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인원의 비밀
머뭇거렸다. 골프채도 자가용도 없을 때다. 지인은 골프장을 예약하고 가자고 성화다. 그는 골프에 재미를 붙였는지 주말이면 난리다. 사무실은 밥 먹듯 야근이고 호주머니는 텅 비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버티었다. 결국, 그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송아지가 장에 끌려가듯 골프장으로 향했다. 사실 골프를 칠 줄 모를 때였다. 칠 번 아이언만 잡아보았다. 그것도 저녁 식사하고 직장동료를 따라서 실내 연습장에서 몇 번 휘둘러 본 게 전부다.
난생처음 골프장 구경이다. 클럽하우스에 도착하자 이방인이 되었다. 현관에서 골프채를 받아주던 이가 차 트렁크를 열더니 골프채가 하나뿐이라며 이상한 눈초리다. 클럽하우스에 들어서자, 동반 플레이어가 먼저 와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으나 안면이 있다. 웬 이가 핸디가 얼마냐고 묻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멍하니 있었다. 같이 간 이가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넉살이다.
클럽 하우스에서 내려다본 파란 골프장은 천국이다. 산자락을 끼고 휘감은 골프장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솟구치어 오르는 분수는 긴장한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준다. 색깔이 있는 골프복은 생동감 있게 느껴지고 카트에 올라 초원을 누비는 이들은 딴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문득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보 골퍼는 파-쓰리 골프장이나 퍼블릭 골프장에서 연습한 후 오는 게 상례인데 바로 회원제 골프장으로 입성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동물원에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시간이 되어 카트 앞으로 나가자, 골프 매니저가 내 이름을 부르며 골프 백을 찾을 수 없다고 난리다. 골프 백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자, 그녀는 묘한 눈초리로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본다. 동행한 이가 나서서 자신의 골프채를 함께 사용할 거라고 이야기하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적어도 정규 홀에 가려면 자신의 골프채를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무작정 따라왔다는 생각에 후회막급이다.
우리 팀 차례가 왔다. 그녀가 간단한 준비운동을 시키더니 티샷 순서를 정하잔다. 칠 줄 모른다며 말 구를 부탁했다. 첫 골퍼가 티에 올라가서 드라이버 샷을 날렸다. 빨랫줄처럼 호쾌하게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녀가 굿-샷을 외친다. 마지막 내 차례다. 처음 티에 올라간지라 혼이 빠졌다. 어리바리하게 겨우 손을 내밀어서 드라이브를 잡고 어쩔 줄 모른다. 어린 시절 도리깨질하던 생각으로 리듬에 맞추듯 어깨 위로 올려 스윙연습을 하는데 빨리 치라고 채근이다. 뒤에서 다른 팀이 기다린다기에 조급한 마음에 왼손으로 그립을 꽉 잡고 휘둘렀다. 몸은 머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 헛스윙이다.
그들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무던 애썼다. 걱정하지 말고 편안하게 다시 한번 샷을 하란다. 자세를 잡고 드라이브를 휘둘러 보았으나 매한가지다. 헛스윙이다. 그녀가 눈을 흘긴다. 드라이브를 놓고 잡아보았던 칠 번 아이언으로 티샷했다. 뒤땅을 맞아서인지 공이 땅바닥으로 뱀처럼 기어간다. 어쨌든 공이 앞으로 나가서 다행이다. 드라이브로 멀리 날린 이들은 폼나게 카트를 타고 신나게 달린다. 나는 방향성 없이 날아간 공을 찾느라 풀숲을 헤맨다. 그녀는 경기 진행이 늦어진다며 서두르라고 독촉이다. 전반 홀은 허둥대며 끝났다. 잠시 후 후반 운동이 시작되었다. 다리는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겁고 눈썹마저 무거워서 밀어내고 싶은 심정이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빨리 끝났으면 했다.
억지춘향으로 골프를 치는데 그녀가 마지막 파-쓰리 홀이라고 한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솔깃하여 마음을 가다듬었다. 티에 올라가서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칠 번 아이언으로 자연스럽게 스윙한 것이 142m 홀컵으로 공이 빨려 들어간 것이다. 사실 들어가는 순간은 보지 못했다.
“홀인원, 홀인원….”
그녀가 깡충깡충 뛰면서 소리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가 문고리 잡은 격이다. 때마침, 뒤바람이 불어서 공이 조금 더 나간듯하다. 동반 플레이어가 난생처음 홀인원 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탄성이다. 그녀가 무전으로 연락했는지 앞뒤 홀 골퍼들이 홀인원 맞냐며 다가온다. 클럽하우스에서도 차가 달려왔다. 큰절을 올리라 하여 엉겁결에 홀컵을 향해서 절했다. 홀인원 증서를 받아 들고 골프장을 나서며 만감이 교차한다. 평생 골프를 친 이도 홀인원을 경험하기 어렵다는데 무슨 복에 첫날 영광을 얻었다.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다. 골프채도 없이 왔다고 눈치 주던 그녀의 묘한 표정과 동반 플레어의 환호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홀인원의 비밀이다. 홀인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샷을 잘해서 홀인원 한 게 아니다. 주위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바람이 한 부조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골프장을 예약 해놓고 가자고 성화한 지인의 공이 크다. 나는 골프채도 자가용도 없이 무임승차를 했을 뿐이다. 아마추어 골프는 점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회생활처럼 동반자가 중요하다. 동반 플레이어의 배려가 있었기에 홀인원을 한 것이다.
서재 한쪽에서 홀인원 기념패가 미소 짓고 있다. 오랜만에 기념패에 입을 맞추며 회억에 잠긴다. 지난날 내 곁에서 함께 일했던 모든 동반자에게 늦게나마 고마운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