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용 |
연중 제4주일(가해, 박동호신부, 신수동성당) 2011년 1월 30일 마태오 5,1-12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시적(詩的)입니다. 읽기에도 듣기에도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가난이든 물질의 빈곤이든 그 가난을 두고 행복이라 받아들이기에는 내키지 않습니다. 온유하고 슬프게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차라리 무능함이라 믿고 싶어 합니다. 의로움을 찾으면 좋은 기회를 잃을 것이고, 실속을 못 차리면 그 또한 자기만 손해 보는 것이라 믿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어설프게 착하고 옳고 자비로운 척 해봐야 뒤통수 맞는 일이 다반사가 아니냐고 주문처럼 외우고 다짐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순진하다는 것은 이용당하기 쉬운 어리석음에 다름 아니라고 조롱합니다. 온 몸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의 실현을 위해 번거로움을 마다 않는 것은 세상 물정 몰라도 한참 모르는 철없는 이들의 무책임한 선동행위에 불과하다고 손가락질 받기 일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믿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 성당에서는 외우고 읽고 듣기는 하지만, 돌아서 바깥에 나가면 예수님의 말씀은 공허한 소리가 되고 맙니다. 기껏해야 ‘예수님 말씀이 맞기는 맞지만 그건 그 때 예수님 말씀이고, 성당에서나 하는 말이고, 세상은 절대로 그렇게 살 수가 없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말 뿐이고, 차라리 세상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솔직합니다. 이 땅에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는데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흔적은 찾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그 많은 그리스도인이 가난과 청빈, 그리고 나눔을 믿고 살고 있다면, 그 많은 그리스도인이 힘든 이웃과 같이 눈물 흘릴 온유함을 지니고 있다면, 그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평화와 의로움을,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믿고 몸으로 가꾸고 있다면,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면, 세상은 점점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교회 안에 가두었습니다. 다른 의미였지만, 니체라는 철학자가 말한 ‘신의 무덤’을 연상케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가두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허수아비 시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말씀을 공허한 메아리로 더 나아가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그분의 가르침을 가볍게 내다버렸는데, 누군들 그분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2천년 전, 그분 곁에 수많은 군중이 있었고, 그분 곁에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 모두가 그분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지도자들과 다른 낯선 이들의 조롱을 받았는데, 예수님의 처지는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때보다 더할지도 모릅니다. 그 때와는 다르게 오늘날 다른 이들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자랑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면을 벗어야 그나마 솔직한 태도입니다.
수많은 교회와 성당이 있고, 또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는데도, 하느님 나라의 흔적을 이 땅에서 찾기 힘들다면, 둘 중의 하나가 맞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원래 없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그 수많은 교회와 성당과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세우려 했던 하느님 나라의 흔적을 지우고, 그분이 뿌리고 가꾸시려는 하느님 나라의 싹을 없애고 있거나 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불편하고 혼란스럽게 합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표현보다는 ‘나의 믿음’에 도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도전합니다. 정말 나를 믿느냐고.... 그리고 정말 믿는다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를 재촉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도 하염없이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