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부산진여중학교에서 열린 2005년 재부울진군민회는 평소 두배인 약 1천 5백명 이상의 울진사람들이 모여 큰 잔치판이 벌어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수백명에 불과하던 군민회가 이처럼 활성화 된되는 현 김경만(56세) 회장을 비롯한 회장단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지금까지 서울군민회와 포항군민회가 활성화 되어 타지 사람들은 울진군민들의 단결과 화합을 부러워하여 한국의 별종 군민들이라고 비아냥 거림을 받을 정도였는데, 부산군민회가 이를 또 증명이라도 하듯 부산 최고 향우회로 발돋움하고 있으니, 앞으로 그들은 울진사람들을 울진 특별군민들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김경만 회장은 군민회를 활성화 시키는 방법으로 면민회의 결성과 활성화에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울진 10개읍면 출신 중 서면을 제외하고 9개읍면이 결성이 되었고, 멀지 않아 서면도 곧 결성될 전망이다.
그는 약 20년 전부터 군민회이사로 참여하여 부회장직을 역임하며, 울진사람들의 화합과 단결을 이끌어 오다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49년 후포 삼율리 출신이다. 그가 세운 기업의 이름에는 항상 자신이 태어난 곳 삼율이 들어간다. 삼일기공, 삼일 정공, 삼부스텐 이름 속의 ‘삼’ 은 삼율을 뜻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출신과 고향을 드러내고 있으니, 자신의 모국을 사랑하는 사람이 애국자라면 고향을 사랑하는 김회장 그야말로 애향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배운 것도 없고, 또 결혼할 당시 돈 한푼 없고, 허리를 다쳐 몸마져 성치 않았지만, 사람하나 믿고 결혼을 해준 그의 부인이 태어 난 곳도 삼율이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은 중학교로 진학을 했지만, 그는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을 못하고, 6년 내내 우등상을 받았던 그는 서점 점원이 되어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하고 낮에는 점원을 하고 저녁이면 밤늦게 까지 혼자서 강의록으로 독학을 했다.
17살이 되던 해 그는 현재까지의 40년 간 오로지 한 길 쇠(철공)와의 인연을 맺었다. 후포동림수산에 들어가 철공기술을 3년간 정말 열심히 익혔다. 그의 쇠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인천의 한 철공소의 기술자로 뽑혀 갔다.
그러나 금방 인천에서도 일류기술자로 인정을 받게 되자, 22살이었던 그는 부산의 제법 규모가 큰 회사의 책임자로 스카웃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크나 큰 시련을 맞아야 했다.
작업중 허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해 척추수술을 받아 6개월 동안 대소변마져 받아내어야 했고, 오른 쪽 다리에 신경이 마비되어 고향집에 돌아와 1년간 혼자서 가시덩쿨에 넘어지면서도 밤늦게까지 걸어야 산다는 재활 의지를 불태웠다.
약 1년 후 몸이 어느 정도 정상을 찾았을 때, 주위의 반대도 있었지만 어렵사리 결혼식을 올렸다. 이 때 그는 24살이었다. 결혼 부조금 2만원을 들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 당시 방 한칸 부엌 하나 딸린 방세가 보증금 2만원에 월세 1만원 정도였다. 그의 부인은 댓쌀을 사 먹는 처지에 점심마져 거르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김사장을 내조했다.
2년 뒤 사상버스정류장 인근에 구멍가게 철물점을 열었다. 모두 10평. 여기에 아이 하나와 3식구 점포겸 살림집을 겸했다. 자전거를 타고 정말 부지런히 공장들을 쫓아 다니며, 배달하고 영업을 했다. 정비중인 버스기사들에게 수천원을 더 팔기 위해 밤새워 가게 문을 닫지 않았다.
약 5년을 열심히 하다보니, 약간의 돈을 모았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꿈을 찾기 시작했다. 후포동림수산에서 철공일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면서 키워 왔던 큰 규모의 기계공장을 만들겠다는…. 이 때 그의 나이는 31살 1979년이었다.
처음은 작게 30여 평의 기어제작 공장인 <삼일기공>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약 10년을 운영하여 적지 않은 약 10억원을 벌었다. 여기서 그는 또 한번 도약을 시도했다. 사상공단에 20억원을 투자하여 각종 기계장치에 소요되는 감속기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차렸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되던 공장이 나중에는 어려워져 공장 설립 6년만에 과감히 정리했다. 무려 12억원이란 결손을 보았다. 1995년 47세 되던 해 사상공단에다 스텐레스 후판 프라즈마 절단 업체인 현재의 (주)삼부스텐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1백평 소규모 공장이었다. 점점 회사의 규모를 키워갔다. 250평에서 500평, 700평. 수년전 인접공장을 매입하여 1200평 규모의 회사로 커졌다. 그러나 삼부스텐도 한 때는 고난이 있었다. 설립 초기 적자는 누적에다가 또 부도를 맞고, 3년차에는 IMF를 맞았다. 이 때가 자신의 사업 인생에 흥망의 기로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연령적으로 보나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 삼부스텐을 살려내야 했다. 그는 울진사람이다. 울진에서 태어나고 울진에서 자랐으며, 울진에서 장가 가고, 어릴적 강인한 후포바다의 내음과 기세에서 호연지기를 체득해 왔지 않았는가! 울진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은 그에게 독한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쇠를 다루는 정밀기술이 있었다. 자신의 모든 정성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현재 6명의 사무직과 14명의 고급기술자들을 거느리고 국내 스텐레스프라즈마 절단업계 최고 최대의 기술과 규모를 갖추어 금년 매출액 규모가 약 150억원이다.
부산의 기계업계 사람들은 그 어려움속에서도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이름없던 삼부스텐의 급성장을 놀라워 하며 그 비결을 배우려 한다. 지난해 그는 세계 스텐강판 경기가 활성화 될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과감히 스텐원판을 대량으로 비축하여 기술력 뿐만아니라, 제품원가 경쟁면에서도 국내동업계 최고 경쟁력을 지녔다.
정밀도와, 납품기일에서 이미 명성을 얻고 있던 삼부는 지금 국내유수의 조선소와 원자력발전소 부품업체에 납품을 하고 있고, LCD 진공관 소재를 생산하며, 전국 각지에서도 삼부제품에 대한 공급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김사장 이제는 내실을 다지겠다고, 그리고 남는 시간을 고향의 일에 헌신할 것이란다. 잘사는 울진 고향을 위해 더욱 사업에 열심히 매진하는 것이 고향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전병식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