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승리
계 19:11-13
2022년 12월 18일 주일 낮 11시
인도, 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 교회 진천
요한 계시록의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심판, 교회, 천년 왕국 등도 중요한 내용이지만 계시록의 중심 혹은 핵심 주제는 아니다.
‘보좌(헬, 쓰로니스)’라는 말이 신약 전체에 62회, 요한 계시록에서 47회 사용된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신 이”로 묘사된다(계 4:3, 9; 5:7, 13; 6:16; 7:10,15; 19:4; 21:5).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라는 표현이 4회 나타난다(3:21; 5:6, 11; 7:17). 하나님 보좌는 하나님의 왕 도심과 주권자 도심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이 계시록의 중심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계 19:11-21은 예수님의 재림 사건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최종 승리의 모습을 강조한다. 계 19장과 20장은 하나님의 심판과 성도의 승리라는 주제가 강조된다. 계19장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 추종자들의 심판을 다룬다. 20:4-6은 순교자들의 최후 승리와 하나님의 보응을 기록한다.
19:11
11a “그리고 내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하늘이 열리는” 모티프(motif, 주제)는 “본다”는 동사와 연계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소개하는 방법이다. 성경에 “하늘이 열린다” 혹은 “하늘 문이 열린다”는 모티프과 연관된 성경 구절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
에스겔 1:1 에스겔은 크바르 강가에서 포로들 중에 있었을 때 “그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열린 하늘” 모티프와 “본다”는 동사가 자주 연결된다.
막 1:10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시니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주님 위에 임했다.
마 3:16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주님 위에 임했다.
눅 3:21 예수님이 세례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이 위에 강림했다.
요 1:51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셨다.
행 7:56 스테판 집사가 돌아 맞아 순교하는 중에 말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 10:11 베드로가 기도 중 환상을 보았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계 4:1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음성이 나고 “이후에 될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니라. 이는 하나님의 심판 장면의 시작 신호이다.
이사야 64:1-3도 “하늘이 갈라짐”(64:1)은 심판의 시작의 모습이다.
“하늘의 열린 문” 모티프는 하나님의 심판 시작의 모습이다.
11b “그리고 보라 백마와 그 위에 탄 이는 신실하고 진실하다.”
먼저 인물이 올라앉은 그 물체(보좌; 말; 구름)를 먼저 언급하고 그것 위에 앉은 개인이나 그룹을 말하는 기술 방식이 계시록에 자주 나타난다(4:2,4; 6:2-8; 14:14; 20:4). 백마 위에 탄 기수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기병대를 수반하는데, 예수의 재림(Parousia)의 극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천상의 기수의 모습은 온갖 환난에서 백성을 건져내는 구원자의 모습이다.
하늘에 전쟁이 있고,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그의 사자들과 싸운다(12:7). 용과 그의 사자들이 그 싸움에서 지고 땅으로 내쫓긴다(12:8-9).
하늘의 군대는 미가엘이 사령관으로 지휘한다(12:7). 이 하늘 군대는 용과 그의 군대와 싸워서 이겼다.
백마 위에 탄 신실하고 진실한 이는 누구인가(19:11b)? 미가엘인가? 19:11-16을 읽어 보면 미가엘이 아니다. 미가엘로 추정하는 주석가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하늘 군대(14절)라는 표현 속에 미가엘이 함께 포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11절의 백마 탄 이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메시아 예수(16절)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6:1에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신다. 그리고 흰 말을 탄 자가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 한다(6:2). 그렇다면 6:2의 흰 말을 탄 이와 19:11의 백마(흰 말)를 탄 이는 다른 인물이다. 6:2의 백마 탄 이는 천사 중 하나이다. 19:11의 백마 탄 이는 어린 양, 그리스도 예수,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다.
“신실하고 진실한” 속성은 그리스도에게 쓰인다. 요한은 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의 서두에서 그리스도는 “신실한(충성된)” 증인(1:5)이시라고 소개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신실하고 진실된 증인” 혹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 한다.
보좌에 앉으신 이, 처음과 나중이신 이가 요한에게 주는 계시를 “신실하고 진실한” 말씀이니 기록하라 한다(21:5). 22:6절에서도 그 예언의 말씀이 “신실하고 진실하다”(헬, 로고이 피스토이 카이 알레씨노이)고 말한다. 히브리어는 “아만”이고, “아만”의 칠십인경(LXX)은 “헬, 피스토스, 신실한,” “헬, 알레씨노스, 진실한”으로 옮긴다.
11c “그가 정의로 심판하며 싸운다.”
“의로 심판한다”는 것은 말 탄 자의 원수들을 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 즉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라는 긍정적 의미도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의로 심판하는 분”으로 기술될 때, 그것은(그 심판은) 그의 백성뿐만 아니라 나라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시편 9:8; 72:2; 96:13).
이것은 히브리어 본문 이사야 11:4의 암시이다: “약한 자들을 의로 재판하고...” “이새의 새순(이사야 11:1),” 즉 이상적 왕, “그는 의로 심판한다(히, 베 샤팥 베 체덱),” 그리고 악인을 멸한다(이사야 11:4). 이사야 11:4은 유대주의에서 메시아적으로 해석하는 문구다.
이것은 계 19:15절에도 암시된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칼로 만국을 치고 그들을 철 막대로 다스린다.” 이것은 살후 2:8의 재림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그의 입의 영(성령)으로 불법한 자를 죽이고, 그가 강림하여 그(불법한 자)를 폐한다.”
“의로 심판하는 것,” “정당한 판결 심판하는 것,” 즉 “의롭게 판단하는 것”은 구약에서 지극히 중요하다. 그리고 초기 유대주의에서 “히, 처다카,” “헬, 디카이쉬네,” 즉 “의(righteousness) 혹은 정의(justice)”는 백성과 백성,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개인 혹은 집단의 관계)를 정의하는 핵심이다.
그것은 판관들(사사들), 왕들(잠 31:9), 대인관계(스가랴 7:9)의 도덕적 표준(신 1:16; 16:18) 이었고, 하나님의 행위를 특징짓는 의롭고 공정한 심판에 완전히 일치하는 이상적 패턴에 근거했다(시편 7:11; 렘 11:20; 롬 2:5; 딤후 4:8; 벧전 2:23).
그것은 초기 기독교 대인관계에 적용되었다(요 7:24):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헬, 디카이안 크리신)로 판단하라” 하셨다.
“헬, 폴레메이, 전쟁하다”는 동사는 계 2:16에서 하는 것과 같다: 즉 주님은 버가모 교회 안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게 “회개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 입의 검으로 그들(회개치 않는 자들)과 싸우리라(헬, 폴레메소)” 하셨다. “헬, 폴레미이”는 공동체 구성원을 징계 혹은 심판과 악인의 멸망을 언급한다(계 19:15).
계 19:12a “이제 그의 눈은 찬란한 불꽃 같았다.”
“찬란한 불꽃”을 가진 그의 눈은 초자연적 존재 임을 의미한다.
계 19:12b “그리고 그의 머리에 많은 왕관들이 있었다.”
고대에 다수의 왕관을 사용하는 것은 여러나라들에 대한 주권을 상징했다.
12:3에 그 일곱 머리를 가진 용은 머리 각각에 왕관을 썼다. 이는 일곱 왕(황제)들을 상징한다. 반면에 13:1에 그 바다 짐승은 그의 열 뿔 각각에 한 개의 왕관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개의 왕관은 “왕중 왕과 만주의 주(16절)”라 불리기에 적절하다.
계 19:12c “그 자신 외에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쓰여 있다.”
2:17에 승리한 그리스도인은 “받은 자만 아는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약속받는다.
3:12에서 승귀하신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승귀하신 주님이 그의 위에 기록한다.
말을 탄 이가 비밀의 이름을 가진 것은 신적 존재(참조 창 32:29)이거나 혹은 천사적 존재(사사기 13:17-18)임을 암시한다. 천사(하나님)와 겨루어 이긴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신다(창 32:29).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흐가 여호와의 사자의 이름을 물으니 “놀라움(기묘자)”이라 했다(사사기 13:17-18). “예수”는 주 그리스도의 지상의 이름이지만 그의 참 이름은 하늘에 들어가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가 말했다. “그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하면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출 3:13)” 하나님은 모세에게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 “‘예흐예가 너희에게 나를 보내셨다’ 하라(출 3:14).” 예흐예는 “스스로 있는 자,” “자존자”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 혹은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알 수 없다. 그가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만큼만 알 수 있다.
필로(Philo)는 “귀와 혀가 정결한 자들만 그 거룩한 곳에서, 그 이름을 듣거나 말할 수 있다.” 했다.
13a “그는 피가 묻은 옷을 입었다.”
그 피는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의 은유가 아니라 하늘의 전쟁으로 그가 죽인 자들의 피가 묻은 것이다.
원수들을 멸하려 오는 신적 용사 형상(imagery)은 구약과 초기 유대주의 본문들에 나타난다(출 15; 신 33; 사사기 5; 합 3; 이사야 26:16-27:6; 슥 14:1-21).
“그가 피묻은 옷을 입은 것(계 19:13a)”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옷이 그 어린 양의 피로 하얘졌다(계 17:4)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성도들에게 흰 옷을 입히기 위해, 즉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고 죽었다(막 15:25).
13b “그리고 그의 이름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었다.”
요한 공동체의 로고스(말씀) 신학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참고는 할 수 있으나 전적으로 동의할 어떤 근거는 없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 예리한 칼은 만국을 치고(19:15), 하나님의 그 말씀의 칼로 그의 원수들을 죽인다(19:21). 그 칼은 하나님의 그 말씀에 대한 은유이다.
“하나님의 그 말씀”(헬, 호 로고스 투 쎄우)은 계시록에 5회 나온다(1:2, 9; 6:9; 19:13; 20:4). 복수형 “하나님의 말씀들”은 2회 나온다(17:17; 19:9). 단수와 복수형의 “그 말씀”은 “복음,” 즉 그리스도인을 위한 구원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그 말씀(헬, 호 로고스 투 쎄우)”은 재림하시는 주님(예수님)의 호칭이다. “그 말씀(헬, 호 로고스)”은 요 1:1에 절대형으로(수식어 없이) 3회 나온다. “그 말씀(요 1:1)”은 그의 공생애 중 전한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가 전한 “메시지”는 “생명의 그 말씀(헬, 호 로고스 테스 조에스)”이다. 계 19:13의 “하나님의 그 말씀(헬, 호 로고스 투 쎄우)”은 속격 “하나님의(헬, 투 쎄우)”가 붙여져서, 재림하시는 주님의 그 호칭으로 쓰인다.
그 용사의 이름, “하나님의 그 말씀”은 19:11-16의 여러 이름들 혹은 호칭들 중의 하나이다(“신실하고 진실한,” “은밀한 이름,” 그리고 “만왕의 왕 그리고 만주의 주”). 그 이름은 승리의 용사의 메시지 속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양날의 어떤 검보다 예리하고,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한 인격체로 표현되고 있다.
애굽의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서 애굽인의 장자를 죽인다(출 12:30). 히브리인 집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니 히브리인 집에는 장자의 죽음이 오지 않았다(출 12:23).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씀”과 “역병”의 의미를 갖는다. 온(David E. Aune)에 의하면, 역대상 21:16에서 역병은 하나님의 사자로 의인화 된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천사가 거기 서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 천사를 모두 본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보여준 것이다. “다윗이 하늘과 땅 사이에 야웨의 사자를 보았으니 그의 손에 칼을 빼들고 예루살렘을 겨누었더라(역대상 21:16).” 다윗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인구 조사를 행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이다. ‘인구 조사’는 전쟁, 조세 등을 위한 것이다.
17:1-19:10은 그 음녀 바빌론이 관심이다. 21:9-22:9은 그 신부 새 예루살렘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전사로서 말을 탄 그리스도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맞서서 하늘 군대(군대들)를 이끌고 나온다. 그 짐승과 그 거짓 선지자는 패퇴하고 벌을 받았다(계 12-13장). 주님의 재림(Parousia, 1:7 예언 실현)은 성도들을 모으기 위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것이다. 파루시아는 심판 기능이 있다. 그리고 영원한 메시아의 나라가 개혁된(renovated) 땅 위에 세워진다.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성도들을 모으기보다는 땅 위에 있는 그의 백성에게 온다.
승리의 전사로서 그리스도는 ‘신실하고 진실하다.’ 그는 의롭게 심판한다(19:11). 그는 많은 왕관들을 쓰는(12절) 것은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16절)”로서 그의 주권을 상징한다. 그의 비밀의 이름은 그 자신만 안다. 로마의 비밀의 이름에 상응하는 듯하다(17:5). 그의 구원(구속)의 죽음은 피에 적셔진 그의 옷에 암시된다(1:5; 5:9; 7:14; 12:11). 하나님의 전사로서 말을 탄 그리스도는 메시아이다(전통적 개념). 그의 공적 이름은 “하나님의 그 말씀”(13절)이다. 이는 그 복음을 가리킨다(1:2,9; 20:4).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호칭이다(요 1:1-3; 요1서 1:1).
한 천사가 하나님께 대한 땅의 대적자들에 대해 임박한 멸망을 발표한다. 그 짐승과 그 거짓 선지자가 붙들리고 불 못의 영원한 고통에 처해진다(19-21절).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바빌론(그 음녀)”은 멸망했다(17:16-17).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모든 인간 대적자들은 멸망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어린 양과 성도들의 나라는 새 예루살렘과 함께 영원하다(20:7-9).
새 하늘, 새 땅은 어둠의 권세, 저주가 없는 곳인데, 사단의 멸망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계 19, 20장은 사단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강조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안에서 위로와 소망과 승리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