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들의 가라 앉음이 행복이다” 열반경 게송의 해석
잔뜩 찌뿌린 날씨를 보면 마음까지 탁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찌뿌린 날씨가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은 아니고, 어지러운 마음 역시 계속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지금 보는 흐린 날씨와 이를 바라보는 찌뿌등한 마음은 곧 바뀔 것임에 틀림 없다.
무슨 재미로 사나
행복이란 무엇일까. 옛날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화두로 삼아 온 것이다. 어떤 이는 ‘먹는 재미’로 산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돈이 최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체로 ‘오욕락’을 즐기는 것이 행복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성과의 즐거운 시간, 그리고 보드라운 잠자리, 풍족한 재산, 사회적 지위를 가지면 행복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그런 조건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오래가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마치 예술품 같은 음식을 먹고 난지 대여섯시간만 지나면 허기가 져서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은 먹을 때 뿐이다. 이성과의 즐거운 시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재산은 언제 어떻게 없어질지 모르고 지워나 권력은 잠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무엇을 행복이라고 할까.
성질나는대로 사는 사람들
초기경전에 행복경이 있다. 부처님이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해 놓은 경이다. 이 행복경에는 여러가지 행복의 조건이 있다.
부처님은 행복의 조건에 대하여 아홉개의 게송으로 말씀 하셨는데, 수십가지의 조건 중에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어리석은 사람’을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사람을 가까이 한 다는 것 자체가 불행으로 본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좋아함과 싫어함이 극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으면 잡아당기고 싫으면 밀쳐내는 특징이 있다. 한 마디로 성질나는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 함께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어리석은 자에 대한 게송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법구경에서 어리석은 자에 대한 게송을 모두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법구경에서 어리석은자에 대한 게송
출처 : 거해스님 법구경
거해스님의 법구경에서 ‘어리석은’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하여 보니 무려 18개의 게송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 게송을 보면 어리석은 자를 멀리하고 가까이 하지 말기를 말하는 것 보다 더 강도 높게 말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한다는 것
특히 61번 게송을 보면 어리석은 자와 함께 있느니 차라리 홀로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와 함께 있는 것은 ‘고통’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행복경에서 어리석은 자들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되고, 파멸경에서는 어리석은 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불행의 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들과 가까이 하지않고 지혜로운 자들과 가까이 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지혜로운 자들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말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법우님들과 법담하는 것도 행복의 조건이 될 것이다. 실제로 행복경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가 바로 그 내용이다.
열반이 왜 최상의 행복일까
이렇게 어리석은 이와 가까이 하지 않는 것도 부처님은 더 없는 축복, 최상의 행복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세간적인 행복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세간적인 행복뿐만 아니라 출세간적 행복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Tapo ca brahmacariya?ca ariyasacc?nadassana?,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행복경, 숫따니빠따 Sn2.4,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만일 열반에 대하여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씀 하지 않았다면 불교는 오늘날까지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열반을 제외한 나머지 사항은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어느 종교에서나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열반이 왜 최상의 행복이라 하였을까.
저녁에 TV나 라디오를 끄고 불도 끄면 깜깜해진다. 시각과 청각, 후각 등 모든 감각기관이 멈추어지는 것이다. 다만 마노의 문으로 들어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5문만 막아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런데 마노의 문으로 들어 오는 생각마저 차단 된다면 그야말로 고요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여기에다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상태를 무엇이라 부를까. 그것을 열반이라 부른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인식할 수 없어서 세상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그런 열반이 행복이라 하였다.
후박나무님의 열반경 게송의 해석
열반을 빠알리어로 ‘닙바나’라 한다. 그런 열반은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적멸(寂滅)’을 들 수 있다. 이 때 적멸은 닙바나의 ‘의역’인 것이다. 고요하고 멸한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멸하여 고요하게 되었다는 말일까.
최근 인터넷 카페에서 열반송에 대한 게송을 발견하였다. 후박나무님이 쓴 것이다. 네이버 지식에 올려진 것을 카페에 올려 놓은 것이다. 후박나무님은 적멸 즉 열반에 대하여 대승경전과 초기경전의 문구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게송의 해석 열반경 게송의 해석
[한문]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빠알리] Anicc? vata sa?kh?r? upp?davayadhammino Uppajjitv? nirujjhanti tesa? v?pasamo sukho ti. 1)
[영어] impermanent, alas, are formations. subject to arisen and banishing. having arisen, they cease: their appeasement is blissful.
[한글] 1.아아!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생멸의 성질로 이루어진 것은 생하고 멸한다. 이것들의 진정이 평온이다.
2.형성된 것들은 참으로 무상하여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법 일어났다가는 소멸하나니 이들의 가라앉음이 행복이로다.
3.모든 지어진 것은 덧없어 생겨나고 사라지는 법이네.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고요히 함이야말로 행복일세.
4.진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을 지닌 형성력들은 무상하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번뇌들의 가라 앉음이 행복이다.
5.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니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 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6.모든 지어진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법이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 그것을 고요히 함이 행복이네.
------------------------------------------ [의견] 위 게송은 붓다가 막 열반에 들었을 때 범천(제석천)이 읊은 게송(d.n.14)이기도 하고 쌍윳따 니까야에 4번 나오는 게송이고 디가니까야에 2번 나온다. 디가니까야의 열반경에서는 범천이 읊는 게송으로나오고 마하수다사나수따에서는 세존이 아난다에게 해주는 법문으로 나온다. 그리고 쌍윳따 니까야에서는 각각 천신, 범천, 아라한의 법문을 아누룻따가 하는 법문으로 나오고 마지막경전은 세존의 법문으로 나온다. 한문경전으로는 대승열반경과 법화경에 이 게송이 나온다고도 한다. 위 게송을 해석하는 핵심은 [生滅滅已]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먼저 한문 번역은 sa?kh?r?가 복수라는 이유로 모든(subba)이라는 단어가 없음에도 [諸行]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의 제행무상은 모든 유위법의 무상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오온의 行, 즉, 정신현상으로만 보기도 하는데 아래와 같은 경전을 보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전이 좀 길지만 이게송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경전이므로 쌍윳따 니까야의 베뿔라산경을 살펴보자.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깃자꾸따 산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이 베뿔라 산이 한때 빠찌나방싸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사람들은 띠바라라고 불렸다. 수행승들이여, 그 띠바라 사람들의 수명은 4만 살이었다. 수행승들이여, 그 띠바라 사람들은 빠찌나방싸 산을 나흘이면 오르고 나흘이면 내려왔다.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까꾸싼다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까꾸싼다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에게는 비루라와 싸지바라고 하는 단짝의 탁월한 제자가 있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보라. 그 산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사람들은 죽었다. 그리고 그 세존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이 베뿔라 산이 한때 방까까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사람들은 로히땃싸라고 불렸다. 그 로히땃싸 사람들은 수명이 3만 살이었다. 수행승들이여, 그 로히땃싸 사람들은 방까까 산을 사흘이면 오르고 사흘이면 내려왔다.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꼬나가마나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꼬나가마나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에게는 비이요와 쑷따라라고 하는 단짝의 탁월한 제자가 있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보라. 그 산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사람들은 죽었다. 그리고 그 세존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이 베뿔라 산이 한때 쑤빳싸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사람들은 쑵삐야라고 불렸다. 수행승들이여, 그 쑵삐야 사람들은 수명이 2만 살이었다. 수행승들이여, 그 쑵삐야 사람들은 쑤빳싸 산을 이틀이면 오르고 이틀이면 내려왔다.
수행승들이여, 그 당시 깟싸빠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깟싸빠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에게는 띳싸와 바라드와자라고 하는 단짝의 탁월한 제자가 있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보라. 그 산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사람들은 죽었다. 그리고 그 세존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수행승들이여, 지금 이 베뿔라 산은 베뿔라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지금의 사람들은 마가다까라고 불리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마가다까 사람들은 그 수명이 짧아 보잘 것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 마가다까 사람들은 베뿔라 산을 잠깐 사이에 오르고 잠깐 사이에 내려온다. 수행승들이여, 지금은 나 곧 세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나에게는 싸리뿟따와 목갈라나라고 하는 단짝의 탁월한 제자가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언젠가 이 산의 이름은 사라지고 이 사람들은 죽고 나는 완전한 열반에 들 때가 올 것이다.
(Anamatagga sa?yutta?-The unimaginable beginnings of samsara-無始, 웨뿔라산경, 상윳따니까야 SN15, 전재성박사역)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와 같이 시로써 말씀하셨다. [세존] "띠바라 사람에게는 빠찌나방싸 로히땃싸 사람에게는 방까까 쑵삐야 사람에게는 쑤빳싸 마가다에서는 베뿔라라 불렸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성하고 다시 소멸해야 하리. 생성하고 또한 소멸하니 그것들의 적멸이 행복이네."2)
그러므로 위 경전을 보아서는 제행은 모든 조건 지어진 유위법 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諸行無常 是生滅法은 진실로, 형성된 법들은 무상하여 생멸하는 법칙이다.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해석은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생멸하는 것(Uppajjitv? nirujjhanti) 그것들의(tesa?) 고요히 함(v?pasamo)이 행복(sukho) 이라고 하네(iti)라는 문장에서 복수 소유격으로 사용된 그것들의(tesa?)가 무엇을 가르키는 지가 불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tesa?이 무상하다고 하는 제행을 가르키는 것이라면 베뿔라 산처럼 형성된 법을 인간이 어떻게 소멸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성주괴공은 자연의 질서요, 법칙인데 그 것을 어떻게 소멸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유위법의 생멸현상을 가라앉힌다는 해석은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 경전안에 해답이 주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지어진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3)
이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상카라들은 무상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데 그 무상한 상카라들을 가라 앉히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상카라들에서 (처소격.sabbasa?kh?resu) 싫어하여 떠나고 초연하고 해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生滅滅已의 生滅은 대상으로부터 일어나는 탐착의 생멸을 말하고 滅已는 그 생멸하는 탐착의 소멸,즉 탐진치의 소멸을 말한다.
디가 니까야의 마하수닷사 경에서도 이와 같은 문장이 보인다.
보라 아난다여, 그 형성된 것들은 모두 지나갔고 소멸하였고 변해버렸다. 이와 같이 아난다여,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이와 같이 형성된 것들은 견고하지 않다. 이와 같이 아난다여, 형성된 것들은 안식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형성된 것들은 모두 역겨워 해야 마땅하며 (탐욕이)빛바래도록 해야 마땅하며 해탈해야 마땅하다.4)
한문의 문장을 가지고 말하자면 是生滅法 의 生滅과 生滅滅已의 生滅이 각각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는데, 是生滅法 의 生滅은 자연의 법칙(upp?davayadhammino)으로서의 생멸 이라면 生滅滅已의 生滅은 정신현상으로서의 생멸심 즉, 번뇌의 생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멸멸이]는 번뇌(행)의 생멸을 가라앉히라는 의미이고 그것은 탐진치의 소멸이 바로 최상의 행복이라는 붓다의 열반에 대한 정의와 일치 한다. 가라앉히고 소멸 시켜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번뇌이지 이 자연의 법칙이 아니다. 꽃이 피고 열매 맺어 떨어지는 이 자연의 법칙을 누가 어떻게 가라앉힐 수 있다는 말인가?
열반경에서 붓다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알려진 법문에서도 모든 형성된 것은 부수어지는 법이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Vayadhamm? samkh?r? appam?dena samp?deth?ti.)
여기서 Vayadhamm?란 위에서 upp?davayadhammino 처럼 법의 속성을 말한다. 그런데 이법의 속성을 가라앉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고 말씀 하신다. 주석서에서 이 말을 마음챙김을 지속 시키라는 말로 이해한다. 이상으로 살펴 본바와 같이 경전의 문맥을 살펴보면 위 게송이 무상한 현상에 마음 챙겨서 법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혐오하고 멀리해서 번뇌를 소멸시키고 해탈하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生滅滅已는 번뇌의 생멸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한글 해석은 4번,5번이 알맞은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
[주석]1) (D.N.PTS, Vol. Ⅱ, p.157) [문법적인 설명]Anicc?(a.impermanent) vata(ind.indeed) sa?kh?r?(m. pl. formations) upp?da(m.rising) vaya(m.nt.decay) dhammino(m. something which have nature.), Uppajjitv?(ger. having arise) nirujjhanti(3.pl.to cease) tesa?(ge.pl.of those) v?pasamo(m. nom. sg. calmness. cessation) sukho(nt. happiness)"ti. 2) Vepullapabbatasutta?((s.n.2권) 3)Vepullapabbatasutta?((s.n.2권) 4) Pass?nanda sabbe te sa?kh?r? at?t? niruddh? vipari?at?. Eva? anicc? kho ?nanda sa?kh?r?. Eva? addhuv? kho ?nanda sa?kh?r?. Eva? anass?sik? kho ?nanda sa?kh?r?, y?va?cida? ?nanda alameva sabbasa?kh?resu nibbinditu?, ala? virajjitu?, ala? vimuccitu?.mah?sudassanasutta?(d.n.17)
(후박나무님)
출처: 1)http://cafe.daum.net/amjaesa/C5Sb/15 2)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3&docId=582997&
사진 : http://wirajhana-eka.blogspot.com/
“번뇌들의 가라 앉음이 행복이다”
이 글을 보면 한역의 애매모호함을 지적하고 있다. 한역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에서 생멸이 두 번 나오는 데, 앞의 생멸과 뒤의 생멸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에서 빠알리어를 직접 번역한 ‘웨뿔라산경(S15.20)’을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앞의 생멸은 자연의 생멸이고, 뒤의 생멸은 번뇌의 생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뇌의 소멸이 열반인 것이다. 그런 열반을 한역으로 적멸이라 하였는데, 그런 적멸이 곧 행복(寂滅爲樂)이라 것이다.
그래서 열반게송 여섯 개중 가장 잘 번역된 것이 4번과 5번이라 한다. 그 중 5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을 지닌 형성력들은 무상하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번뇌들의 가라 앉음이 행복이다.”
가장 잘 번역된 한글 게송을 보면 번뇌들의 가라 앉음이 행복이라 하였다. 이는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어느 경계에도 끄달려 가지 않는 것이다. 좋으면 당기고, 싫으면 밀치는 단세포적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것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싫은 것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다음 마음이 일어남에 따라 곧 사라지고 말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외롭더라도 차라리 혼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 집착으로 인하여 본인도 괴로울 겪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피해를 준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기 때문에 멀리 하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들과 함께 하느니 외롭더라도 차라리 혼자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착각한다. 그 결과 자아와 세상에 대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온갖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현상이 일어나면 반드시 사라짐을 알기 때문에 그 현상에 집착하지 않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떤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 괴로움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어차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인데 거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행복자체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런 행복은 일시적인 행복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역시 마음이 편안해 진다.
그러나 가장 큰 행복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적멸일 것이다. 그런 적멸은 일어나고 사라짐 자체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2012-03-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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