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 2024년 3월 3일
요한 2:13-22
허물고 다시 세울 성전
오늘 우리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성전 정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오늘 이야기를 앞부분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만큼 요한에게 이 사건은 그리스도론적 상징성이 부각 된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성전 정화로 인한 결과 즉 수난을 미리 짐작하게 한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본래 유목민의 축제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기념일로 바뀝니다.
오순절, 초막절과 함께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성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했습니다.
성전 마당은 유대인과 이방인 공간이 나뉘어 있었고, 그 규모는 매우 컸습니다.
유대인 마당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만 들어가서 제사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채찍을 휘두르신 곳은 누구나 출입이 가능한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소는 부자의 제물이고 양은 중산층, 비둘기는 빈자의 제물이었습니다.
가난했던 예수님의 부모도 출산 후 40일이 되는 날 빈자의 제물인 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습니다. 로마 은전(데니리온)과 그리스 화폐(드라크마)를 성전세인 세겔로 바꿔서 봉헌했습니다. 사람을 새겨 넣은 돈을 그대로 바치면 우상을 새긴 것으로 생각한 거죠.
예수님이 채찍으로 그들을 쫓아냅니다.
그래서 성전 정화가 아니라 성전 공격(마틴 스콧) 더 나아가 성전 항쟁(김근수)이라고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빈자의 제물인 비둘기 상인에게는 ‘거두라’고만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처사(정양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신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그분을 체험하고 만나는 곳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드러내신다는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스스로 드러낸 선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그리스도론적 표징이라고 합니다.
화가 난 유대인들이 표징(기적)을 요구하시자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히에론(ἱερόν) 즉 건물 자체로 이해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나오스(ναός),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성소)를 의미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예루살렘의 성전은 그들의 고동치는 심장(톰 라이트)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을 단순히 건물의 외형만을 생각하고 형상화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성전을 세울 것이라는 말을 이해 못 한 건 당연합니다.
여기서 일으켜 세운다는 동사 에게이로(ἐγείρω)는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을 말합니다.
성전은 절대적인 믿음의 상징이었지만, 허상이 되는 순간 무너져야 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제 분노 가운데 절규하시며 채찍을 휘두르시는 예수님을 떠올리며 묵상해 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에도 계급이 나뉘고, 온통 소란스러움으로 하느님의 집이 난장판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은 없었을 터, 예수님은 하느님의 집에서 자신의 이익을 찾는 이들을 향해 매섭게 채찍을 휘두르신 것입니다. 비록 이방인의 뜰이었다 해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성전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분노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우리는 분노할까요?
우리가 먼저 분노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 하느님께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 내 잇속을 채우려 하는 내 욕망에 대해 분노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살아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인 내 마음이 혹시 장사하는 집으로 변한 것은 아닌지 늘 멈춰서서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을 경배해야 할 내 마음이 장사하는 집이 되지 않도록 매섭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 (2:19) 하신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제 우리는 내 안에 허물어야 할 허상의 성전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허물어져서 완전히 폐허가 되면 그때 예수님께서 참 성전을 세울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상실과 불안함, 불편함으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합시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우리가 만들어 낸 허상의 성전일 뿐입니다.
나 자신이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그야말로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임을 늘 인식하고 살 때,
이제 나의 인간적인 분노는 버리고 예수님의 그 거룩한 분노를 닮을 것입니다.
인간적 분노와 두려움, 이득과 손해를 먼저 생각하는 우리 안에 허상의 성전이 있다면, 이제 주님께서 보여 주신 그 단호한 약속을 믿으며 허물어 버립시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하느님께서 계신 곳으로 만들고, 내 마음에 새로운 성전을 세웁니다.
우리가 허물어야 할 허상의 성전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세워야 할 본질의 성전이 무엇인지도 함께 묻고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 자신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1고린 3:17)
주님의 몸과 같은 존재인 우리도 항상 정결함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되었다면 주님께서 보여 주신 그 거룩한 분노로 내 마음의 성전에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낡은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별하고, 두렵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굳센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의 수난 후 부활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이듯이, 우리가 세운 성전이 변하고 올바로 서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그렇기에 마음 모아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