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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춘추시대 때의 수많은 제후들이 결국 7개국으로 정리됩니다(전국7웅). 전국시대 초기에 가장 강력한 나라는 위(魏)나라였습니다. 위문후는 전국시대 최초의 명군이었고, 공자의 제자인 자하를 스승으로 섬기고, 이회, 전자방, 단간목, 서문표, 악양, 오기등 뛰어난 인재들을 기용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특히 오기는 뛰어난 전략가이고 병법에 뛰어나서 서하를 점령했고 진(秦)과의 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무적의 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문후가 죽은 후에 즉위한 위무후가 오기를 의심하여 병권을 빼앗아, 결국 오기는 초나라로 망명했습니다.
이게 시작이었는지 위나라는 자기 나라의 인재들을 다른나라에 유출시키면서 나라가 점점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전국시대 기간동안 초일류급 인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거의 위나라 출신이었습니다. 오기, 상앙, 장의, 범저, 울료, 위무기가 모두 위나라 사람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한 명이라도 위나라가 제대로 기용했다면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오기의 서하점령, 상앙의 변법, 장의의 연횡책, 범저의 원교근공책 등 하나같이 전국시대의 중국을 뒤흔든 정책과 전략들이었고, 울료는 진시황 때 군정을 담당한 인물이었고, 위무기는 전국시대 말기에 진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지만, 위나라는 이들 모두를 제대로 쓰지 못하던지 다른 나라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전국시대 사공자(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춘신군)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은 신릉군 위무기라고 합니다. 대개 맹상군을 빼고, 일 신릉, 이 춘신, 삼 평원으로 그 능력을 평가합니다. 맹상군은 이들 삼공자보다 선배이어서 제외한 것인지, 아니면 반제 연합군에 참가해 자기 모국인 제나라를 공격했던 흠결때문에 제외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신릉군 다음에 맹상군을 넣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최고통치자의 칭호가 처음에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나라 천자는 왕으로 불렸고, 주나라 왕이 봉한 제후들은 왕이 아니라 공, 후, 백, 자, 남의 다섯개의 봉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자(孔子)가 편찬했다는 역사책인 '춘추'를 보면 노공, 진후, 정백, 초자의 호칭이 보입니다. 그리고 제후 개인을 호칭할 때는 제환공, 진문공 처럼 '공'으로 했습니다.
춘추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힘이 많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제후들이 형식적으로는 주왕실을 섬기고, 그 권위를 인정해서 감히 왕을 참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의 정통 문화와 많이 다르고 주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던 남쪽 오랑캐인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는 왕을 자칭했었습니다.
주나라 왕족의 가문을 왕실이라 했고, 제후들의 가문을 공실이라고 했습니다. 왕의 아들을 왕자라 했고, 제후들의 아들을 공자(公子)라고 했습니다. 전국시대가 되자 주나라는 작은 제후만도 못한 국력밖에 남지 않아 그 권위가 떨어져서 제후들이 모두 왕을 참칭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국시대 제후들의 아들도 왕자라고 불러야 하지만 아직까지 전통과 관습이 남아서 공자라고 한 것입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최고통치자의 호칭을 이미 격이 떨어진 왕 대신에 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이후에는 황제의 아들은 황자, 제후들은 왕으로 호칭되어 왕의 아들은 왕자가 되고, 일반 벼슬하는 신하들의 호칭이 충무공이나 문정공처럼 공이 되면서 벼슬하는 신하들의 아들은 공자로 정리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벼슬과 상관없이 보통 젊은이들을 부를 때도 개나 소나 모두 공자가 되고 맙니다.>
사기열전에서 다른 삼공자인 맹상군, 평원군, 춘신군은 봉호로 열전 이름을 삼았습니다. 즉 맹상군 열전, 평원군 열전, 춘신군 열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릉군 위무기만은 신릉군 열전이라고 하지 않고, '위공자 열전'이라고 제목을 삼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AI가 한 답변이라고 하는데 '위나라 공자들의 전기를 서술해서 위공자 열전이라고 했다'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AI는 자기가 모르는 지식은 창작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았습니다.
구글에서 찾아보니 신릉군이라는 봉호보다 위공자로 명성이 크게 알려졌고 많이 불러져서 위공자 열전이라고 했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그럴 듯 했습니다. 나중에 제후국의 빈객들이 신릉군에게 병법을 바쳤는데 신릉군이 각 편 마다 이름을 붙이고 편집하여 병법서를 발간했는데 책이름을 '위공자병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위무기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선비와 교류하고 겸손하게 행동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귀족적인 호칭인 신릉군 보다 친근하게 위공자로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마천도 다른 삼공자와는 구분되게 <위공자 열전>이라고 한 듯 합니다.
위공자 위무기(魏無忌)는 위나라 소왕의 막내아들이자 위나라 안희왕의 이복동생입니다. '무기'는 꺼리지 않는다는 뜻이니, 위무기가 현명하든 불초하든 선비들과 꺼리낌없이 사귀고 교만하게 굴지않은 자기인생을 잘 드러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안희왕이 즉위한 후 위무기를 신릉군에 봉하게 됩니다. 위무기는 사람됨이 인자하고 선비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항상 예의를 갖춰 사귀고 교만하지 않으니 사방 수천리에서 선비들이 앞다투어 몰려와 귀의하니 식객의 수가 삼천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한번은 위무기가 형인 안희왕과 육박(여섯개의 막대를 던져서 나오는 숫자만큼 기를 움직이는 놀이라고 하는데 윷놀이와 비슷한 놀이 같습니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령관이 북쪽 국경에 봉화가 올려졌다면서 조나라가 침략해 오고 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안희왕이 놀라서 육박을 멈추고 대신들을 불러 의논하려고 하자 위무기는 말리면서 "조나라 왕이 사냥하는 것일 뿐 침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계속 육박을 계속하게 합니다. 안희왕은 육박을 하면서도 걱정이 되어 육박에 집중할 수 없었는데, 다시 북쪽에서 전갈이 오길 "조나라왕이 사냥하고 있을 뿐 침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보고하자, 안희왕이 깜짝 놀라서 위무기에게 "어떻게 그일을 안 것이냐?"라고 물어봅니다. 위무기는 "저의 식객 중에 조나라의 왕을 은밀한 일까지 살피는 첩자가 있어 저에게 매번 보고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일이 있고난 후에 안희왕은 위무기의 현명함과 유능함을 꺼리어 위무기에게 국정을 맡기지 않게 됩니다.
위나라에 후영이라는 숨어사는 선비가 있었는데, 나이는 70세였고 집이 가난하여 위나라 수도인 대량성의 동쪽 성문인 '이문'의 문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위무기가 그 소문을 듣고 후영을 찾아가 선물을 전달하고 사귐을 청하려고 하지만 후영은 "문지기가 고달프다고 공자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면서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위무기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위나라의 장군, 재상, 종친들과 빈객들을 초대하여 모여놓고, 자신이 직접 고삐를 잡고 수레를 몰고 나가 후영을 데리러 갑니다. 위무기는 후영에게 수레의 상좌에 앉게 하고 온화한 안색으로 공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후영은 "제 친구가 시장의 도축장에 있는데 잠깐 들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위무기는 수레를 몰아 시장에 들어가 후영과 그 친구 주해가 오랫동안 대화하는 동안에도 한층 공손하게 기다립니다. 시장 사람들은 위무기가 말의 고삐를 잡고 오랫동안 후영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후영을 욕하게 됩니다. 후영은 위무기의 안색이 끝까지 변함이 없는 것을 보고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고 수레에 다시 오르게 됩니다. 집에 도착해서 위무기는 후영을 인도하여 윗자리에 앉히고 여러 빈객들에게 후영을 소개하고 잔치를 시작합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후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위공자에게 할만큼 했습니다. 저는 이문을 지키는 문지기일 뿐인데, 공자께서 수고스럽게 직접 수레 행렬을 이끌고 오셔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또 다른 곳에 들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공자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러 주셨습니다. 한편 저는 공자의 명성을 널리 알리려고, 일부러 공자의 수레행렬을 시장 한가운데 오랫동안 서 있게 하고 친구와 만났지만 공자께서는 더욱 공손하였습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저를 소인이라고 욕하고 공자를 덕망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술자리가 끝난 후에 결국 후영은 위무기의 상객이 됩니다.
이 에피소드는 위무기가 선비를 사귀기 위해 얼마나 겸손하게 진심을 다했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이런 행동이 나중에 진나라에 대항하는 마지막 불꽃을 이끌어 내는 힘이 됩니다.
후영이 위무기에게 "제가 찾아갔던 백정 주해는 어진 사람인데 세상사람 누구도 그를 제대로 일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백정들 사이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위무기는 주해를 여러 번 찾아가 그를 만났으나, 주해는 답방하여 감사를 표하지 않아 위무기는 이상하게 여기게 됩니다.
위나라 안희왕 20년, 진나라 소양왕이 장평에서 조나라 군대 45만명을 땅에 파묻어 죽인 후에 다시 병사를 진격시켜 조나라 수도인 한단을 포위하게 됩니다. 위무기의 누나가 조나라 평원군의 부인이었으므로, 평원군과 그 부인이 위나라 안희왕과 위무기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위나라 안희왕은 장군 진비에게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합니다. 그러자 진나라 소양왕이 사신을 보내 위나라 안희왕에게 "조나라를 구원하는 자는 조나라를 함락시킨 후에 반드시 그 나라를 칠 것이다."라고 협박하니 안희왕은 겁을 먹고 진비에게 국경에서 군대를 주둔하게 하고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단의 포위가 더 급해지자 평원군은 위무기에게 연이어 사자를 보내 간절하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위무기는 걱정이 되어 직접 안희왕에게 구원을 청해보기도 하고, 빈객과 변사를 통하여 안희왕을 설득하기도 했지만 진나라에 겁을 먹은 안희왕은 위무기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위무기는 도저히 안희왕의 허락을 얻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조나라가 망한 후에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백대의 전거(戰車)를 마련하여 수하의 빈객들과 진나라 진영에 돌진하여 조나라와 생사를 같이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길을 떠나 이문을 지나갈 때 후영을 만나 정황을 다 이야기한 다음에 작별 인사를 하니, 후영은 "공자께서는 힘껏 해보십시오. 이 늙은이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위무기는 헤어져서 몇 리를 가다가 마음이 언짢아져서 "내가 후영을 진심으로 대접한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나를 보낼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고 수레를 돌려 후영에게 되돌아 가서 묻게 됩니다.
후영은 웃으면서 "저는 공자께서 돌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재난이 닫쳤다고 아무런 대책 없이 진나라 진영으로 돌진하려 하시는 것은 마치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 주는 격인데, 무슨 성과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위무기는 두 번 절한 후에 계책을 물으니, 후영은 "제가 듣기에 장군 진비에게 내준 병부의 다른 한 쪽이 언제나 대왕의 침실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여희가 대왕의 총애를 받고 있어 자유롭게 침실을 드나들 수 있어서 병부를 훔쳐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여희의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여희는 3년 동안이나 재물을 써서 범인을 잡으려 했고, 왕이나 그 신하들도 여희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주려고 했지만 찾아내지 못했는데, 여희가 공자께 울면서 부탁하니, 공자께서 빈객들을 시켜 그를 찾아내 목을 베어 여희에게 정중하게 바쳤다고 들었습니다. 여희는 목숨을 바쳐 공자께 은혜를 갚을 각오를 하고 있으니, 여희에게 병부를 빼돌려 달라고 부탁하면 여희는 반드시 승낙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병부를 가지고 진비에게 가서 군대를 빼앗으면 조나라를 구원하여 진나라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계책을 알려줍니다. 과연 여희에게 부탁하니 여희는 병부를 훔쳐서 위무기에게 내주었습니다.
병부(兵符)는 왕의 군대통수권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보통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어 호부라고도 합니다. 왕이 장군을 출정시킬 때, 병부를 반으로 잘라 하나는 장군에게 주고, 하나는 왕이 가지고 있게 됩니다. 왕이 어떤 명령을 출정한 장군에게 전할 때, 왕의 사자에게 반쪽 병부를 가지고 가게 해서 출정한 장군이 가지고 있던 병부와 맞춰보게 해서 딱 맞으면 왕의 명령으로 인정하고 그 명령을 따르는게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위무기가 떠나려는데 후영이 "장수가 싸움터에 나가 있을 때는, 군주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만약에 진비가 병부를 맞춰보고도 공자께 병권을 내주지 않고, 왕에게 다시 명령을 확인하면 일이 위험해집니다. 제 친구 백정 주해를 데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해는 힘이 장사입니다. 진비가 말을 들으면 좋은 일이지만, 만약에 말을 듣지 않으면 주해로 하여금 때려 죽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위무기는 진비가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면서 위나라의 기개있고 경험많은 노장을 죽여야 하는 것이 가슴아퍼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 후에 위무기는 주해에게 같이 가자고 청하니 주해는 "저는 시장의 한낱 백정에 지나지 않지만, 공자께서 여러 번 찾아 주셨을 때 감사를 표하지 않은 것은 자그만한 예의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공자께서 위급한 처지에 계시니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주해와 동행한 위무기가 후영에게 감사를 표하고 떠나려고 하자 후영은 "저도 따라가야 마땅하지만, 너무 늙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공자께서 진비에게 도착하는 날을 헤아려 북쪽을 향하여 자결하여 공자를 배웅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왕의 침실에서 병부를 훔쳐 위무기에게 전달한 여희의 행적이 사기열전에 더 이상 나오지는 않지만, 안희왕의 성품이 쪼잔해서 아무리 사랑하는 후궁이라고 해도 병부를 훔쳐 위무기에게 준 여희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희는 은혜를 갚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후영은 위기에 빠진 위무기를 위해 계책을 내놓고는 위무기를 격려하기 위해 자결했습니다. 위무기가 훔친 병부로 진비를 대신해 군대를 조나라로 진격시키면 위나라에 남아있는 본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무기가 진비를 위해 눈물을 흘렸지만,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희와 후영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위공자 열전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의기가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전개가 드라마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적입니다.
진비의 진영에 도착한 위무기가 병부를 맞춘 후에 안희왕의 명이라고 속여 병권을 넘기라고 진비에게 말하니, 진비는 "지금 제가 10만 대군을 통솔하여 국경에 진을 치고 있는데, 수레 한 대를 타고와서 저를 대신하겠다고 하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하면서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주해가 사십근 나가는 철퇴를 소매 속에 숨기고 있다가 진비를 쳐죽였고, 그제서야 위무기는 진비의 군대를 통솔할 수 있게 됩니다.
위나라 병사들을 집합시킨 위무기는 영을 내려 "부자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돌아가고, 형제가 같이 있는 사람은 형이 돌아가고, 외아들도 모두 돌아가서 부모를 공양하라."고 합니다. 이 조치로 위나라 군대의 사기가 올랐을 것입니다. 남은 8만명의 군대로 진격하여 진나라 군사를 치니 진나라의 군사가 한단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게 됩니다. 조나라를 보존하게 된 조나라 효성왕과 평원군은 성밖으로 친히 나와 위무기를 영접하고 절을 두번 하여 고마움을 표합니다.
위나라 안희왕은 신릉군 위무기가 자신의 병부를 훔친 뒤에 속임수를 써서 진비를 죽인 일에 화가 나 있었습니다. 위무기도 이를 잘 알고 있어서 진나라를 물리치고 조나라를 보존시킨 후에 위나라 군사들만 위나라에 돌려보내고, 자신은 빈객들과 함께 조나라에 남았습니다.
조나라 효성왕은 위무기가 진비를 속여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해준 것에 감격하여 평원군과 의논한 후에 위무기에게 다섯 개의 성을 봉읍으로 주려고 했습니다. 위무기는 이를 전해듣고 교만하고 우쭐대는 마음이 생기면서 자기의 공을 자랑하려는 기색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위무기의 빈객 중에 한명이 "다른 사람이 공자께 덕을 베풀면 이를 잊으면 안되지만,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풀었다면 부디 이를 잊으시기 바랍니다. 위나라 왕의 명령을 사칭하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것은 조나라에게는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로 보면 공자를 충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자께서 스스로 교만해져서 그 일을 공이라고 여기시니 공자께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라고 간언하자, 위무기는 그 즉시 자책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고 합니다. 조나라 효성왕이 위무기를 초대하여 다섯 개의 성을 봉하려고 했지만, 위무기는 너무나 겸손한 태도로 자신은 위나라에 죄를 지었고 조나라에도 공이 없다고 몸을 낮추니 효성왕은 다섯 개의 성을 봉한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위무기는 조나라에 도박꾼들 사이에 숨어지내는 모공이라는 사람과 장(漿)이라는 음료수를 파는 집에서 숨어지내는 설공이라는 사람을 수소문하여 찾아내서 그 두 사람과 교유하면서 매우 즐거워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평원군은 위무기의 누나인 자기 부인에게 "내가 소문으로 들으니 부인의 동생 위공자가 도박꾼과 장이라는 음료를 파는자와 어울려 지낸다니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오."라고 말합니다. 부인이 이 말을 위무기에게 전달하니 위무기는 "저는 평원군이 어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위나라왕을 저버리면서까지 조나리를 구원했습니다. 그렇지만 평원군은 사람을 사귀면서 진정한 선비를 찾으려 하지 않으면서 호걸인 척 행동만 합니다. 제가 대량에 있을 때부터, 모공과 설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들어서 조나라에 와서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그 두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두 사람이 나를 꺼리지 않을까 걱정하고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원군이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니, 평원군은 사귈만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는 조나라를 떠나려고 짐을 싸니, 평원군이 부인에게 말을 전해 듣고 위무기에게 찾아와 관을 벗고 사과하면서 한사코 위무기를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평원군의 빈객들이 절반이나 위무기에게 귀의하였고, 천하의 선비들도 위무기에게 몸을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고 합니다.
평원군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인재들을 찾아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나랏일에도 제대로 된 대책을 내지 못하고 항상 뒷북만 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국시대 사공자 중에 평가가 제일 낮게 나옵니다. 그렇지만 남의 충언을 들으면 금방 반성하고 행동을 고치려고 합니다. 그 점이 그래도 혼탁한 시대에 아름다운 공자라는 평가를 받게 했습니다. 이번에도 멍청한 소리를 했지만 따끔한 위무기의 질책을 듣고는 바로 반성하고 위무기에게 사과했습니다.
위무기는 조나라에 십 년 동안이나 머무르면서 위나라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진나라는 매년 출병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가 위급한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위나라 안희왕은 이를 걱정하여 위무기에게 돌아오라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위무기는 안희왕이 아직도 자기에게 노여워 하고 있을까봐 자신의 빈객들에게 위나라의 사자를 들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립니다. 모공과 설공이 "위나라가 위급한데 돌아가지 않았다가 나라가 망하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를 대하시렵니까?"라고 설득하자 위무기는 즉시 위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위나라 안희왕은 위무기를 만나서 서로 함께 울고나서 위무기를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위나라 군사를 이끌게 합니다. 위무기는 자신이 위나라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고 제후들에게 알리니, 제후들이 모두 군대를 보내 위나라를 돕게 합니다. 이것이 제 3차 합종이었습니다. 위무기가 다섯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 몽오의 군대를 격파하고 함곡관까지 추격했습니다. 진나라 군대는 감히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신릉군 위무기의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공원국씨의 <춘추전국이야기>에서 '신릉군 위무기는 범저와 위염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책략가였다. 만약 위가 여전히 하동을 보유하고 있을 때 그가 정치를 담당했다면 오기와 같은 업적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위무기는 위염처럼 군대를 직접 지휘할 수 있고 병법에 뛰어나다는 말이고, 범저처럼 외교적 책략에도 능수능란하다는 것입니다. 위무기의 신망에 다른 제후들도 호응하여 세번째 대규모 합종도 성사되었습니다. 위무기가 계속해서 위나라의 병권을 쥐고 있었다면 진나라의 중국 통일은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진나라에는 권모술수와 온갖 사기, 속임수, 협박같은 술책에 능한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나중에 진시황이 되는 진왕 영정의 시기였고, 요가, 이사같은 책사들이 모여 있었으니 이들의 특기가 발휘됩니다. 위무기에게 억울하게 죽은 진비의 빈객들을 동원해서 안희왕에게 위무기를 모함하기 시작합니다. "위무기가 위나라에 돌아와 장군이 되자 각 제후들의 장군들도 그 휘하에 두게 되었고 제후들도 위무기의 위세를 두려워 해서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안희왕의 마음에 의심이 들게 만듭니다. 때때로 위무기가 왕이 된 것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안희왕은 위무기를 장군에서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장군에 임명합니다. 위무기는 자신이 참언에 의해 또 쫓겨났음을 알고, 빈객들과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많은 여자들을 가까이 하다가 몸이 상해 4년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형인 안희왕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겨우 18년 후에 위나라는 진시황의 진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중국의 정치는 유교 이념에 따라 통치되었다고 말합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폭압적인 통치에 대비되는 정치를 하려고 했습니다. 진나라가 분서갱유로 탄압했던 유교의 이념으로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라를 포함한 중국의 통치 이념은 겉으로 내세우기는 유가의 인정(仁政)과 예의 규범이었지만, 실제로는 법가의 엄격한 법에 의한 통치를 했습니다. 진나라의 법률체계를 거의 그대로 베껴서 사용했습니다. 중국의 황제 체제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전제정치였고, 중국 백성들에게 황제와 그를 보좌하는 관리들은 거의 신성불가침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관리들과 부자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에 호소할 곳이 없는 백성들에게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통하게 한 것은 유교의 이념이 아닌 협(俠)의 문화였습니다. 협은 유협(遊俠)또는 임협(任俠), 협객(俠客)으로 불렸습니다. 무협지에 나오는 검객들도 협의 의리를 추구합니다. 영화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은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이 말을 주윤발이 장국영에게 한 말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네이버를 찾아보니 주윤발이 아닌 대만의 조폭 두목이 한 말이라고 하네요. 다시 한 번 영웅본색을 보고 확인해야겠네요.) 이 강호의 도가 바로 협의 의리를 말합니다. 상시적으로 법을 위반하는 깡패 집단인 조직폭력배조차 "강호의 도"를 들먹입니다.
사마천은 <유협 열전>에서 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협객은 그 행하는 바가 비록 정의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은 반드시 과감하다. 이미 약속한 일은 반드시 이행하며 자신의 위급함을 돌보지 않은채 남의 위급함을 돕고, 사생존망의 위급함을 겪었어도 그 능력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협은 억울한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를 징치해서 약자를 돕는 사람을 말합니다. SBS 드라마 '모범택시'에 나오는 복수대행써비스를 수행하는 사람들도 협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협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법률위반은 물론이고 살인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협객입니다. 이들은 은원을 확실히 해서, 은혜를 갚기 위해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기도 합니다. 위무기를 위해 병부를 훔친 여희도 협이었고, 위무기를 돕기 위해 목숨을 불사한 후영과 주해도 협이었습니다.
그래서 법가에서는 법을 우숩게 아는 협을 나라를 좀먹는 다섯 가지의 좀벌레(오두: 五蠹)중의 하나라고 비난합니다. 법가에서는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몰려다니면서 법을 상시로 위반하는 협객들을 모두 없애려고 했습니다.
위무기는 대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중국에서 협의 문화를 완성한 사람입니다. 맹상군도 임협의 무리를 식객으로 초청했지만, 맹상군의 식객들은 거칠고 무례해서 유협의 의리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맹상군이 실각하자 모두 떠났다가 맹상군이 재상으로 복직하자 다시 모였던 약싹빠른 사람들입니다. 반면 위무기의 식객들은 후영, 주해가 아니더라도 위무기가 조나라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하고 전거를 이끌고 진나라 군대에 돌격하려고 떠나자 기꺼이 동행했습니다. 협의 의리가 대의와 일치하면 그 사람은 대협으로 불리게 됩니다. 왕의 병부를 훔쳐 진비의 군사를 탈취한 것은 왕명과 법을 위반한 반역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조나라가 망하면 위나라도 멸망할 것이 뻔한데 조나라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무기는 반진합종이라는 대의와 조나라와 위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행위를 과감하게 실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위무기는 대협이라고 불릴만 합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은 미천할 때 부터 신릉군 위무기를 존경해서 대량을 지날 때 마다 위무기의 무덤을 참배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유방의 부하 중에 장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중에 황제가 된 후에 장이와 사돈이 됩니다. 그런데 장이가 젊었을 때 위무기의 식객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유방은 장이에게서 위무기의 성품과 활동상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된 다음에도 위무기의 무덤을 관리하도록 다섯 집을 선정하고, 대대로 일년에 네번 계절별로 위무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