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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김정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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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마다 카네이션이 넘치는 5월. 꽃다발로 묶인 카네이션도 있고 바구니에 한 아름 담긴 카네이션도 있고 가슴에 달도록 핀이 달린 ‘한 송이 카네이션’도 있다. 그중 가장 마음에 와 꽂히는 것은 가슴에 달도록 핀이 달려 있는 ‘한 송이 카네이션’이다. 한 뭉텅이 바구니 카네이션이건 한 아름 꽃다발 카네이션이건 사실 카네이션은 다만 ‘한 송이 카네이션’이다. 한 송이 붉은 마음이면 충분한 것이다.
거리에 가득 찬 카네이션 앞을 거닐 때 갑자기 마음이 지극히 순(順)해지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 생각해 보면 아무리 흉악하고 살벌한 사람들 속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카네이션 꽃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나야말로 카네이션을 바쳐야 할 사람들이 많다는 그런 깨달음도 온다. 부모님의 사랑은 내복(內服)과 같은 것이니 굳이 드러내 놓고 찬미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성장하면서 내가 만난 분들이 카네이션 꽃송이 꽃송이마다 떠오른다. 그중에는 단연 선생님들이 많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님. “너는 꼭 시인이 될 거야”라고 말해주었던 그 순간의 선생님이 떠오른다. 중학교 교정엔 ‘히말라야 시더’라는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키 큰 소나무가 많았는데 그 소나무의 큰 날개를 바라보며 “저렇게 푸르고 큰 날개를 가진 시인이 꼭 될 거야”라는 꿈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그 격려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한마디의 말이 그렇게 사람을 만든다. 대학에서 만났던 그 소중한 스승들. 한국 문학을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지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옛날에 이민을 가서 지금쯤 이국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 틀어박혀 평범하고 고독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 세대 한국 여성에게는 성차별과 남근중심주의 가난한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 꿈이자 미래였으니까.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은 다 스승이라고 하지만 ‘진짜 스승’은 그렇게 우리의 사고와 미래를 형성한다. 남자도 아니고 학문적 업적도 부족한 나에게 오직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장뿐인 지도교수 추천장을 써주신 나의 스승을 기억한다. 만약 나에게 조금이라도 성실성이 있다면 그 속에는 그렇게 스승의 은혜가 들어 있다. 버클리대학에 있을 때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그렇게 애썼던 몇 교수님들. 우리의 현재는 그렇게 눈에는 안 보이지만 그토록 많은 카네이션 꽃송이들이 연결되어 있고 어쩌면 우리는 카네이션들의 네트워크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카네이션의 봉헌이 없는 마음이란 불모(不毛)의 마음일 뿐이다.
그러나 오월 거리거리 카네이션 꽃이 넘치는 만큼 진짜 붉은 감사의 마음이 많은 것일까? 실리와 자기 욕망의 달성이 중요한 시대니 만큼 감사(感謝)보다는 늘 불만에 익숙하다. ‘쿨’한 것을 지향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감사’란 질척질척한, 시대착오적인 촌스러운 감정 같기도 하다. 마음의 구속(拘束)이 되니까 너무 오래 감사할 필요는 없다. 감사해야 할 대상에게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배신과 증오와 비방(誹謗)을 가하는 것도 보았다. 세상은 어차피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는 가장무도회. ‘자기 이익’이 어느 종교보다도 우세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사 같은 것은 구속이 되니 내쳐버리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최고라면, ‘감사’와 ‘자유’는 반대말?
한때 ‘스승의날’ 초·중·고 학생들이 등교를 않도록 하는 행정 조치가 있었다. 스승의날 선물 부작용 때문이라던가? 빈대 몇 마리 잡느라 완전히 초가삼간을 불태워버린, 그야말로 반(反)교육적 야만주의 행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승은 지엄하다. 스승이 지엄하다기보다 스승의 은혜가 지엄하다. 우리 문화가 그 지엄성을 보호하고 기리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잔인성과 기회주의적인 이익 추구뿐이다. 자, 그러니 스승에게, 또 고마운 길동무들에게 아낌없는 카네이션을 바치자. 은혜를 진짜로 갚는 길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카네이션의 환한 고리로 연결되어 가는 세상. 감사를 느끼고 그것을 이어갈 줄 아는 세상. 존 레넌이 꿈꾸었던 ‘이매진(Imagine)’의 세상에다 꼭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세상이다!
(김승희 시인·소설가·서강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