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외벽에 그려진 벽화는 멀찍이서도 보일만큼 매우 컸다. 낡긴 했지만 높지 않은 층수의 단순한 실루엣을 가진, 옛 학교 건물 스타일의 외벽 크기는 가로 12m, 높이 8m이며, 그 앞쪽으로 차량들이 줄지어 주차된 상태이다. 벽화를 위해 건물의 구조를 변경한 것이 없기 때문에 벽화가 그려지기 전의 상태를 예측해 보기는 쉽다. 아마도 아무 장식도 없이 칠한 지 꽤 시간이 지난 페인트가 허여멀건한 낡은 벽면은 공백공포를 자아내며 무엇인가로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벽화 이전에는 마치 거대한 대자보처럼 문화원에서 진행하는 각종 행사를 알리는 대형 플래카드 등이 걸려 있던 장소였다. 문화원은 문화 예술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드나드는 장소이며, 굳이 문화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 앞에 도로와 지하철이 가까워 많은 시민들이 지나다니면서 볼 수 있는 곳이라서 어쩌면 공공미술이 실현되기에 이상적인 장소일 수도 있다.
작가 이관수가 총감독을 맡아 진행한 작품은 정사각형 평면으로, 벽면 아래에 주차로 인해 가려질 부분을 제외한 벽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대형 벽화이다. 화면 오른쪽 위에는 개항 기 월미도가 찍힌 흑백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한 이미지가 있고, 화면 왼쪽에는 전통 의상을 입은 연주자가 대금을 불고 있다. 자신의 연주에 깊이 심취된 악기 연주자와 그 옆에 펼쳐진 풍경은 다소 단절된 듯도 하지만, 풍경 자체가 현재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관념 속에 떠오른 이미지처럼 보인다. 마치 피리 소리에 의해 홀연히 등장한 옛 장면 같이 말이다. 원근법적 효과에 의해 공중에 붕 뜬 듯이 보이는 풍경은 관념성을 더하고 있다. 현재 유원지화 되어 있는 월미도는 개항 기 당시에도 풍광이 좋아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별장이 많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그 한 장의 역사적 자료를 접한 적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컬러로 각색된 뒤의 풍경은 그냥 월미도 풍경으로 보일 법도 하다. 관객이 벽화를 보는 시선을 고려해 보면, 왼쪽의 강력한 도상인 대금 연주자에 비해 월미도는 먼 풍경으로만 다가올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함없는(?) 풍경은 일본인이 차지했든 서구 열강이 차지했든,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왔든 간에 상관없는, 자연이 인간 역사에 대해 가지는 우월한 관점을 나타낼 수 있다. 그 풍경이 지금의 월미도로 보이는지 옛 월미도로 보이는 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벽화 제작가의 본래 의도가 역사를 환기시키는 지형도로서의 월미도를 염두에 두었다면,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벽화 제작자는 월미도 사진을 선택한 것에 대해, ‘자문위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월미도가 가지는 상징성이 조형적으로 잘 드러났다고 볼 수는 없다. 소재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구체적 상징을 읽기 어려운 채 먼 풍경으로 흘러가는 월미도와 달리, 오른쪽의 악기 연주자는 검은색 관모와 붉은 색 전통 의상,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크기로 인해 강한 인상을 남긴다. 벽화 제작자는 이 인물에 대해 ‘문화원의 상징을 살리고자 체택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 도상은 자신의 그림 안에 즐겨 그려왔던 소재였다.
악기 연주자는 문화원의 상징이자, 자기 그림의 주요 모티브이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면인 월미도의 옛 사진과 문화원의 상징, 게다가 작가가 평소에 열심히 그려왔던 작품세계까지 총괄된 최종 산물은, 역사와 문화, 개인을 골고루 안배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 및 소재가 결과물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특히 그것이 개인의 작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벽화이기 때문에 개인작품으로서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는 상황이 문제가 되는 수가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미술장식품 공모도 아니고, 문화재단에서 지원한 공공기금으로 진행하는 공공미술 사업은 결코 개인의 작업을 공공영역에서 확대해 놓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개인 작가의 작품이 훌륭해도 그렇다. 물론 공공미술에서 개인이 맡아야할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수많은 변수를 전체적으로 조율하고 책임지는 일이다. 공공미술 작업에서 개인은 큰 역할을 하지만, 작품에 구현되어야 하는 것은 결코 작가 개인의 작품 세계가 아니다. 관복 입은 대금 연주자의 모습이 개인 작품의 모티브가 아니라, ‘문화원의 상징’으로서 본다 해도 문제는 남아있다.
그것은 훌륭한 우리의 전통문화를 되살려내자는 당위를 호소하고 있을 뿐이지,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문화를 상징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대금 연주자의 모습은 월미도 사진 만큼이나 소재주의적이다. 소재주의라는 혐의는 소재와 맥락이 어울리지 않을 때 발생한다. 각각으로서는 훌륭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맥락이 무의미할 때 좋은 소재들은 빛을 바래고 만다. 그러나 벽화 제작자도 처음부터 이런 결과물을 내려하지는 않았다. 문화재단에 제출된 지원 서류에 나타난 기획 의도를 보면 ‘구민들의 참여의 방법으로 중구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나 지역의 그림을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모하여, 당선된 그림들을 옛 인천 시가지도 위에 배치하여 그림지도 형식으로 벽화를 구성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중구의 역사와 문화를 벽화로 학습하게 되는 효과를 기대 한다.’ 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시민 참여의 과정이 쉽지는 않았고, 벽화의 방향이 왔다 갔다 하다가 역사와 문화, 개인의 세계를 종합한다는 명분만 좋은 결론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제작자에 의하면 의사결정 과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정작 벽화를 그린 시간은 일주일 남짓이었다고 한다. 공공미술이 어려운 지점은 바로 평소에 예술과 거리가 있었던 시민 참여의 계기를 높이는데 있다. 개인 작업을 할 때는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될 사항이 공공미술에서는 큰 매개 변수로 작용한다. 개인 작업은 ‘대중이 날 무시했으니 나도 대중을 무시 하련다’는 발상이 가능하고, 대체로 사회에서 소외된 미술가들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개인 작업에 열심이었던 작가들이 공공미술을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공공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작품의 성공여부의 기준이 아예 달라진다는 것이다. 공공의 맥락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우선일 텐데, 불특정하고 익명적인 다수로서의 대중을 고려한다는 것은 개인 작업에만 매달렸던 이들로서는 매우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로 떠오른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금 이 벽화 앞을 지나치는 대중들은 이익사회의 일원이지, 공동사회의 일원이 아니다. 문화를 통해 구현되어야 하는 공공성은 배타적인 개인의 이익을 따라 뿔뿔이 흩어지려는 현대문화를 치유하는 방향을 향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도식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벽화는 그 내용을 떠나서, 그리기라는 방식 자체에서도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벽화 제작자는 ‘회화를 벽화로 만들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회화를 벽화로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회화가 다양한 기상 조건과 공공에 노출되는 벽화가 될 때, 그것은 바탕면의 처리나 안료의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나 제작자는 이 대형 벽화를 실외에서는 취약한 아크릴 물감으로 마감했다. 더구나 5년 안에 재건축이 예정된 건물의 벽면은 못 질만해도 부서지는 상황이었고, 벽면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공사비가 많이 들것이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을 그리든 간에 벽화를 하려고 결정 했으면, 바탕 작업과 실외에 절적한 안료 선택은 기본이다. ‘회화를 벽화로’라는 발상은 내용적으로는 개인성과 공공성 사이에 내재된 긴장을 쉽게 건너뛰게 했으며, 형식적으로는 캔버스 작업을 벽면에 확대시킨 결과로 나타났다. 요 몇 년 사이에 붐처럼 일어난 공공미술에서 수없이 생산된 벽화들은 안료 선택의 실패로 흉물로 방치된 경우가 많았다. 대개 지속적으로 보수할 시간과 인력, 재원이 확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벽화 제작자는 처음부터 벽화가 지속되기 위한 물리적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그 벽에 벽화가 필요했던 이유는 벗겨져 가는 페인트였다. 그러나 새롭게 아크릴로 그려진 벽화는 아마도 먼젓번 페인트보다 더 짧은 시간 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계속 보수하려면 벽화 제작자는 제작 당시 보다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할 것이다. 곧 떨어져 나갈 안료 찌꺼기로 뒤숭숭해질 벽면은 그 자체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줄 것이다. 개항 기 월미도의 모습이든 고풍스러운 대금 연주자의 모습이든, 모든 것은 시간에 의해 파괴되고 흐릿해진다는 것을 벽면 스스로 드러낼 것이다. 결과야 어찌됐든 제작자의 노고가 드러난 벽화를 보면서, 그리고 작품이 성공적 이었는가 아닌가를 논구하기에 앞서, 어떻게 그렇게 큰 벽면이 훵하게 노출되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수천만 원을 들여서 칠하고 그려도 곧 벗겨질 페인트나 아크릴 물감으로 뒤덮인 그 벽면 말이다. 햇빛이 잘 드는 그 벽면은 그 앞에 큰 나무들을 심으면 보기 좋았을 것이다.
나무가 공간을 너무 차지한다면, 최소한 푸릇푸릇한 담쟁이라도 뒤덮을 수는 있을 것이다. 차량 몇 대를 더 세우려고 건물 외벽까지 닦아 세운 주차장이 문제였다. 아마 주차장 부족으로 있던 나무도 베어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된 건물 주변에 나무가 없었을 리가 없다. 차를 더 세우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거나, 또는 심지 않고 비어둔 거대한 공간은 많은 돈을 들여 주기적으로 돈을 쳐 발라야 하는 페인트 벽이 되었고, 벽화든 뭐든 그 무엇도 받아주지 않는 고집불통 벽이 된 것이다. 이미 그렇게 고정된 장소는 더 강력한 분칠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러나 삶을 움직이는 거대한 구조적 힘을 인지하지 못하고, 표면에 붙어 일희일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조적 모순을 덮는 분칠이 아니라, 신선한 그늘이나 바람 같은 예술이다. 조금의 편리를 위해서 환경을 파괴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수많은 재화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현대 도시문명의 역설 속에서, 공공미술의 참여자들은 시류에 편승해서 프로젝트를 따내는 일에 열중하기 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