다.
맨 처음 매는 김매기는 초벌매기. 이때는 끝이 아주 뾰족하고 날개가 넓고 큰 호미로 바닥을 주로 긁어 주는 게 일이다. 두벌매기와 세벌메기는 맨손으로. 마지막 김매기를" 망시"라고 한다.
이 김매기는 더위 속에서 칼날 같은 벼잎에 몸이 긁히며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힘이 무척 든다.
그래서 논메는 소리 김매는 소리 소위 노동농요가 생긴 것이다.
혼자하기 힘드니 두레니 품앗이 형태로 오늘은 김가네 내일은 황가네 식으로 집단으로 한다.
사실 이때가 농부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신나는 절기이다.
자기 아버지가 어느 집에 일 가게 되면 경상도 말로는 육발이(곁다리 孼얼)라고 해서
새참이나 점심시간에 목 목으로 나오는 어른 두 손 바닥 보다 큰고 반으로 접은 명태 찜을
지푸라기로 중간을 매어 손잡이 달아준 고 것, 맛있고 건사한 것을 아버지에게서 받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 논메는 시절 이 골짝 저 골짝 선소리 한분이 노호세 노호세(노세 노세) 하면
받는 꾼들이 산천이 떠나갈 뜻 장엄하게 신나게 따라불러 울려 퍼졌다.
한 뱀이 다 매고 나서 휴식이나 새참을 먹기 전 마무리 작업신호는 반드시 후 후 하 하 호 호 였다.
그 러나 과학영농 한다는 지금은 그 김매기의 효과가 거의 없고,
잡초 제거도 제초제라는 농약으로 간단히 해결 할 수 있다니 좋은 세상이나 정서는 없다.
참 지금은 사람 손 김매기 대신. 오리. 기러기 우렁이 농법으로 논에 잡풀을 제거 하고
유기 농약으로 방제하고 그래서 신선 쌀을 생산한단다.
모내기 한 논은 주인이 자주 돌아다봐야 한다.
그래서 생긴 말이 벼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했다.
주인이 손바닥만 한 나비의 보습에 긴 자루가 달린 삽을 메고 이 논 저 논 논뚜렁을 자주 다니며.
뜬 모. 뜸부기가 둥지 쳐서 망가진 포기. 두더지가 뚧은 구명으로 논물 새는 곳.
기세 좋게 올라오는 잡초 등등을 부지런히 손봐야 온 농사가 된다.
이때 옆집 논 벼 보다 잘 자라지 않는다고 행여 벼 포기를 뽑아 올리는 짓 “조장 助長” 하지는 말아야 한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이 조장의 우화를 꼭 한번 찾아보시길,
논에 벼가 정상적으로 잘 자라 수확량을 높이려면 논 물 조절을 잘해야 한다.
특히 가뭄이 심한 해에 단비가 왔을 때 그 기쁨. 세상에 가장 보기 좋은 장면은 여북하면
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내 논에 물들어가는 것이라 했으랴.
일찍이 孟子맹자 선생은 진심 편에서 간파하신 바 있다.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이라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글자는 과 科자이다. 과거시험. 병원의 내과 소아과. 과학시대의 바로 그 과 科자이다.
이 글자의 원뜻은 작은 웅덩이. 벼포기의 뜻이 있다.
마른 벼논에 물이 들어갈 때, 위쪽 물고부터 차례로 벼포기 아래 약간 옴팍 파인 곳(科)를 채우지 않고는
그냥 건너 뛰어가는 법이 없다는 뜻. 너무 쉽게 돌아가거나 뛰어넘지 말고 순리대로 자연 그대로
즉 무위자연 無爲自然 하라는 깊은 뜻을 논에서 배워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농사가 그렇듯이 벼농사도 하늘님이 좌우한다.
너무 비가 많이 와도 안 되고, 너무 기온이 높거나 낮아서도 안 된다. 모내기 후 백중까지는 날씨가 덥고 일조량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만 아침에 논에 들어간 백로가 저녁에는 보이질 안을 정도로 벼가 무럭무럭 자란다. 벼가 안 자란다고 절대 조장하지 말 것. 볏논에 눈엣 가시는 피(稷)이다. 예부터 볏논에 피가 많은 집에는 딸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그런 논 주인집은 분명 게으름뱅이 집이고. 인품이 형편없으며, 손가락질 받는 집이기 때문이다.
사실 농촌사회에서는 이 손가락질이 권총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피는 아주 강한 벼과식물이다. 가뭄에도 잘 견디어 물 없어 모내기 못한 논가에도
아주 억세게 잘 자라서 이삭이 빨리 여문다. 우리는 삼일에 피죽 한 그릇 못 먹은 놈같이 힘이 없다고 하는데,
물가뭄 흉년에도 결실 되니 이놈으로 끼니를 이울 수 있다는 뜻이다.
피는 벼보다 동작 빠르게 키도 한 뼘 정도 더 크고 이삭도 빨리 여문다.
그래서 피 이삭이 올라오자마자. 피사리 작업이라해서 이를 제거해야 양분도 안 빼앗긴다.
벼 베기 할 때 까지 그냥두면 익은 피 열매가 오소소 그냥 논바닥 땅에 먼저 떨어져 다음 농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긴 벼농사 전에 피를 농사로 했다는 증거도 있다.
땅과 곡식에 제사 지냈다는 사직단 社稷壇의 사는 社는 토지의 신이고 직 稷을 기장이나 이 피 직 稷를 말한다.
벼에도 “혀”와 “귀”가 있다는 것 알아야 한다.
그런데 피에는 이 “혀”와 “귀”가 없어 벼와 잘 구분되어 피사리 할 때 기준이 된다.
농촌 속담에 피가 패 면 머슴의 똥이 쿠리다는 말이 있다.
피 이삭이 필 때는 지금은 없어진 말이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여름 중 한숨 돌리 수 있는 농한기 인데,
이때 머슴이 주인에게, 나, 일하느라 고생 많이 했으니 뭘 좀 잘 해달라는 행패 비슷한 투정 부리는 시기라 한다.
하여 풋굿, 호미씻이. 백중놀이 등으로 알려진 위로 파티 비슷한 게 마을마다 집집마다 열리고 대접하며
잘사는 집에서는 머슴들에게 삼베 바지적삼 한 벌을 버젓이 해서 입힌다
.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은 남의 집 잘살았다고 부러운 칭찬을 했다.
팔월 23일경이 절기상 처서 인데 이 무렵 비가 오면 쌀독이 줄어든다고 한다.
벼가 이삭을 올리고 수정을 할 때 높은 일조량과 기온이 필요한데 비가 오면 저온으로 수분 수정에 지장을 준다.
볏줄기가 아기 밴 몸처럼 통통해진 모습을 “배동받이”이라고 하는 데,
이 무렵 거름도 물도 햇빛도 온도도 가장 많이 필요하다. 이제 어린 이삭이 올라온다
. 이 현상을 이삭이 팬다(出穗). 한다. 벼꽃을 본적이 있는 분 몇 사람이나 될까?
벼도 결실하니 분명 꽃이 핀다.
벼이삭 한줄기에는 벼꽃이 약 80-90여개가 달리는데 이게 많을수록 수확량이 많다.
벼는 암수한몸, 벼 낱개 한 개에 암술 하나에 수술 여섯 개가 있고
여간해서는 벼꽃 볼 기회를 포착하기 어렵다.
보통 오전 10전후로 한 시간 동안만 피었다가 진다.
벼는 주로 자가수분을 한다. 그래서 쌀의 잡종은 거의 없다. 잡종쌀밥은 있으나 잡종 쌀은 없다.
포대안의 여러 품종의 쌀이 섞인 것은 있을지언정 쌀 한 톨 자체의 잡종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벼꽃을 “자마구”라 한다. 이 자마구는 모든 식물의 꽃가루를 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주로 벼의 꽃을 말 한다. 지금쯤 벼 껍질 밖으로 혓바닥처럼 내민 하얀 부분은 수정되고 난 후의 꽃가루 부스러기 이다. 처서 이후에 가을 하늘이 높고 늦더위가 심하면 벼이삭은 잘도 익어 풍년을 기약한다.
잎의 광합성산물이 쌀 톨이 되어 영글어 진다. 익은 벼가 고개 숙이다.
벼 이삭에서 겸손을 배워야지. 겸손. 영어로는 어떻게- Still water run deep! 이라던가?
예기에 이르기를 교학상장( 敎學相長)이라 했지.
벼는 추석 전후로 익어서 고개 숙인다.
보리는 남쪽부터 익고 벼는 북쪽부터 익는다고 했다.
지금은 추석 전에 벼가 익어 햅쌀로 차례를 올릴 수 있었으나,
전에 남부지방에서는 추수가 늦어 추석을 못 쇠고 음력 9월9일 중굿날 차례를 올리기도 했다.
서리 내리기 전에 벼 수확을 해야 한다.
벼가 서리를 맞으면 쌀의 질이 떨어지고 반 토막 쌀이 나기 쉽다.
이를 안 우리 현명한 조상은 우리나라 전역에 무궁화를 심었다.
벼와 무궁화가 무슨 상관? 무궁화는 장기 일기 예보 해주는 옛날 당시의 기상장기예보 식물 이다.
그 지역에 첫 무궁화 꽃이 피기 시작한 날로부터 정확히 100일 후에
첫서리가 내린다는 경험적 지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래서 전국방방 곳곳에 무궁화를 심어 무궁화 삼천리을 노래 부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벼 베기, 이 작업도 두레 혹은 품앗이로 주로 한다.
우둔해 보이는 우리 대장간 작품 조선낫(朝鮮 鎌)이 아니라 날렵하고 선뜻한 기분이 드는
기계로 만든 왜낫(倭鎌) 혹은 양낫(洋鎌)으로 한꺼번에 두세 포기 모아 잡고 당겨 벤다
. 매가리를 만들어 단을 지어 볏단을 묶어, 세우기도 하고 논뚜렁에 눞여서 말린다.
날씨 좋고 손품 나는 날, 소 걸채와 사람의 지게로 집 앞 마당에 날라 낟가리를 만든다.
이 집체만한 낟가리는 안 먹어도 배부르고 보기만 해도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이 풍년든해 낫가리는 인도 타지마할 항금궁전과 같다.
이웃들 손을 모야 아무 날 타작을 한다. 소위 와랑와랑 소리 내는 원통굴렁쇠 답족탈곡기(踏足脫穀機).
한 팀 4.5명이 신나게 발로 굴리면 황금 같은 나락이 동산처럼 싸이고
풍구질 한 놈은 가마니로 뒤주로 들어간다.
참 이 가마니는 우리 것이 아니라 일보강점기에 가마지 라는 말로 들어 왔다.
우리 것은 섬이다. 흐뭇한 하루이다. 여기까지가 벼농사의 대강이나.
벼농사 뿐 아니라 모든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말이 있다.
지금이야 수리시설이 잘돼있어 여간해서 가물 들어 모내기 못하는 경우는 드물다
. 그러나 80년대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빗방울 떨어지기 목뼈고 기다리는 농민이 많았다.
그래서 농 자 農 字 붙은 곳에 일하는 자는 농림장관부터 시골농부까지 고달팠다.
그렇다고 풍년이 들어 좋아할 일만도 아니다.
풍년들면 쌀값하락에 비료 값 농약 값 농가부채 갚기가 더 어려웠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농사지을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서 농촌사회가 동공화 洞空化 된지 오래전.
빈집도 많고. 농사짓는 이의 평균나이가 6.56세가 되는 노년충이니 걱정이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금년 쌀 수확예정량이 400 여 만 톤, 이는 지난 30연만에 최저치라고 한다.
그 이유는 잦은 비와 폭우. 벼 재배면적의 축소로 인한 결과 이다.
식량무기화란 말을 들은 적 있을 것이다.
하나만 예를 보자. 구소련이 해체 된 원인을 정확하게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군사력의 약화. 국민정신 해이. 외교력 부재. 과학기술의 뒤쳐짐. 어느 것도 아니고
소련의 연이은 밀 흉작에 미국이 밀가루 부대를 꽉 잡고 놔주지 않는데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사실 우리도 쌀만이 겨우 자급자족이지 나머지는 거의 전부 수입이란 건 다 알려진 사실.
그런 연유로 쌀이 더 소중하게 보인다.
食以爲天 [식이위천]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중요(重要)하다는 말,
쌀 미 米자는 벼농사의 여든여덟(八十八)의 손이 가고 땀을 많이 흘리는 일이란 즉 고통의 산물 이란 뜻이라 한다.
누구는 잡곡밥, 오곡밥. 비타민 B가많다는 보리밥이 좋다하나.
고깃국 없더라도 나는 쌀밥 이 팝 이밥(이씨 왕가에서만 먹는밥)이 좋더라.
나는 지금 이 예초기로 깔끔히 정리된 논뚜렁 길을 걸으며 마음속으로 참회록을 쓰고 있다.
고백컨대. 한때는 농촌 농민 운운하면서 내가 나고 자란 농촌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입으로 떠들었다.
그러나 시방 나는 낀 세대도 아니고 생의 사분의 삼 이상을 서울이란 낯선 땅에서 밥벌어먹었다.
그러고도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주변인으로 서성거리고 있다.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를 가장 잘 아는 의사는 그 페스트 환자가 병원 앞문을 들어서면
의사는 비겁하게 뒷문으로 더 빨리 도망쳤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래 나는 내 마음의 배신자고 변절자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꿈은 가끔 꾼다. 귀농하여 성공한 사람들. 귀농하려 준비하려는 젊은이들을 위해
선망과 격려의 박수를 함께 보낸다.
저 윗논뚜렁 끝나는 지점 왕버드나무 그늘 아래에서 진정한 농사꾼 농부로. 가시고기처럼 사시다 30여 년 전 가신 우리 아버지가 보인다. 하얀 수건 쓰시고 논렁콩 심던 울어매도 보인다.
나 언제 돌아가리. 도연명이 부른 그 귀거래사 歸去來辭 부르며 돌아가리.
“나가수”에 나오는 사람들 같이 전신의 열정 정렬을 다하는 그런 농사꾼은 아닐지라도.
저 작은 골짜기에서 소리 없이 삽질하는 늙은 농투성이고 싶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아니라 소본 小本이라도 좋으니까 —
何日是歸年 하일시귀년 (두보-절구) 어느 날이 돌아갈 해 이오.
어라- 여기가 어드메뇨? 종묘 앞 세운상가 있던 그 자리.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있지. 5층짜리 세운상가 그 자리에 한마지기 논 뱀이 논뚝길을 걸으며 촌사람 티 못벗어나고 이 복잡한 종로통에서 백일몽 白日夢를 꾸고 있었나보다. 그것도 남의 논뚜렁길을 걸으며— 뭐 인문학이 따로 있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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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고마운줄도 모르고 삼시세때를 맛이 있네 없네 하며 먹는 그 쌀..그 쌀을 키우는 농부의 마음을 잠시 돌아봅니다..
선생님 늘 좋은 글로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며칠 외유를 다녀오니 좋은 글 두 편이 저를 옛 시절로 보내주었네요..
올 추석엔 비소식도 있는데 올핸 고향엘 가시는지요? 가신다면 옛정취 흠뻑 느끼시고 편안한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
물건너 갔다 오신게 틀림없지요. 다른 세상 구경하신 이야기 기대합니다. 추석 잘 쇠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