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인도네시아에서 온 편지 / ?
인도네시아의 박물관과 바틱
박정자
■Apa Kabar!
안녕하세요.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있는 박정자입니다. 이 기고를 통해 『시와산문』 애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고맙고, 다른 한편 두렵습니다.
‘Apa Kabar’는 우리나라의 ‘안녕하세요’와 같은 인사말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인사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건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어는 영어의 알파벳을 그대로 쓰고 있고 발음대로 말하고 쓴다는 면에서 접근하기 편한 언어입니다. ‘Apa Kabar’ 역시 우리가 배운 영어식대로 발음하면 됩니다. ‘아빠 까바르’이지요. 발음이 경음이라는 것 말고는 영어와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대답도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Baik 바익’, 우리도 ‘네,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처럼 좋다는 말입니다. 인도네시아 말이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인사는 이쯤으로 하겠습니다.
누구든 처음 방문한 나라에 대해 알고 싶으면 박물관과 오래된 거리를 가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역시 국립박물관을 비롯해 역사박물관, 묘비박물관, 독립투쟁박물관, 화폐박물관 등 크고 작은 박물관과 전시관이 많은 나라입니다.
네덜란드인들의 거주지였던 오래된 거리에는 몇 백 년 전에 지어진 교회와 성당, 식민시대의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유럽풍의 건축물들은 낡을 대로 낡아서 피 흘리는 속살 같은 검붉은 벽돌을 드러내며 부스러져 내리고 있습니다. 갈라진 벽과 지붕 틈에 뿌리 내린 무성한 잡초들을 보면 끈질기게 이어져 온 생명의 역사가 눈물겹습니다. 외국 사람인 내가 녹슨 아치형 문에 기대 사진을 찍자 그것들이 어깨까지 내려와 구경을 합니다. 어느새 주위에 모인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닮았습니다. 낡은 입성과 천진난만한 웃음까지 잡초와 아이들은 닮았습니다. 유물이 되어버린 거리에 서면 나는 늘 햇살이 너무 눈부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도네시아의 박물관
오늘은 국립박물관과 인도네시아 전통 문화유산인 바틱에 대해 말씀드리려합니다. 인도네시아에 와서 제일 먼저 마음먹고 가본 곳이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이었습니다. 자바원인 두개골(복제품)과 북경원인 두개골이 있는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에 가면 그들의 왕조와 종교, 문화를 대표할만한 종족들의 풍습, 생활도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기후와 풍토, 종족에 따라 다른 가옥과 신앙의 형상인 조각품들은 낯설고 특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상신에 대한 예우와 믿음, 영혼에 대한 깊은 사색은 어느 나라나 공통이라는 확인을 하게 됩니다.
조금 허전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많이 허전했습니다. 전시된 유물이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보존이나 전시상태가 허술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직립원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원을 가진 나라이며 거대한 군도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유물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컸던 모양입니다. 말로만 듣던 바딱, 바둘, 다약, 또라자, 아스마 등 300여 종족으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나라의 문화유산은 얼마나 찬란할 것인가, 내심 기대했으니까요.
하지만 유물의 보존 및 전시상태가 허술했던 것은 그들의 고된 역사 때문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실제로는 문화 부국이지만 350년이 넘는 상상할 수 없는 세기를 식민으로 살면서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고단했겠습니까. 참혹한 역사감옥박물관을 가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나는 가끔 혼자서 국립박물관에 갑니다. 옛날 화려했을 왕조의 장식품들이 광채를 잃고 진열되어 있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박제되어 있는, 그래서 여기까지 시간을 끌고 온 유물들의 노고를 보고 있으면 콧등이 시큰해지는, 역사의 딱지를 만져보러 그 곳에 갑니다. 또 하나, 박물관 안뜰에 있는 석상들을 만나러 갑니다. 민간신화와 영웅전설이 신앙의 옷을 입고 있는 그 석상들은 비에 젖은 몸을 햇빛에 말리며 시간의 지문을 문질러내고 있는 중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그들은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 둥글어지고 평온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수다스럽게 얘기합니다. 그러다가 말없이 어깨를 기대고 서로의 체온으로 감정의 주파수를 맞추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비슷한 관념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서로 통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석상들의 얘기가 마치 우리 가문의 얘기처럼 낯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곳 사람들은 국립박물관을 ‘코끼리박물관’이라고 부릅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에 의해, 인도네시아식 건축이 아닌 유럽풍의 그리스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네덜란드 총독부 건물이었습니다. 그 건물의 정면에 청동으로 조각된 코끼리가 높이 들려 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아직 네덜란드의 통치하에 있을 때 불교국인 태국 국왕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보내준 선물이라고 합니다. 태국은 그 대가로 인도네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세계의 불가사의, 보로부두르사원에서 귀한 불상들을 5대의 왜건wagon으로 받아갔다고 합니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 코끼리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뼈아픈 코끼리상을 보면서 나는 나의 조국을 떠올립니다.
■전통문화 유산 바틱Batik
‘Batik바틱’은 인도네시아 자바의 영혼입니다. 문학이고 음악이며 미술이고 철학입니다. 그리고 손끝 저린 삶의 시입니다. 밀납 입히기와 염색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야 비로소 멋진 문양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바틱은 꽃이나 새, 나비, 물고기 외에도 기하학 문양들이 다양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문양만도 3천 가지에 이른답니다.
바틱은 작업과정에 비해 그 도구는 단순합니다. 전통적인 도구인 ‘Canting짠팅’은 구리로 만든 작은 주전자입니다. 그 안에 뜨거운 밀랍을 채워 넣고 그림선을 따라 점을 찍어 밀랍을 입힙니다. ‘Cap찹’이라는 구리도장도 있습니다. ‘짠띵’이나 ‘짭’으로 밑그림이 그려진 천에 밀납을 입히고 염색을 합니다. 이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면 문양과 색상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바틱은 이집트와 중동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예술적인 면에서 볼 때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만들어진 것이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바틱은 왕족에서 서민까지, 고대에서 현대까지 생활의 모든 양식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중부 자바에서는 요리나 집안일 못지 않게 바틱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여자의 솜씨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 여인네들의 길쌈이 생각납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 한편에 낡고 허술한 바틱공장이 있습니다. 바틱이라는 말은 ‘천 위에 찍힌 작은 점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둠침침한 공장 안에서 땅에 앉아 등을 구부리고 작업을 하고 있는 여인들이 바틱이라는 그 말처럼 작은 점으로 모여 무늬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서툴게 그려진 한 점이 되어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부터 바틱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소녀가 어느새 노인이 되었다고 숙였던 얼굴을 들고 웃습니다. 뜨거운 밀랍이 채워진 ‘Canting짠팅’을 조심하며 침침한 눈을 깜박입니다. 날마다 무수히 찍었을 그 점들이 얼마나 큰 산을 이루었을까요.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세상이 일어났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했을까요. 어릴 때는 나비만을 고집스럽게 그렸다고 합니다. 나비를 그리면 밥이 되었고 학교가 되었고 사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비는 그가 도달해야 할 꿈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컴컴한 작업장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비가 아니라 꽃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아이들이 그 꽃에서 날아오르겠지요. 바틱은 인도네시아 여인들이 쓴 손끝 저린 시입니다.
바틱공장이 개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Museum Tekstil 직물박물관’은 인도네시아 바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유럽과 중국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문양이 있는가 하면 인도의 영향을 받아 부드럽고 다소 어두운 느낌의 문양도 있습니다. 왕가의 전통문양이 있는가 하면 전설 속 인물이 들어앉아 있는 바틱도 있습니다. 바틱은 그들의 역사와 종교, 철학을 문양에 담고 있습니다. 뜰에는 갈색을 내는 마호가니, 노란색을 내는 낭까, 초록색을 내는 망가, 붉은색을 내는 자띠나무 등이 수백 년의 따가운 햇볕 아래서 자기만의 색깔을 익히고 있습니다.
2009년 10월 2일, 유엔은 인도네시아의 영혼, 바틱에 계승된 인도네시아인의 정신을 세계문화유산에 입적시켰습니다.
■문화교류의 선율
이 글을 정리하는 동안 감동적인 행사장을 취재하고 왔습니다. 우리나라 모 건설회사에서 인도네시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양국의 노래 100곡이 담긴 디지털 피아노 만 대와 칠판 삼만 개를 기증하는 식이었습니다. 피아노를 기증하게 된 계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피아노가 아닙니다. 피아노에 담은 우리 노래와 문화를 전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던 회장님의 대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열악한 교육시설을 걱정하는 마음에 문화교류까지 폭을 넓힌 그런 분들의 혜안이 장차 국가와 국가의 장벽을 허물고 “Apa Kabar”와 “안녕하세요”가 동시에 통하는 세계를 꿈꾸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개별적으로 존중되고 보편적으로 인정되어야 할 문화교류의 힘일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보냅니다. 여름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박정자 / 1957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문예사조』로 등단했다. 시집 『그는 물가에 있다』 외 6권이 있고, 현재 인도네시아에 살며 교민지 『한인뉴스』의 편집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