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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바이블 15 모세 기적의 허구성
옮긴이 : 천리아허상탁
▶ #성경의 출애굽 경로는 허구이다
출애굽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이려니와 성경에 나와 있는 경로로 이동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민수기 3장16절에는 유대인들이 갈대바다를 건넌 이후 도착한 출애굽의 8번째 기착지가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지적이다. 민수기 33장 1절~49절에 지적된 37개의
기착지들 중에서 '에시온 게벨'을 제외하면, 어떤 곳도 장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아마도 다른 이름이었거나 지명이 달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컨대 돕가는 지금의 세바레트 엘 카딤과 동일시 되고 있다)
출애굽 자체가 역사적으로 전혀 증거가 되지 않지만, 현재 학계 에서 출애굽의 경로를 밝혀내는데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그 가설들이 너무나 많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세 가지만을 열거한다.
첫째는 해안도로 설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타당하지가 않다. #파피루스 아나스타지Anastasi의 자료에 의하면 해안도로들은 이집트의
요새에 의해 엄격히 감시되고 있었으며, 이집트 당국의 특별 통행증이 없이는 왕래가 허용되지 않았다.
체쿠에 주둔하고 있는 궁수대장 카켐웨르(Kakemwer)와 서기관 이네나(Inena)가 상부에 보고한 파피루스
아나스타지 제5,6번을 보면 해안도로로 탈출을 시도했던 두명의 노예가 수색을 당했고, 에돔 출신의 샤수 민족의
이동에 관해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유대민족이 여기를 지나갔다는 것은 타당치가 않다.
두 번째는 횡선도로 가설이다.
민수기 33장 35절, 신명기 2장 8절에서는 유대인이 광야에서 진을 쳤던곳이 에시온 게벨(Ezion Geber)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다르브 엘 하지라 불리는 횡선도로를 이용했다면 갈대바다에서 수르, 파란, 씬 사막을 거쳐
직접 에시온 게벨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곳은 매우 험한 곳이며 사실상 성경과 맞지가 않다.
만약 유대인들이 이길을 이용했다면, 아라바 경계선을 따라가면서 곧바로 가나안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돔인들에게 통행권을 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아말렉족과 싸울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아말렉족은 휠씬 더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홍해도로설이다.
그 길은 대상들이 이용하는 도로였으며, 여러정황을 고려하면 가장 설득력이 있는 도로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가지 문제가 있다. 신이 모세에게 나타났던 그산을 찾아야 한다.
이미 시나이산(Sinai)으로 알려진 것과 다른 위치의 산, 즉 시나이 산봉우리들의 남쪽에 위치한 지점을
찾아내야만 한다. 사실상 출애굽이 실재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속의 이동경로와 일치할 수가 없다.
또, 민수기에는 맛사, 므리바, 에인 미쉬파에서 유대인들이 38년동안 거주하였다고 한다.
민수기에서 목마름으로 불평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얻자,
여호와는 너희 세대는 약속의 땅에 정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게 된다.
오늘날의 학자들이 모세의 반석 후려치기 사건이 있었던 곳을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로 규정짓고 있다.
그곳은 가나안으로 가는 중요한 체류지였던 곳으로 팔레스타인 남쪽, 네겝 지역에 위치하여,
에돔과 모압으로 통하는 십자로 였다. 정찰대들이 약속의 땅을 알아보기 위해 떠난 곳도 그곳이었다.
유대민족이 38년동안 체류한 곳을 가데스 바네아로 규정짓는 것은
출애굽기 17장2~7절과 민수기 20장2~13절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데스 바네아로 알려진 곳은 '에인 코우데스'나 그곳에서 10Km '에인 엘 코우데이라트'로
추정되는데 두 곳에는 모두 우물이 존재했다. 특히 '에인 엘 코우데이라트'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물이 아주 풍부했던 곳이었다.
또, 민수기 13장과 신명기 2장에는 파견되었던 갈렙이 엄청나게 큰 거인을 목격하고,
두 사람이 들어야할 정도의 큰 포도송이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포도송이와 거인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기는 다른 거인종족인
르바임(모압인들이 에밈이라고 불렀다는)들이 예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다고 명시한다.
(사무엘상에도 팔레스타인의 거인 골리앗이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팔레스타인인들은 한세기후인 BC 12세기경에나 가나안에 등장한다.
또, 그들이 거인이었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 #모세의만나와메추라기기적의허구성
오경에서 광야에서 떠돌아 다니는 유대인들에게 여호와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서 그들을 먹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잘못되고, 과장되게 기록한 면이 없지 않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출애굽기 16장 14절~15절]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민수기 11장 9절]
만나는 히브리어로 '만후' 라고 부르는데, 성경에서는 만나가 땅에 서리처럼 내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만나는 나무의 송진같은 수지(樹脂)응고물의 일종으로서 #진딧물의 일종인 연지벌레라는 곤충의 공격을
받을 때 생성되는 것이다. 즉, 만나는 땅위가 아닌 타라미스(위성류)라는 나무에 열리는 것으로,
땅에 이슬과 함께 내려온다는 출애굽기의 지적은 틀린 것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출애굽기 16장 19절~21절]
#모세는 만나를 하루이상 보관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데 이것은 만나의 속성을 확인 시켜 준다.
그것은 구더기가 급속하게 번식하기 때문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출애굽기 16장 16절]
#모세는 한 사람에 한 오멜씩 식구수대로 거두어들이라고 명령한다.
"또한, 거기에서 오멜은 에바 십분의 일이더라." [출애굽기 16장 36절]
즉, 1오멜은 10분의 1에파라고 분명히 지적한다. 1오멜은 대략 3리터 반의 양이다.
그 정도의 만나로 빵을 만든다면 적어도 5kg이나 한다.
이것은 성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도 배부르게 먹고 남을 정도의 양이다.
게다가 그 분량이 사실 그대로라면 천명당 하루 소비량은 무려 3.5톤이다.
출애굽기 12장 37절에 따르면 이집트를 빠져나온 유대인 숫자는 딸린 식구를 빼고 장정만 60만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딸린 식구를 뺐다는 60만명의 하루 소비량은 2100톤이다. 게다가 장정 60만에 아내와 아이 한명씩
있다고 계산하고 180만명으로 잡으면 만나의 하루 소비량은 6300톤에 이른다! 당시 유대인이 자녀를 한명씩만
두었을리가 만무하므로 유대집단이 하루 동안에 먹어치운 만나의 양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출애굽기 16장 35절]
40년 동안 만나를 먹으며 지내다니, 과연 사막지역에 그토록 많은 타라미스 나무가 있었을까?
이번엔 메추라기 기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모세오경이 모세에 의해 직접 기록 되었다고 철썩같이 믿는 기독교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수기와 출애굽기의 메추라기 기적은 서로 엇갈리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출애굽기 16장 12~13절]
출애굽기16장에서 배가 고프다고 투정하는 유대 민족에게 여호와는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보내고
아침에는 만나를 보내 배불리 먹인다. 그러나 민수기는 출애굽기와 내용이 다르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민수기 11장 4절~6절]
유대인들은 만나에 대해 불평을 해대면서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소연 한다. 그러자 여호와에게 한탄하는
#모세에게 메추라기의 기적을 일으킨다.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 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 이었더라." [민수기 11장 32~34절]
#민수기에서 여호와가 보인 메추라기의 기적은 탐욕하는 사람들에 대한 징벌로 나타난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여호와의 축복과 기적으로 묘사한 것과는 정반대되는 견해 인 것이다.
벌써 모세오경이라는 텍스트에 대해서 모순이 생기지 않는가?
또한, 수확한 메추라기의 양 또한 너무나 상식을 벗어난 숫자이다.
실제로 구약속의 지적과 같이 시나이 반도의 지역에서는 수많은 철새들이 이동한다.
봄에는 남에서 북으로, 가을에는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며, 메추라기 역시 마찬가지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의 에이탄 체르노프에 따르면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의 새들의 이동은 네겝 지방을
통과한다고 한다. 사실, 시리아에서 아프리카로 뻗어내리는 산줄기는 맹금류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철새들이
이동하는 일종의 통로다.
하지만,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여호와가 주는 메추라기의 양은 상식을 초월하는 양이다.
'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하루에 주파한 거리는 44km 815m에 이른다고 전한다.
실제로 수많은 무리가 도보로 하루에 이렇게 많이 이동했다는 것은 거의 과대평가임이 분명하다.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민수기 11장 31절]
민수기에는 메추라기들이 하룻동안 행군 할 거리 만큼의 하늘을 아무 방향으로나 날았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2천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엄청난 공간을 메추라기가 뒤덮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조류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메추라기떼는 아무리 많아도 수만마리 정도라고 한다.
민수기 11장 32절에 따르면 메추라기를 아무리 적게 거두어들인 사람이라도 10오멜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적게 거두어들인 사람도 한사람당 35리터의 메추라기를 잡아들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메추라기 한 마리당 300그램으로 잡았을 때, 가장 적게 잡은 사람도 무려 120마리를 잡았다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출애굽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가정하면, 유대인들이 시나이반도를 지날 때 만나와 메추라기 떼를 만나서
수확하여 식량으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구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내용이다.
▶ 가나안 정복설
앞에서 #모세의 엑소더스가 이집트의 역사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음을 말해 두었다.
이번에는 고고학에서 바라보는 유대민족의 가나안 정복에 대해서 제기되는 연구자료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가설들은 고고학이긴 하지만, 구약학자들이 연구해오는 중요한 가설이기도 하다.
가나안에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는 BC 1550~1200의 후기 청동기 시대의 말에 해당한다.
아마르나 시대를 고려하면 당시 가나안에서 발생한 심각한 사회적인 혼란은 이집트의 패권정치의 공백과
북으로부터 밀려온 새로운 이주자들의 소요, 그리고 가나안 내의 도시국가들 간의 정치적인 알력으로 발생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올 시기의 여러 성읍들을 발굴한 후의 고고학적인 결과는
유대인들의 가나안 출현에 대한 성경의 기록과 전적으로 동일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곧 중앙산지의 벧엘(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언급이 없다), 쉐펠라의 라기스, 그리고 갈릴리의
하솔(여호수아에 의해 멸망)은 유대인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성경의 입장을 옹호한다.
하지만 성경의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된 몇 요새화 된 성읍들은 이 시기에 파괴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여호수아 6장 24절에서는 여리고를 초토화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곳을 발굴한 케욘(K. Kenyon)의 입장은
여호수아에 무너졌다고 주장하는 여리고의 실재 성벽은 BC 1550년 경의 것으로 이것은 힉소스의 추방과 관련하여
이집트인들에 의해 무너진 것이지 유대민족의 침공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주장했다.
즉, 후기 청동기 시대의 말에 여리고는 단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는 입장이다.
아이 성의 점령사건도 마찬가지다. 초기 청동기 시대의 말에 파괴된 이후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는 성읍이 들어 서지 않았던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파악한다.
이런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 고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들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기원에 관해 소개하는 모든 이론들은 크게 5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유대민족이 한꺼번에 외부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는 가정.
둘째는, 유대민족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가나안에 점진적으로 이주했다는 가정.
셋째는, 유대민족이 가나안의 토착민으로서 점차 세력을 확장했다는 가정.
넷째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가나안에 철기문명을 가진 유목민이 정착하여 유대민족으로 발전했다는 가정.
다섯번째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틈타 아피루, 농민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했다는 가정 등이 있다.
우선, 유대민족이 외부로부터 가나안에 이주해왔다는 가설을 살펴보자.
이 이론은, 13세기 정복설(13th-conquest)이라고도 불리며, 올브라이트(Albright), 존 브라이트(John Bright),
라이트(G. E. Wright)등의 학자들이 지지했다.
이 이론의 특징은 성경의 기록을 BC 13세기에 유대민족이 통일된 단일체로서 가나안을 침략했다는 가설이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 연대를 BC 1220년으로 상정하고 민수기 14장 33절을 바탕으로 BC 1260년을 출애굽의 연도로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출애굽기 1장 11절을 근거로 노예였던 유대 민족에 의해 람세스와 비돔성이 건축되었다고 전제했지만,
막상 람세스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 했지만 이집트 제18왕조 점령의 증거가 발견 되지 않았다.
이로써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다는 주장이 효력을 잃는다.
그 외에도 여리고, 아이, 기브온 등의 유적에서는 군사적 충돌에 관련된 역사적 증거가
성경적 기록과 맞지 않는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 문제점에 대해서 보완한 것이 점진적 이주설(The infiltration theory)이다.
알트(A. Alt), 노스(M. Noth), 바이페르(M. Weippert), 밀러(J. M Miller)등의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으며,
이집트에서의 아피루들의 대규모 이동이 없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가나안 정복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난 점유 또는
정착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차례로 다양한 기원을 갖는 아피루 집단들이 정착해 가면서
가나안 정복은 다윗시대까지 완성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처음에는 가나안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은 없었고 단지 점진적인 유목민들의 침투만이 있었을 뿐이다.
광야의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가축들을 먹일 목초를 찾아 인구가 희박한 중앙산지로 이동해 왔다.
그들은 가나안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과 통혼하기도 했지만, 후기에 들어서 유목민들이
가나안의 비옥한 지역인 해안평야, 이스르엘 평야, 그리고 쉐펠라 등으로 확장할 무렵이 돼서야
가나안인들과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경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신속한 가나안 정복은 여호와 신앙을 강조하였던
신명기 학파들의 종교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알트(A. Alt)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단계에서는 전적으로 이주가 평화로왔다. '반쪽의 #유목민들seminomadic 가나안 변두리 지역에서
겨울을 지내며 살다가 점차 여름에도 가축떼를 먹이기 좋은 가나안 구릉 지역으로 정착하여 농경화 되었다.
가나안 고원 지대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을 때에는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는 거주민과 갈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정착이 완료되고 통합되면서 더욱 수가 많아지자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으로부터 평야와 저지대를
빼앗으려는 시도를 했다. 군주제 초기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격렬한 군사적 충돌과 함께 영토확장이 시작 되었다."
이번에는 유대민족이 원래부터 가나안 토착민이었다는 가설을 설명해 보겠다.
이것은 농민 반란설(The peasant revolt theory)이라고 불리며, 멘델혼(G. E. Mendenhall),
고트왈드(N. K. Gottwald)등의 학자들이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혼과 바산 왕 옥의 왕국들을 전복하기 위해 그들의 적대세력들과 손을 잡았던
요단 동편에서 반란이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후 이주한 유대민족들은 요단 서편 지역에서 사회적인 혁명을
주도했다. 이집트의 정치적인 후광을 업고 도시국가들을 유지하는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유대민족이 야합하여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 했으며 이로 인해 유대민족은 큰 저항없이 가나안의 여러 성읍들을 차지했다는
견해이다.
이 학설은 세겜지역을 아무런 반항없이 점령하게 된 성경의 일부 기록과 파괴된 흔적이 없는 여러 성읍들을
유대인들이 접수하게 된 배경을 일부 지지하는 듯하지만 여호수아와 사사기 등에는 농민폭동에 관한
그 어떤 기록이나 암시도 없다.
멘델혼(G. E. Mendenhall)은 아피루(Apiru)와 히브리(Hebrew)라는 두 어휘를 동의어로 보고,
그 뜻을 '자신에게 입지를 부여했던 사회조직으로부터 의무를 폐기하고, 그것으로부터 보호받기를 거부한 자'라는
뜻으로 재정의 했다.
멘델혼은 "만약 초기에 유대인이 히브리인라고 불려졌다면, 그들이 관계를 끊었던 정통적 사회의 관점에 의해
그렇게 이름 붙여졌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초기의 유대인들은 폭압적인 도시 통치 체제하에서 빠져나온
가나안의 토착 농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집트에서 이주해온 소수의 아피루 집단이 가나안에 당도했을 때
전제군주에게 핍박받던 가나안 농민들과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가나안 농민들에게 모세의 언약이 호응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멘델혼의 사회학적 접근방식이 처음 제기 되었을 때 학계에서는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그러나 브라이트(Bright)의 '이스라엘의 역사'(A History of Israel)의 제2판에서 이 이론이 거론되자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후에 이 이론은 강력한 기반을 제공하는 지지자들이 나타났다.
#멘델혼Mendenhall은 정치적 주체적 반란을 주장한 반면, 고트왈드(N. K. Gottwald)는 물리적, 지리적 반란을
거론했다. 고트왈드는 멘델혼의 모세의 언약 개념이나 종교적 이념들을 제거 하면서 출애굽의 역사적 가치에 큰
회의를 품었다.
멘델혼이 단기간에 일어난 반란과 이스라엘의 출현을 설명했다면 고트왈드는 그 과정이 약 2세기에 걸쳐
사회적 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지대의 철기 1기(Iron 1)의 문물의 정착은 저지대에서 철수한
반란 집단의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번에는 #핑켈슈타인의 이스라엘의 유목기원설Finkelsteins view of Israel's nomadic origins)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이론은 철기 1기의 정착 과정의 연구로, 고고학적 토대를 근간으로 하여 이론을 세운 것이다.
이 이론을 먼저 제기한 것은 프리츠(Fritz)였는데, 그는 후기 청동기의 가나안 문화와 오랜접촉을 가진
초기 유목민들이 철기 1기의 정착민 이었다고 본것이다. 하지만 프리츠는 이들 유목민이 원래 어느 지역에서
유입해 들어왔다고 보는 반면, 핑켈슈타인은 가나안 철기 1기의 정착민은 토착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철기 1기의 정착민을 유대민족의 시조로 여겼고, 프리츠도 정착 과정중인 고지대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핑켈슈타인의 설명에 따르자면, 초기 철기 1기 정착민은 목축과 농업에 유리한 중앙 산지와 작은 산간 분지에
정착했다고 한다. 과수 농업은 에파래미트(Epharaimite)고지의 서쪽 경사면에 정착한 후에 진행 되었다.
이런 식의 정착은 정착민이 유목민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철기 1기의 취락 형태는 중앙에 공간을 두고 그 주위에
거주지가 둘러싼 전형적인 타원인데 그것은 유목민의 취락구조(duwwar)와 닮았다.
또한 철기 1기 거주민들의 지하 저장 시설의 광범위한 사용은 정착중인 유목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간결하고 넓은 실내, 기둥과 4개의 방으로 된 집들은 베두인 양식에서 발달된 것이다.
이 양식은 철기 1기 정착민보다 앞선 유목민의 것임을 가리킨다.
이번에는 칼라웨이의 해변 평야로부터의 인구 대체설(Callaway's theory of displaced population from the coastal
plain)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칼라웨이는 철기 1기 정착민이 해변 평야와 세펠라(shephelah)로부터 온 농경민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 근거로, 옥상 물탱크를 지닌 주택이 고지대에서 발견된 사실과 당시 비탈에 계단형 농지를 만들었던 점 등을
들어, 유물이 세펠라와 해변 평지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그는 고지대 철기 1기 정착민은 바로 세펠라와 해변 평지에서의 인구증가와 충돌로 발생된 피난민이라고
한다. 이 가설이 농민 반란설과 비슷한 점은 철기 1기 정착민들이 저지대로부터 올라온 피난민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도 렘체의 진화적 이스라엘 설(Lemche's evolutionary Israel)이 있다.
#렘체는 혁명적 기원설을 거부하고 대신 진화적 이스라엘을 설명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 하기 위해서 바빌론 유수 이후에나 등장한 성경은 역사적 근거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고고학적 자료로써 재구성하려고 했다.
렘체의 주장에 따르면, 최소 BC 14세기 전에 아피루의 거주지가 중앙 고지대에 있었으며,
아피루는 팔레스틴의 작은 성읍과 분지로부터 도망 온 토지 보유권자이거나 이전의 예속된 농민들로 구성된
반사회적 구성원들이었다. 아피루는 그 당시 정착민이 아니었고 일부는 농작을 했지만 대부분 무법적인 약탈자로
살았기 때문에 고고학적 자료로써 그들의 생활상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철기시대가 시작되는 100년 후에 고원지대에 새로운 정착민이 등장했다.
이때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했고 철기1기 정착민은 농경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단일 종족화가 진행되어
이스라엘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R. B.쿠트와 K. W. 휘틀럼의 종합이론(The synthesis of Coote and Whitelam)을 설명해보겠다.
그들은 성경의 역사성을 거부하면서, 역사가의 직무는 비교 역사학과 인류학적 정황 안에서 고고학의 기록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철기 1기 정착의 성격과 지역을 검토한 결과, 그들은 고고학적 증거가 정복설,
이주설, 반란설과 잘 맞지 않는다고 결론 지었다.
쿠트와 휘틀럼의 주장에 따르면, 후기 청동기 시대의 끝무렵에 발생한 경제적 쇠퇴라는 상황속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크게 의존 되었던 지역간의 무역이 약해지면서
가나안 성읍의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지대에 있는 성읍 중심지의 경제가 쇠퇴함에 따라
유목민, 농민, 약탈자들이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경제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고지대에서 농업이 발달하여 여러 집단들을 불러
들였다. 따라서 농업과 유목의 결합을 바탕으로 정착이 착수 되었다. 그 결과 고지대에 정착하는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치적, 인종적 형태가 등장했다.
#쿠트와 휘틀럼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오로지 농민이거나 약탈자 무리거나 유목민만은 아닌 이 모두의 결합체
였다고 보았다. 이들 학설의 장점은 협소한 접근법의 취약성을 극복하고 광범위한 종합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비평적인 역사학자들은 유대민족의 가나안 정복은 오랜 기간을 두고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일치된 견해를 갖고있다. 고고학은 성경의 기록을 입증하려거나 부정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고고학은 단지 발견된 것을 통하여 기술하고 그 자료를 통하여 학문적인 이론을 전개해
갈 뿐이다. 이것은 세계역사에 있어서 고고학이 가지는 성질과 같다.
[김희보 / 구약 이스라엘사 / 총신대학출판부] [레온 우드 / 이스라엘의 역사 / 기독교 문서선교회]
[김정우 / 역사서연구 / 총신대학신학대학원 강의안] [정규남 / 구약개론 / 개혁주의신행협회]
[글리슨 아처 / 구약총론 / 기독교문서선교회]
[출처] 안티바이블 그 -15, 모세 기적의 허구성|작성자 천리아허상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