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해탈의 길 THE WAY OF ETERNAL LIBERATION
1. 아함경에 `영생해탈의 길은 분명히 있고 영생해탈을 가르치는 나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중생들이 어리석어서 가고 안가고 하느니라.`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오늘은 다 아시는바와 같이 부처님의 열반절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부처님을 25년간이나 모셨던 그 총명하고 성실한 아난존자는 부처님이 가시는 장엄스러운 열반에 즈음해서 자신을 가느지 못하고 통곡해서 오열해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불교를 배울때 보통 불교라 하는 것은 `생사를 초월한다.` `본래 생도 없고 죽음도 없다.`하는 그런 가르침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인데 하물며 부처님을 25년동안이나 모신 아난존자가 그와 같이 자기의 감정을 가누지 못해가지고서 오열에 잠겼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했던 것인가? 아난존자가 열반이라 하는 지극한 높은 뜻을 모를리가 만무합니다.
1, The Sutra of Agama says thus: `There is the way of eternal liberation; there exists the I that teaches it; however, some people follow it; and others do not.`
As you know, this is a memorial day of Buddha`s Nirvana. Over His death, Ananda, one of His ten disciples, who had followed Him twenty-five years, could not keep up himself but only to burst into tears. Buddhism teaches with emphacis again and again that it transcends both life and death, because there it neither of them in truth. Nevertheless, the intelligent and honest Ananda, even though he had studied Buddhism for twenty-five years, could not overrule himself but sobbed his heart out. He could not have been ignorant of the meaning of Nirvana. Then, why do you suppose he cried out?
2. 우리는 오늘 부처님 열반절을 당해서 우선 열반의 뜻을 좀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열반 그러면 `신지구멸`이라 - 우리 몸도 멸하고 의식도 멸한다 - 는 뜻입니다.
물론 부처님 열반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의 몸도 화장 되어서 응당 멸해버릴 것이고 또 의식 활동도 멸해서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열반 뜻 그대로 신지구멸이라, 부처님의 몸과 의식이 동시에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느끼고 또는 좋아하고 기뻐하고, 그런 차원에서 볼 때는 분명히 부처님 몸도 사라지고 의식도 사라져서 조금도 자취가 없습니다.
2. Let us look brifly over the meaning of Nirvana.
Nirvana represents the exhibition of both body and consciousness. In Nirvana both body and consciousness cease to function. So was it with Buddha`s Nirvana. In His Nirvana, His body was cremated to a handful of ash and His consciousness functioned no more. Seen from the view point of our physical world, His Nirvana has left no trace of His body and consciousness.
3. 그러나 불교의 참다운 가르침은 무량(無量)으로, 보고 느끼고 하는 현상세계(現像世界)를 초월(超越)한 세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열반의 뜻도 이른바 소승열반(小乘涅槃)이 있고, 그런가하면 대승열반(大乘涅槃)이 있습니다.
아난존자가 그와 같이 부처님을 흠모하는 부처님을 추모하는 그런 자기 감정을 가누지 못해가지고서, 슬피울고 한것은 - 아난존자가 소승열반의 뜻은 분명히 잘 알았을 것이고 또는 대승열반의 뜻도 알지만은 - 대승열반의 뜻과 완전히 계합(契合)이 못됐단 말입니다.
3. Buddhism theaches that we should acknowledge another world that transcends our physical world, where we are able to feel and see the limitless. There are two kinds of Nirvana: one is the Nirvana of Hinayana, the lesser vehicle; the other, the Nirvana of Mahayana, the greater vehicle. It was because Ananda had not gained the utter significance of Mahayana Nirvana, though he might have grasped the meaning of Hinayana Nirvana, that he could not control himself but went on weeping bitterly when Buddha passed away.
4. 우리는 불교 가르침에서 구분해야 할 것은 해석한다는 `풀해(解)자`와 `깨달을오(悟)`라 하는, 해오(解悟) 단계의 그런 법문(法門)과 또는 우리 몸으로 마음으로 증명한다 하는-우리 마음도 바꿔지고, 우리 생리(生理)도 바궈져서 오염(汚染)된 자기가 전환되어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참다운 자기로 전환되어 버리는-그러한 단계가 아니면은 `부처님의 법을 증명한다.` `우리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증명한다.` 하는 그런 증오(證悟)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4. We must be able to discern between `Initial Enlightenment` and `Ultimate Enlightenment` on the road of pursuing awakening. The initial enlightenment points to our capability to explain an awakened state by our reasoning, and the ultimate enlightenment means that we have proven the awakened state both physically and mentally. In other words, our physiology is transformed from a tinted into a pure ego; thereby we can prove Buddha`s Dharma Nature or Buddha`s Reality.
5. 따라서 아난존자는 유감스럽게도 부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모시고 법문은 소승열반도 충분히 알고 대승열반도 알지만, 대승열반(大乘涅槃)자리-몸이 사라지고 또는 우리가 사고(思考)하는 의식활동(意識活動)도 사라진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영생불멸(永生不滅)의 자리-를 미처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슬픔을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열반소식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소승열반을 떠나서 대승열반에 있습니다. 참다운 열반은 대승열반에 있습니다.
5. It is a regret that Ananda failed to acquire a stage of Mahayana Nirvana. He did not experience a state of immortality truly meant by Mahayana Nirvana, though our body and consciousness are to be expired in it. The tidings of Baddha`s Nirvana is to say that he entered the greater vehicle Nirvana, and not the lesser vehicle.
6. 원래 경(經) 풀이하는데는 강사(講師)가 있고, 또는 법문 잘 하는데는 법사(法師) 가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은 강사도 법사도 아니고, 참선(參禪)하는 선사(禪師)이기 때문에 선사가 말하는 말은 참 딱딱하고, 거두절미해서 그냥 알맹이만 말하기 때문에 참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몽둥이로 텅텅 울리는 그런 방도 하고, 또는 할로 그때 그때 고함을 지르고 한단 말입니다. 참선소식은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 본체(本體)만 가지고 이야기 하기 때문에 문자를 떠나고 헤아림을 떠나 있습니다. 이런 소식들은 그야말로 고함을 지른다거나 또는 방을 친다거나 그렇지 않고서는 할 도리가 없단 말입니다.
6. I am not a lecturer who gives doctrinal explanation of the scriptures, nor a Dharma teacher who is good at preaching sermons. As you see. I am a Zen monk. So I am afraid my talk would sound stilted or no so much interesting, since a monk like me will insist on telling just. essence by cutting a long story short. With a view of revealing a Dharma he sometimes is ready to hit his listeners with a stick; othertimes he will resort to shouting all of a sudden to them iustead of talking.
7. 그래서 중국 당나라 때 석두희천(石頭希遷)스님이라 - 스님은 굉장히 당대의 위대한 선지식입니다. 마조도일(馬租道一)스님과 더불어서 당대의 중국 선계(禪界)를 주름잡은 분입니다. - 석두스님한테 법문을 청하니까, 법상에 올라와서 그냥 눈만 끔벅끔벅 몇번 하고서, 내려와서 자기 방장으로 가버린단 말입니다. 저같은 사람도 그만한 선지식(善知識)은 못되지만은 참선(參禪)하는 사람인지라, 그렇게 간단히 하고 싶습니다. 그런나 한 시간동안 말씀 해달라고 하시니까, 한 시간동안 무슨 말씀인가 해야 하겠지요.
7. Once upon a time in the days of Tang China there lived a great monk named Sukdoo-Huichon, Shih-t`on Hsi-chien in Chinese. He was known to b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Zen masters together with his contemporary monk Macho Doil, Matsu Tao-i in Chinese. One day when he was asked to deliver a sermon to a large congregation, he stated himself on the Dharma table. He tried to open and close his eyes several times, and then he left for his room finishing his Dharma talk.
I wish to make such a short preaching, even if I am not a competent Zen master. But I think I have to continue on saying because you want me to.
8. 대승열반(大乘涅槃)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사(生死)가 없는 도리(道理)` 우리 중생의 안목에서는 분명히 내가 있고, 너도 있고 또는 죽음도 있지만은 [대승열반의 경계]에서는 그러한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8. What does Mahayana Nirvana mean in general? It means the world of Truth where there is no samsara or no life and death. In the eyes of sentient beings life and death as well as you and I are evidently seen to exist; yet there is no roon for thire existence in the world of Mahayana Nirvana.
9. 열반경(涅槃經)에 보면은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열반경계에서 네 가지 덕(德)이 있다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어떤 것인고 하면은 이것은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9. The Nirvana Sutra says that Nirvana contains four kinds of virtues: Permanence of immortality, eternal bliss, the Great Self, and utmost party. The first virtue is permanence of immortality.
10. 우리 생명(生命)이라하는 것이 중생(衆生) 차원(次元)에서 볼때는 분명히 생사(生死)가 있고 또는 서로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선악(善惡) 시비(是非)가 있습니다만은,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우리 참다운 불성(佛性) 자리에서는 그것이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해서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선 그와 같이 죽음이 없다는 자리, 영생한단는 자리가 이것이 열반 자리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세계에서는 고통도 있고, 안락도 있고, 여러가지 그러한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만은 열반 자리, 참다운 본래면목 자리 또는 우주의 본바탕 자리,이 자리에서는 고통은 조금도 없고, 정말로 안락무구(安樂無垢)한 영원한 행복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상락(嘗樂)이라-상주부동해서 우리가 영생불멸 하고 또는 안락무구해서 행복만이 있단 말입니다.
10. Our life is seen in the light of sentient beings to have birth and death, meeting and parting, goal and evil, or right and wrong; however, it it is seen by Buddha Nature that is our Original Ego, it has none of them. Nirvana is the world of eternal life where there is no birth and death, meeting and parting, good and evil, and so forth.
Another virtue is exernal bliss. Our world of human existance is a world of relativity. It is mingled with pleasure and conflict, but in the world of Nirvana that is the world of our Original Ego and the birth place of the universe there exists not a bit of suffering, but just complete happiness or pure pleasure.
11. 그 다음에는 대아(大我)라. 우리 범부 중생 같이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그러한 삼계에서 얽매인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를 초월해서 이것도 역시 영생불멸(永生不滅)함과 동시에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춘 그러한 참 다운 나 - [참다운 진아]를 우리가 충분히 체험하고, 진아(眞我)를 발휘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청정무애(淸淨無碍)]라 청정해서 조금도 번뇌(煩惱)의 흔적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참다운 열반이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의 필경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故鄕)]입니다.
이런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80평생을 살으시다가 많은 중생을 제도하시고 가셨다 하더라도, 신지구멸이라 - 부처님의 허망 무상한 색신과, 부처님께서 쓰시던 의식활동은 다 잠자버렸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참다운 생명자리, 부처님의 참다운 법성(法性)자리는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죽음도 없고 또는 조금도 이그러짐이 없습니다.
11. A third virtue is the Great self or the True Ego, or the Real Ego. All living beings can not escape the Triple worlds that are called the world of sensous desires, the world of beings with forms, and the world of formless beings. But the world of Nirvana, containing boundless virtue, transcends all of these. A fourth virtue is utmost purity that is not colored by any defilement at all. It is so pure a world that no trace of defilement is found there. That is where we should return in the end and also our true hometown is. We should be eager to go back there.
The world could never have been scarred by the decease of Shakyamuni Buddha or by the vanishment of His body and consciousness, who had saved countless souls for forty-five years. Nothing else could defame the place of Buddha`s True Life, or he place of Buddha`s Dharma Nature. That is he world of His True Nirvana.
12. 이것이 부처님의 참다운 열반이고 따라서 아까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열반은 어느 누구한테나 존재하는 영생불멸한 [마음의 고향]자리입니다.
영생해탈의 열반은 이것은 어디에서나 누구한테나 있는 것이고, 또는 이 자리를 가기 위한 가르침도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 게을러서 못간단 말입니다.
12. We must recognize that we ourselves too have utmost purity, and it is our Mind`s eternal hometown. Every one of us is in poession of the eternity of Nirvana. Buddhism shows us the manifest way of it. It is merely owing to our idleness that we fail to go there.
13. 우리는 부처님 공부할 때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고 하면은 [자굴심(自屈心)]이라 `스스로자(自)자` `굴욕이란 굴(屈)자`입니다. 자굴심은 무엇인고 하면 [자기비하심(自己卑下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석가모니는 성불(成佛) 하셨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된다.`는 자굴심을 가지면 자굴심을 여의지 못하면, 이것은 참다운 불교 신앙(佛敎信仰)이 못되는 것입니다.
13. In studying Buddhism we must take precautions against self-humiliation. Self-humiliation is self-distrust. He who lacks self-confidence is prone to say: `Of course, Shakyamuni attained Buddhahood; but I am nobody; and it is inpossible for me to become a Buddha`. There is no faith in Buddhism in what he says. Unless you leave off such a sense of humiliation, you cannot achieve anything in Buddhism.
14. 석가모니와 나와 더불어서, 달마대사와 나와 더불어서,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생명(生命)자체는 조금도 흠이 없습니다. 아난존자도, 이러한 가르침 정도는 알으셨겠지요. 여기 계시는 사부대중 - 우리 불자님도 충분히 알으시겠지요.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능엄경(稜儼經), 열반경(涅槃經) 등을 읽을 때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거니` 이런 정도의 법문(法門)은 다 알으십니다.
그러나 어느 경계(境界)에 부딪치면은, `아! 나 같은 것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자굴심을 품는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14. You must be aware that the life itself of yours is just as perfect as those of Shakyamuni and Bodhidarma. Ananda might have known it to some extent. And you knaw it, too.
Many scriptures such a the Flower-Ardoned Sutra, the Lotus Sutra, the Suramgama Sutra, or the Nirvana Sutra, tell that the sentient beings are not different Buddhas. Sometimes, unfortunately, when you encounter a difficulty, you will easily become discouraged. I can say that the quick disappointment of yours come from the fact that your karmic obstruction has not been purified sufficiently.
15. 우리의 업장(業障)이 아직은 정화(淨化)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안다 하더라도 똑같은 반야심경(般若心經) 한편을 우리가 공부한다 하더라도 업장(業障)이 가벼운 사람은 `아! 그렇구나, 모두가 다 제법 공(空)이구나! 내 몸도 텅텅 비었구나!` 이렇게 잘 느끼지만은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아! 어째서 공(空)일 것인가?`하고 공도리(空道理)를 못느낍니다.
15. We cannot study for in the wisdom Sutra without noticing that every Dharma is empty. A man whose karmic hindrance is thinner can promptly understand the emptiness of all Dharmas. But a man whose karmic hindrance is thicker will not agree to the fact that everything is empty. The one will say, "Yes everything is in vanity and my body is vanity itself.";
The other will doubt, "Why is it that all beings are void. Look! you and I are here thus. I know what love and hated are!"
16. `분명히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는 것인데, 왜 공(空)일 것인가?` 하고 아직도 공도리(空道理)를 여실히 못느끼신분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성찰(自己省察)을 깊이 하셔야 쓰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생불멸하는 열반의 네 가지덕인, 그런 [상덕(常德)]이란 말입니다. 또는 안락무구(安樂無垢)]한 행복(幸福)만이 존재하는, 그런 [낙덕(樂德)]이라. 또는 모든 선 공덕을, 진여공덕(眞如功德)을 다 갖추고 있는 {아덕(我德)]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대아(大我)라고 하는 참다운 진아(眞我)의 소식을 분명히 느끼고, 우선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삼명유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모든 지혜(知慧)와 자비(慈悲)를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한테는 분명히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그런 원만한 덕성(德性),
16. It is legitmatc and right for those who have doubt about emptiness to have a deep self-examination.
Through the realization of emptiness, they can grasp the tidings of the four Nirvana virtues.
We should be able to make out the tidings of the Great I or the True Ego which is possessed of the three spiritual and six spiritud powers. The three insights are: the capability to see the moral conditions of living beings in the previous lives, the capability to foresee their future conditions, and the capability to overcome all cravings and temptations. The six spiritual powers are: in addition to the above three, supernatural power, divine eyes, and thelepathy. The True Ego has limitless wisdom and compassion.
17. 이것을 못느끼면은 참다운 불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한테, 그런 덕성을 먼저 알으키고, 그런 덕성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또는, 청정무애(淸淨無碍)라. 조금도 번뇌가 없단 말입니다. 이런 소식을 알려면은 먼저 반야지혜(般若知慧)라-제법(諸法)이 공(空)한 도리(道理)를 분명히 알으셔야 합니다.
17. Unless a man feels the virtues that he owns, he can not be called a Buddhist in the true sense of the word. Buddha tride to show us the virtues himself and to teach us that we might prove them for ourselves. In order to comprehend the merit of non-hindrance purity, which is completely out of any defilement, we should realize above all that every Dharma is empty.
18. 어째서 공(空)인 것인가?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아진 것은 이것은 존재(存在)라고 할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이것은 분명히 공(空)입니다. 다만 한 동안도, 고유(固有)한 존재(存在)가 못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변화(變化)해 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은 것은 공간성(空間性)도 없는 것이고,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시간성(時間性)도 없습니다. 우리의 욕탐(慾貪)으로 인해서 중생(衆生)의 무명(無明)으로 인해서 잘못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대승(大乘)법문으로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조금도 흠축이 없는 원만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인데도, 우리 중생(衆生)들이 잘못보기 때문입니다.
18. Let me say something about non-existence of all Dharmas. We do not call what is aggregated temporarily by cause and conditions a being. It can not last its own unique form even a moment, for it changes second after second.
Therefore, it does not have any concept of space or any concept of time in it. We do not observe this non-existence of Dharmas owing to the thickness of our karmic obstruction resulting from three poisons-greed, hated, and delusion. So we don`t see that the whole universe is filled with Suchness of Buddha Nature.
19. 그러나 다행히도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이러한 것을 분명히 증명(證明)하고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모든 은하계(銀河系)의 각 성수(星宿)나 또는 태양계(太陽系)에 있는 것, 화성(火星)이나 목성(木星)이나 우리 지구(地球)나 모두가 다 산소(酸素)나 또는 수소(水素)나 더 미세한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이런 것이 합해서 안된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19. Fortunately, modern physics clarifies the non-existence of Dharmas. It shows that every phenomenal thing is composed of atoms, electrons, protons and neutrons, not to speak of the Earth, the Mars or the Jupiter in this solar system, and even of the heavenly bodies in the galactic system of the boundless universe.
20. 일체 존재의 근원적인 미세한 알맹이 이런것이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라 생각할 때 이런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런것은 알 수 없는 [우주(宇宙)의 장(場) 에너지(energy)] 이른바 [전자기장(電磁氣場)]이란 말입니다.
알 수 없는 우주의 장 에너지에서 그때그때 적당히 물리적 원칙이라든가 또는 화학적 변칙이나, 이런 걸로 해서 진동(振動)하고 있는 조그마한 상태를 전자요 또는 중성자요, 양자요 그러는 것입니다.
고유한 전자, 고유한 양성자가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과정적(過程的)으로 존재(存在)하는 에너지(energy)의 그러한 진동(振動), 운동(運動)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태양이 되고 또는 달이 되고, 지구가 되고, 우리 몸이 되고 한 것입니다.
20. What are those small particles that constitute all things? They are nothing but intangible field energy of which the universe is made up. The intangible field energy is also called electro-magnetic field.
And they are called an electron, a proton, or a neutron when a condition is vibrating out of the universal field energy according to physical principle or chemical change. They stay only as a passing of vibration or moment of energy, and not as a unique existence. We know that these particles aggregate to form everything.
21. 이와 같은 것은 조금도 한 순간도 그댈고 머물러있지 않단 말입니다. 다만 중생들은 업장이 무거워서 이렇게 형체(形體)가 이루어진 사람과 같은 모양을 보고, 또는 나무같은 모양을 보고 해서 이것은 나무요, 이것은 사람이요, 너요 나요 하는 것이지만은 정말 우리가 양자나 중성자나 그런 차원(次元)의 것을 볼수 있는 현미경(顯微鏡)을 쓰고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사람도 안 보이고, 집도 안 보이고, 이렇게 아름다운 꽃도 안보이고, 모두가 다 양성자나 전자나, 중성자나 이런것들만이 꾸물꾸물 운동(運動)하고 있을 것입니다.
21. Nothing can stand still a moment because of the movement of particles. We call one kind of form a tree, another kind a man; this one I, that one you; and so forth. Now, let us suppose the forms are observed with a microscope that can reach even elementary particles. Then, neither a man nor a tree will be seen except its movement.
22. 한걸음 더 나아가서 [청정법안(淸淨法眼)]이라 - 청정법안을 번뇌(煩惱)를 다 떼내버린 순수(純粹)한 생명(生命)만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안목(眼目)은 순순한 생명만 보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다 비어있는 제법공(諸法空)의 자리를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법은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 다 증명하듯이 마음을 깨달은 도인(道人)들은 청정법안(淸淨法眼)이나 혜안(慧眼)이나 불안(佛眼)이나, 그런 참다운 맑은 눈으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이니까, 이렇게 밖에는 안보이지만은, 가사 우리가 하늘 사람이 볼수 있는 천안(天眼)으로 본다고 생각 하십시다. 천안을 가지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이 이렇게 안보인단 말입니다.
미운 사람이 그렇게 미웁게 보일 수도 없는 것이고, 지극히 좋아하는 사람이 꼭 좋아하게시리 보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또 나아가서 법안이요, 해안이요, 불안이요, 이런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안보인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러한 여러가지 경관(景觀)이나 이러한 것은 모두가 텅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텅텅 비어있으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제법공(諸法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22. Pure Dharma Eye sees only genuine life itself never colored by defilement. That is what Buddha Eye sees, and that is where all things are empty.
Thus enlightened minds will see, with their pure and true eyes, wisdom eyes, and Buddha eyes, what is proven by modern physics. We see what is seen with our physical eyes, but it we could see what is seen with the divine eyes of heavenly beings, then it would be seen differently.
A man whom we hate or we love will look different. Likewise, Dharma eyes, wisdom eyes, or Buddha eyes will see differently from our physical eyes. As I mentioned, the various scenes that spread before our eyes are in fact all emptiness.
23. 우리는 지금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道理)를 알고 있습니까? `반야심경 도리`를 모르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영생불멸하고 또는 행복만이 존재하고 모든 공덕을 갖춘 대아(大我), 진아(眞我)라 또는 청정무애(淸淨無碍)라, 조금도 번뇌(煩惱)가 없는, 그런 맑은 자리, 이런 자리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열반공덕(涅磐功德)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중생이 그냥 거짓 것을 보고서 사실을 사실대로 모르고서, 잠시간 존재하는 거짓것을 - 그림자를 보고 실제로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중생은, 우리 몸뚱아리는 지금 분명히 있는 사실로 봅니다. 우리 마음은 안보이는 것이니까. `아, 몸이 실존이고, 우리 마음은 그림자이겠지` 그러나 실지로 해서는 그 반대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주인공(主人公)인 것이고, 우리 몸은 마음 따라서 - 주인공 따라서 거기에 이루어진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탄소나, 그러한 것이 잠시간 우리 마음의 업장(業障) 따라서, 운동(運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보고 `나`라고 우리가 고집(固執)을 하는 것입니다.
23. Can you comprehend the true meaning of the wisdom Sutra? Without its realization, you can not gain the Nirvana virtues of the true permanence, true happiness, true ego, and true purity. The world of Nirvana is full of immortality, supreme bliss, ommipotent ego, and non-obstructed purity. Buddha taught us where there is an extincntion of the emotional fluctuation of mind there is a true calm pleasure. Where all things are extinct is the place of Nirvana. A man who sees falsehood, failing to see the Real is prone to consider the illusory existence as the real: he counts a momentary shadow to be a reality; he thinks of his body to be a substance while his invisible mind is thought of to be a reflexion, not the other way around. We should know that our mind is the master of our body and our body is a mere reflexion of our mind. Our body can not be we, because it is a form resulting from a movement of various elements of oxygen, hydrogen, nitrogen, carbon, and so forth according to our karmic habits.
24.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쓴 책 가운데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저서(著書)가 있지 않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병`은 무엇인고 하면은 실지로 있는 우리 마음, 우리 주인공(主人公)을 외면하고서, 실지로 있지 않은 그림자에 불과한 내 몸뚱아리, 또는 권력(權力)이나, 또는 돈이나, 의식주(衣食住)나, 이런 것에 생명(生命)이 있다고 보는, 이런 것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몸뚱아리만 제아무리 아끼고 다듬고 화장(化粧)을 한다 하더라도, 몇 십년 살다가 결국은 죽고 말지 않습니까? 지위(地位)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상(現像)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종당에는 죽고 마는 생사(生死)의 법(法)을 떠나지 못하는 -인과(因果)의 범주(範疇)에 꽁꽁 매여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24. Kierkegaard, a Danish philosophor wrote on the sickness leading to death. When you turn away from your mind which is true master of your life and attach yourself back to your body, your power your wealth, and your house - those are only the shadow of your life then, he said, will appear the very sickness that brings about death. No matter how dearly you love your body, it can not avoid death in some decades. Then what is the use of your material wealth? Death is the destiny of all living things. They are to ve subjected to the law of life and death. They are bound up in the chain of cause and effect.
25.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법(法), 하나가 자굴심이라! 자기가 본래(本來)는 분명히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갖춘-대열반의 공덕(功德)을 갖춘-항시 영원히 존재하고, 또는 무한(無限)의 행복(幸福)을 본래 갖추고 있고, 또는 불교(佛敎)말로 하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요새, 우리 스님네들이나 어느분들이 그런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말씀을 드리면 `아, 그것은 부처님 당시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신비적인 어떠한 방편(方便)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씀들을 합니다만은, 삼명육통 같은, 그러한 부처님 신통묘지(神通妙智)는 어떤 누구나가 다 분명히 또는 완벽히 갖추고 있습니다.
25. You may recall what I said: Buddha taught that one of the most important laws to be observed by a Buddhist is that he should renounce seif-humiliation. You must know that your True-self is endowed with the three insights and six powers as well as the four Nirvana virtues. Some people like to say that such insights, powers, and virtues worked as special religious expedients only during the life time of Shakyamuni Buddha. It is true even now as then that everyone of as possesses such miraculous powers infact.
26. 부처님의 10대 명호 가운데서, 명행지(明行智)라 - `밝을명(明)자` `행할행(行)자` 지혜지(知)자` 명행지 - 라는 그러한 법문이 있습니다. `여래(如來)` 또는 `정변지(正邊智)`요, 하는 부처님의 10대 명호 가운데서 하나의 이름이 명행지란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통달무애(通達無碍)한 부처님의 지혜란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화시켜서 말씀드리면 숙명통(宿命通)을 통해서,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끝도 갓도 없는 과거를 훤히 내다보고 또는 천안통(天眼通)을 통해서, 미래(未來)를 다 훤히 내다보고 또는 현상적인 모든 것을 내다 보고, 또는 누진통(漏盡通)을 통해서 우리의 번뇌를 다 없앤 지혜, 이것보고 [삼명(三明)]이라 합니다. 이러한 삼명을 다 얻음과 동시에, 행족(行足)이라! - 6바라밀(六波羅蜜)을 다 온전히 행(行)한단 말입니다.
이런 지혜(知慧)가 부처님한테는 분명히 계십니다. 이런 지혜를 우리도 분명히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분명히 다 믿어야 자굴심을, 자기 비하심을 우리가 면할 수가 있는 것이고, 참다운 불심(佛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26. As you see, the perfect knowledge and conduct is one of the ten titles of Buddha. The perfect Knowledge means Buddha`s wisdom, which is non-hindered wisdom. Concretely, it means His three insights: Insight into destiny that can recollect former existences of sentient beings, insight of divine eyes that can foresee their future existences, and insight creared of defilement. And the perfect conduct means that Buddha has completed the six Paramitas. They are: Dana, Charity; Sila, Moral conduct; Ksanti, Patience; Virya, Devotion; Dhyana, Concentration; and Prajna, Knowledge. We must be conscious that the Buddha`s Knowledge and conduct is retained in our True-Ego. So long as we have a firm belief in it, we will not have self-humiliation and we can be true Buddhists.
27.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증상만(增上慢)이라. - `더할증(增)자` `웃상(上)자` `거만할만(慢)자` 증상만이라!
부처님 공부를 하시는 분들이 자굴심은 조금 총명해서 면했다 하더라도 증상만을 면하기기가 어렵습니다. 증상만은 무엇인고 하면은 미처 자기가 참다운 도리를 모르면서 알았다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주의 해야 합니다. 참선(參禪) 한철도 공부도 않고, 기도도 백일(百日) 동안 한번도 못해본 분이, 아, 좀 무엇이 빳닦(반짝)하고, 조금 무엇이 기묘(기묘)한 것이 보이면은 공부다 했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런 것이 증상만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난존자 같은 분도 25년간이나 부처님을 모셨거니, 참선(參禪)도 꽤 많이 했고, 염불(念佛)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하셨겠지요, 이런 분도 부처님 열반 드실 때에 자기를 가누지 못해가지고서, 마음이 동요가 되고, 비탄에 잠긴 것은 미처 열반성(涅槃性), 참다운 자기를 체험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27. I would like to talk about one thing that we should abstain in studying Buddhism. That is our arrogance of superior knowledge. It is much harder to get rid of us, even when we become wise to a degree as we practice Buddism very ardently. To be arrogant means, in terms of Buddhism, to pretend to have realized the True Ego. Not infrequeutly we find around us that a man who has never had a season of retreat of meditational practice nor a period of a me hundred days` praying dare to assent that he is at the final stage of the study of Buddhism. When something novel or mystic appears to him. That is an arrogant attitude. Honorable Ananda had followed Shakyamuni Buddha for twenty-five years, and he continued to practice Zen meditation and repeat Buddha`s sacred name. Nevertheless, he was saddened so deeply by the loss of Buddha as to abandon himself to grief. This example of his life shows a lesson that consummation of Buddhistic study is not so easy.
28. 그렇다고 생각할 적에, 참선 공부를 한둥 만둥하고, 또는 기도 좀 한둥 만둥 해가지고서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을 다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미처 증명(證明)하지 못하고 증명했다 하는 것을, 또는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이것 보고 증상만 또는 상만 그럽니다. 나라는 정도가 지금 어떤 정도인가? 내가 지금 부처님의 무량대비(無量大悲) 무량대자(無量大慈)를 분명히 믿는가? 나한테도, 지금 그러한 것이 조금치도 흠축없이 갖추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가? 분명히 믿어야, 자굴심을 면하는 것입니다.
28. People tend to profess that they have come to understand the true teaching of Buddha, even when they still have not arrived at the final stage of their praying or their meditation. It must be a conceit or an addition of arrogance it they say that they have achieved Enlightenment Dharma, when they haven`t, infact, proven Dharma yet. Do you think you have attained the perfect realization of your True Ego? Do you have a firm faith in Baddha`s immeasurable sympathy and in His boundless compassion? or do you believe that you have the sympathy and compassion in you? When you believe so, you will chase away self-humiliation out of you.
29. 공부를 조금 했다 하더라도 `깨달음의 경계`라는 것은, 우선 이치(理致)로 아는 해오(解悟)가 있는 것이고, 또는 체험(體驗)해서 아는 증오(證悟)가 있는 것이고 증오를 했다 하더라도-증명을 좀 했다 하더라도, 우리 번뇌의 습기(濕氣)를 다 뽑아서 없애버리는, 참다운 구경각(究竟覺)까지 가야, 그래야 공부를 마치는 것입니다.
29. There are stages of enlightenment for us to take. The first stage is the so-called initial awakening that we acquire by means of our reasoning; the next is the proven awakening that is testified by our experience of meditational practice; and the third is ultimate awakening that is finalized when we have exterminated all the roots of our habit of delusive thoughts, that is when we have completed our Buddhist efforts.
30. 우리가 증상만을 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처 못가고 갔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또는 부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세(近世)에 와서 이러한 분들이 없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재가불자(在家佛子)도 그렇고, 출가불자(出家佛子)도 그런 분들이 상당히 있던 것으로 우리는 압니다. 참다운 깨달음, 참다웁게 증명을 못하고, 증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30. To pretend as if you had perfected your study of Buddhism without having passed thrugh this course is to fool Baddha Himself and also yourself. However, we have seen not a few such men as have behaved so, even while they are still in the process of study.
31. 그러나 이러한 자리를 증명한다는 것은, 그렇게 꼭 특수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다라표]라는 한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 말씀을 할 때마다, 이분에 관한 여러가지 기록을 볼 때마다, 마음으로 감격을 느낍니다.
다라표 이분은 14세에 출가했습니다. 그래서 16세에, 단 2년 동안에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신 분입니다.
삼명육통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부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신통지혜(神通智慧)를 다 몰아서 삼명육통 그럽니다.
14세에 출가해서 16세에 삼명육통을 다 한 다라표가 어떻게 했는고 하면은 나중에 자기가 원력(願力)을 세워서 `아! 내가 대중(大衆)들의 뒷바라지를 해야하겠구나.` 그래서 대중들이 많이 오면, 자기가 일일이 침구도 운반도 하고, 음식도 운반도 하는 시중을 들었습니다.
[삼명육통]을 한 분이기 때문에, 더러 어슴푸레 할 때에 객승들이 오는 경우는 왼손을 척 들어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광명(光明)을 낸단 말입니다. <이때 큰스님께서는 왼손을 척 들어 보이셨다.>
31. We must know that the place of ultimate awakening is not so difficult to reach as only some specially talented men can.
I will show you this by introducing a monk whose name was Tarapyo, who was a contemporary of Shakyamuni Buddha`s. Whenever I think of him or real of his life I can not but be deeply moved. He was a common village lad. He left home to become a monk at the age of 14. After two years of desperate practice, he succeeded in conguering the stage of the three insights and six supernatural powers.
It is interesting to see his life since he achieved that stage at the age of 16. He decided to attend on the visitors to his temple. He worked hard, taking good care of their tables and bed rooms. Especially, when a monk came at night he would emit flames in a radiance samadhi by litting his left hand for the purpose of helping him. 32. 우리 불자님들! 신통지혜하는 힘이 우리한테도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참다웁게, 우리 육신(肉身)이 - 우리 생리(生理)가 - 정화(淨化)가 못되고, 우리 번뇌(煩惱)가 정화가 못되어서 발휘를 못하는 것이지, 우리한테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더불어서 조금도 흠이 없는 신통묘지(神通妙智)를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32. As I have said over and over again we must admit that anyone of us is by nature endowded with the equal wondrous powers as the young mork was. It is only due to the impurity of our physiology that we are not capable of those insights and powers that remain buried in us.
33. 다라표 이 스님은 왼손을 척 들어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빛을 내는 삼매에 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훤히 비추겠지요. 그래 가지고 오른손으로는 침구도 들고, 또는 음식도 들고, 해가지고서 객승들을 안내 한단 말입니다.
다라표 수자가 갖춘 공력이 우리 몸 가운데는, 우리 마음 가운데는 조금도 흠이 없이 모든 지혜공덕(智慧功德)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어떤 공덕(功德)인가?
한말로 말하면은 지혜광명(智慧光明), 자비광명(慈悲光明)이 갖춰져 있습니다. 전자(電子)나, 양자(陽性子)나, 또는 중성자(中性子)나 모두가 다 하나의 방사광선(放射光線)입니다. 우주(宇宙)에는, 우주 밑 바닥에는 조금도 빈틈이 없이 영원한 광명(光明)이 충만(充滿)해 있는 것입니다.
33. Tarapyo gave off liglt, in a radiance samadhi, with his left hard raised. And with his right hand, he would carry food and bed clothes for visitors. We must recognize that we have the same kind of wisdom that Tarapyo had. It is called the radiance of wisdom or the light of compassion. What is known an electron,a proton or a neutron is nothing but emission of radioactivity, and the whole universe is filled with its radiance.
34. 오늘은 다행히 날이 좋아서 이와 같이 청명합니다. 그 위에 이렇게 또 전기(電氣)가 밝으니까 더욱더 광명에 빛나는 것 같이 보이겠지요. 이런 광명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다만 물리적인 조직에서만 오는 것인가?
무(無)에서 유(有)는 못 나옵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에는 근원적으로 광명(光明)이 충만(充滿)해 있는 것입니다. 무슨 광명(光明)인가? 부처님의 지혜광명(知慧光明), 부처님의 자비광명(慈悲光明)이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34. Today is a fine day. It is very bright in this hall with the lights on. Where does this brightness come from? From a physical operation? No, it can not. A being can not come from nonbeing. It comes from the univevse. Heaven and earth are, from their origin, full of brightness. It is called light of Buddha`s wisdom and compa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