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295 - 373)】 "세상에 맞선 사람"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296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부주교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더의 후계자로서, 32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평생 동안 아리우스주의와 싸우며 정통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는 데 헌신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진 하나님이며,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자가 성부와 동등한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구원의 본질상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신학은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정통 신앙을 변호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 서언: 박해가 종식된 4C. 초 기독교는 전례 없이 빠른 성장을 했지만, 더불어 내부의 시련을 혹독히 겪게 되었다. 이는 바로 예수에 대한 교리적 분열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의 사역과 존재에 대해 구분하며 예수를 칭송하면서도 그의 신적 정체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교훈과 더불어 그의 본성의 중요성도 강조하기 시작했다.
즉 '기독론'은 그분이 '대체 누구인가'라는 논쟁부터 '어떻게 인간이시고 또 하나님이신가'를 다루는 교리이다. 교회 분열 문제를 다루기 위해 황제들은 주교들을 모아 여러 공의회들을 개최하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네 개의 공의회이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선포한 니케아 공의회(325년), 아리우스파 이단을 단죄한 콘스탄티노풀 공의회(381년),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한 에페소스 공의회(431년), 그리고 예수의 두 본성을 확정한 칼케돈 공회의(451년)였다. 이중 가장 중요했던 회합은 사실 니케아 공의회였다.
2. 니케아 공희회: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대결: 32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는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예수는 하나님과 "유사한" 신성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가르쳤다. 이 도시의 대주교 알렉산더(Alexander)와 부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아리우스를 반박하고 파문하였다. 이들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창조주이시며 "똑같은"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삼단논법에 기초하여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1).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다. (2). 피조물은 같은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다. (3). 예수는구원자이시므로 피조물이 아니며 하나님이시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 후에도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의 지지를 받으며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다. 여러 도시에서 정통파와의 다툼도 격화되었고 급기야 아리우수파 신도들은 테러도 일삼았다. 거짓 종교는 늘 폭력을 수반한다. 제국의 혼란이 발생하자 A.D.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주교들을 모두 초청하여 공회의를 소집하였다.
장소는 아름다운 아카르디아 호수 옆에 황제의 별궁이 있는 니케아(이즈닉)였다. 아타나시우스 기록에 의하면 318명의 주교가 참석하였다. 회의장 한가운데 높은 단에는 신약 성서가 놓였고 홀 가장자리 보좌에는 콘스탄틴누스 대제가 앉아 있었다. 크고 강렬한 눈빛, 굵은 목과 건강한 체격의 대제는 겸손히 로마 제국의 과거 박해를 사과한 후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연설하였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뵙고 싶었습니다. 모든 주교들이 참석하여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교회의 분열은 전쟁이나 갈등보다 더 해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인간의 육체를 죽이나, 잘못된 교회는 영혼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간의 불화를 해결하고 신속히 그 원인을 제거하기 바랍니다."
격론의 결과 주교 2명을 제외한 모두가 아리우스파의 이단성에 표를 던졌다. 이러한 결과에는 대주교 알렉산더(Alexander, c, d. 328)를 수행한 아타나시우스의 활약이 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리우스의 책을 모두 불태우고 추방할 것을 명했다. 공의회는 성자 예수에 대한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를 만들어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된 분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와 동일한 본질(homoousios)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고 빛 중의 빛이시다."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시라는 진술은 기독교인들에게 단순히 신비 그 이상의 명제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확증하는 일이었다. 한편 기타 안건으로, 부활절을 유대교 달력으로 지키는 것을 폐하고 로마 달력에 따라 춘분(春分)이 지난 만월 직후의 일요일에 지키는 부활절을 정하였다. 니케아 공회의는 황제가 소집한 최초의 회의였는데 이후 정치가 교회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교들은 몇 주일 더 머무르며 큰 연회에 참석했다. 카이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이전에 혹독한 박해시대를 회상하며 이 모든 놀라운 변화들이 믿기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 "마치 그리스도의 왕국을 미리 보는 것 같다.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꿈처럼 느껴진다."
3. "세상을 맞선 사람" 아타나시우스: 정통파들의 이런 꿈 같은 기쁨도 머지않아 깨졌다. 특히 니케아 공의회의 공로자 아타나시우스와 동료들의 앞날에는 오히려 악몽 같은 고초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9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 주교가 되는 꿈을 가졌다. 어느 날 어린 아타나시우스는 주교 흉내를 내며 친구들과 세례 주는 놀이를 했고 이때 길 가던 대주교 알렉산더 대주교는 그를 양자로 키우고 부제로 삼았다.
아타나시우스는 플라톤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오리겐의 신학을 연구하여 청년 시절 이미 유명한 학자 겸 사제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시편을 거의 다 암송하는 성서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 이단을 제압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니케아공회 3년 후인 328년 대주교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서른의 나이에 대주교(Patriarch)에 선출되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그 시대의 평균 수명이 현대보다 20년 이상 짦았던 것을 감안하면 서른 살은 적절한 나이였다. 대주교 직위는 분명 영광스러웠지만 아타나시우스에게는 이것이 엄청난 고난의 시작이었다. 한편 니케아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아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반성문을 제출하고 인맥을 동원해 사면을 구했다.
황제는 대주교 아타나시우스에게 연통하여 70의 고령인 아리우스를 교회 일치를 위해 용납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젊은 대주교는 오류와 기만으로 충만한 아리우스를 신뢰할 수 없었기에 황제의 요청을 과감히 거부하였다. 위대한 황제와 위대한 주교는 결국 이렇게 충돌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즉각 아타나시우스를 대주교에서 파면하였다.황제보다 대주교를 더 존경했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황제를 비판하며 격렬하게 시위하였다.
33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더 분노하여 아타나시우스를 아예 서로마 트리어(Trier)로 귀양 보냈고 이듬해 이단 아리우스를 알렉산드리아로 귀환시켰다. 돌아온 아리우스는 의기양양하여 활보했으나 갑자기 큰 복통으로 사망하였고 이듬해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세상을 떠났다.
아타나시우스는 총 45년의 대주교 사역 동안 무려 5번이나 18년간 유배와 망령 생할을 했다. 356년 아리우스파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를 죽이려고 5,000명의 병사들을 알렉산드리아 테오나스 성당으로 보낸 적도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피신했지만 지지자 수백명은 학살당했다. 아리우스파 황제들이 통치할 때 이 이단도 함께 위세를 부리며 행패를 일삼았다. 정통파 교회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3 번째 피난 중에 아타나시우스는 친구 파고미우스가 세운 이집트 사막의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는 유배 생활을 차라리 수도 생활로 삼았고 고행 중에 <성자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저술하였다. 나지안주스의 주교 그레고리는 아타나시우스를 가리켜 "모든 미덕을 다 갖춘 모범"이라고 평했다. 37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타나시우스는 마침내 버뀐 세상을 목격하고 세상을 떠났고, 8년 후인 381년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풀 공의회를 열어 폭력적인 아리우스 이단을 축출하였다.
또한 이 공의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일한 신성을 천명한 삼위일체 교리를 고백하였다. 참고로 공의회가 열린 성 이레네(St. Irene) 성당은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회당이다. 당시 사람들은 무려 네 명의 황제들에 대항했던 아타나시우스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온 세상과 맞섰고 온 세상도 아타나시우스에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