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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석여 추천 0 조회 47 17.01.22 15: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필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근무하던 시절,

이곳에 소장된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특히 조선시대에 제작된 각종 지도들의 상세함과 다양함에 놀랐다.

세계지도에서부터 조선 전체의 모습을 담은 조선전도, 그리고 각 지방의 모습을 담은 군현지도에 이르기까지

지도에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와 국토에 대한 인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중에서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일명 혼일강리도)」는

1402년에 그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안타깝게도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402년에 제작된 원본을 바탕으로 만든 지도가 일본 용곡(龍谷:류코쿠)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지도학자 이찬 교수가 사람을 시켜 모사하여 규장각에 기증하였다.

그러나 모사본일지라도 610년 전에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그린 세계지도라는 점에서 지도의 가치는 매우 크다.

 

1402년 5월 이회(李?)는 자신이 그린「조선팔도도」를 태종에게 바쳤다.

그리고 3개월 후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도」가 완성되었다.

지도 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의정부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 검상(檢詳) 이회, 참찬(參贊) 권근(權近) 등이었다. 혼일강리도는 조선 초기 국가 최고의 의결기관인 의정부의 최고위급 관원들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권근은 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제작 동기를 밝힌 발문을 썼다.

 

 

 

천하는 지극히 넓다. 안으로 중국에서 밖으로 사해에 닿아 몇 천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요약하여 두어 자 되는 폭(幅)에다 그리면 자세하게 기록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지도를 만든 것이 대개 소략한데,

오직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게 갖춰졌으며,

역대 제왕의 국도 연혁(國都沿革)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에 갖추어 실렸다.

(.......)

요수(遼水) 동쪽과 우리나라 지역은 이택민의 광피도에도 또한 많이 궐략되었으므로,

이제 특별히 우리나라 지도를 더 넓히고 일본(日本) 지도까지 붙여 새 지도를 만드니,

조리가 있고 볼 만하여 참으로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저 지도를 보고서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도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되는 것이니,

두 공이 이 지도에 정성을 다한 데에서도 그 규모와 국량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

 

- 권근(權近) <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 《양촌집(陽村集)》

 

 

 

권근의 발문을 보면 김사형과 이무는 지도 제작을 기획하였고, 실무는 이회가 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회가 그 전에「조선팔도도」를 제작한 것을 감안하면「혼일강리도」의 실제 주역은 이회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에서도 1398년경「대명혼일도」가 제작되었는데「혼일강리도」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대명혼일도」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원나라든 명나라든 중국에서 제작된 세계지도를 참조하여 조선과 일본을 합한 것이 바로「혼일강리도」가 된 것은 틀림이 없다.

발문에 “우리나라 지도를 증광(增廣)하고 일본을 첨부했다”는 표현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회는「조선팔도도」를 제작한 경험이 있는 만큼 중국과 비례하는 조선의 지도를 그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한편 『세종실록』에 1401년 통신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박돈지가 일본지도를 입수하여 왔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때 입수한 지도가「혼일강리도」 제작에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도에 표시된 일본은 위치나 크기 면에서 실제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15세기 초반 일본을 작은 나라로 간주한 당시 조선 집권층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혼일강리도」에는 조선과 중국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비하여 일본은 조선의 남쪽에 작게 그려져 있다.

위치나 크기로 보아 조선 초기에는 일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1443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간 신숙주가 1472년에 왕명으로 편찬한 『해동제국기』에 그려진 일본 지도가 훨씬 정확한

점을 고려하면 15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된 일본과의 교류가 16세기 이후 일본에 관한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혼일강리도」에는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유럽까지 표시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의 섬과 해안선의 윤곽은 실제보다 단순하게 그려져 있지만

필리핀과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주요 동남아 국가들이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월상, 교지, 임읍’으로 기록된 곳은 베트남이며, 태국은 ‘섬’으로 표기되어 있다.

참고로 『지봉유설』에도 태국이 섬라국으로 표기되어 있다.

‘범국’으로 표기된 곳은 지금의 미얀마다.

당시까지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추정되는 유럽과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도 비교적 자세하다.

「혼일강리도」에는 1백여 개의 유럽 지명과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지중해가 바다 아닌 호수로 표시되어 있고, 아프리카 중심부가 대부분 호수로 채워진 것으로 표기된 것도 눈길을 끈다.

아프리카 대륙의 한 가운데에 있는 황사(黃砂)는 사하라 사막에 대한 정보가 이때에 이미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혼일강리도」를 보면 현재의 세계지도와 비교해서 유독 달리 보이는 곳이 있다.

바로 인도다. 언뜻 생략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중국의 서쪽 옆에 그 윤곽이 드러난다.

그리고 친절하게 ‘축국(竺國)’이라 표기되어 있다.

인도가 대륙에 붙어 있는 것처럼 표기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지도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향 때문으로 여겨진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에는 인도가 반도 아닌 대륙의 일부로 그려져 있으며,

이 지도의 영향을 받은 아라비아 지도에도 인도가 대륙의 일부로 그려졌다.

결국 그리스의 세계지도가 아라비아로 전해지고, 아라비아의 지도는 다시 중국을 거쳐, 600년 전 조선에 전해진 것이다.

 

「혼일강리도」의 제작에는 이슬람 계통의 세계 지도인「성교광피도」도 참고가 되었다.

「혼일강리도」에는 아랍어 지명이 보이고,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 계통의 지구의(地球儀)와 동일하다.

아마도 아라비아지역까지 영토를 확보했던 원나라 시대에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가 중국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이를 토대로 제작된 중국의 세계지도를 어떤 형태로든 참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가 땅은 둥글다는 지구설에 기초하여 원형의 세계지도로 제작된 것과는 달리

「혼일강리도」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천지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지도가 사각형으로 그려진 것은 이러한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 원본이 일본 용곡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혼일강리도」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해외에 반출된 문화재 반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관심과 반환의 열기가「혼일강리도」에도 이어졌으면 한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 일지사, 2000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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