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창녕(昌寧)은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옛 창녕현(昌寧縣)과 영산현(靈山縣)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본래 삼한시대에 불사국(不斯國), 이후의 빛벌가야(非火伽倻) 지역이었다. 신라에 의해 555년(신라 진흥왕 16) 하주(下州)가 설치되었고, 565년(진흥황 26)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군(比斯伐郡)으로 개칭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화왕군으로 바뀌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창녕군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밀성군(密城郡: 密陽)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창녕군에 속하기도 하였다. 1274년(원종 15)에 영산현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창녕현으로 되었고, 1631년(인조 9) 창녕현이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얼마 후에 복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창녕군·영산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상남도 창녕군·영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영산군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1960년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창녕성씨(昌寧成氏)의 시조 성인보(成仁輔)는 고려시대 호장중윤(戶長中尹)을 역임했으며, 정월 초에 송경(松京)의 하례 모임 참석 중 병사하였다고 한다. 문하시중인 아들 성송국(成松國)이 시신을 업고 창녕으로 돌아오다가, 현풍현(玄風縣)에 이르러 현 대지면(大地面) 모산리(牟山里) 맥산(麥山)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시조의 가계는 창녕의 호족으로 대대로 번성하여 창녕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창녕성씨는 성공필(成公弼)과 성한필(成漢弼) 대에서 두 계통으로 갈라졌으며, 지금은 13파로 분파되었다.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판서공파(判書公派)·독곡공파(獨谷公派: 문경공파(文景公派))·회곡공파(檜谷公派: 문숙공파(文肅公派))·상곡공파(桑谷公派: 정평공파(靖平公派))·낭장공파(郎將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시랑공파(侍郞公派)·정절공파(貞節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좌랑공파(佐郞公派)·평리공파(評理公派)·검교공파(檢校公派)·지사공파(知事公派)로 나뉘어졌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창산리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삼포리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지산리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대양리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창녕성씨는 52,058가구 총 167,90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