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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화는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이등박문을 총살한 안중근의사를 이야기하고자 혀.
113년전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일제의 아시아 침략과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역에서 저격하여 철천지 원수를 총살했지요.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은 수상 네차례 지낸 일제의 정치실세이자, 조선통감부의 통감이었으므로 한국민들의 철천지 원수였다.
철천지 원수 대한제국 최고의 원수 이등박문을 사살한 대한국인의 영웅 안중근 의사 장하다.
아베신조가 얼마전 총탄에 사망했는데, "아베 신조"가 수상으로 있을 때 한일관계가 가장 악화되었으며, 그는 틈만 있으면 군국주의 부활을 획책한 인물이여.
한국인의 원수를 총살한 안중근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계만방에 알렸으며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인물이었다.
7월의 무더운 더위에 건강관리 잘 하시고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안중근(1879.9.2~1910.3.26 32세)은 누구인가?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본관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에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어려서 안응칠(安膺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세례명은 사도 성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 그래서 안중근 토마스(혹은 도마 안중근)라고도 불린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장사를 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망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하얼빈 역 전 역인 채가구 역, 창춘 역에서도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의 암살 계획이 있었으나, 각각 철통 같은 수색과 역장의 의심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안중근 이전에도 안양에서 원태우가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 으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재판과정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고종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이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김구와의 인연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김구가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안중근이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국왕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이토 히로부미 사살의 영향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1927년부터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엔 저우언라이와 궈모뤄 등이 무한, 장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연출해 반일 투쟁을 고무 격려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합방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 합방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동경에서 한일 합방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
☛안중근의 시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거의가(擧義歌) / 우덕순(1876 ~1950.9.26)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也)런고.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리(幾萬里)를
혹은 윤선(輪船) 혹은 화차(火車) 천신만고 거듭하야
노청양지(露淸兩地) 지날 때에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앙천(仰天)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오호 간악한 노적(老敵)아 우리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 없이 뺏노라고 궁흉극악(窮凶極惡) 네 수단으로
대한민족 이천만이 다 같이 애련하여
너 노적을 이 정거장에서 만나기를 천만번 기도하며
주야를 잊고 만나고자 하였더니 마침내 이토를 만났고나
금일 네 명(命)이 나의 손에 달렸으니
지금 네 명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갑오독립 시켜놓고 을사체약(乙巳締約)한 연후에
오늘 네가 북향(北向)할 줄 나도 역시 몰랐도다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너뿐인 줄 아지 마라 너의 동포 오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보는 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오호라 우리 동포여
한마음으로 전결(專結)한 후 우리 국권 회복하고
부국강병 꾀하며는 세계에 어느 누가 압박할까
우리의 자유가 하등(下等)의 냉우(冷遇)를 받으니
속히 속히 합심하고 용감한 힘을 가져
국민 의무 다하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일본어: 伊藤博文 (いとうひろぶみ),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일본 제국의 정치가이다. 제1대 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부의 통감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 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일위(從一位)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영국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niv. of London)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자 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명은 토시스케(利助)로, 후에는 슌스케(俊輔, 春輔, 舜輔)로 불렸다. ‘슌보’(春畝, 춘무)나 ‘창랑각주인’(일본어: 滄浪閣主人, そうろうかくしゅじん)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春畝公)이라고 쓴 것도 많다.
한국에서는 한일 병합과 관련해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이며, 일반적인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초기 근대 정치인의 한사람이자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1909년6월 14일 통감직을 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 안중근(安重根)에게 피격. 사망하였다. 사후 일본 천황으로부터 충정군(忠貞君)에 추봉되었고, 대한제국 조선 순종 황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안중근을 존경한 일본인간수 치바 도시치
1910년 3월 26일 오전. 중국 뤼순 형무소.
안중근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교수대 앞에는 일본인 검찰관, 통역관, 의사, 변호사가 좌정했다.
“1910년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의 판결이 확정됐고, 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한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나의 행위는 동양 평화를 위해서다. 한일 양국 국민이 서로 일치 협력하고 평화를 도모하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교수대에서 동양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싶다.”
안중근은 3분 정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간수가 두 장의 종이를 접어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하얀 헝겊을 감았다. 오전 10시 4분 밧줄이 목에 걸렸다. 순간 안중근의 몸이 공중에 매달렸다. 10시 15분 검시관은 절명을 확인했다.
형무소측은 안중근과 함께 거사에 참여해 수감돼 있던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를 불렀다. 그들은 안 의사의 유해를 향해 조선 관습대로 두 번 절을 올렸다. 공판 중 가장 냉정했던 우덕순이 “아이고” 통곡하면서 관 위에 쓰러졌다. 간수들이 떼어 놓을 때까지 그들은 관을 잡고 울었다. 차가운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사키 류조 지음 ‘광야의 열사 안중근’ 참조)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
안 의사는 사형 판결을 받아들이고 항소하지 않았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니 당당하게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당부를 한복 수의와 함께 전했다.
일제는 안 의사의 주검이 항일 투쟁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해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줘야 하는 법을 어기고 안 의사의 시신을 유기해 암매장했다.
순국 5분 전. 안 의사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자신을 담당했던 간수 치바 도시치(千葉 十七) 상등병이었다. 그는 안 의사에게 사형집행을 알리러 갔다. 안 의사는 “다 읽지 못한 책이 있으니 시간을 달라”며 5분 남짓 조용히 독서를 했다.
31세 사형수와 25세 간수의 마지막 대화는 이렇다.
“그간 보여준 친절을 마음 속 깊이 고맙게 생각하오. 동양에 다시 평화가 찾아와 두 나라 사이에 우호 관계가 회복될 때 다시 태어나 반갑게 만나기로 하세.”
“선생님,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죄송한 마음에 가슴이 저립니다. 앞으로 선한 일본 사람이 되도록 생을 바쳐 정진하겠습니다.”
안 의사는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는 듯 지필묵을 청했다. 그리고 ‘為国献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글을 써주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므로 미안한 마음을 갖지 말라는 의미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 수감됐다.
당시 치바 도시치는 형무소를 지키던 말단 헌병이었다. 치바에게 안중근을 특별감시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안 의사가 수감된 독방 바로 옆이 치바의 방이 됐다. 그의 인생을 바꾼 144일 간의 짧은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치바 도시치는 처음에는 일본의 영웅을 살해한 안 의사에게 적개심을 표출했다. “너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권총을 겨누기까지 했다.
그러나 안 의사 거사의 대의명분과 동양평화 철학, 재판정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연한 지조와 당당한 태도, 인간적 품위를 접하면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그는 안 의사를 증오하다가 동정했고, 동정하다가 존경했고, 존경하다가 흠모했고. 흠모하다가 숭배했다.
치바 도시치의 고향 센다이 대림사에 있는 안중근 의사 현창비.
안 의사가 처형되자 치바는 곧바로 제대를 자청하고 고향 미야기현 센다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철도원과 경찰로 일하며 4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간 그의 삶은 안 의사와 떨어질 수가 없었다.
치바 도시치 부부와 안중근 의사의 유묵. 치바가 죽은 후 부인이 안 의사 유패를 30년을 더 모셨다. 처형 직전에 써준 이 글씨는 1980년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유족이 한국 정부에 반환했다.
집안에 불단을 만들어 안 의사의 위패와 유묵을 모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절을 하며 기렸다. 숨지기 직전엔 안 의사 유묵을 가보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위패를 모시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아내 치바 기츠요는 1965년 74세로 죽을 때까지 30여 년간 위패를 모셨고 이는 자식으로까지 이어졌다.
그의 고향에는 또 한 명, 안중근 의사의 삶과 철학에 감복해 지금도 안 의사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매년 추모제를 올리는 사람이 있다.
치바의 고향에는 대림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의 주지인 사이토 다이켄(齎藤泰彦)은 치바와 안중근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다. 스님은 안 의사의 현창비와 기념관을 세웠고 안 의사와 치바의 영정을 나란히 모셨다.
그는 일본 극우파의 살해 위협을 받았다. 그럼에도 매년 안중근을 숭모하는 일본인들을 모아 한 해도 빠짐없이 기일마다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인 그는 안 의사에게 마음을 빼앗겨 ‘내 마음의 안중근’이란 책도 펴냈다.
76세이지만 지금도 일본 전역을 돌며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을 기초로 일본의 대륙 침략을 규탄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발전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안 의사가 투옥 중일 때 그를 자주 찾은 또 다른 일본인 스님이 있었다. 오카야마 가사오카 시에 있는 정심사(淨心寺)라는 작은 절의 주지 마쓰다 가이준(津田 海純) 스님이다. 그는 안 의사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의사가 순국할 때까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안 의사는 순국하기 전 자신의 유품을 이 스님에게 맡겼다. 스님은 안 의사의 유묵 3점과 귀중한 사진들을 보관해왔다. 1997년 절을 관리하던 후손들이 일체의 자료를 일본 류코쿠(龍谷)대학에 기증했다. 안의사 기념관에 사진본들이 전시돼 있다.
류코쿠대학은 안중근동양평화연구센터를 세우고 2011년 서울의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협정을 맺고 해마다 서로 방문하면서 학술 발표와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안 의사를 존경한 일본인은 이들 외에도 많다. 당시 형무소장도 안 의사를 존경해 안 의사가 동양평화론 책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집행을 연기시켜 달라고 본국에 요청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당시 뤼순 감옥에 치바보다 계급이 높은 야기 마사노리(八木正禮)라는 헌병이 있었다. 그 역시 안 의사를 존경해 투옥 중인 안 의사를 잘 모셨다. 안 의사는 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 말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이를 따른다)’는 유묵을 써주었다. 이 유묵은 그의 후손이 한국에 기증했다.
안 의사 재판을 취재한 기자도 안 의사의 유품을 가졌다. 시코쿠 고치현 지역신문인 도요신문(土陽新聞) 기자이자 화가였던 고마츠 모토코(小松元吾)는 우연히 뤼순에 체류하면서 재판을 지켜봤다. 그는 재판정을 사진으로 찍을 수 없어서 재판정 모습을 그렸고 안 의사 재판이 삽화로 보도된 것은 이 신문뿐이었다. 그는 안 의사한테 ‘志士仁人殺身成仁(지사인인살신성인, 뜻있는 사람과 어진 사람은 자신을 죽여 인을 이룬다’ 유묵을 받았고 유묵과 방청권, 재판정 스케치는 2016년 후손에 의해 국내에 기증됐다.
뤼순 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 검찰관은 당시 안 의사를 취조했다. 어쩔 수 없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그는 바로 안 의사를 존경하게 됐다.
그는 안 의사한테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유묵을 받았다. 이 유묵은 1976년 그의 딸이 국내에 기증했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는 안 의사 구명운동까지 했다.
안 의사의 통역관 소노키 스에요스도 안 의사와 인간적 교감을 나누었다. 그는 ‘韓日友誼作紹介(한일우의작소개, 양국이 서로 잘 알아야 우의가 생긴다)는 글씨를 받았다.
이밖에 다롄(大連)세관에서 근무한 사람, 형무소 간수들, 감옥에서 근무한 의사, 한국통감부 경찰, 뤼순의 초등학교 교사 등도 유묵을 청해 받았다. 안 의사 주변에 있던 일본인들 대다수가 안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한 것이다.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유묵은 200점 정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현재까지 60점 정도가 확인됐다. 그중 25점은 보물 569호로 지정됐다. 안 의사의 글씨가 명필이자 명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인 다수가 안 의사의 글을 청하거나 안 의사가 써줘서 가져갔다. 아직 일본에 있는 유묵도 많이 있고, 국내에도 안 의사 기념관 말고도 여러 대학 부설 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
그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한 일본인들은 직접 비단과 종이를 구입해 글을 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유감스러운 점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인을 위한 글씨는 단 한 점도 없고, 모두 일본인들의 요청에 의해서거나 안 의사가 고마움의 표시로 써준 것들이다.
치바 도시치의 후손은 1980년 8월 23일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70년간 보관해온 유묵을 한국 정부에 반환했다. 1993년 보물 제569-23호로 지정돼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걸려 있다.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에 있는 동상.
올해는 안중근 의사의 순국 112주년이다. 서울 남산 자락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50년을 맞았다. 1970년 순국 60주년을 기념해 국민의 모금으로 지어졌다. 코로나로 문을 닫고 있지만 전시실에는 안 의사를 숭모한 치바 간수 등 많은 일본인들의 후손이 기증한 유품과 유물, 유묵이 있다.
막상 안중근의 조국인 한국에는 안 의사 숭모회가 있지만 치바 같은 개인적 스토리는 없다. 아무런 연고가 없던 한 개인이 평생 안중근을 가슴에 품고 기리며 살아간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안중근과 치바의 속세 인연은 슬프도록 아름답고 운명적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영화나 소설로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하다. 젊은 사형수와 더 어린 간수로 만난 두 사람은 하늘에서 재회해 반갑게 포옹을 했을까.
- 이글은 전문가가 집필한 기고입니다 -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지바 도시치(일본어: 千葉十七, 1885년 ~ 1934년 12월 17일)는 일본의 군인이다.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출신으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의 헌병 간수를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강인하고 투철했던 안중근 의사의 애국 정신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군인으로서 안중근을 간수하는 역을 맏게 되어 괴로워하던 그는 사형집행 이전에 안중근 의사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을 받고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며 흠모하여 죽을 때까지 안중근 의사의 기일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바 도시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위패를 사찰에 모셔두고 넋을 기렸다. 이는 안중근 의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한 일본인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구리하라시 다이린지(大林寺)의 법당 본존불 불단은 안중근과 지바 도시치를 모시고 있다.
===위키백과===
안중근의사의 유묵
안중근 의사의 유묵으로 밝혀진 글은 총 57점이며 위의 예시 외에도 총 25점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의 대부분은 당시 뤼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간수나 일본인 검찰, 혹은 일본인 헌병 등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그를 감옥에 가둔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을까요?
당시 안중근의사를 존경했던 뤼순감옥의 헌병간수 "지바 도시치"의 유지를 이어 일본에서 안중근의사를 기리고있는 "사이토 다이켄" 대림사 주지스님은 위와 같이 말합니다.
"안중근의사는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자세가 바르고 일본인 모두를 예의 바르게 응대했다는 겁니다.
저나 지바도시치 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진행한 재판소장과 형무서장도 그의 특별한 인격을 알고 존경했습니다.
재판소장과 형무서장 외에 안중근의사를 존경했던 사람 중에는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에게 다리에 총을 맞았던 다나카 세이지로 씨가 있어요.
그는 안중근의사를 제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적이었던 일본인들마저도 감화시키며, 심지어 그에게 총을 맞았던 자도 그를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할 만큼
특별한 인격과 정신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안중근의사에게 감화된 일본인 간수, 일본인 검찰관, 일본인 헌병은 이러한 안중근의사가 자신들을 위해 글을 써주기를 원하였고 안중근의사는 그들을 위해 흔쾌히 글을 써주게 됩니다.
안중근의사의 유묵들을 자세히 보면 유묵마다 안중근의사의 지장이 남아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어째서 안중근의사의 지장에는 약지 손가락의 끝마디가 없을까?"
안중근의사는 1909년 3월 초 그와 항일의 뜻을 함께하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동의단지회' 를 결성하여 왼손 약지손가락의 끝마디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새겨 넣으며
독립의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단지동맹입니다.
지금까지 안중근의사의 유묵과 유묵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16세의 소년 안중근 '청강홍의장군'이 되고, '김구'와 인연을 맺다
1879년(출생), 황해도 해주에서 안중근 태어나다.
1894년(16세), 재녕군 신환면 김홍변의 딸 김아려(17세)와 결혼하여 후에 2남 1녀(딸 현생, 아들 분도, 준생)를 두게 되었다.
황해도에서 동학 농민군이 소요를 벌일때 부친 안태훈은 의병을 일으켜 그들과 전투를 벌였고, 안중근은 부친을 도와 자진 선봉장이 되어 적장소를 급습하고 큰 공을 세우웠다. 이때 안중근이 붉은 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적당들은 달아나면서 '천강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라 칭하였다.
동학군의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 김구가 패전, 피신 중 안태훈 의려장의 초청으로 청계동에서 40~50일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김구'와 상봉하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1895년(17세), 안태훈이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천여 푸대의 양곡을 군량으로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탁지부 대신 어윤중과 전 선혜청 당상 민영준으로부터 양곡을 상환하라는 압박을 받았으나 개화파 김종한의 중재로 일시 무마되었다.
1896년(18세), 민영준이 다시 양곡의 상환문제를 들고 나오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태훈이 명동성당으로 수 개월간 피신하고, 성당 안에서 성서도 읽으면서 천주교 강론을 듣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 민영준의 일이 마무리되자, 안태훈은 120권의 천주교 교리문답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와서 주민들과 인근의 유지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안태훈은 청계동으로 귀향한 후 일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사람을 보내 매화동 본당의 빌렘신부를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초빙하였다.
1897년(19세), 안중근은 1월 중순 빌렘 신부로부터 토마스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때 그의 부친을 비롯하여 숙부, 사촌 등 일가 친척과 청계동 및 인근 마을사람등 모두 33명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를 공부하며 평신도의 신분으로 빌렘신부와 함께 전도를 하게 되었고, 한편 불어를 배우며 신사조를 수용하게 되었다.
☛교회활동과 육영사업
1898년(20세), 4월 하순, 빌렘 신부가 청계동 본당신부로 옮겨 청계동 본당을 설립하였다. 청계동 본당에서 안중근은 숙부 안태건회장과 함께 교회일에 헌신하였다. 청계동 성당의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빌렘 신부를 따라 미사 복사도하면서, 그를 수행하여 황해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교활동에 열중하였다.
어느날, 안중근은 서울에 가서 친구들과 더불어 거리를 걸어가다가 한 일본인이 말을 타고 지나가던 한국 사람을 강제로 끌어내리고 말을 탈취하려고 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안중근은 그 약탈자의 얼굴을 치면서 권총을 뽑아 그의 배에 갖다대고 그를 크게 꾸짖어 승복시켰다. 말 주인이 말을 도로 찾아서 간 후 그 일본사람을 놓아주니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의 이름을 알고자 하였다.
1899~1904년(21-26세), 안중근은 교회의 총대로 추대되어 교우들의 난제해결에 앞장섰다.
천주교를 비방하는 금광 감리 주가가 천주교에 대한 비방을 심하게 하여 교회의 피해가 커지자 안중근이 총대로 선정되어 주가를 힐문할 때 무기를 든 금광 일꾼 400~500명의 위협을 받고 간신히 벗어났다.
만인계(채표회사) 사장에 피선되어 출표식 때 기계 고장으로 군중 앞에서 수난을 당하였으나 함경도 사람 허봉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한편, 한국 교인들이 학문에 어두워서 교리를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고 서양 수사회 가운데서 박학한 선비 몇을 청해다가 대학을 설립하여 국내의 연준 자제들을 가르칠 것을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 당하였다.
조정에서 海西敎 案을 사핵하고자 조핵사 이응익을 파견하여 천주교회의 중요 인물을 잡아들이는데,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숙부 안태건도 포함되었으나 빌렘 신부가 감싸주었고, 안태운은 몇달 동안 숨어다녔다.
안태훈이 청국인 서가에게 봉변을 당하자 안중근이 친구 이창순과 함께 서가를 찾아가
따지고 외부에 청원한 결과, 진남포 재판소에 환부하여 승소판결을 받다. 후에 다른 청국인의 소개로 서가와 만나 화해하다.
1905년(27세), 신문, 잡지, 각국 역사등을 읽으면서 정치사상과 독립정신을 높이던 안중근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동이나 상해에 국외 항일터전을 잡을 계획으로 출국하여 중국의 상해와 청도 등지를 두루 다녔다.
상해에서 민영익을 2~3차례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상인 서상근을 찾아가서 구국의 방도에 대하여 논의했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할 방도는 외국의 도움을 구하는 길도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상해의 천주교당에서 우연히 만난 안면이 깊은 르각신부의 권유로 교육의 발달, 사회의 확장, 민심의 단합, 실력의 양성등 4가지에 힘 써야 함을 깨닫고 진남포로 돌아왔다.
한편, 안중근 일가는 교통 요충지인 진남포로 이사하는 중 부친이 재녕에서 병사하였다. 이에 가족들는 청계동에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안의사는 상해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듣고, 진남포를 떠나 제계를 지키기 위해 청계동으로 다시가 상례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그 해 겨울을 보냈다. 이 때 안중근은 독립하는 날까지 술을 끊기로 맹세하고 죽을때까지 지켰다.
이 해, 장남 분도가 출생하였다. 그러나 장남은 1914년 망명지 북만주 무린에서 일제에게 독살되었다.
1906년(28세), 4월 안중근은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해 양옥 한 채를 짓고 살림을 안정시키는 한편,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여 진남포에서 삼흥학교, 프랑스 신부가 경영하던 천주교 계통의 돈의학교의 재정을 맡으면서 2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 무렵 서우학회(뒤에 서북학회로 개칭)에 가입하였다.
☛동의단지회와 독립투쟁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응징하다
1907년(29세), 봄에 안태훈과 친분이 있던 김진사가 안중근을 찾아와서 간도, 노령 등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권하였다. 안중근은 재정을 마련하고자 한재호와 송병운등과 함께 삼합의라는 석탄회사를 만들었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수 천원을 손해만 보았다.
이 무렵, 대구에서 발생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안중근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 국채보상회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1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인 평양 명륜당에서 의연금을 내도록 권유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와 제수들에게도 권고하여 반지 패물까지 헌납하도록 하는 등 열성적으로 구국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8월 1일, 정미 7조약을 이어 군대가 해산되어 시위대가 봉기하였을 때에, 안중근은 국외활동을 통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서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후에 다시 원산으로 향하였다.
원산에서 선편을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려 했으나 청진에서 일제 임검경관에게 발각되어 하선하였다. 이에 다시 육로로 함북 회녕을 경유하여 두만강을 건너 8월 16일 북간도 용정에 도착하였다.
용정촌을 중심으로 북간도 일대를 3개월 동안 시찰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이미 그곳에 일제 침략기구인 총감부간도파출소가 설치되어 여의치 못하므로 10월 20일에 연추를 지나 해삼위로 향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안중근은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직을 맡아 항일독립운동에 큰 경륜을 펴기 시작하였다. 한인사회의 유력자들에게 의병부대 창설에 대해 설득작업을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엄인섭, 김기룡등과 의형제를 맺었다.
이해 차남 준생이 출생하였다.
1908년(30세), 안중근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순회하면서 동의회 회원을 모집하기 위하여 유세작업을 벌였다.
이에 다수의 한인들이 호응하여 무기, 자금 등을 지원하자 마침내 국외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총독에 김두성, 총대장에 이범윤을 추대하고, 안중근은 참모중장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군기 등을 비밀히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서 모인 후 국내진입작전을 도모하였다
7월(음력 6월), 안중근등 여러 의병장이 대를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 부근 홍의동과 신아산 부근으로 진공하였다. 안중근 부대는 몇 차례 승첩을 올리고 일본군인과 상인등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포로들을 석방하면서 무기까지 내어주었다. 이 때문에 동료의병들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중에서 부대를 나누어서 떠나버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결국, 석방한 포로들에 의해 일본군에게 위치가 노출되면서 기습공격을 받고 회녕 영산에서 일군과 약 4~5시간 큰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
안중근은 수 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면서 열이틀 동안 단 두끼만 겨우 얻어먹는 등 곤경을 겪으면서 연추의 의병 본거지로 돌아갔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수청, 하바로프스크 등을 순회하면서 각 한인사회의 교육과 사회 조직 건설에 힘썼다. 특히 기선을 타고 흑룡강 상류 수천 여리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산골짜기에서 일진회 회원들에게 잡혀서 구타를 당하고 죽음의 위기에서 간신히
풀려나 친지 집에서 상한 곳을 치료하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이 무렵 안중근이 1906년경부터 1907년초까지 진남포에서 운영해 오던 삼흥학교는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여 진남포의 오성학교의 야학부로 재편되었다.
1909년(31세), 3월 5일(음력 2월7일경), 안중근은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의 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안중근은 회장에 선임되어 회무를 주관하였다.
* 동의단지회(12명): 안응칠(31세), 김기룡(30세), 강순기(40세), 정원주(30세), 박봉석(32세), 유치홍(40세) 조응순(25세), 황병길(25세), 백규삼(27세), 김백춘(25세), 김천화(26세), 강창두(27세)
3월 21일, '해조신간'에 '안응칠'이란 이름으로 기서하여 '인심을 단합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방략'에 대하여 논하였다.
10월 초, 안중근은 해삼위에서 소문과 신문을 통해 이등박문이 22일경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의거를 결심하였다. 우덕순에게 동행의거를 제의하고, 우덕순도 쾌히 동의하였다.
10월 21일, 아침에 안중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으로 향하던중 통역을 맡아줄 유동하와 동행하였다. 22일 하얼빈에 도착하여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조도선을 찾아가서 함께 의거를 도모하였다.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에게 의거결행과 자금에 관한 편지를 쓰고 의거의 결의를 읊은 '장부가'를 짓고, 우덕순도 이에 화답하는 '거의가를 지었다.
10월 24일, 아침에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 정거장으로 나가서, 역의 관리를 통해 러청열차가 서로 바뀌는 정거장이 채가구 등지임을 알게되었다.
유동하는 남아서 연락을 담당하게 하고,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채가구 역에 이르러 하차하였다. 안중근 일행은 이등박문이 10월 26일 아침 6시경에 이 곳(채가구)을 지날 것이라는 사실을 정거장 사무원을 통해 확인하였다.
10월 25일, 안중근은 의거의 만전을 위하여 채가구를 의거의 한 지점으로 정하여 우덕순, 조도선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하얼빈으로 돌아와 하얼빈역을 의거지로 작정, 의거준비를 하였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채가구에서 의거를 도모하던 우덕순, 조도선은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수상하게 여겨져, 열차가 지나가는 시각에 그들이 투숙한 역 구내여관의 문을 잠궈 방안에 갇혀 있다가 의거에 실패하였다.
안중근은 오전 7시경 역으로 나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역사안 찻집에서 이등의 도착을 기다렸다.
오전 9시경 이등박문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자 러시아 코코프췌프 대장대신이 기내영접을 하였다. 약 20분뒤 이등박문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 때 안중근은 9시 30분경 러시아 의장대 뒤쪽에 서 있다가 약 10여보 거리를 두고 선 자세로 브로닝 권총을 발사하여 이등에게 3발을 명중시키고, 이등박문을 수행하던 하얼빈 천상 총영사, 삼 비서관, 전중 만철 이사 등에게 부상을 입혔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코리아 후라(대한민국 만세)'를 3번 외쳤다. 의거 직후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된 안중근은 하얼빈역 헌병대 분파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에게 심문을 당하다가 오후 8,9시경에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치명상을 입은 이등은 곧 러시아 장교들과 일본인 수행원들에 의해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약 20분 후에 69세로 절명하였다.
☛여순감옥과 순국
10월 30일경,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구연효웅 검찰관의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고, 관련 연루자와 함께 여순 관동도독부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1월 1일, 일본헌병과 러시아 헌병의 감시하에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정대호, 김성옥 등 9인이 여순구 감옥으로 향하였다. 11월 3일, 여순구에 이르러 감옥에 수감되었다.
12월 2일, 소촌수태랑 외무대신이 현지 파견중인 창지철길 정무국장을 통하여 '중형징죄'를 전보로 명령 전달하게 하고, 나아가 고등법원장 평석씨인을 본국으로 소환해 '사형판결'을 위한 공판개정을 다짐받았다.
12월 중순, 안중근의 동생 정근, 공근이 여순감옥으로 안중근을 면회왔다. 안중근은 국내에서 찾아온 두 동생을 4~5일만에, 혹은 10여일 만에 차례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 자리에서 한국인 변호사를 청해 올 일과 천주교 신부를 청해다가 종부성사 받을 일들을 부탁하였다. 또한 안중근이 자신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32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공판 개시되었다. 1월 31일 ~ 2월 1일경부터, 일본 검찰관과 옥리들의 심문태도가 강압적으로 돌변하고 안중근에게 공판개정일이 6~7일 뒤로 결정되었다고 통보하였다. 또한 이미 허가한 한국인 변호사의 변호는 물론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의 외국변호사도 일체 변호가 허가되지 않으며, 일보인 관선 변호사만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통보하였다.
2월 7일 오전 10시, 중국 여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장 진과십장의 단독심리하에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등 하얼빈 의거 관련자 4인에 대한 제 1회 공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재판장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장 진과십장, 담당검찰관은 구연효웅, 관선변호사는
수야길태랑, 겸전정치, 서기 도변랑일로 전원 일본인 일색으로 구성하다. 이 공판에서 우선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네 피고인의 인적사항 확인 다음 안중근에 대한 신문이 전개되었다.
안중근은 “3년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의거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2월 8일 오전 11시, 제 2회 공판이 속개되어 우덕순과 조도선에 대한 개별신문이 행해졌다.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에 참가한 이유를 "안중근은 의병으로서 한 일이겠으나, 자신은 국민의 한사람 으로서 당연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진술하였다.
조도선은 "정대호가 데리고 오기로 되어있는 안중근의 가족을 마중 나갈 때 러시아어 통역을 도와주기 위해서 안중근과 채가구로 동행하였다"고 진술하였다.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제 3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먼저 유동하에 대한 개별신문이 행해지졌고, 유동하는 안중근의 의거 의도를 몰랐다고 진술하였다. 오후부터 재판장의 정거취조가 행해져 안중근이 이강에게 보내려던 편지와 안중근, 우덕순의 시가 러시아와 일본 관헌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이 제시되었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등박문의 죄악' 15개조를 설명하다 중도에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였다.
2월 10일 오전 9시 40분, 제 4회 공판이 시작되었다. 구연 검찰관으로부터 각자에 대한 형량이 구형되는데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 조도선은 징역 3년, 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이 구형되었다.
2월 12일 오전 9시 30분, 제 5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두 일본인 관선 변호사의 변론이 행해지다. 겸전 변호사는 주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에 대해 변론하고 수야 변호사는 안중근에 대하여 변호하였다.
변론이 끝난 후, 최후의 진술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침략적 간계를 규탄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이등박문을 제거했다, 단순한 자객으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중에 잡힌 포로로 대접하여 마땅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라'고 진술하였다.
2월 14일 오전 10시, 제 6회(최종판결)이 개정되었다. 재판장은 일본 형법을 적용시켜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이러한 선고를 받고 안중근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3월 8일, 한국으로부터 여순감옥으로 빌렘신부가 찾아왔다. 다음 날인 9일부터 10일까지 빌렘신부가 안의사의 영생영락을 위하여 고해성사와 미사성제대례, 예수의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는 대예식을 행하였다. 안중근은 이 미사 중에 직접 복사를 하고 성체를 받아 모셨다. 이때 감옥소의 일반관리들도 함께 참례하였다.
면회실에서 검찰관, 전옥, 통역, 간수장, 두 변호사 등이 입회하에 안정근, 안공근 두 아우와 빌렘 신부를 면회하고 20분 동안 기도를 드린 후 동포에게 고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3월 15일, 안중근은 지난 1909년 12월 13일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그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92일만에 탈고하고,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무렵부터 안중근은 '국가안위노심초사',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등 한문 붓글씨로 된 많은 유작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안중근이 갇혀있는 감옥소에 관계하던 많은 일본인들이 비단과 지필묵을 가지고 와서 안의사에게 기념소장할 붓글씨를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안중근은 25일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마지막 면화하는 자리에서 모친과 부인, 숙부, 동생, 뮈텔주교, 빌렘신부 등에게 미리 써놓았던 6통의 유서를 전하였다. 이 보다 앞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하여 뼈에 사무치는 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을 전달하였다.
3월 26일, 안중근은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임형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을 묻는 검찰관의 물음에, "나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관리들도 앞으로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하고 이 자리에서 함께 '동양평화만세'를 부를 것을 제기하자 반대하고 교수형을 집행, 안중근은 의연하게 순국하였다.
안중근의 시신은 새로 송판으로 만든 침관에 안치된 후 여순감옥 묘지에 임시안장 되었다.
☛안중근의사 어머니 조마리아여사(본명 조성녀)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옮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화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조마리아(본명 조성녀(趙姓女). 천주교세례명은 마리아(瑪利亞) 1862-1927.7.25)는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백천 조(趙)씨이다. 아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제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이등박문 사망 추도식이 열린 장충단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통감부>의 초대 통감을 지내다 1909년 안중근장군에게 척살당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장례식 추도회가 장충단에서 열렸다. 이는 일제가 한국인에 의한 이토의 사망을 한국인에게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상징적인 공간인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실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은 당시 실록의 원문이다. “태자의 태사 문충공 이토오공작의 국장일에 황족, 궁내관, 각 부의 관리 및 인민들이 함께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太子太師 文忠公 伊藤公爵 國葬日, 皇族、宮內官、吏閣部官吏及人民一同, 設行追悼會于 奬忠壇)” (순종실록 1909년 11월 4일)
또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은 한일합방으로 달려가던 정국에 충격파를 던졌다. 친일파들은 공포에 휩싸여 더욱 적극적으로 합방을 추진하게 되었다. 안중근의 이토 척살에 매국친일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통감부문서>의 헌병대 기밀문서는 “이완용이 이토공(公) 피해 이후에 눈에 띄게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안중근이 일제 검찰의 신문에서 “이완용은 망국적 큰 괴수로서 이토에게 자신의 직무를 팔아넘겼다”라고 비판한 것처럼 다음 표적은 이완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마냥 위축되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내각 차원에서 이토오를 위해 성대한 추도식과 장례식을 준비했다. 헌병대 기밀문서에 따르면 11월 4일 오후 2시부터 3시 45분까지 “서울 장충단에서 이토에 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전·현 내각대신과 황족 원로, 궁내부를 비롯해 각 부의 고등관과 군 장성, 엄비가 보낸 사신이 참석했다. 그 성대함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성회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관·공립을 불문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참석시켜 추도회장(장충단)을 채웠던 조작된 성황에 불과했다. 그뿐만 아니라 친위부의 보병 2개 중대를 참석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치러졌다. 순종은 애도사에서 '메이지천황'에게 '吾國의 兇手에게 死', 즉 우리나라 악당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을 쓰며 이토의 '훙서(薨逝)'에 애통해 하는 마음을 전하였다.
또한 친일파들은 장충단에서의 이또오 추도식 직전 고종황제로 하여금 통감관저에 마련된 빈소에서 직접 조문을 계획했다. '통감부문서' 1909년 11월 1일의 '태황제가 통감관저에 행림하신 내부사정'이란 문서가 그 전말을 전해준다. 고종황제는 직접조문 의견이 나왔을 때 “내가 직접 통감관저로 가서 조문한다면 국민들이 어떤 감정을 갖겠느냐. 칙사를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승녕부 총관 조민희와 농상부장관 조중응이 작당한 후 조민희가 “직접 조문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자 11월 2일 결국 허락하고 만다. 다만 고종은 엄비(嚴妃)가 추도식에 직접 가는 것은 적당치 않다면서 상궁과 황태자 유모 2명을 보내는 것으로 조정했다. 결국 고종황제는 11월 2일 통감관저로 가서 자신의 외교권과 왕위를 빼앗은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죽음을 애도해야만 했다.
이등박문과 비슷하게 떠난
"아베신조(安倍晋三)''란 인물은 어떤 자인가?
그의 할아버지(조부)는 "아베노부스키" 이며
일제강점기 마지막 조선총독이고
그의 외할아버지(외조부)는 "기시노부스케"이고
만주국 건설과 대동아 정책의 중추적 역활을 한 인물이다.
그 패륜적 반인간적인 자의 손자가 "아베"임을 감안할 때,
이는 그 당시 역사를 "수평이동"시켜 놓은 것 처럼 "아베 신조"가 수상으로 있을 때
한일관계가 가장 악화되었으며,
그는 틈만 있으면 군국주의 부활을 획책한 인물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깊이 새기고 잊어서는 안될 악질중의 악질이다.
소름끼쳤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친손자가 바로 얼마전 2022.7.8 저격당한 ''아베 신조(安倍晋三)''라는 것을 생각하니 역사는 언제나 우리 대한민국 편에서 응원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다시한번 그의 족보를 살펴보면 그의 조부는
1875년 일본 이시카화현(石川縣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아베노부유키(阿部信行)"이고,
1944년 7월 24일에 일본의 제10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마지막 시기에
조선총독을 지냈던 자임을 명심하십시요.
그는 189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육군참모본부 총무부장·군무국장을 거쳐 1929년엔 육군차관에 임명된다.
1939년에 일본의 제 36대 수상이 되었지만 4개월여 만에 총사퇴하였다 이후 여러 직을 거치다가 1944년 제10대 마지막 조선총독으로 취임하여 전쟁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일본으로 착취해 갔다.
조선총독으로 부임 후 전쟁 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인 자이다.
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의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했으며, 심지어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를 발부했고, 이에 불응시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5년 8.15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 자는 미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대한민국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 이 자가 남긴 유명한 망언이 있다.
그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요렇게 마지막 망언을 남기고 떠날때
그의 나이는 78세 때이다.
한편으론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무섭기까지 하다.
아베 총독은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와 군 중앙부 주요보직을 거쳐 1933년에 육군대장, 1939년엔 일본 내각 총리가 됐었다.
비록 4개월이었지만 일본 총리를 지낸 그는
1944년 마지막 조선총독에 임명돼
조선인에 대한 식민지 교육을 더 철저히 자행했다.
그리고 일본 주둔 미군 맥아더사령부가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 11일 아베를 심문할 때
그는 일본 식민정책은 한국인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이었다.
조선인은 아직도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된 정부 형태가 되면 당파싸움으로
다시 붕괴할 것이라며 남북공동정부 수립을
적극 반대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베의 사돈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91세 1896~1987)" 그는 만주국을 건설하며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철저하게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투쟁을 무력화 시켰다.
어제 저격당한 ''아베 신조''는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두 사람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우리 민족의 가장 악질 웬수의 손자이다.
이는 이렇게 저격당해 죽는 모습을 볼 때 역사는 반드시 나쁜놈을 심판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실감하면서, 우리의 오늘의 현실을 냉엄하게 반성해야 겠다.
정치인들만 제대로 정신차려 일했으면 그들에게 식민지배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의 악몽이 요즘 우리 정치사에 되살아 나는 듯 하는 예감은 나의 부질없는 생각일까요.
제발 대한민국 정치인들 정신좀 차리세요.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준 글 정리한 것-
안중근의사 기념관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소월로 91 (남대문로5가)
안중근의사는 일제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처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려 대한의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린 민족의 영웅입니다. 동양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안중근의사는 일제의 부당한 판결을 받고 뤼순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던 중 서론과 본문의 일부만을 남긴채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습니다.
때문에 아쉽게도 우리는 그 깊은 평화사상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동양평화론』에 나타난 정치적 구상은 오늘날 유럽공동체(EU)와 흡사하고 경제적 뒷받침을 위해 공동은행을 세우려는 구상은 세계은행(IBRD)·국제통화기금(IMF)의 구상과 일치하여, 안중근의사는 100년 후의 오늘을 내다본 탁월한 정치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조국이 광복을 이룬 후에도 한국전쟁과 정치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안중근의사에 대해 이렇다 할 위훈을 기리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을 보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 1970년 10월 26일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와 국민의 성금 등으로 일제시기 민족정기를 탄압하는 조선신궁이 있던 서울 남산 현 위치(회현자락)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건립·개관하게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기념관이 노후·협소해짐에 따라 2004년 (사)안중근의사숭모회와 광복회의 요청을 받은 노무현대통령의 지시로 국가보훈처에서는 2010년 10월 26일 새 기념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념관 신축을 계기로 안중근의사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그 사상과 정신을 보급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고자 있습니다.
앞으로 이 기념관은 우리의 젊은 세대와 후손들에게 나라와 민족이 무엇인가를 일깨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애국지사를 민족의 긍지로 여기며, 스스로 삶의 표본과 중심을 일으켜 세우는 산교육의 마당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2010. 10. 26.
서산대사(1520~1604)의 해탈시(解脫詩)
조선중기의 승려로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나 20세에 출가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73세의 나이로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을 모집 승병장으로 공을 세웠다. 휴정이 해탈時에 읊은 詩랍니다.
生也一片 浮雲起 (생야일편 부운기)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 浮雲滅 (사야일편 부운멸)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니
浮雲自體 本無實 (부운자체 본무실)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
生死去來 亦如然 (생사거래 역여연) 살고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러한 것이라오.
근심 걱정 없는 사람 누군고
출세하기 싫은 사람 누군고
시기 질투 없는 사람 누군고
흉허물 없는 사람 어디 있겠소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고
못 배웠다 주눅들지 마소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 외다
가진 것 많다 유세 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소리 치지 말고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 세상
있고 없음을 편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하지 말고
얼기설기 어우러져 살다나 가세
다 바람 같은 거라오
뭘 그렇게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순간이라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라오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한밤의 눈보라 일 뿐이오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 아침에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돈다오
다 바람이라오
버릴 것은 버려야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리오
줄게 있으면 주고 가야지 가지고 있으면 뭐하리오
내 것도 아닌 것을
삶도 내것이라 하지마소
잠시 머물러 가는 것일 뿐
묶어둔다고 그냥 있겠소
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아니 가겠소
그저 부질 없는 욕심일 뿐
삶에 억눌려 허리 한번 못 피고
인생계급장 이마에 붙이고
뭐 그리 잘났다고 남의 것 탐내시오
훤한 대낮이 있으면 까만 밤하늘도 있지 않소
낮과 밤이 바뀐다고 뭐 다른게 있소
살다보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다마는
잠시 대역 연기하는 것일 뿐
슬픈 표정 짓는다 하여 뭐 달라지는게 있소
기쁜 표정 짓는다 하여 모든 게 기쁜 것만은 아니오
내 인생은 내 인생
뭐 별거라고 하오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불다보면
멈추기도 하지 않소
그렇게 사는 것이라오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살고 오고감이 모두 그와 같으오
[출처] 서산대사의 해탈시(解脫詩)
조동화의 쓰잘띠 있는 이야기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83.5세입니다.
남성은 80.5세, 여성은 86.5세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사람 사는날이 얼마나 될까?
인생 70이면 25,550일
인생 80이면 29,200일
인생 90이면 32,850일
인생 100이면 36,500일
부와 명예 혹은 자유와 쾌락, 행복 등등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서 악착같이 살고 있으나,
인간의 삶의 종착역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구나.
죽는데에는 순서가 없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애써 죽음을 외면하면서 살 뿐이다.
그러고 본개 인생사는거 별것 아니여.
그냥 그려려니 다둑다둑하면서 남은 세월 잘 살면 되야
어떻게 사는삶이 잘사는 삶일까?
인생무상 화무십일홍 그려려니 긍정적으로 살면 되야.
인생은 정답이 없구나.
인간의 운명은 도둑처럼 찾아온다는 소리가 헛소리가 아니여.
67세의 일본의 아베 전 총리가 죽었다는 소리가 들려오는구먼.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치앞도 모르는 인생길이로구나.
인생 60대는 해(年)마다 늙고,
인생 70대는 달(月)마다 늙고,
인생 80대는 날(日)마다 늙고,
웬 세월이 이렇게 빨라
7월이 시작 되더니 중순이 넘어가고 있구먼
그놈의 세월 꽁꽁 묶어놓으면 좋으련만 흘러만 가는구먼.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여.
사람사는 세상이 거기서 거기로서니 즐겁고 행복한 삶이란 더불어,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라,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인생을 너무 어렵게 살지말자구.
단순하게 살자.
이리도 한세상 저리도 한세상이여.
조동화가 생각하는 행복은 내가 첫째여
세상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제.
왜냐하면 내일이 바빠 나도 말이지 다른사람들에게 관심을 줄 시간이 없는거여.
누가 나를 좋아하겠어
누가 나를 미워하면 그려려니 넘기면 되야
미워하면 인간의 피에 독성물질을 만들어 내는거여.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stress)야.
“스트레스(stress) :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이나 조건에 처할 때 느끼는 심리적, 신체적 긴장 상태”를 말하는데
모두가 그려려니 하면 스트레스 않받지.
스트레스가 왜 무서운지 알아.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간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려 노화를 촉진하여 암을 유발한다고 하네.
스트레스 해소하는거 아무것도 아니여.
그냥 마음비우고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 생각하고 웃으면 되야.
돈!
은행에 있는 돈은 내 돈이 아니다 이말이여!
돈은 쓸 때에 비로소 돈이며, 죽기전에 쓸수있는 돈만이
내 돈이다!
되게 오래 살 것처럼 행동하면 어리석다.
내말 알아들어 .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거여.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가 어떤사람이여!
조동화는 스마트폰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쁠 것 없이 스마트폰에 순간 순간을 포착하여 사진에 담아 추억으로 남기는 사람이여.
열심히 스마트폰 모바일세상 즐거움 느끼고 살어야 혀.
인자 스마트폰은 필수품이고 없으면 않되야.
스마트폰 필수품인디 옛날 구닥다리 쓰면 낙오자 되야.
조동화는 노트9를 쓰고 있다구.
아나로그 세상에서 디지털스마트세상이 된지가 15년인데 조동화는 스마트세상에 순응하며 편리하고 즐거운 세상 살아가고 있지.
지금 세상은 스마트폰 세상이여.
스마트폰세상 편리허구나.
그런데 말이야 스마트폰을 발명한 세계의 최고 갑부 “스티븐잡스”는 56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갔지.
생과사는 결국 돈으로 해결할수 없구먼.
스마트폰이 만능인 세상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노래하자
나는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며,
“인생은 왜 사는가? 조동화는 왜 이세상에 왔는가?”를 나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고 살아왔다.
이세상에 먼저 왔던 선현이나 명사들이 그 해답을 풀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여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기도 하고, 천주교에 심취하여 신부가 되고, 기독교 목사가 되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으나, 아직껏 조동화에게 답을 준 사람은 보질 못했제.
이런 의문을 갖지 않으면 짐승이나 다를바 없지.
솔직히 조동화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하여 걷는일 열심히 하여 건강혀야 혀.
강조 해서 말하면 걷는것보다 더 좋은 천연보약은 없단말일세.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세상의 하고많은 놀랄 일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주변에서 남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은 죽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많이 배우고 학식과 직위가 높다고 오래사는 것도 아니며 행복한 것도 아니고, 재물이 많다고 오래사는것도 아니며 행복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인생이란 하룻밤 이슬과 같다라는 말처럼 오늘하루도 소중히 생각하며 즐거운 삶을 영위해야 하겠다.
☞하룻밤 이슬과 같은 이야기 하나
실재로 나의 주변 부부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여?
남편은 69세, 아내는 65세
부부는 1층은 상가로 세를 내주고, 2층에서 여유롭게 살았었는데 아내가 중병이 걸려 죽은거야.
자식은 딸둘과 아들은 잘 키워 결혼시켜 출가하였다고 혀.
인자 69세된 남자가 혼자 살아갈 일이 막막한거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천층 만층 생각이 다 틀려.
나는 다 알지만, 69세된 남자의 운명은 숙제로 남겨 두겋다 이말이여.
참으로 사람의 운명이란 알수 없구나.
아내가 죽은 후 건강했던 그 남자 15일만에 저승길에 가버리고 말았네.
왜 갔는지 나는 알어.
어떻게 좋은 세상 저승길에 갔는가.
조동화는 궁금헌것도 많혀.
혼자 남아도 살아 있으니, 좋은 세상 멋지게 잘 살아야 하는디 죽은 망자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지리라.
사람의 운명은 한치앞을 모른다고 했지 않은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쓰고 싶을 때 쓰고 그러는 거여.
옛말에 아는길도 물어서 간다고 하는 말이 틀린건 아니여.
☞사건사고도 많은지
몇일전 LH직원 한사람이 술을 거나하게 먹고, 자기차는 놔 두고 남의차로 운전하다가 사람을 치여 죽게만들었는디 직장에서는 파면 당하고 형무소 갔다는 이야기여.
술 먹고 운전 하지 말어.
알겧제.
조동화의 벗님들!
이세파에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만한 나이되얐제.
우리세월은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 행복한 것, 맛있는 것, 추억할 것, 배려할것을 좇아 삶을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이여.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구.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는디
나홀로 족이 많다는거야
한국의 사회상은 세가구중 한가구가 혼자사는 세상으로 변했다 이말이여.
그러고 말이여
공원에 산책 나가면 무슨 강아지 끌고 댕기는 사람이 많아.
강아지 천국 되얐어.
아이 않낳는 세상, 강아지세상
잘못 되여가는 세상의 변화같은디......아이도 낳고 바른세상으로 갔으면 혀.
스티븐 잡스가 스마트폰 발명해놓고 56세가 저세상으로 가서 애석하지만 내가 꿈꾸는 세상은 아니여.
스마트폰 디지털 편리한 세상이 되얐기에 아나로그세상으로 돌아갈수 없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한번 해볼끄나
한국이 어떤나라여.
세계경제 10대강국이여.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세계경제10대 강국이라하면 자부심 느낄만 하제.
그러나 한국사회상은 통계를 보니 심각하구먼
한국 OECD 출산율 최저 0.83명(2021통계)
세가구중 한가구 혼자사는집(2015년 통계)
이거 해결 못허면 않되야.
꽁수 부릴거 없단말이여.
국가가 나서서 신혼부부들 내집마련 꿈 심어 주어야 혀.
엄청난 예산 투입혀야 혀.
공청회라도 열고 무엇인가 해결할려는 기미가 않보여.
대한민국 망하기 일보직전이여.
대통령 그냥 하는거 아니여.
어려운것 해결 헐라고 대통령 하는것 아닌가.
내가 가만히 본게 가장 중요한 국가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모르는것 같여.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꿈이 있는 대한민국 만드는거여.
5년동안 할일이 무엇인지 국민한테 청사진 밝혀야 혀.
구렁이 담넘어가는 꽁수로는 않되야.
2022/3/9 대통령 당선자가 새로 탄생해서 100일이 넘어가도 희망의 메시지가 없단말이여.
검사할때는 죄있는 사람은 봐주고 죄 없는 사람은 감옥보내고 헌것 다 알어.
죄있는 처 장모는 아무리 죄가 커도 봐준 그사람이 대통령인디 나라 잘 돌아가겋는가.
지금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야 이놈아 꿀 먹은 벙어리가 대통령인가.
도야지를 대통령 앉혀놓아도 그렇게는 않혀.
정자도 모르는놈이 대통령한다고.............
야 이놈아 대통령할라면 대통령공부를 해야지.
대한민국 어떤나라여.
독재국가-군인세상-민주국가-검찰공화국까지 왔다만 싹수 보니까 검찰공화국은 틀렸다.
국가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도 모르는 놈이 대통령한다고 하면 되겋어.
이명박이 감옥에서 내 놓는것이 우선순위여.
천문학적인 자원개발 비리는 하나도 조사 않하고............................
부자감세 어쩌구 저쩌구.
서민위해서 대통령 할놈 아니구먼.
지금부터라도 대통령 공부혀서 경제 살리고 주변비리부터 처단혀야 혀.
권성동이란 놈 텔레비 나와서 얼굴 내미는디 취업청탁비리 검찰놈들이 봐준것 다알어 이놈아.
그런디 청와대에다 청탁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놈아.
이놈의 자식 민심이 어떻게 사나운지 모르는구먼.
나는 다 알어.
내말 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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