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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양문규
영국사에서 집으로 가는 길
산수유 가지 위
새들이 안팎 없이 노닌다
노오란 꽃잎,
쪽빛 물구덩 노랗게 물들인다
그 속을 참개구리
암팡지게 기지개 펴며
물방귀를 뀐다
논밭에선 농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노인의 허리 굽은 삽질
아버지도 배 밭에 거름을 뿌리고 있겠지
삶의 검붉은 때 배꽃처럼
환하게 꽃 피울 수 있을지
썩은 두엄더미 옆으로 개가 지난다
집으로 가는 길
많은 꿈들 울음으로 메마른
그 못난 사내,
앞길 열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산채만 한 슬픔이며 아픔
살포시 감싸안아주기도 하는 것이다
배의 향기는 아버지의 땀 냄새다
무엇을 뜨겁게 쏟아부었는지
입술로부터 아주 작은 희망이 부풀려진다
산등성이 비알진 밭뙈기
배나무 속으로 흐르던
짐승의 뜨거운 눈시울
가지마다 시절에 찌든 잎 비끄러매고 있다
일흔 가까운
빈 수레 같은 생이
누런 봉지 안에서
그믐달보다 더 시린
달빛을 꺼내고 있다
꽃들에 대하여 / 양문규
올해 처음으로 피어난 꽃들에 대하여
아름답다 말하지 말자
봄날로부터 가을에 해거름까지
우리들이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의 어디에서나 피어있을
그 꽃들을 함부로 얘기하지 말자
그리움과 사랑 같은
혹은 순수나 빛깔 따위
마음을 치장하는 너울이 아님을
가지마다 흐트러지는 잎의 하나하나에
말 못할 아픔 베올로 짜여 있음을
우리 얘기하지 말자
묏등 가에 서 있는 들꽃 한 송이
멀리서 그저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아니, 이 땅의 주름진 하늘 끝에 닿아
되돌려지는 메아리로
누구나 꽃밭에서 생각하던
통곡하다 떠나간 거리의 한 모퉁이
들꽃에 대하여도
우리 말하지 말자
결코 아름답다 얘기하지 말자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면서 / 양문규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나는 오늘 밤에도 또 헐벗은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면서 겨울나무 밑둥엔 살기가 감돌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처럼 부질없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나는 이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면서
내 하는 작업이 더없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가혹하게 겨울나무 밑둥에 물 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는 나와
그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는 나에 대하여,
또 사람들은 말하리라.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는 나와
그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는 나에 대하여,
무언가 소리 없는 비정한 분노의 싹이 곧 움틀 것이라고
날망집 감나무/ 양문규
날망집에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 있다
새들이 내려앉을
삭은 나뭇가지 하나 달고 있지 않는,
하늘과 땅 사이
오직 마른 외마디 기둥으로 서 있다
아침이면 새들이 우짖는
탱자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텃밭을 일구다가
저녁이면 어둔 그림자만 이끌고
집으로 들어서는 노인
어느새 그 나무 내 속에 들어와 있는가
탱자나무 울타리 떼지어 사는 새들
날망집 감나무 비껴
또 다른 허공으로 날아간다
시래깃국 / 양문규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 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계간 『시와 시』 2010년 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0년 올해의 좋은 시
산동네 돌담길 따라가다
꽃보다 먼저 사랑을 꿈꾸었으리
뒤척이는 몸 일렁일 때마다
사립문 금줄 타고 달빛에 젖었으리
옛날도 그 옛날도 그러했으리
해와 달 바뀌고
별이 바뀌었어도
애기똥풀, 노오란 꽃
장작을 패며 겨울 난다
저 잘린 굵고 흰 장딴지 나무토막
허리 꺾인 사십 중반의 생인지도 모를
나무 빠갠다
허연 살 드러나도록 잘게 부순다
도끼날에
어둑어둑
찢겨 날아간 생
장작 패며 겨울을 난다
빠개진 장작 갈피 기웃기웃 들여다보면서
마당 한 가운데 너럭바위 있다
댓돌 위 검정 고무신 있다
마루 한쪽 맷돌 확독 있다
뒤뜰 크고 작은 독 있다
외양간 코뚜레 한 소 있다
사랑채 흙벽 종다래끼 뒤웅박
키 호돌이 삼태기 있다
뒷간 똥장군 똥바가지 있다
정짓간 쇠솥 있다
조와신 절구통 절굿공이 있다
헛간 벽 쇠스랑 갱이 갈쿠리 걸려 있다
도리깨 홀태,
족답식 탈곡기 있다
쟁기 지게에 얹혀 있다
닭장 닭둥우리 있다
개울 나무다리 놓여 있다
뒷산 서낭당 있다
상엿집 있다
천태산 남고개 너머
더 깊은 골짝
장선리
어머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감 깎는다
족히 열접 넘어 보이는 감들
어머니 손끝에서 껍질 벗겨진다
나는 잘 깎인, 둥그런
감들 싸리 꼬챙이 꿰어 처마 끝에 매단다
시커먼 그을음뿐인
내 몸도 실은, 속살마저
가을볕으로 포개지는
연한 건시乾枾가 되고 싶다
헌 푸대자루에 담긴
저물대로 저문 어머니의 뼈같이
상강霜降 무렵, 허공 중에 매달리고 싶다
새벽녘 / 양문규
들밭의 칠순 아버지
땡감처럼 탱글탱글하다
별들이 뽀얀 화장을 지우고
소텅소텅 솥이 텅 비었다는
소쩍새 울음 따라
들밭에 거름내고
논 갈고 밭 갈고
인삼밭에 풀 뽑고
배밭에 로터리치고,
어머니는 아궁이에 식은
된장찌개 아욱국 데우고
또 데우고
소쩍새 울음은 그친지 오래
아버지의 겨울/ 양문규
밤은 깊었는데도 아버지의 방엔 불빛이 환하다
헐렁하게 개어진 카시미론 이불 같은
일흔의 아버지
아랫목에서 타래노끈을 짤막하게 끊고 있다
말을 듣지 않는
무릎 관절을 다독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놀림
칼끝처럼 예리하다
눈꺼풀 가늘게 열리는
아침이면
진눈깨비 치는 강을 건너
산비알 인삼밭으로 나아가리라
거친 바람에 삐걱이는 지주목
미치광이 춤을 추는 차광막
틈새를 비집고 뼈와 살이 되는,
끝내는 땅을 지키는
아버지의 무서운 일독
어둠 깊으면
그 자리
봄빛 가득 살아오려는가
영국사에는 梵鐘이 없다 / 양문규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산과 산 사이로 구름이 낮게 흘러가고
바람 속을 종소리 대신
소똥 묻은 새가 울고 간다
스님은 심장을 드러내고 계곡물 소리를 듣는다
서로 가는 것을 묻지 않고,
길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소리들이 되돌아와 발 디디는 곳마다
종을 울린다
물은 흘러가는 것을 묻지 않고 계속 흐른다
마음 속의 觀音
종소리 아닌 종이 운다
절 밖
아름드리 은행나무,
큰 울음
나뭇등걸 속에 내장한 채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다
지상의 마지막 暴雪 앞에 / 양문규
지상의 마지막 폭설 앞에 매달려 있다
산중의 쇠붕어
정오의 햇살을 더듬는 듯
폭설의 언덕 너머
언 강물 속으로 遊泳해 간다
어둠 속으로,
금빛 지느러미 마른 물살을 가르며
산중의 폭설을 기억한다
마을 너머 저편
사랑이 움터왔음을 또한 기억한다
멀리 눈 덮인,
겨울이 다 저물도록 내밀한 울음
讀經 소리에 묻으며 살았으리
뒤뜰 대숲, 눈보라에 귀를 대고
淸明한 사랑
밤마다 꿈꾸며 살았으리
해가 바뀌고
다만 폭설 한가운데 들어가 앉아
오래 전 꿈속에서 보았던
날개 없이 하늘을 날고 있는
나비, 나비부처들의 흰 너울을 껴안고
지상의 마지막 폭설 앞에 매달려 있다
애호박 / 양문규
풀숲의 뜨거운 눈시울
풀벌레도 숨어들어 삶을 이루는 곳
맑은 햇살이 종일 머물다
달덩이 하나 키운다
풀의 노래 / 양문규
내가 밤마다 꿈꾸는
꿈의 빛이 무엇인지
어둠 속에 누운
빈 들의 속살 헤집고
바람, 바람 속으로
자꾸만 빨려들어가는 까닭을
내가 꽃이 아니고
막다른 벼랑으로 벼랑으로 내달리는
푸르른 구름이었을 때
홀로 서 있는
낯선 푸르름이었을 때
이제는 각자 헤어진 식구들이
여린 눈빛이 어른거렸을 때
그들은 내게 가까이 와서
말했지 노래했었지
그래, 우리 삶은
푸른 하늘
징징 가슴을 가득 메우는
저 노랫자락이라고
밤마다 풋풋한 흙
거기 깊게 뿌리내리고
저 혼자
외롭게 부르는 노래라고
그늘 속에는 / 양문규
하늘 받든 은행나무는 안녕하신지?
햇살 푸지도록 환한 날
다시 천태산 영국사로 든다
은행나무는 낮고 낮은
골짜기를 타고 천 년 동안 법음 중이다
해고노동자, 날푼팔이, 농사꾼
시간강사, 시인, 환경미화원
노래방도우미, 백수, 백수들......
도심 변두리에 켜켜이 쌓여 있는
어둠이란 어둠,
울음과 울음의 바닷속을 떠돌던
사람이란 사람 모다 모였다
가진 것 없어 정정하고
비울 것 없어 고요한
저 은행나무 그늘이 되고 싶은 게지
하늘을 닮아가는 아버지도
밭둑가 구름이 드리운 그늘에
잠시, 고단한 몸 풀고 있을 것이다
모든 그늘 속에서 쉬는,
키가 큰 만큼 생이 깊은
영국사 은행나무 아직도 법음 중이다
내 몸 속에 너를 키운다 / 양문규
내 몸 속에 너를 키운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살을 저미는 적막 속에 너를 가두고
굴참나무 숲 바람 소리에 몸을 기댄다
간간이 뒤울 안에서 우는 굴뚝새 울음처럼
나는 어둠을 타고 흐른다
언제나 하늘은 산 마을 그림자를 껴안고
인기척 없이 또 한 슬픔을 거둔다
그대 가파른 절벽을 때리는 소리
잎새의 작은 떨림도 재우지 못하고
살과 뼛속 젖은 살로 스민다
내 몸 속 가시만 돋는다
인적 드문, 변방에 집 틀고 외로이 진다
침묵보다 더 시린 별 하나
내 몸 안에 가두고
어둠 밑으로 뿌리를 뻗는다
그리움 저편, 애태우며 토해내지 못하는
바위 속 뜨거운 눈시울
내 몸 속에 너를 파묻고
내 몸 속에 너를 키운다.
<<양문규 시인 약력>>
*1960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
*청주대학 국문과 졸업.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학위 취득.
*1989년 《한국문학》에 〈꽃들에 대하여〉 외 1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벙어리 연가』(실천문학사, 1991)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실천문학사, 2002) ,
『집으로 가는 길』 (시와 에세이, 2005)이 있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총무국장, 열림원 기획위원, 실천문학 기획실장 등을 역임.
*대전대, 명지대 겸임교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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