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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생명의 빛, 소금언약, 산상수훈, 권위있는 새 교훈
1. 말씀배경
▶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5장 1절에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8장 1절에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5장-7장까지가 산상수훈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많은 무리들에게 놀라운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 마 7: 28-29절에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받은 무리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놀라다 (헬,에크플랫소)는 원어적인 의미는 한 대 맞은 것과 같은 충격적인 놀람입니다.
왜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권세(헬, 엑수시아)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단지 자기들이 배운 지식이나 장로의 유전으로 가르치기 권위, 권세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27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권위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치유가 일어나고 귀신들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지식 차원을 넘어서 성령의 역사로 말씀의 권위가 있고, 사람들에게 놀라게 하는 말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오늘 두 번째로 가르치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믿는 우리들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 정체성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냐?“에 대한 것입니다.
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대하여 강조하는 두괄식과 같이 먼저 말씀하시고, 이런 복을 받기 위해서는 ②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로 연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③ 그리고 이어서 율법적인 내용, 도덕적인 내용 등을 가르치고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우리들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면 앞서 말씀하신 팔복도 받을 수 없고, 이어지는 말씀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이라는 정체성을 갖는 것은 믿는 자에게 정말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먼저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의 삶은 많은 부분 그렇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대적했던 많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 로마서를 보면, 바울 시대에도 소금과 빛의 삶을 살지 못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가증한 우상을 섬기고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게 하고, 무할례자와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 2:21-29)
오늘 말씀의 내용으로 본다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한 그들의 모습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은 유대인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 여호와의 성민, 소유로 삼으시고 세상 모든 민족이 유대인을 통하여 구원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출 6:7, 출 19:5, 레 25:12, 신 7:7, 신 26:19).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그들은 선민으로서 특권의식이 대단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기만 하면 자신들도 다른 민족들보다도 특별한 복을 받을 수 있고, 다른 민족들까지도 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창 22:18). 그런데 삶은 실제로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롬 2:21-29)
▶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들의 삶은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① 소금이 맛을 잃은 것처럼 ② 빛을 발하지 못하는 꺼진 등불처럼, 말 아래 감추어진 등불처럼 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로서 자신도 구원을 받고, 소금과 빛처럼 세상에도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데 말입니다.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의 명령형이 아니라 ”~이다”로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되라”의 명령형이라면 원래 소금과 빛이 아닌데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노력하라는 의미가 있는 반면에, “~이다”는 원래 우리들이 소금과 빛인데 이런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소금과 빛인 우리들이 소금의 맛을 잃었고, 빛인 우리들이 죄의 어둠에 가리워져 빛을 발하지 못하여, 마치 등불이 말 아래, 등경 아래 둔 것처럼 비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 죄의 영향이요 열매들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거룩함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소금과 빛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가 문제입니다.
▶ 이 소금과 빛의 정체성은 우리들의 사명과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소금과 빛으로서 소금의 사명, 빛의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무언가에 해야할 필요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들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이 끝나면 죽는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도 사명이 마쳐지니까 일찍 가셨습니다. 우리들도 소금과 같은, 빛과 같은 사명을 감당하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가룟유다와 같은 악한 자의 도구로 쓰임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룟유다처럼 하나님을 팔고, 예수님을 팔고, 성령님까지 모독하는 자들이 그런 자들일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교회까지 이용해서 장사를 하면 바로 가룟유다와 같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기에 억울한 면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가 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 망나니 자식이 있다면 누가 그 자식이 태어날 때 부모의 마음이 망나니가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가 바라는 자식이 되어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가 빠지면 그의 공백이 커야 합니다.
소금과 빛은 인간에게나 동식물들까지도 없어서는 안될 존재입니다.
소금이 없어도 살지 못합니다. 빛이 없어도 살지 못합니다. 금방 죽지는 않지만 결국 나무가 시들듯이 죽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살리고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 그러면 우리들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의인이 없는 악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창 6:5).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전도서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그래서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소금에 사용된 세상의 헬라어 원어는 ”게“입니다. 이것은 하늘과 대비되는 땅을 뜻합니다.
소금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함을 가르쳐 줍니다.
→ 그리고 빛에 사용된 세상은 ”코스모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우주입니다.
빛이 하늘로부터 비추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온 우주까지 영향을 미치는 빛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찬란한 태양 빛이 온 세상의 어둠을 밝히듯이 말입니다.
1) 먼저, 우리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을 보면 소금이 된다는 영적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소금의 역할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지금은 소금이 많아서 흔하지만, 과거에는 소금이 귀하여 소금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까지 했습니다.
→ 과거 주몽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주몽이 소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소금 광산이 있다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자의 목숨까지 걸고 가는 것입니다.
→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북방 4왕과 가나안 땅 5왕과의 전쟁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 갔는데, 아브라함이 모든 포로를 재물과 함께 다시 찾아오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전쟁의 원인이 많은 학자들은 지금의 염해(창 14:3), 오늘날 사해바다로 불리는 곳에서 생산되는 소금이라고 주장합니다.
사해바다의 염분은 보통 바닷물의 염분은 4-6%의 4배나 되는 25%나 됩니다. 소돔성이 부자가 된 것은 아마 소금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소돔 왕, 고모라 왕 등이 소금을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게 십이 년동안 바쳤는데, 십삼 년이 되는 때부터 바치지 않아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강대국에게 공물로 바치고 소금이 부족하면 소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전쟁을 치를 만큼 소금이 인간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물질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많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소금과 같이 되기 바랍니다.
① 실제로 소금은 인간에게나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생명과 같은 존재입니다.
소금을 섭취하지 않으면 체내 전해질 불균형으로 혈압저하, 근육경련, 혼수상태, 심장마비가 일어나고, 체내 수분 균형이 깨져서 탈수증, 부종과 같은 증상이 일어나고 소화불균형도 일어납니다. 식물도 성장 저해가 일어나고 동물도 기능적 장애를 가져오는데, 소금끼가 있는 바위를 핥고 있는 동물을 보신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이 없으면 해양 생태계도 다 파괴되고 소금끼가 없으면 바다가 썩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인류에게 마치 생명을 주는 물질과 같은 것입니다.
→ 엘리사가 여리고성의 물이 나빠 토산이 익지 못하고 열매가 떨어졌는데 그 물 근원에 소금을 던지니 물이 고쳐져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왕하 2:19-22). 영적인 초자연적인 일이지만 소금은 이와 같이 살리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우리들이 소금된 삶을 산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삶인 것입니다. 살리는 자입니다.
자살의 위기에 있는 자들을 살리고, 실의 빠져 죽음의 위기에 있는 자들을 회복시키는 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고, 안수해 주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주고 위로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된 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② 소금은 또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들어가면 음식의 부패를 방지합니다. 썩지 않게 합니다. 변질되지 않게 합니다. 생선 같은 것을 소금에 저려서 보관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죄로 인하여 많이 썩어져 있고 부패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된 삶은 이런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죄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마약을 판매하고, 도박장을 운영하고, 술집을 운영하고 퇴폐업소를 운영한다면 오히려 썩게 만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 내야 하는것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사역할 때에 런던의 술집이 반 이상 문을 닫고 에수를 영접했습니다.
▶ 소금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변질방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한 신실함도 소금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언약을 소금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레위기 2장을 보면, 소제물에 소금을 치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제는 곡물로 드리는 감사제입니다. 소금을 치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믿고 우리들도 변함없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변질 방지입니다. 영적으로 순결함, 성결함을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에 지옥에서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눅 9:48, 공동번역: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③ 또 소금을 맛을 냅니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은 맛이 없습니다. 그 량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일 맛이 없는 것은 싱거운 것입니다.
소금된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맛을 내는 자와 같습니다. 그가 있음으로 인하여 행복해지고 살 맛이 나는 것입니다.
소금은 다른 것과 어우러져 다른 것들이 맛을 내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잘 살게하고, 기쁘게 하게하는 촉매제 역할인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기 시작하면 자기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녹아져 그들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땅에서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내 자신이 녹아져 없어지는 것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을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소금이 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소금이 맛을 내는 것은 화목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막 9:50]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에 절여져 자신이 죽고 낮아져 겸손하게 되어 어우러질 때에 모두가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치가 맛을 내기 위해서는 소금에 절여져야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고집 부리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있다면 그 속에 소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소금이 되셨나요?
③ 또 소금은 치료제 역할도 합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약이 많지 않으므로 소금을 환부에 뿌렸습니다. 아마 소독 역할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도 신생아에게도 소금을 문질러 소독을 하고 그 몸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겔 16:4)
소금된 삶은 아픈 세상을 치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이런 그들을 치료하고 위로하는 삶이 소금된 삶인 것입니다. 자기가 치료할 수 없다면 치료의 하나님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 이렇듯 소금의 역할은 대단합니다.
이런 소금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소금의 모양은 있으나 맛을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 버려져 밟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순수한 소금이 맛을 잃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소금에 불순물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소금이 비를 맞으면 맛을 잃고 찌꺼기만 남게 되는데, 그러면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되더라도 순수한 소금이 되어야 맛을 잃을 염려가 없습니다.
▶ 식용에 있어서는 소금의 정체성은 짠 맛입니다. 물론 칼슘, 마그네슘, 칼륨과 같은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어 또 다른 기능도 있지만 부가적인 기능입니다. 주 기능은 짠 맛입니다. 이런 짠 맛을 잃어버리면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오늘날 우리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리적인 태양빛도 발할 수 없고, 영적인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의 근원이 우리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빛도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영적인 빛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첫째 날에 창조한 것이 ”빛“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알고 보고 경험하고 있는 빛은 넷째 날에 태양과 달과 별들을 통하여 비치는 빛입니다. 그래서 첫째 날에 창조한 빛은 분명히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첫 날에 창조한 빛은 태양과 달, 별들이 없어도 비치는 영적으로 어둠과 대비되는 빛이요, 영적으로 낮과 밤을 구분하는 빛인 것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빛이요, 진리를 알게 하는 빛이요, 생명의 빛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인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 곧 우리들이 영원히 거할 천국에는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태양 빛과 같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빛으로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한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인 것입니다 (출 34:29-30).
그러므로 우리들이 비추어야 할 빛의 근원은 빛 되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12]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 결국 우리들이 빛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고, 빛 되신 에수님을 드러내는 삶인 것입니다. (요 12:35-35).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나의 영광, 내 영광“, ”나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9: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디도에 대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라 했습니다(고후 8:23)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될 때에,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빛으로 사셨습니다.
▶ 다시 정리하면, 빛된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요, 예수의 형상과 인격, 능력을 드러내는 삶이며, 예수님과 같은 선한 삶을 살고, 생명을 전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사랑의 삶입니다. 겸손의 삶입니다. 이적과 기사가 드러나는 능력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빛이 되면 이런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빛이 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입니다.
▶ 빛이 되면,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도 비춰지고, 산위에 있는 동네까지도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도 드러나고, 비진리도 드러납니다. 어둠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 등불은 빛을 비추는 도구입니다. 등불을 켜서 말(헬, 모디오스, 되보다 10배 큰 동량형 기구) 아래 두지 않고, 평상 아래 두지 않습니다. 어둠을 좋아하고 빛이 되지 못했기에 자꾸 바퀴벌레처럼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빛이 되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데 말입니다 (현재 능동태)
▶ 빛된 삶은 외적으로는 착한 행실, 선한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 것입니다.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과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4-15]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그리고 내적으로는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의 정세성을 빵빵하게 가질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맺는 말씀>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서, 선한 삶을 넘어서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내 언행심사, 삶의 모습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하고, 타락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가 아닌 사탄의 나라에 확장하는데 동조하고 있다면 그는 소금도 아니요, 빛의 자녀도 아닌 것입니다.
산상수훈 두 번째로 소금과 빛이라고 우리들의 정체성을 말씀하신 주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 모두 썩어져가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