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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상하이 함락
시가지를 행진하고 있는 인민 해방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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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에 의해 점령당한 직후의 상하이의 모습.
1949년 5월 12일,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은 상하이에 대한 공격을 시작해 5월 27일에 최종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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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이 사라진 후 몇달 동안 나는 그가 무척 그리웠다. 방과 후에 나는 학교 정문 근처의 우리가 매일 만났던 곳을 향해 걸어 갔다. 그럴 때마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친한 친구를 잃은 슬픔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지만, 큰형 처럼 나도 많은 지식을 배워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큰형이 사라진 다음, 나는 다른 상하이 주민과 마찬가지로 매일 곧 들어온다는 공산주의자들을 걱정 하면서 보냈다. 장카이색의 국민당과 마오 제둥의 공산당 사이에서 벌어진 중국 내전은 다른 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 되었으나, 상하이 시민들은 전투로 인해서 발생한 불이나 연기를 본적이 없었다. 상하이가 함락 되기 전 몇년 동안, 시민들은 겉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 사회 혼란, 깡패들의 행패, 장카이색 정부 요원들에의 한 괴롭힘을 견뎌 내야 했다.
한달에 30% 씩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의 가치가 떨어 졌다. 장가이색 정부는 인프레이션에 대한 대책으로 돈을 더 찍어 냈다. 가치가 보존 되는 돈이 없으니, 사람들은 곡물, 석유, 상하지 않는 음식, 마른 음식등을 사서 쟁였다. 이것은 인플레이션을 더 심하게 했다. 사재기와 인프레이션의 악순환은 명열한 속도로 돌아 갔다. 한때는 상하이 근처 농부들은 농산물을 돈을 받고 팔지 않고 서로의 산물을 교환 했다. 상하이 시민은 돈 대신 은, 금, 보석, 옷, 다른 소유물을 주고 일상 먹는 음식을 샀다.
헬렌 이모와 나는 다행이었다. 이모는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로 부터 통조림 음식을 구해 왔다. 매달 첫날에 이모는 월급을 받았다. 그날 온 종일 여러 곳에서 음식을 구해서 우리 아파트로 가지고 왔다. 월말이 가까워 지면 우리는 이모의 백인 크리스찬 친구에게서 얻은 스팸, 정어리 통조림, 채소 통조림을 먹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앞으로 닥 칠 공산주의 통치에 대한 공포에 떨 면서 지냈다. 푸단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 하고 있는 헬렌 이모는 조심스러워 하고 불안해 했다. 이모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회 활동을 주렸고,
큰소리로 공산당은 망한다고 중얼 거리는 것을 중단했다. 대신 허공에 대고 물었다.
“왜 장카이색은 그렇게 무능 한가?”
“왜 미국은 자국 군대를 보내서 돕지 않는 가?”
“마오는 기적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인 가?”
“하나님은 그를 따르 는 사람들을 버리는 가?”
이모의 질문은 나나 다른 사람을 겨냥 한 것이 아니었지만 항상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내가 숙제를 하고 있는 데, 갑자기 허공을 쳐다 보고 질문을 하면 나는 깜짝 놀라서 이모를 쳐다 보지만, 이모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시의 북쪽 경계에 도달하기 몇주전에 국민당 정부는 무너지기 시작 했다. 아무 경고 없이 전기, 수도, 가스 공급이 아무 예고 없이 정기적으로 중단 되었다. 버스와 열차 운행이 몇시간 씩 연기 되었다. 학교도 알리지 않고 아무 때나 닫았다. 어떤 날에는 아침 10시에 선생님이 모두 집에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헬렌 이모는 내가 점심 먹으러 12시에 집에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두 시간 동안 길거리를 돌아 다니며 드라마와 스펙터클이 일어 나는 곳을 찾았다.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스펙터클은 결백 한 처럼 보이는 사람이 사복입은 안전원에게 체포되는 장면이었다.
안전원이 그를 세우면, 지나가는 행인들의 관심을 사려고 미친듯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는 죄지은게 없어요!”
화가 난 안전원은 수감을 체워 연행 할 때까지 희생자를 욕 하고 두들겨 팼다.
더욱 극적인 장면은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백주에 길거리에서 처형 하는 것이었다. 일반사람들 (반공)교육을 위해서 일부러 공공장소에서 행해 졌다. 보통 돼지처럼 손발이 묶인 죄인을 십자로 한가운데에 데려다 놓고, 군인과 안전원으로 구성된 처형 팀이 공산주의자라고 알려진 죄인의 이름과 죄목을 손에든 확성기를 통해서 발표 한 다음, 땅에 누워 있는 죄인을 라이플로 총구멍을 그의 몸에 바짝 대고 쏘아 죽였다.
총에 맞은 죄인의 몸은 총알의 충격으로 땅에서 반사적으로 튀어 올랐다가 퍼져가는 피웅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나는 그때마다 움찔 했다.
내 정신을 빼앗아가는 장면은 무섭게 보이는 군인들이 총검과 기관총을 매고 군화 소리를 내며 여러 행군대열을 만들어 힘차게 행진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이 전투를 하려고 최전방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 했다.
때때로 기계화부대 행렬이 지나갔는 데, 탱크, 대포, 무장한 트럭등을 볼 수 있었다. 행인들은 장카이색의 엘리트 군대의 무기를 보려고 가던 길을 멈추었다.
별로 신통하지 못 했지만 자주 볼 수 있었던 장면은 경찰 에스코트를 받으며 뺘른속도로 길을 통과하는 리무진의 무리 였다. 때때로 리모 안에는 금발의 서양인이 타고 있었다. 리모가 뷰익이면 혹시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헌차가 아닌가 하고 의심해 보았다.
대부분의 보행자들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항상 주위를 들러 보았다. 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소리가 들리거나,
뜻 밖의 장면이 눈에 띠면 빠른 걸음으로 피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소음이 틀리거나 총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 갔다.
어떤 때는 어디서 날아오는 지 모르는 총알에 맞아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갑자기 10 피트 또는 20 피트 날라가서 쓰러지고 흐르는 피는 웅덩이를 만들었다. 구급차나 경찰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순히 시체와 피를 피해서 걸어 갔다. 나중에 그곳에 가보면 시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장카이색의 국민당 정부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 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신자, 상인, 자본주의자는 모두 위험 했다. 1948년 말에는 은행가, 실업가, 섬유
계 재벌, 부동산 재벌이 홍콩이나 다른 외국으로 도피 하기 시작 했다. 대부분의 정부기관은 그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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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늦게 헬렌 이모와 내가 살던 아파트 건물 지하층 부엌에서 불이 났다. 이 건물에는 우리 식구와 다른 6 가구가 입주해 있었다. 옛 프랑스 조계지에 있었던 콩크리트 건물이었다. 나는 낮잠자다가 일어나서
다른 입주자들과 같이 밖에 나와 있을 때 까지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다. 입주자들이 지하 창문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중 몇사람은 보도에 앉아서 두려움과 고통에 넘쳐서 흐느끼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보험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집이 불에 타면,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정부나 다른 기관의 도움도 없었다.
모두 밖으로 나온지 5분 후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했다. 소장이 차에서 뛰어 내리고 소방원들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호스도 꺼내지 않고 펌프도 연결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타는 건물도 쳐다 보지 않았다. 대신에, 놀라서 공포에 떨면서 불타는 집을 쳐다보고 있는 우리들 쪽으로 걸어 왔다.
“불 끄는 데 얼마 주겠소?” 소장은 아무 꺼리낌없이 웃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는 모두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잘 잘못을 따질 시간도 협상할 시간도 값을 깍을 시간도 없었다. 일초라도 불끄기가 지연 되면 그 만큼 많이 탈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가진 재산을 그 만큼 더 잃어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소장 마음대로 였다. 마치 사람을 인질로 잡아 놓고 몸값을 요구 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요구하는 만큼 주겠소. 어서 불이나 꺼 주시요!” 몇명의 입주자들이 간청 했다. 소장은 미소를 띠우고 그의 부하들에게 고개를 끄덕 였다. 불을 다끈 다음 소장은 집 가격의 5%를 내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생각 보다 작은 불이었고 별로 어렵지 않게 진화할 수 있었다. 5%는 정당한 것처럼 보이나, 문제는
집값을 소방대원 마음대로 정한 다는 것이었다. 그는 집을 살펴 보고 건물 구조를 재 보고 입주자들을 경험 있는 눈으로 본 다음 집값을 정 했다.
“내일 오후 까지 돈 준비 하시요. 우리가 와서 받아 갈 것 입니다. 만약 돈을 안내면 집에 불을 붙일 것이요!”라고 하고 떠 났다.
그날 저녁 때, 입주자들은 어떻게 진화 값을 나누어 지불 할 것인가를 놓고 몇시간 동안 언쟁을 벌렸다.
그중 두 남자는 거의 주먹 다툼을 할 뻔 했다. 결국 합의를 보았는데 헬렌 이모는 나에게 자기 저금의 반 이상을 지불하게 되었다고 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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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이 상하이에 가까이 접근 하면서 관리, 소방소원, 경찰에 의해서 저질러진 부패와 속임수가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한 유일한 것도 아니고 가장 나쁜 것도 아니었다. 법과 질서의 부재가 부패 보다도 더 사람들을 에게 손상을 주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접근해 오자, 국민당 정부의 상하이 관청들은 해체되기 시작 했다. 누군가가 공산군이 쓴 마오 모자를 살짝 보기 3일 전에 대도시 경찰과 시 정부는 문을 닫았다. 장카이색의 중무장한 군인들도 사라졌다.
경찰, 군인 그리고 여러 임무를 맡은 관리들이 자리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 할 때, 사무실과 부대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들만 가지고 갔다.
그들이 다 없어지자, 군중이 거리에 모였다. 약탈을 위한 열린 시즌이었다. 처음에 군중은 관청과 공공 건물을 목표로 했다. 그 다음에 상가를 털 었다. 사람들은 은행, 경찰서, 소방서, 우체국, 백화점, 상점으로 몰려 들어 가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갔다. 관청과 상가 주위 거리는 남자, 여자, 심지어 어린이들로 꽉차 있었다, 이들은 의자, 책상, 밴취, 음식, 옷, 도구, 전등, 문방구, 수세식 변기등을 들고 가고 있었다. 대원수 자신도 재무부의 금괴와 국립박물관에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그림과 골동품을 타이완으로 가지고 감으로 서 만인의 모범이 되었다.
사흘동안 대도시 상하이는 정부 없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누구나 어떤일을 해도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았다. 중국 사람들이 “암흑세계”라고 부르는 깡패, 도둑, 마피아는 살인, 강도, 강간, 복수와 아무 쓸데 없는 폭력을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밤낮 가리지 않고 자행 했다.
지옥이고 아수라장이었다. 보통 시민들은 날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우리집은 어른들이 창문을 볼트로 죄고, 문을 잠그고 문 뒤에 무거운 옷장, 책상을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보호해 달라고 예수, 부처, 하나님에게 기도 했다. 한두 시간 간격으로 헬렌 이모는 방안에서 무릎을 꿇고
악마에게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주님에게 호소 했다.
집안에서 공포는 서로에게 옮겼고 서로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바짝 긴장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우는 소리로 말을 했고 곧 살아있는 그들의 신경 다발이 생으로 잘라 질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구슬을 가지고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헬렌 이모와 같이 쓰던 방을 나갈 때는 발꿈치를 들고 발가락으로 초초한 사람들 가운데를 걸어 나갔는 데 어른들을 짜증을 나게 했다.
지옥 같은 사흘 동안 아무도 감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첫날은 한 입주자가 가지고 있던 라디오 앞에 사람들이 모여서 뉴스에 귀를 기울 였다.
장카이색의 라디오 방송은 대부분 허위선전과 내전에 관한 가짜 뉴스였다. 그들은 국민당군이 용감하게 싸우고 있으며 곧 공산주의자들과의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 시킬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공산주의자들이 라디오 방송을 장악 하지 않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국민당군이 도망가고 있기 때문에 마오의 군대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헬렌 이모와 어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장카이색을 원조 했던 미국이 개입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점령을 막아줄것을 허망하게 바라고 있었다.
둘째 날에는 전기가 나가고 수돗물이 끊겠다. 라디오 뉴스가 나오지 않자, 어른들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신경이 곤두 섯고 무서워 했다. 그들은 말이 없어졌고 안절부절 했다.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경련에 시달렸다. 어떤 사람은 거의 돌부처 처럼 경직되어 버렸다. 집전체가 요새화된 방커 같이 봉쇄 되어서 고약한 인분 냄새로 악취를 풍겼다.
셋째날 아침 6시 쯤 요란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내가 침대에서 나올 때, 어른들은 이미 막아 놓은 집 문앞으로 불안하게 다가가고 있었다. 2층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창문으로 밖앗 거리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고함을 질 렀다. 우리는 문을 열어 주어야 했다. 아무도 승전한 점령군 군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거절 할 수 없었다!
벌벌 떨면서 어른들은 문을 막아놓은 가구들을 억지로 치웠다. 지난 사흘 동안 끊임 없이 서로 나누었던 피해망상적인 생각과 걱정을 저주 했다.
“우리 중국 사람들은 나쁜 운명을 타고 났어!”
“공산주의자나 국민당이나 다 똑 같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들 같이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 하는 것이야.”
“차라리 서로 나라를 둘로 나누어 가지고 전쟁을 끝내지.”
“우리는 살 까?”
“부처님이여 자비를!”
복도에서 사람들이 모두 없어진 다음, 대부분의 어른들은 무서워서 문에서 가장 먼 귀퉁이에 서서 문쪽을 바라 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누가 문을 열어야 할 까? 다행이, 마침, 6 입주 가족 중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연장자인 자기가 해야 한다고 하며 자진해서 나섰다. 그는 크게 숨을 쉰 다음 문앞에 버티고 서서 볼트를 제거 했다. 그리고 문 손잡이를 잡았다. 헬렌 이모는 침을 꼴깍 삼키며 나를 자기 옆으로 끌어 당 겼다.
문이 열리자 모두 깜짝 놀랐다. 열린 문에 서있는 3명의 군인들은 웃으면서 인사 했다. 그들은 너덜너덜한 군복을 입고 라이플을 어깨에 매고 있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점령군의 무장한 군인이 웃으면서 일반 시민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 하리라고는 아무도 이전에 상상 해 본적이 없었다. 보통 점령군은 약탈하고 죽이고 이런 저런 잔악한 짓을 한다.
“미안하지만 먹을 물 좀 주시겠 습니까?” 그중의 하나가 정중하게 요구 했다. 너무나 큰 공포에 휩싸여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예의 바른 태도에 직면하여, 모두 가만히 서서 입을 딱 벌리고 군인들을 쳐다 보았다. 나는 문과 놀란 어른들 사이 층계 계단에 자리 잡고 있었는 데, 나에게는 영화 상영기 바퀴에 영문 모르게 필름이 끼어 화면이 고정된 장면 처럼 보였다. 내가 군인들과 어른들을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가며 보는 동안 길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지나 갔다. 결국 한 젊은 여자가 마치 꿈에서 깬 것 처럼 일어나서 가장 가까운 부엌에서 끓인 물 한병을 가져와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군인들이 서로 물을 나누어 마신 후, 그중에 한명이, “대단히 고맙습니다. 우리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 습니다만 아무 음식이나 괜 찮으니 먹을 것을 좀 나누어 주시면 정말 감사 하겠 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가겠 습니다. 우리는 시민들을 괴롭힐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어제 부터 우리는 음식과 물 없이 쉬지 않고 60 마일을 강행군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이 마르고 배고프고 피로에 지쳐 있습니다.” 라고 말 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믿기 힘들었다. 군인들은 큰소리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강제로 집에 들어 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총을 흔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것들 외에도 얼마든지 더 나쁜 짓을 할 수 있었다. 대신에 그들은 우리에게 물과 음식을 달라고 청 했다!
우리는 방금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쇼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선입견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공산주의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악마 여야 했다. 소문이 그랬고 국민당 정부는 신문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매일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 앞에 3명의 무장 공산주의자들을 두고,
공포가 사라지기도 전에 우리는 동정심과 존경심을 느꼈다.
우리는 3명의 군인들을 집안으로 대려 다가 찐빵, 밥, 피클과 어제 저녁 먹고 남은 음식을 대접 했다. 너무나 좋아서 어쩔줄을 모르며 음식을 꿀떡 꿀떡 삼켰다. 그리고 다시 깊이 깊이 감사 했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또 다른 군인들이 와서 물과 음식을 요구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우리를 안심 시켜 주었다. 민폐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전 병력이 3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지역의 집을 방문 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이 떠난 다음, 사흘 동안 쌓였던 긴장이 드디어 풀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 했다.
“이거 믿을 수가 없어!”
“나는 무장한 사람이 저 공산주의자들 처럼 점잖고 절제 있는 것을 본적이 없어. 만약 장카이색의 군대라면
적어도 우리 가진것들을 빼앗가 갔을 거야!”
“공산주의자들은 나쁘지 않은 가봐!”
“무슨 말 하는 거야, 그사람들 참 좋아!, 그 사람들 얼마나 정중 해, 봤지 않아!”
“한 부대가 세 팀으로 나누어 물과 음식을 요구 했어. 그들이 얼마나 절제 있고 잘 조직되어 있는 지 알 수 있잖아!”
“이건 전화위복인지 몰라!”
그날 밤 여자들은 집에 있는 음식을 모두 모아 모두 더같이 먹을 수 있는 상을 차렸다. 아파트 건물 입주자 6 가구 모두가 내전을 견뎌 내고 살았음을 축하하기 위해서 였다. 아무것도 잃어 버리지 않았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아파트 건물도 손상되지 않았고, 놀랍지만 안심시켜주는 공산주의자 군인들과의 대면이었다. 남자들은 메이 구이 루(장미 냄새 나는 술)를 가져와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건배 했다.
공산주의자 군인들은 사흘동안의 공포와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신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군대가 점점 많이 들어 오고, 그들은 질서를 잡기 시작 했다. 곳곳에 보초를 세우고, 관청을 접수 하고, 교통정리를 했다. 군인이 아닌 공산주의자 관리들은 수도, 전기, 공공 교통을 효율적으로 회복 시켰다. 만 이주 만에
도시는 더이상 깡패와 암흑세계 범죄자들의 사냥 터가 아니었다.
상하이가 함락 된지 얼마지나지 않아서 중국 대륙 젼체가 공산주의자 손에 떨어 졌다. 상하이와 난징의 함락은 장카이색의 국민당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상하이에서 서쪽으로 200마일 떨어져 있는 난징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 였다. 그리고 상하이는 중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번영 하는 대도시였다. 두도시의 함락은
국민당의 종말을 의미 했다. 결국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후퇴 했다. 공군과 해군이 없는 공산군은 중국 대륙과 타이완을 갈라 놓는 대만 해협을 건너 국민당군을 추격 할 수 없었다.
1949년 10월1일, 체어맨 마오는 톈안먼 광장에서 중국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고 베이징을 수도로 정 했다.
한두달 만에 공산주의 통치는 상하이를 바꾸어 놓았다.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법과 질서가 혼란과 부패를
대신 했다고 좋아 했다. 공산군인들은 시민에게 봉사하고 보호 하는 평화 요원으로 그 임무를 수행 했다.
그들은 책임을 지고 일을 하고 서로 감시 했다. 관리들은 시민을 강탈하지 않았다. 발뺌을 하거나 달콤한 말로 속이는 상거래도 사라 졌다. 정부의 명령으로 식량을 집에 사 쟁이는 일도 없어 졌다.
인프레이션도 그쳤다. 쌀, 밀가루, 석유, 육류를 정부가 경영하는 상점에서 정해진 가격으로 팔았다. 배급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굶지 않았다. 몇십년 동안의 혼란, 예측하기 힘든 상황, 관리와 범죄자들의 갈취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안전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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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좋은 세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년도 안되어,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나라, 개개인, 그리고 정신 까지 통제하려 했다. 그들은 정부와 공공부분만 관리 하지 않았다. 모든 시민의 개인 생활 까지도 관리하여 모두가 동질의 정신적인 구조를 가지게 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 했다. 그들의 통제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사람들이 이제까지 몰랐던
새로운 통치제도가 그 정체를 들어 내기 시작 했다.
정부는 어디에 살 것인 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슨 옷을 입을 것인가, 무엇을 읽고 쓸 것 인가, 무엇을 하고 즐길 것인가, 언제 일어날 것인가, 낮잠을 원하든 원치 않든 낮잠을 언제 잘 것인가를 정해 주었다.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정부 부처와 관리가 있었다. 사람들 행위의 모든 면에 관한 법이 서면이나 구두로 마련되어 있었다. 공산당은 지역 사무소, 번지 연합체, 동네회등의 관료조직을 만들어 사회 구석 구석, 갈라진 틈세기를 빠집없이 침투 했다. 공산당 간부는 개개인에 관한 세밀한 정보를 수집 했다. 그들은 내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읽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했는 지 알았다. 그들은 심지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알려고 했다. 아무것도 당 간부의 눈과 귀를 피할 수 없었다. 개인은 언행, 믿음
, 버릇등 공산당이 들어오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매일 하던 일들을 모두 그들의 감시를 의식하며 해야 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꺼려 했고 자진해서 소식을 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것이 전혀 해가 되지 않고, 서로에게 상관 없는 내용이라도. 저 높은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면 아마 그(그녀)는 큰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뒤로 숨어 버렸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말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소음으로 꽉찬 거래의 대도시 상하이가 마치 개미 처럼 사람들이 하루 하루 일상에 필요한 일을 하려고 말 없이 바쁘게 걸어 가는 새로운 주거지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감시 당하고 누군가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가운 데, 모든 개인 사업체가 문을 닫고 개인 소유권이 박탈 되었다. 정부는 명령으로 모든 것을 압류 했다. 집, 땅, 은행, 상점, 노동기관, 음식과 음료 보급등 모든 것이 정부 소유가 되었다. 친 자본주의 국민당 사람들은 사상개혁을 위한 세미나에 매주 “자진해서” 참석 해야 했다. 그들은 고백하고 인민의 비판을 받으며 모욕을 당해야 했다. 공산주의 선전 자료를 공부하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가장 가벼운 요구 사항 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의 업적을 공부 한 후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 그들은 설교 하거나 신도들을 만 날 수가 없었다. 조직된 종교는 말살 되었다.
도박 하다가, 카드 놀이 혹은 마작을 하다가, 리더스 다이제스트나 다른 외국 잡지를 읽 다가 잡힌 사람들은
타락자로 낙인이 찍혀 사상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매주 열리는 동네 위원회 회합에서 불려나가 여러사람 앞에사 모욕을 당 했다. 두번 째 잡히면 일주일 동안 투옥 되었는 데, 건강 상태에 상관 없이 중노동을 시켰다. 공산주의 자들에게 비판적인 발언을 하거나, BBC(영국공영방송)이나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으면 반혁명 행위로 처벌 받았다. 처음으로 걸린 사람은 2주 마다 한번씩 정치교육과 세뇌강좌를 들어야 했다. 상습범은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레이버 켐프에 정해지지 않은 기간동안 보내졌다. 범죄자, 조직폭력배, 불량배들은 체포되어 한꺼번에 재판없이 처형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교하게 만든 사회조직은 자기가 사는 반(residential unit)내의 다른 시민에 대해서 서로 보고 하게 되어 있고, 이 조직은 당 간부의 감독을 받았다. 그 당 간부는 아주 경험이 많은 당원이 었는데, 상하이 암흑세계 조직원으로 일 했을 가능 성이 높았다. 그들은 자기반내의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을 그의 임무로 알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염치없고 동정심 없는 관료의 통제하에 있는 매끄럽게 만들어진 사회적 정치적 구조의 그물 안에 시민들을 몽땅 모아 몰아 넣었다.
누구나 피해 망상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것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피해의식이 아니고 현실 적인 것이었다. 모두 서로 상대방이 정부에 꼬아 바치는 정보원이라고 의심 했다. 놀라울 만한 속도로 위대한 대도시 상하이는 죽었다. 그 곳에서 계속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불안이 일상을 억 눌렀다.
말하는 습관의 변화가 관료제도의 효율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나쁜 습관인데, 중국사람들은 서로의 관계에 따라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방대한 종류의 타이틀을 서로 사용 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서로의 가족 구성원 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특별한 존칭을 사용 했다. 예를 들면 내 친구의 아버지를 부를 때, “네 아빠” 혹은 “네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링준”이라는 말을 썼는 데, 문자 그대로 “명예로운 권위자”라는 뜻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지시로 모든 그런 종류의 사회적인 관례는 즉각 중단 되었다. 사람들 간에 소문난 평등을 강조하기 위해서 모두 서로 “동무”라고 불러야 했다. 그러나 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규칙은 불평등을 제거 하지 못했다. 이름하여 공산당원은 특허를 받아 다른 사람보다 더 평등 했기 때문이었다.
헬렌 이모는 계속해서 푸단 대학에서 경제학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세번 강의를 기다리며 준비 했다. 이모 주위의 것들이 무너지는 판에 강의는 그녀의 삶을 붙잡아 주는 앵커가 되었다. 이모는 아직도 기도 했지만 불이 다 꺼진 저녁 때에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님을 큰소리로 부르지 않았다. 그녀의 기도는
아주 조용히 진행 되었다. 한두 피트 떨어져 있는 나도 그녀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상하이를 장악한 지 6개월후, 헬렌 이모의 복음교회가 해산 되었다. 몇십년 동안 매주 일요일 마다 수백명의 신도들이 예배를 보았던 교회였다. 이모는 몹시 괴로워 했다. 중국인 목사는 레이버 캠프로 보내 졌다. 그녀의 미국 선교사 친구들은 모두 중국에서 추방 당했다. 어떤 이는 홍콩으로 가고, 일부는 미국으로 돌아 갔다. 헬렌 이모는 감히 그들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전혀 과격한 변화를 경험 하지 못 했다. 정부가 바뀐지 한달 만에 모든 수업이 다시 시작 되었다. 내가 학교로 돌아 왔을 때, 학급마다 마오의 초상이 걸려 있는 것외에 변한 것은 수업시간에 공산당 선전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가르쳐 준 많은 노래 중에 새 국가가 있었는 데, 그들의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는 내용이었다. “동쪽은 붉다”는 체어맨 마오를 구원자로 찬양하는 아부 노래 이다. “너는 등대다(You are the Beacon)”는 공산당을 따르라는 노래 다. 다른 혁명가의 가사는 의도와는 다르게 우리를 즐겁게 했다. 그 중에 하나는 이렇게 나갔다.
아, 장의 도적들아!
아, 엉망진창이야!
아, 엉망진창이야,
아, 엉망진창이야….
한가지 옛날이나 변함이 없는 것은 어디가나 볼 수 있는 사복요원의 존재였다. 장의 요원은 겨울에 진한 갈색의 가죽 자켓을 입었고, 여름에는 풀먹인 흰 반 소매 셔츠를 바지 춤에 넣지 않고 입었다. 공산주의자 안전요원도 똑 같은 복장을 입었는 데, 한가지 차이는 겨울에 가죽 자켓 속에 마오 자켓을 입는 것이 었다.
다 아는 일이지만, 다 똑같은 사람들이 단지 소속만 바꾸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기 때문에, 분명히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이 알기를 바랬을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걸어서 학교에 갔다. 길거리는 조용하고 별로 볼만한 일이 없었다. 나를 놀라게 하는 일도 구경거리도 없었다. 총쏘는 일도, 처형도, 추격도, 주먹 싸움도, 군인들의 행진도 없었다. 폭력배와 하층민도 사라졌다. 상하이의 대명사였던 상거래도 대부분 없어졌다. 정부가 인수한 것 외에, 상점들은 하나씩 문을 닫았다. 큰형이 나에게 초콜렛 선데이를 사주었던 아이스크림 팔러의 폐점을 목격하는 것은 나를 슬프게 했고 노스탈지아(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어른들은 불안하고 피해망상적이었을 지 몰라도 내 생활은 글자그대로 심심 했다.
하루종일 별로 할일이 없어지자, 나는 자주 큰형을 처음에 만났던 학교 연못에 갔다. 섬세한 흰색과 분홍색이 섞인 연꽃은 마음을 사로 잡을 뿐만 아니라 매혹적이었다. 나는 커다란 연한(muted) 초록색갈의 연잎에 물을 뿌리기를 좋아 했다. 기름 칠한 것같은 표면 때문에, 물이 은구슬같은 물방울이되고, 이 방울들이 잎 가운데로 모여 반짝거리는 타원형 모양의 공을 만드는 데, 잘못하면 수은 덩어리로 착각 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연못가에 15분 혹은 20분 동안 구부리고 앉아서 연꽃과 물방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큰형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 궁금해 했다. 나는 정말 그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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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여름이 끝날 무렵, 나의 4년동안 대리 부모인 헬렌 이모는 갑자기 홍콩으로 이사 간다고 알려 주었다.
“홍콩이 어디 있는 데 왜 우리는 거기로 가야 돼?” 나는 물었다.
“홍콩은 중국 남부에 있는 영국 시민지야. 네 부모가 홍콩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너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려고해.”
그말을 듣고 나는 놀랐다.
“나는 아버지가 난징에 있는 호랑이 다리 감옥에 있다고 생각 했었 는 데.”
“아버지는 지금 감옥에 있지 않아.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난징을 점령하기 전에 나왔다. 장카이색이 석방 시켜 주었다. 홍콩에서 너는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 거야.”
나는 더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모는 어른이어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었다. 그외에도,
1946년에 어머니가 나를 상하이에 보냈을 때, 이모는 나에게 여기서 사는 것은 임시라고 말 했었다.
한 이틀 후, 헬렌 이모와 나는 광주로 가는 남행 열차에 탔다. 광주 보다는 캔톤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열차는 적재량을 초과 했고 석탄을 때는 엔진은 과로 한 상태였다. 기차는 석탄재가 섞인 연기를 길게 내 뿜으며 칙칙 폭폭 힘들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섰다가 다시 움직일 때 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앞뒤로 덜컹 덜컹 움직였다.
열차 안에서는 어른들만 좌석이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앉아 있는 벤치 밑에 누워서 갔다. 어른들은 어깨를 맞대고 한줄로 빼곡히 앉아 있었다.
그때는 덥고 습한 여름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어른들은 시원하게 하려고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나는 한쪽에 반대편 아이와 나를 갈라 놓는 나무 판대기와 다른 한쪽에 어른 들의 발이 있었다.
맹세코 말 하지만, 그 발 냄새는 난징의 외간 변소에서 나는 냄새보다 더 지독 했다. 열차 안에서 나는 땀 냄새, 방귀 냄새, 썩은 음식 냄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떤 발은 진물나는 무좀이 있었다. 내가 빈민촌에 살 때 기생충에 감염 된 내또래 아이의 다리가 생각 났다. 그 아이는 폐혈증으로 죽었다.
이박삼일을 기차는 상하이에서 광주 까지 600 마일을 헉헉 거리며 달렸다. 평지에서는 기어 갔으며 경사지를 올라 갈 때는 겨우 움직였다. 나는 숨이 막혀 죽을 지경 이었다. 악취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좌우 좌석 사이의 통로에는 짐이 꽉차 있었다. 내가 열차 끝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짐사이를 통과 할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마치 내가 그들의 귀중한 소지품을 집어들고 기어가는 기차에서 뛰어 내릴 려고 하는 가 해서 말이다.
광주에 도착하자 나는 이제 해방이다 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다시 70 마일 떨어져 있는 홍콩 경계 까지 기차를 타야 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홍콩행 기차를 타려고 플랫트 폼(승강장)에 모여 있었다. 발디딜 틈이 없었다. 1,2년전에 큰형과 같이 문 닫는 은행에 들어가려고 할 때 군중들 사이에 끼어 있던 일이 생각 났다. 군중은 규칙을 지키지 않았고 양보할 줄을 몰랐다.
헬렌 이모는 양손에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는 내 소지품을 넣은 작은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모의 팔을 잡고 움직이는 사람들 물결 속에서 홍콩 가는 열차 쪽으로 걸어 갔다. 승차하는 입구 마다 사람들이 열차의 좁은 입구로 모여 들었다. 입구에 가까워 질 수록 사람들은 점점 밀집 되었다. 사람들은 짐을 들고, 밀고 끼어 들며 차를 타려고 기를 썼다.
나는 이모의 팔을 있는 힘을 다해서 붙 잡고 있었 지만 밀려드는 승객들은 결국 우리를 서로 떨어 지게 했다. 헬렌 이모가 사정없는 군중에 의해서 차안으로 밀려들어 가고 나는 뒤쳐졌다. 이모는 돌아 올 수가 없었고 나는 따라 갈 수가 없었다. “리 나” 나는 그녀가 움직이는 사람들에 떼 밀려 들어 가면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위(이모)”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내 주위 사람들을 밀고 또 밀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차 안에서 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녀의 움직이는 입과 놀란 눈을 볼 수 있었지만 군중들과 열차 소리 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기차가 앞 뒤로 덜컹 덜컹 하더니 출발 했다. 기차에 타지 못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열차에서 물러 나면서 나를 넘어지 게 했다. 내가 일어 났을 때는 아-위(아모)와 기차는 이미 떠난 후 였다.
사람들로 꽉찬 승강장 내 주위에 지쳐 빠진 사람들이 절망으로 축 쳐져서 짐을 앞에 두고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언제 다음 열차가 올지를 몰랐기 때문에 무척 긴장 되어 있었고 불안 해 했다. 그 인해(sea of people)가운 데 서서 나는 그렇게 외롭고 놀랐던 적이 없었다.
공황에서 거의 무감각이 되었다. 나는 아무 목적 없이 내 소지품이 들은 주머니를 꽉 잡고 기차역을 돌아 다녔다. 마치 저주 받은 것 처럼 몇시인지도 몰랐고 내주위에 대해서도 까막눈이 되었다. 나는 끝장이라고 생각 했다. 어른의 보호 혹은 살 방도가 없으니, 이 낯설은 땅에서 나는 인질로 잡히거나, 팔리거나, 만두 속 재료로 잘게 잘리워 질 것이다!
나는 주체할 수 없게 떨기 시작 했다. 그때, 갑자기, 나는 내 이름 같이 소리를 내는 무엇을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환각에 빠졌다고 생각 했다. 그 때 또 내귀를 울렸다.
“이게 리 나가 아니야?”
뒤를 돌아보니 상하이에서 온 헬렌 이모의 옛 친구 중 하나였다. 그가 헬렌 이모를 만나러 우리 아파트에 여러번 왔기 때문에 나는 그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배가 나와서 둥글게 생긴 노인은 중국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찬찬히 쳐다보며, 놀랍고 영문을 모르 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가 분명히 헬렌 이모의 친구라는 것을 확신 하자, 내눈에 눈물이 고여서 나는 그의 윤곽을 겨우 인지 할 수 있었다.
“네 아-위(이모)는 어디 갔니?” 하고 그가 물었다. 나는 그에게 얼른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억제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나에게 다가와서 내 어깨에 손을 엊으며 헬렌 이모에 대해서 다시 물었다. 내가 결국 일어난 일을 울다가 말하고 말하다가 울고 하면서 나는 안간 힘을 다써서 완전히 탈진 했다. 마치 간질병 환자가 발작에서 깨어 난 것 처럼 내 이빨은 다닥 다닥 부디 쳤고 내몸은 심하게 떨 었다. 그는 단호하고 따뜻 한 목소리로 당분간 내가 맡아서 보호 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성을 앞에 붙이지 않고 “바이-바이(큰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을 마다 하지 않았다. 그는 헬렌 이모와 나처럼 공산주의자들을 피해서 홍콩으로 가고
있다고 말 했다.
“걱정 마, 리 나!, 우리는 홍콩에서 아-위(이모)를 찾을 거야.” 그는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다행히, 헬렌 이모는, 그녀의 친구가 나를 보호하고 한 두시간 후 다음 열차를 타고 홍콩 경계 지점에 도착 했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적 타격을 주었던 이모와의 이별이 끝났지만, 안도나 기쁨 또는 축하 같은 것은 없었다. 헬렌 이모와 나는 뼈속 까지 피곤 했다. 우리는 아직 경계선을 넘어야 했다. 우리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 몰랐다.
기적적으로 우리는 뇌물을 주지 않고 아무런 괴롭힘 없이 홍콩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영국 사람들이 중국과의 경계를 닫기 하루 이틀 전이었다.
우리가 홍콩과 중국을 갈라 놓는 강위의 다리를 건널 때, 나는 영국 경찰이 중국 군인과 전혀 다른 정복을 입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록색 마오 유니폼 대신, 그들은 카키 색 반바지에 반소매 셔츠를 입고, 옅은 초록색 무릎까지 닿는 양말과 잘닦은 검은 부츠를 신고, 검은 가죽 총 집에 넣은 권총을 옆에 차고, 앞쪽에 검은 테를 한 뻣뻣 한 둥그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경찰 뒤에 서 있는 데, 검사관이 벙커 같은 사무실에서 다리를 건너 밀려오는 피난민들을 조사 하고 있었다. 똑같은 간격의 번쩍 거리는 단추가 달린 상의, 뻣뻣한 흰 셔츠, 검은 타이, 날카로운 주름을 잡은 능직(twill)바지의 아주 멋진 군복을 입고 있었다.
사무실 위에는 엷은 영국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댓글
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