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쉬운 서정시의 가능성

[조수웅]

짧고 쉬운 서정시의 가능성

조수웅

요즈음 발표되는 작품 중에는, 40년 국어 선생에, 대학에서 17년 문학 강의를 한 나도, 알기 어려운 괴팍하고 난삽한 시가 많다. 이런 시를 중견시인은 물론 젊은 시인도 즐겨 쓰고 있고, 그 흐름이 대세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물론 이는 나의 엉성한 시적 감각 때문임을 먼저 인정하지만 그렇다손치더라도 얼른 수긍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굳이 ‘밀교주의’니 ‘대중주의’니를 따지지 않더라도 시의 본령은 서정성이다. 시는 산문과 달라 고도로 조직화해서 감춰 말하고 돌려 말하여, 애써 귀 기울이는 자만 감동하고 느끼게 되어 있다는 기본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난해하고 번잡한 시와 김이호 시를 견주면서, 시의 본령은 서정성임을 다시 새겨본다.

조병화 시를 떠올리면서, 쉬우면서도 아름다움을 갖춘 시는 쓸 수 없는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한다. 다시 말해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시, 서정시의 정도(正道)를 되살린 시는 쓸 수 없는 것인가를 고민하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난삽하고 기괴한 시가 장황하기까지 하면 일반 독자들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이렇게 독자에게 부담을 주는 시, 너무 어렵고 지루 할 정도로 긴 시 그래서 독자에게 권태, 피로, 짜증만을 안겨주는 시를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쉽고 짧게 그러나 금방 가슴에 와 닿는 그런 서정시는 쓸 수 없는 것일까? 다음 시들을 음미해보자.

색동무지개

여름 소나기 그친

저녁노을에

동쪽 하늘에 색동무지개

이 저수지에서

저 저수지로

이은 무지개

너무 곱고 아름다워

잡으러 쫓아가면

저 멀리 저 멀리

도망가는 색동무지개

워즈워드의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를 연상케 하는 이 시는 ‘잡으러 쫓아가면//저 멀리 저 멀리/도망가는 색동무지개’에서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의 순수한 어린이의 영혼을 담은 것이다.

저수지 물

저수지 물은

출렁거린다.

누가 보지 않아도

출렁거리고

내가 몰래 보아도

출렁거리고

자기들끼리 만나도

출렁거리고

운동 삼아

출렁거리고

맑은 물 되려고

출렁거린다.

이 시는 자연 속의 나 즉, 물아일체의 경지라고나 할까. 소통 없이 오직 나 자신만을, 우리 가족을 이익만을 위해 사는 현대인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영안(靈眼)으로 ‘맑은 물 되려고/출렁거린다.’를 발견해낸 것이다.

친구들아 모여라

코 흘릴 때

좁은 방에서

같이 놀았지만

몸집이 커지면서

방이 좁아

전국각지로 흩어졌지만

내가 농사지은 돈으로

크은방 만들어 놓을 게

친구들아 다 다시 모여라

‘사람은 빵만으로 살수 없다’는 서양 속담이 생각나게 하는 시다. 돈도 안 나오고 배도 부르지 않지만, 시인은 시를 쓴다. 큰방 다시 만들어 어렸을 적 친구 다 다시 모이게 하려고 말이다. 이를 어찌 돈과 권력으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건강한 호박순

호박순이

건강하게

계속 뻗는 것은

뿌리와 흙이

깊기 때문이다.

호박순이

건강하지 못하고

일찍 시든 것은

뿌리와 흙이

앏기 때문이다.

뿌리와 흙이

깊은 것은

양심과 진실이 있고

착하게 사는 것이오.

뿌리가 얇은 것은

양심과 진실이 없고

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정자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며 양심을 들먹인다. 태초의 원시인 같은 김이호 시인은 호박순 하나면 뭐가 양심이고 뭐가 진실인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다림

아내가 목포 청호시자에

콩과 팥을 팔러갔다.

해지고 어둑해졌으니 오겠지.

오는 버스마다 이번에느 아내가 탔겠거니

기다리다 지쳐 집에 와도 마음 조여

다시 승강장으로 간다.

이 버스 저 버스 다 지나가도

아내 모습은 밤처럼 깜깜하다.

아내 사랑! 이것은 계산도 안 되고 만질 수도 없으며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김이호 시 ‘기다림’에 오롯이 배여 있을 뿐이다.

이 다섯 편의 시는, 내가 말한 짧고 쉬운 서정시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만, 인간 김이호와 섞어 그의 시를 읽노라면 정말 그런 시에 근접하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김이호 시인은 자칭 농부 시인이다. 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니 그 말이 틀리지 않다. 그는 ‘시는 특수하고도 높은 언어 전달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는 완전한 일상어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거나 ‘따라서 언어의 시적 조직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의 복잡 미묘한 느낌과 태도와 생각을 사실에 보다 가깝게 전달할 수 없으며, 인생과 우주의 은밀한 진실을 그대로 파악하고 표현할 수 없다’는 식의 고상하고 체계적이며 논리적인 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그냥 농사일을 하다가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논두렁에서 잠간 메모해뒀다가 잠자리에서 시를 완성하곤 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시 공부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요즈음 대학마다 문창과가 있고 그 유명한 문창과 출신들이 중앙일간지 신춘문예를 휩쓸다시피 하는 것을 보면 시 공부가 그리고 이름 있는 교수의 지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시 창작에 왕도(王道)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살아 있는 증인이 바로 김이호다. 시 공부를 시작하는 문창과 학생들에게 시 이론을 깨우쳐주거나 첨삭 지도를 해주는 것은 마땅한 처사다.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 자신이 갖고 있는 비법과 미묘함까지 제자에게 전달해준다 가정하드라도(실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래서 제자는 스승의 수준까지 갈 수 있을지라도 그가 스승의 시를 뛰어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스승은 그 기법으로는 이미 최고의 시를 써버렸기 때문이다. 스승의 기법대로 100% 익혀 쓴 제자는 그 스승이 쓴 시만큼 밖에 안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정교한 시 공부가 외려 발랄하고 참신한 시 탄생을 가로 막는 한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김이호 시를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이다. 물론 김 시인의 시는 아직 설익었다. 시의 완성도도 떨어진다. 마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소재를 순간 포착한 것을 미처 다듬지 못하고 꺼내 논 듯 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김이호 시를 높이 사는 것은 앞에서 말한 장황, 난삽, 기괴한 중견시인들의 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짧고 쉬운 서정시가 될 수 있겠다는 점이다. 시적 완성도도 차츰 높일 수 있는 가망이 보인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김이호 시에는 농부의 순수한 영혼을 담아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물질만능의 이 척박한 세상에서 그나마 인간성을 지킬 건 시 뿐이고, 현대인보다 원시인이, 어른보다 아이가, 그리고 도시인보다 농촌사람이 쓴 시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시적 기교와 상관없이 김이호 시가 소중한 이유다.

[최정웅]

짧고 쉬운 서정시의 가능성, 잘 보았습니다.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김이호 시인의 시는 참 좋습니다.

[박일훈]

시인 김이호 이사님의 시가 가지는 장점을 잘 풀어주셔서 많은 이해와 공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조수웅 고문님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다복하셔서 후학들에게 귀한 가르침 전수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김이호]

조수웅 문학박사님! 저의 시를 읽어봐 주시고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너무 고맙고 감사 합니다. 앞으로 조 박사님에 기대에 어긋남 없이 잘하겠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 하십시요. 그리고 댓글 달아 주신 선생님들고맙고 감사합니다.

[김춘남]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김이호 시인님이 계시는 곳이 눈을 감아도 보입니다. 김이호 시인님의 마음이, 눈을 감아도 느껴지고 보이는 또 한가지는 조수웅 회장님의 남도 문학 사랑의 깊이..회장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올 한해도 건강하셔서 많은 가르침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