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각화(岩刻畵 .. 바위그림)은 선사시대의 신앙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표현한 그림으로, 주로 풍요(豊饒)로운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주술적(呪術的)인 내용을 바위 면이나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것을 말한다.

이 암각화(岩刻畵)는 고령 양전동에 있으며, 1971년도에 발견되어 보물(寶物) 제605호로 지정되어있다. 청동기시대(靑銅期時代)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북(慶北)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소위 ' 알터(卵峴)마을 '이라고 불리는 곳에 위치한다.

암각화는 높이 3m, 너비 6m정도의 산비탈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현재는 보호각(保護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제방(堤防)을 쌓기 전에는 이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바위 앞까지 하천(河川)이 흐르고 깊은 물 웅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제방 축조 후 땅을 메우고 , 암각화 바로 앞쪽과 근처에 민가(民家)가 들어 섰었는데, 이 암각화는 바위 앞에 세워진 담을 허물다가 발견되었다.

알터마을
이 곳 양전동은 알터마을로 불리우고 있다. 그 연유는 ... 전설에 의하며 이 곳 장씨의 밭에서 꿩이 알을 낳았는데 부화(孵化)를 못하고 있다가, 장마가 들어 알이 떠내려 갔으며, 이 알이 김해 강가 숲에 도달하였고, 그 숲에서 부화하여 김알지(金閼智)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 암각화는 " 알터 암각화 "로도 불리우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의 오른편에 낮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는 평균 지름이 30~40cm정도 되는 움푹 패여진 자국이 있어, 그 곳이 공룡이 알을 품었던 자리로도 추정되고 있다.
김알지(金閼智)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시조이다. 65년 탈해왕(脫解王)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속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신하 호공(瓠公)을 시켜 가보게 하였다. 금빛의 작은 함(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호공(瓠公)이 탈해왕에게 보고하자, 탈해왕이 직접 가서 함(函)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이때부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사내아이는 금함(金函)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다.
발견 초기의 양전동 암각화

발견 초기의 양전동 암각화(岩刻畵) ... 또렷한 무늬를 확인할 수 있지만 지금은 많이 마모되어 무늬를 식별하기 어렵다.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반구대(盤龜臺) 암각화와 천전리(川前里) 암각화가 규모와 내용 면에서 우리나라 최대의 암각화이지만, 두 유적의 동물과 인물상, 추상적 도형 등의 내용은 우리나라 암각화에서 매우 특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15곳의 주요 암각화(岩刻畵) 유적 중 8곳의 유적은 형태가 유사한 신면(神面) 암각화로 우리나라 암각화에서 신상(神像)은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곳 양전동 암각화는 신면(神面) 암각화 중 가장 복잡한 기본형으로, 그밖의 것은 양전동(良田洞) 암각화의 신상(神像)이 변형된 형태로 보고 있다.


이곳 고령 양전동(良田洞) 암각화는 동심원(同心圓)이 3개, '십'자형이 1개, 가면(假面) 모습의 목책형(木柵形) 2~3개가 대체로 좌, 중, 우의 3군(群)으로 나누어 추상(抽像) 양식으로 음각(陰刻)되어 있다. 이 중 목책형(木柵形) 방형(方形) 무늬는 가면(假面) 같기도 하나, 목책(木柵)에 둘러싸인 특별 성역(聖域)을 표시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곳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원시신앙 유적지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 605호
대구에서 고령으로 가는 도로변의 금산재(錦山嶺)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에 석기 유적지가 있고, 구릉 동쪽 산록의 저지에는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이 바로 이웃의 양전동 알터(란현. 卵峴)마을에 바위그림 유적이 있다. 1971년 2월에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예비조사를 하고 4월에 본조사를 실시하였다.
바위그림은 수십 장(丈)의 군암절벽 중 알터마을 입구의 나지막한 암면이 선택되어 조각되어 있다. 암벽 전체의 높이는 지상 약 3m, 옆너비는 6m이었는데, 이 가운데 그림은 높이 약 1.5m, 길이 약 5m에 걸쳐 조각되어 있다. 그림의 내용은 동심원(同心圓) 십(十)자형, 이형화(異形畵)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동심원은 지름이 약 18~20cm의 삼중원(三重圓)으로 모두 4개이다. 중앙부에 동심원 하나가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고, 하나는 바위 정상부 가까이 있는데, 암면의 파손과 함께 절반부가 파손되었으며, 또 하나는 왼쪽 중간 위에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 하나는 오른쪽 하부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십(十)자형은 중앙부 동심원의 오른쪽 약간 아래에 있는데, 마멸로 명확하지는 않다. 둘레에는 가로 15cm, 세로 12cm의 사각형으로 선이 그려져 있는 것 같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표현방법으로 보아 이는 십(十)자형을 표현한 의장(意匠)으로 추측된다.
또 암면의 곳곳에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것 같은 이형화(異形畵)가 그려져 있다. 모두 17개로 작은것은 세로 20cm, 가로 22cm, 큰 것은 세로 40cm, 가로 30cm에 달한다. 형태는 모두 같은 모양으로 위로는 머리카락을, 좌우로는 수염과 같은 털을 그렸다. 그리고 귀, 눈, 코, 입과 같이 구멍을 팠고, 좌우로 뻗어 놀라간 뿔을 표현하여 마치 사람의 얼굴모양, 혹은 짐승얼굴 모양과도 같아서 가면(假面)이라고 부른다.
바위그림의 구성은 동심원(同心圓)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가면(假面)이 둘러싼 3개의 소군(小群), 즉 왼쪽 소군(小群), 오른쪽 소군(小君)으로 구분되어 중앙 상부의 동심원과 십(十)자형에 통합되어 하나의 대군(大群)을 이루고 있다. 동심원은 태양(太陽)을 상징한 것으로 태양신(太陽神)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십(十)자형은 십(十)자를 가운데 두고 주위를 둘러싼 "전(田)'자형을 이루고 있어, 부족사회의 생활권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가면(假面)은 모두 인간의 얼굴인 듯하며 인물상의 형식화된 호부(護符)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모두 농경사회(農耕社會)의 고유신앙으로서 주술적(呪術的)이고 상징적인 상형(象形), 또는 기호로 표현하여 이를 제단으로 삼고 이곳을 성지(聖地)로 여기며, 태양신 곧, 천신(天神)에게 농경(農耕)에 따르는 소원성취를 기원한 것이라 추측된다.
신상 神像








검파형 劍把形
이 검파형(劍把形) 무늬는 상하로 긴 장방형에 안쪽을 가로선만으로 2~3개로 구분하고, 그 안에는 성혈(性穴)을 묘사하였으며, 윗부분은 U자형으로 홈을 파서 깃털 모양의 선(線)을 위와 양쪽으로 새겼으며, 모두 29개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검파형(劍把形)무늬는 아직까지 전세계에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대개 동심원(同心圓) 무늬와 함께 조각되어 있다.

삼중 동심원 三重 同心圓
이 동심원(同心圓) 무늬는 일반적으로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태양신(太陽神)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곳에서 동심원 무늬가 4군데 새겨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